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53
#952화
중양절(重陽節)은 대륙 최대의 명절 중 하나다.
제비가 따뜻한 강남을 향해 떠나고, 뱀과 개구리는 겨울잠을 준비하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는 시기.
이 무렵 사람들은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고 시를 읊으며 산수를 즐기고는 했다.
이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무지렁이 백성도,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고관대작(高官大爵)도, 풍진 강호에 몸담은 무림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억나느냐?”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불현듯 울려 퍼진 목소리.
그러나 샛노랗게 피어난 국화밭을 말없이 바라보던 청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여전히 국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되묻는 청년, 진무경의 옆으로 익숙한 인기척이 다가와 섰다.
“오 년 전, 우리 삼 형제가 뒷산에 올라 함께 중양절을 지냈던 것 말이다. 참 즐거웠었지.”
“……십 년 전, 중양절 말씀이십니까?”
석연치 않은 아우의 대답에 진위경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제는 기억조차 안 나는 게냐?”
“기억은 나는데, 제 기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아 여쭤본 겁니다.”
“차이?”
“태경이,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술에 잔뜩 취해 행패를 부렸잖습니까. 그래서인지 딱히 즐겁진 않았습니다.”
진위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느냐? 검집으로 두들겨 팰 때는 꽤 즐거워 보이던데.”
“안 웃었습니다. 단지 혈육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훈육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던데.”
정곡을 찌르는 진위경의 한 마디에 진무경은 잠시 침묵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사고뭉치 막내, 막내라면 그저 어화둥둥 껌뻑 죽는 형님.
이런 갑갑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명분이 생기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었겠나.
물론,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머릿속 기억의 작은 한 조각으로만 남아 있는.
“막내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엉엉 울었고, 너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수련을 시작했지. 사람들과 떨어져 숲속에서 해가 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던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그건 기억에 없지만, 분명 그랬겠지요.”
진무경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에게 있어 수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검을 들었고, 언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련에 매진해 왔다.
태원진가의 삼형제가 마지막으로 함께 중양절을 보냈던 오 년 전, 약관 어림의 진무경은 이미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네가 본가를 떠나던 날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구나.”
“아.”
진무경이 문득 입맛을 다셨다.
전날 밤 한바탕 울기라도 했는지,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배웅을 나왔던 형의 모습이 떠올라서.
‘꼭…… 꼭 가야겠느냐?’
‘예. 꼭 가야겠습니다.’
‘이 형님이 이렇게 부탁한다고 해도?’
‘택도 없습니다.’
‘아니, 그까짓 천무학관(天武學館)이 뭐길래 혈육까지 버리고 만리타향까지 떠난단 말이냐!’
‘형님이 말씀하신 그까짓 천무학관에 가려면, 명문대파의 제자들도 몇 년씩 줄을 서야 합니다.’
‘알겠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이 형님이 직접 하남까지 바래다주마.’
‘……진심이십니까.’
‘내 관주(館主)님을 직접 찾아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
‘아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반드시 알고 계셔야 할 중요한 주의사항만 전달할 것이다. 네가 싫어하는 몇 가지 음식들이랑 생활 습관…… 무경아, 어디 가느냐 무경아!’
튀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그토록 온 힘을 다해 경신법을 발휘한 건 정말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진무경은 천무학관에서 더욱 강해지고 싶었을 뿐, 최단기 퇴학생도라는 업적을 달성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형님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터지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 소매로 눈가로 가린 채 떠나던 네 뒷모습을.”
“…….”
진무경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때때로 어떠한 종류의 진실은 드러나지 않았을 때가 더 아름답다.
가령 먼지를 막기 위해 소매로 눈가를 가렸다든지, 극성을 부리는 형님을 피해 도망쳤다든지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갑자기 왜 웃느냐?”
“아닙니다. 그냥…….”
겨우 웃음을 그친 진무경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 년 전, 기약 없는 폐관 수련을 위해 또다시 떠나는 자신을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한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그때 그 순간처럼.
“반가워서 웃었습니다. 변하지 않은 형님의 모습이.”
“무경이 너…….”
“다행입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라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 년 남짓한 시간을 보냈다.
쓰고 떫은 벽곡단(辟穀丹)으로 허기를 채웠고, 동굴 깊숙한 곳에 위치한 수련동에 고인 이슬과 빗물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탈진할 때까지 검을 휘두르다 차가운 지면에 널브러질 때마다 문득 떠올리곤 했다.
이곳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언젠가 이 어둠을 벗어난다면,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습니다. 제가 알던 세상이, 사람들이 너무나도 달라져 있을까 봐.”
그 짐작은 반은 틀렸고, 반은 맞았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가 알던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사고뭉치 막내 녀석도, 분명 그럴 것이다.
“녀석이 가문을 떠나던 날, 저를 찾아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을 곱씹었던 대화다.
평소와는 달리 담담하기 그지없던 진태경의 목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나중에 보자, 라고.”
그것은 그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성라대연(星羅大宴).
구주팔황과 사해오호를 수놓은 무수한 별들의 연회에서 만나, 청풍과 함께 겨뤄 보자는 도발이자 도전장이기도 했다.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로서.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그리고 아우가 떠난 빈자리를 우두커니 지켜보던 진무경은 미처 건네지 못한 대답을 홀로 뇌까렸댔다.
‘그래, 나중에 보자. 반드시.’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곳에서 진무경은 쉼 없이 검을 휘둘렀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너머를 베고, 찌르고, 찢어발겼다.
새로운 것에 눈을 뜰 때마다 또 다른 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넘어야 했다. 부숴야 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진무경은 계속해서 정진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한 빛을 발견할 때까지.
그 빛이 태양처럼 선명해질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다.
이 년간 그를 휘감았던 어둠을 뒤로한 채, 또 다른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형님.”
진무경은 나직한 부름과 함께 자신의 혈육을 똑바로 응시했다.
빛이 담긴 두 눈동자로.
보는 이로 하여금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올곧은 눈빛으로.
“이제 말해 주십시오. 제가 해야 할 일을.”
“……!”
“아니, 명령하십시오. 태원진가의 소가주로서.”
순간, 진위경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알고…… 있었느냐.”
진무경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태원진가는,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가주를 대신해 그들 모두를 이끄는 진위경은 산서 무림의 맹주(盟主).
이미 산서성은 전시(戰時) 상태다.
화산파의 속가이자 산서성 도지휘첨사인 이풍은 산서성부의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북부의 백성들을 대피시켰고, 오천 남짓의 무림인들은 중부에 집결했다.
그야말로 일각이 아쉬운 상황.
이런 와중에 진위경이 자신을 찾은 것은, 단지 이 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아우와 해후를 나누고 싶었던 마음뿐만은 아니었으리라.
“형님이 저를 잘 알고 있듯이, 소제(小弟)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위험한 임무가 될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진무경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무공을 익힌 것은 그저 검이 좋아서였으나, 강해지고자 한 것은 가문을 위해서였으니.”
몰락한 무가(武家)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강한 힘뿐이다.
지금껏 진무경이 휘두르는 검신에 실려있던 것은 무(武), 그 자체를 향한 열망뿐만이 아니었다.
“태원진가의 이공자 진무경. 성심을 다해 소가주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 함께 포권을 취하는 아우의 모습에, 진위경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짧은 망설임 끝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느덧 산서 무림의 맹주이자 태원진가의 소가주가 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너는 태원진가의 이공자도, 소가주의 아우도 아니다.”
참았던 숨과 함께 토해진 한 마디.
진위경은 침착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우를, 아니 가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진천대주(振天隊主) 진무경에게 명한다.”
진천검(振天劍) 진무경.
지금으로부터 약 오 년 전. 약관의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변방의 후기지수는 새로운 별호를 얻었고, 그의 하나뿐인 형은 아우의 별호를 딴 무력대를 만들었다.
언젠가 자신의 아우가 이 자리에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진천이라는 두 글자에 담긴 뜻처럼, 언젠가 그 이름이 천하를 넘어 하늘에까지 떨쳐 울리길 소망하며.
“북부를 침탈한 적들의 선봉대가 일부 병력을 분산, 정양(定壤)을 피하여 우회하고 있다. 진천대 이백으로 놈들의 예봉(銳鋒)을 꺾어라.”
진무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존명(尊命).”
* * *
다음 날.
아무런 저항 없이 북부에 발을 디딘 초원의 대군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국화 대신 산자락을 뒤덮은 검붉은 핏물과 공포에 질린 선봉대의 생존자였다.
“카, 칸이시여.”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무카는 직감했다.
본대보다 한나절 앞서 산서성을 침범한 일천의 선봉대가, 모조리 전멸당했다는 것을.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눈앞의 얼간이가 가져온 것은, 침략자를 향한 강력한 경고라는 것을.
“노, 놈이 이것을 칸께 전해 드리라고…….”
스륵, 툭.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붙잡고 있던 천 자락이 미끄러진다.
핏물에 흠뻑 젖은 그것 사이로 굴러떨어진 케식 백인장의 목을 말없이 응시하던 자무카가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전부냐.”
“전언(傳言)을, 전언을 남겼습니다.”
변발이 풀어 헤쳐진 생존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 년 후에도, 우리 형제는 함께 산에 올라 중양절을 보낼…….”
“개소리군.”
서걱.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손속.
살과 뼈가 분리된 머리가 국화밭에 굴러떨어진다.
이제는 더 이상 본래의 색을 찾아볼 수 없는 붉은 꽃밭을 바라보던 자무카의 모습에, 칭겐이 입맛을 다셨다.
“끝까지 들어 보지 그러셨습니까. 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중요한가?”
중요한 건 일천의 선봉대가 궤멸했다는 것이다.
아니, 단 한 번의 전투로 그 선봉대에 포함되어 있던 일백의 케식이 죽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어차피…… 곧 만나게 되겠지.”
자무카가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쪽을 응시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뇌리에는 문득 어떠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압도적이면서도 일방적이어야 할 이 전쟁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