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60
#959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저마다의 색깔을 지니고 있고,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다.
눈빛이, 표정이, 온몸을 둘러싼 특유의 기운이 누군가를 설명하고 증명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진무경은 눈앞의 사내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마인(魔人).’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두 글자.
틀림없었다.
살기에 취해 있는 눈빛과 느슨하게 올라간 입꼬리.
거기에 더해 사내의 전신에서 배어나는 혈향(血香)은 마주 선 것만으로도 코끝이 저릴 지경이었으니.
‘이놈은…… 도대체 뭐지?’
진무경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이미 피부로 느꼈다. 머리로 이해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새로운 적이 평범한 악인(惡人)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과거 항산검문을 기습하고, 생각지도 못한 무위로 그에게 상당한 내상을 안겨 주었던 적풍단주 풍양조차 저자에 비하면 일개 마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결이 다르고, 격이 다르다.
지금껏 쌓아 올린 살업(殺業)은 물론, 일신의 무위(武威)까지도.
그리고 그런 진무경을 바라보며, 칭겐은 씩 웃었다.
“역시, 눈빛이 좋아.”
저벅. 쉭!
칭겐이 산책하듯 가볍게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 신형을 날려 뒤로 훌쩍 물러난 진무경이 비스듬히 검신을 곧추세웠다.
“기감도 쓸 만하고.”
칭겐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미세한 살기를 흘렸을 뿐이건만, 단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는 반응 속도.
비록 적이기는 하나, 그는 눈앞의 젊은 검귀(劍鬼)가 생각 이상으로 썩 마음에 들었다.
단순한 사냥감으로 생각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분위기가 다 죽어 가는 늙은이처럼 어두컴컴하긴 해도 아직 한참 어린놈 같은데……. 너, 누구냐? 내 제자 할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한마디에, 칭겐의 등장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빠져 있던 전장의 분위기가 술렁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너진 바위 틈새에서 신음하고 있던 백여 명의 유목민은 눈과 귀를 의심하며 자신들의 대족장을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테무르와 칭겐이 다스리는 서부 초원에 속한 그들은 두 젊은 대족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이 더욱더 믿어지지 않았다.
일신의 무위보다는 지략과 통치력으로 칸의 자리에 오른 칭겐이 그 비범한 무위를 통해 단신으로 초원의 형제들을 수백이나 도륙한 적에게 이런 제안을 하다니.
“카, 칸이시여!”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경악 어린 외침.
칭겐과 케식들의 등장에 기뻐하던 기색은 이미 한참 전에 사라졌다.
각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채,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목민들의 모습에 칭겐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역시 이런 상황에 제안하기엔 좀 많이 이상하지? 아직 주위에 보는 눈도 있고.”
바로 그때였다.
칭겐의 왼손에 들려 있던 소검(小劍)이 흐릿해진 것은.
서걱, 쿠구궁!
서늘한 절삭음과 함께 간신히 맞물린 채 쌓여 있던 바위 더미가 무너지며 유목민들을 덮쳤다.
구조를 기다리던 그들의 비명이 굉음에 파묻히더니 이내 완전히 지워졌다.
“하등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것들이, 하여간 말은 많아서 문제라니까.”
“……!”
“자, 이제 보는 눈이 없어졌으니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보자고. 응?”
순간 내려앉은 정적 속, 깊숙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칭겐을 응시하던 진무경이 불현듯 입술을 뗐다.
“칭겐이라고, 네놈이?”
“어허, 네놈이라니?”
작게 혀를 찬 칭겐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애새끼라고 해도 그렇지, 스승님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확 그냥 혓바닥을 뽑아 버릴라.”
건들거리는 태도와 숨길 수 없는 강자의 여유.
진무경은 유목민 특유의 변발을 한 눈앞의 사내가, 수많은 비밀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용(易用)을 했군. 진짜 칭겐은 어디에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칭겐이 대답했다.
“글쎄, 아마 지금쯤이면 독수리 배 속이 아닐까?”
“또 다른 한 명은?”
“다른 한 명? 아, 테무르 그놈은 살려 뒀지. 둘 중 하나는 살려 둬야 서부 놈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으니까.”
칭겐은 거리낌 없이 대꾸했다.
어차피 반경 수십여 장은 케식이 통제하고 있는 상황.
자무카가 오랜 세월 공들여 키워 낸 친위대인 그들은 결코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 어떤 흉포한 사냥개라도 제 주인은 물지 않듯이.
“뭐, 이 정도면 네 궁금증은 충분히 해결해 준 것 같은데……. 이 몸의 관대한 제의는 어떻게 생각하나?”
칭겐이 몹시 기대하는 눈빛으로 진무경을 바라본 그 순간.
“불가(不可).”
낮게 깔린 목소리가 불쑥 울려 퍼졌다.
진무경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한 사람의 얼굴에 칭겐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 된다니, 어째서? 아니, 그 전에 네놈이 뭔데?”
이야기를 방해한 불청객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늑대가 어떻게 개새끼 밑으로 들어가겠나. 친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운 아우인데, 형님으로서 그런 꼴은 못 보지.”
“아우? 형님?”
살짝 커진 눈으로 불청객, 진위경을 바라보던 칭겐이 피식 웃었다.
“진씨 형제라……. 이거, 생각보다 훨씬 큰 월척이 걸려들었네.”
월척.
그 두 글자에 진위경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월척을 낚아 오겠다며 껄껄 웃던 늙은 낚시꾼이 떠올라서였다.
“노 선배께서는 어찌 되셨느냐.”
내심 짐작은 하고 있으나, 그래도 놈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저 묵빛 낚싯대의 주인이, 태원진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고 나서 준 동정어옹이 어찌 되었는지.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늘 빗나가는 법이 없다.
“아, 그 늙은이.”
칭겐이 흐릿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낚는 솜씨는 제법이었는데, 힘이 부족했어. 분수에 안 맞는 큰 걸 낚아 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부러져 버렸지. 저 낚싯대처럼.”
“……!”
“아니, 부러진 정도가 아니라 으스러졌겠군. 자그마치 삼십여 장 아래로 처박혔으니.”
진위경은 침음성을 삼켰다.
검붉은 핏물에 흠뻑 젖은, 군데군데 균열이 간 흑목조간은 동정어옹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알려 주는 증거였다.
자신이 죽으면 푸른 강물에 유골을 뿌려 달라며 입버릇처럼 말했던 늙은 낚시꾼은 오늘, 바로 이 잿빛 협곡에서 뼈를 묻었다.
태원진가에 빚진 목숨을 태원진가를 위해 내던지며.
그리고 이제는 태원진가가 그에게 갚을 빚이 생겼다.
동정어옹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죽어 간 모든 이들을 향한 빚이.
“이름과 별호를 대라.”
“뭐?”
“네놈의 정체를 알아야, 훗날 망자들을 위한 제를 올릴 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진위경이 서늘한 눈빛으로 칭겐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감히 산서성을 침범하고 당신들을 해한 그 개새끼를, 우리가 직접 찢어 죽였노라고.”
“……!”
“제아무리 세상이 개같이 돌아간다 한들, 그것이 사람 된 도리가 아니겠느냐?”
크게 뜬 두 눈을 깜빡이던 칭겐이, 문득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으하, 으하하하하!”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웃음소리가 사방을 짓눌렀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소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웅. 드드드득!
부풀어 오르는 공기.
막강한 압력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과 절벽이 뒤흔들렸고, 참지 못한 신음이 곳곳에서 새어 나왔다.
“흡……!”
만약 거인의 손아귀에 붙잡힌다면 이런 기분일까.
앙천대소(仰天大笑)에 실린 거대한 기운에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공력이 일천한 하급 무인들 중에는 창백한 얼굴로 토혈(吐血)하는 이마저 있었다.
“초, 초절정 고수……!”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탄식처럼 흘러나온 한 마디. 그 안에 담긴 경악의 감정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다.
아니,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수십 개의 산봉우리에도 높낮이의 차이가 존재하듯이, 칭겐의 모습을 한 눈앞의 사내 역시 초절정이란 말로 다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스아아아아.
그 순간, 산서성의 무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과 연결된 것처럼,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진 암석의 파편이 허공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백여 개.
뾰족한 단면은 그 자체로 암기와 같았고, 그 중심에 우뚝 선 사내의 모습은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실로 변화무쌍한,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
우둑. 뿌드드득!
뼈가 어긋나고 살이 짓눌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습.
모두가 그 놀라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세 줄기의 섬광이 번뜩였다.
슈확!
갈라지는 바람.
케식들조차 제때에 미처 반응하지 못할 만큼, 한 줄기의 벼락이 되어 공간을 가로지른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출수(出手)했다.
후웅, 쉭!
거력이 실린 일권(一拳)과 두 자루의 검신이 휘황한 빛줄기를 내뿜으며 칭겐을 향해 쇄도한 그 순간.
“감히!”
콰아아앙!
노호성과 함께 용암처럼 터져 나온 거대한 기운이 주위의 모든 것을 밀어 냈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광풍과 함께.
화아아악!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희뿌연 먼지구름.
항거할 수 없는 힘에 부딪혀 삼 장에 달하는 거리를 밀려난 세 사람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
퍼엉!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칭겐이, 아니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생소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쿵.
묵직한 발걸음.
어지간한 장정 두셋을 합친 것만큼이나 비대한 체구를 지닌 노인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이건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칭겐이라 불렸던 그는 오랜만에 되찾은 자신의 얼굴과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살집을 더듬었다.
늙고, 추했다.
이것만으로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 역용술과 축골공을 되돌리는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기습까지 당했다는 사실은 노인의 기분을 최악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이런 천하의 배은망덕한 놈을 봤나…….”
노인은 살에 파묻혀 잘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실눈으로 감히 자신을 기습한 쥐새끼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저들 중, 오랜만에 자신의 마음에 쏙 든 진무경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감히 스승을 기습하다니, 넌 파문(破門)이다.”
노인의 선언에 진무경은 문득 생각했다.
만약 이 자리에 자신의 골칫덩어리 동생이 있었다면, 저 헛소리에 뭐라고 대꾸했을지.
그리고 이내 그럴듯한 정답을 찾아냈다.
“개좆이나 빨아라.”
“……!”
“아. 돼지 새끼도 추가.”
분노로 인해 삽시간에 붉어진 노인의 눈동자에, 진무경의 좌우에서 웃고 있는 두 사내의 모습이 비쳤다.
“네놈들은 뭐냐?”
각기 젊고 늙은 두 사내가 선선히 입을 열었다.
“귀검(鬼劍) 위팽.”
“항산호(恒山虎) 철무백.”
태원진가와 항산검문을 대표하는 두 절정 고수의 대답에, 노인은 덩치와는 달리 날렵한 혀로 입술을 핥았다.
“곧 죽어서 귀신이 될 놈과 항산의 개새끼였구먼. 잘 알았다.”
스르릉.
서늘한 마찰음.
노인은 양손에 쥔 두 자루의 검을 교차시키며 입을 열었다.
“저승에 가거든, 마조(魔鳥)가 보냈다 하거라.”
그 한 마디가 신호탄이었다.
멈췄던 전장의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던 심지를 핏빛 불꽃으로 내던지는 신호탄.
와아아아아!
깊은 밤을 깨우는 거대한 함성과 함께, 두 개의 파도가 서로를 향해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