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58
#957화
팔천협을 양옆으로 둘러싼 절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성벽이나 다름없었다.
왜 아니겠나.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그 높이만 무려 삼십여 장이다.
먼 옛날 대륙을 통일했던 폭군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만든 장성(長城)조차 그 높이는 삼 장 남짓에 불과하다.
만약 우회하여 이곳까지 닿기 위해서는 며칠에 걸쳐 험준한 산등성이를 넘어야 했고, 정면으로 뚫으려면 아득게 솟아 있는 암반을 타고 올라야 한다.
물론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숙련된 심마니나 사냥꾼도 충분한 대비책을 마련한다면 긴 시간에 걸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울퉁불퉁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손과 발의 지지대가 되어 주기도 하니까.
단.
협곡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절벽을 가득 채운 일천의 궁수가 불청객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금처럼.
으아아아아!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외침과 함께 개미 떼처럼 절벽을 향해 몰려드는 유목민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발아래 펼쳐진 어둠 속 광경을 응시하던 군관(軍官)들이 일제히 입을 연 것은.
“전원!”
“발시(發矢)!”
펄럭!
어둠 속에서도 흐릿하게 색이 구별되는 붉은 깃발이 벼락처럼 내려감과 함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일천 개의 활시위가 비로소 자유를 되찾았다.
투투퉁, 솨아아악!
깊은 산속에서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
흐릿한 달빛 사이를 가르며 쏘아진 화살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마치 이 짧은 여행의 종착지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터텅! 푸푸푹!
“끄아아아악!”
“안돼! 홀로구!”
비명과 함께 사방에 나뒹구는 신형들.
그러나 아득한 절벽 위에서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던 한 사내의 표정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든 궁수를 동원하여 집중 사격을 가했음에도 고작 일백이라.’
은은한 정광(正光)이 흐르는 두 눈동자는 사내가 상승의 무공을 익혔다는 증거이며, 발아래에 펼쳐진 짙은 어둠 속을 꿰뚫어 볼 능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상보다 놈들의 피해가 적군. 방어를 위해 미리 말을 버리고 방패로 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이건…….’
결국 답은 하나다.
짧은 생각 끝에 결론을 내린 사내는 지휘봉을 들었고, 긴장한 얼굴로 대기 중이던 부관은 상관의 명령을 화살에 묶어 맞은편 절벽으로 날려 보냈다.
쉬익.
비록 원만한 곡선을 그렸다고는 해도 화살은 화살.
그러나 파공성과 함께 날아든 그것은 누군가의 손아귀에 빨려가듯 붙잡혔다.
그것도 아주 손쉽게.
턱.
보지도 않고 화살을 잡아낸 노인은 화살대에 묶여 있던 전서(傳書)를 풀어 주위의 군관에게 건넸다. 갑옷을 갖춰 입은 군관은 신속하게 전서의 내용을 훑었다.
“그래, 뭐라던가?”
“피해가 확연히 줄어든 것으로 보아, 놈들이 정예들을 동원한 것 같다고 합니다.”
“골치 아프긴 한데…… 뭐, 아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군.”
노인은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 압도적인 높이의 절벽은 수성(守城)을 위한 최고의 요충지나 다름없다.
팔천협을 천혜의 요새로 거듭나게 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이자, 지금껏 있었던 두 차례의 대전(大戰)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절벽으로 투입된 적들의 정예병들은, 이제 곧 지옥도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협곡을 정면 돌파하려는 적들은 우군(右軍)이 견제할 테니, 우리 좌군(左軍)은 절벽을 오르는 자들을 처리해 달라 청하셨습니다.”
“청은 무슨. 나이로 따졌을 때는 노부가 좌장(座長)이지만, 지금 같은 전장에서는 장군의 명령대로 따라야지. 안 그런가?”
군관은 대답 대신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아는 눈앞의 노인은 무림에서 명성을 날린 엄청난 고수고, 맞은편의 사내는 까마득한 상관이다.
어중간한 중급 지휘관인 그로서는 당장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마땅치 않았다.
그저 명령에 따라 조심스럽게 제안할 수밖에.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께서 청하시길…….”
“됐네. 됐어. 결국 이 늙은이가 나서야 한다는 말 아닌가?”
손을 내저은 노인이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퉁.
지팡이라고 하기에는 그 길이가 일장에 달할 정도로 길고, 나무라고 부르기에는 암반과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무겁다.
‘저건 도대체 뭐지?’
들리지 않는 군관의 의문을 뒤로한 채, 노인은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아 대는 궁수들의 앞으로가 털썩 걸터앉았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진위경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노 선배께서는 절벽 위를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그간 빚을 졌으니 응당 따라야겠지만…… 이 제안은 자네답지 않군. 차라리 노부가 밑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겠나?’
노인의 반박은 일견 당연했다.
만오천의 병력 중 가리고 가려 뽑은 일천의 궁수가 절벽 위를 점하고 화살비를 쏟아내는데, 살아서 절벽을 오를 적들이 몇이나 될 것이며 고강한 고수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망설임 없이 돌아온 진위경의 대답은 단호했다.
‘맞습니다. 놈들도 그리 생각하겠지요.’
‘……!’
‘놈들은 절벽을 오를 겁니다. 반드시.’
‘자네, 이미 확신하고 있군.’
‘지상의 아군은 온 힘을 다해 결사 항전할 것입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놈들은 절벽을 노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가장 뛰어난 정예들 역시 포함되어 있겠지요.’
‘바로 그 정예들을, 노부가 막아라?’
‘절벽을 오르려는 적들의 시도를 막아 내면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그곳만 끝까지 지켜 낸다면 한참이나 기울어 있는 저울추를 수평으로 맞출 수 있지요.’
그제야 노인은 떠올렸다.
비록 일 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기는 하나, 그가 보고 겪은 태원진가의 소가주는 늘 현명한 선택만 해 왔다는 것을.
‘좋아. 자네가 원하는 대로 노부가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대어(大漁)를 낚아 주지.’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노 선배께서 완치되셨다고는 하지만 충분한 회복 기간이…….’
‘걱정 말게. 태원진가에는 이미 두 번이나 목숨을 빚진바, 내 이번에 그 값을 톡톡히 치러 줄 테니.’
무림인은 은원(恩怨)을 잊지 않는다.
늙고, 적잖은 명성을 쌓은 무림인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노인은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어느 문파에도 몸담지 않은 채 고향 땅에서 일평생을 보냈고, 초절정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른 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뼈를 묻을 생각이었다.
어느 날, 빼어난 미모를 지닌 한 여인과의 만남 직후 이지를 상실하기 전까지는.
“드디어…… 빚을 갚을 때가 왔군.”
노인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빚을 갚아야 할 대상은 타의에 의해 빼앗겼던 자신의 정신을 되돌리고, 수개월에 걸쳐 극심한 부상까지 치료해 준 태원진가뿐만이 아니다.
암천(暗天).
놈들에게도 원한이라는 빚을 갚아야 한다.
아니, 복수해야 한다.
“그래, 오너라.”
왜소한 체구의 노인은 흐릿하게 웃으며 자신의 애병(愛兵)을 쥐었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헤아릴 수 없이 반복했던 그 동작으로, 힘차게 두 팔을 떨쳤다.
후웅.
자그마치 삼 장에 달하는 애병이 거무튀튀한 섬광을 흩뿌리며 낭창하게 휘어진다.
그 끝에 이어진 새하얀 은빛 선과 갈고리가, 화살비를 피해 절벽을 기어오르던 적들을 향해 쏘아졌다.
슈화아아악! 서거걱!
사방을 찢어발기는 새하얀 빛줄기.
살과 뼈가 두부처럼 갈라지고, 갑옷과 함께 토막 난 수십 개의 사지가 절벽 아래로 미끄러진다.
압도적인 힘.
일신의 무위도, 지형적 우위도 가져간 노인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적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바로 다음 순간, 절벽에 펼쳐진 그 빼곡한 은빛 그물 사이로 붉은 섬광이 번뜩이기 전까지는.
쉭, 서걱!
바람 소리보다도 작은, 미세한 파공성.
하지만 노인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적들을 찢어발기던 은빛 선의 일부가 조금 전의 그 일격으로 끊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붉은 섬광에 담긴 힘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강기(罡氣)……!’
틀림없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강기를 머금은 천잠사(天蠶絲)를 끊어 낼 수 있는 것은 동류의 힘뿐이다.
“감히!”
쉬릭!
노호성을 내지른 노인의 손이 흐릿해졌다.
힘과 속도가 더해진 애병은 이무기처럼 몸부림쳤고,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궁수들은 이를 악물며 활시위를 당겼다.
“집중사격하라!”
“저놈, 선두에 선 저놈이 우두머리다! 일제히 발사하라!”
투퉁! 쉬쉬쉬쉭!
푸푸푹!
“커, 커헉!”
“으아아악!”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파공성과 비명.
그러나 절벽 위를 뒤덮은 막강한 화망(火網)을 벗어난 그림자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캉!
날아드는 노인의 공격을 다시 한번 받아치고.
슈확!
전신을 향해 날아든 수십여 발의 화살을 마치 묘기를 부리듯 몸을 비틀어 피해 냈으며.
툭.
가파른 절벽을 밟았다.
아니, 터트리며 쏘아졌다.
콰앙! 쐐애애액!
그것은 질주인 동시에 비행이었다.
경지에 오른 벽호공(壁虎功)의 고수조차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쾌속했고, 태곳적부터 정해진 세상의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턱.
아득한 절벽의 끝자락에 다다른 그림자는, 자신을 기다리던 노인과 마주했다.
정확히는 그의 손끝을 따라 휘몰아치는 은빛 섬광과.
후웅, 슈화아아악!
공간이 갈라졌다.
노인은 수십, 수백 조각으로 쪼개진 바람과 새하얀 강기의 빛 속에서 그림자의 얼굴을 보았다.
메마른 체구. 날카로운 눈매.
유목민임이 분명할 그 사내는, 지금 이 순간 웃고 있었다.
“……!”
콰드드득!
거대한 힘을 이기지 못한 채 힘없이 무너지는 절벽의 일각(一角).
그러나 그 어디에도 죽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절벽 위의 궁수들이 동요하던 그때, 작게 혀를 찬 노인은 텅 빈 허공을 밟은 채 우뚝 서 있는 사내를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누구냐, 네놈은.”
사내가 대답했다.
“사냥꾼.”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군.”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생각이 바뀌었어.”
사내, 칭겐이 노인을 바라보며 입술을 핥았다.
“좀 늙긴 했지만 꽤 먹음직해 보이는데. 안 그래?”
노인이 코웃음 쳤다.
“삼류 사냥꾼이로군. 늙은 만큼 질기다는 것도 모르다니.”
“괜찮아. 이빨이 튼튼해서.”
이를 드러내며 웃은 칭겐이 물었다.
“그래서, 그쪽은 누구신가?”
“낚시꾼.”
담담하게 대답한 노인이 덧붙였다.
“송사리들만 가득한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월척을 낚아서 기분이 썩 괜찮아진 낚시꾼이지.”
“그 월척, 당신 같은 늙은이가 잡기에는 너무 큰 것 같은데.”
“제깟 놈이 펄떡거려 봤자 뭘 할 수 있겠나. 꼬리를 붙잡고 두어 번 내리치면 그만이지.”
“아, 그래?”
사냥꾼은 낚시꾼을 바라보며 웃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뇌리에는, 눈앞의 늙은 낚시꾼을 닮은 누군가의 별호가 맴돌고 있었다.
고강한 무위를 지녔음에도 강가를 떠나지 않으며, 기이한 병기를 쓰는 전대의 노고수.
“누가 사냥에 성공할지는 금방 알게 되겠지. 안 그런가? 동정어옹(洞庭漁翁).”
노인, 동정어옹이 애병인 흑목조간(黑木釣竿)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과연, 월척이로다.”
슈확!
두 갈래의 바람이, 서로를 향해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