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61
#960화
일다경(一茶頃).
고작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지만, 마조(魔鳥)는 내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눈앞의 먹잇감들을, 아니 산서인들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발시(發矢)하라!”
쉬쉬쉬쉬쉭!
절벽을 저지한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협곡 입구 어림에 세워진 다섯 개의 토성(土城).
아직은 불완전한 흙과 바위의 성루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궁수가 대기 중이었고,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쏟아진 화살 비는 한 덩어리가 되어 뒤엉키려던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정확히는, 협곡을 통과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밀려들던 초원의 군세를 향해.
쐐액! 푸푸푸푹!
“끄아아악!”
“내, 내 눈! 눈!”
사방에서 솟구치는 비명과 핏물.
급소에 화살을 맞은 유목민들이 몸부림친다.
물 흐르듯 이어진 몇 차례의 일제사격으로 빽빽하던 진형에 공백이 생기자, 태원진가를 필두로 한 산서인들은 송곳처럼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쳐라!”
“와아아아아!”
돌파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두 갈래로 나뉜 인(人)의 파도는 서로를 향해 나아갔고, 그 충돌의 시작에는 새하얀 포말이 아닌 붉은 핏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각! 콰드드득!
퍼걱!
강철과 강철이 맞물리며 불꽃을 피워올린다.
한 유목민이 내뻗은 날카로운 돌격창이 관군의 가슴팍을 관통했고, 힘없이 허물어지는 그의 시체를 뛰어넘은 태원진가의 무인은 유목민의 목젖을 베었다.
서걱!
“크륵, 컥!”
곳곳에서 넘쳐흐르는 비명과 신음.
모든 이가 끊임없이 서로를 죽이고, 죽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서 있는 이 전장에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일말의 자비나 동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약자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곳.
그것이 바로 전장이었고, 이 끔찍한 살육의 중심에 선 마조는 지난 수십여 년간 잊고 있던 즐거움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그래! 더, 더!”
그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두 자루의 검을 휘둘렀다.
거칠 것 없던 지난날의 모습처럼.
정마대전(正魔大戰)이라 불린 그 거대한 전쟁에서, 마음껏 적의 목숨을 취하고 피를 들이켰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슈화악!
바람이 갈라진다. 길고 짧은 두 자루의 검에서 솟구친 강기(罡氣)가 공간을 베어 가르며 가장 먹음직스러운 먹잇감들을 향해 치달았다.
“산(散)!”
쉬잉!
거의 동시였다.
선두에 선 진무경이 벼락같은 외침을 토해 낸 것도.
그 외침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항산호 철무백과 귀검 위팽이 몸을 비틀어 낸 것도.
그리고.
서걱!
그들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붉은 강기가, 표적의 근처에 자리 잡았던 운 없는 자들을 휩쓸어 버린 것도.
푸화아아악!
비명은 없었다. 토막 난 육신과 피 분수만이 남았을 뿐.
“으아, 으아아아!”
두려움에 찬 누군가의 비명은, 삼십여 명에 달하는 관군과 무림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려 주는 단서에 불과하다.
찰나의 순간.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자그마치 수십의 목숨이 사라졌다.
아니, 지워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만이 당연한 운명인 것처럼.
‘이것이 초절정 고수……!’
위팽과 철무백은 자신들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절정과 초절정.
고작 한 글자가 더해졌을 뿐이지만, 이 두 경계선에 존재하는 벽은 너무나도 높고 거대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반년 전.
뜻하지 않게 태원진가의 문객이 되었던 또 다른 초절정 고수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조금 전의 일격을 본 것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해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토록 강했던 노 선배께서도 결국 저놈에게 당했다.’
비록 동정어옹이 병상을 떨치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지난 몇 달에 걸쳐 동정어옹의 가르침을 받았던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느 정도의 강자인지.
그 정도 수준의 고수가 건네는 말 몇 한마디와 수시로 벌어졌던 지도대련이 얼마나 대단한 기연(奇緣)인지.
동정어옹은 미쳐 날뛰던 자신을 저지해 준 것으로도 모자라 회복에 힘써 준 태원진가의 형제들에게 늘 감사함을 지니고 있었고, 그가 베푼 호의를 통해 태원진가의 전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한데, 그랬던 그가 죽었다.
단 한 사람에 의해.
아니, 도무지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에 의해.
그리고 늙은 낚시꾼을 씹어 삼킨 그 괴물은, 이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새로운 사냥감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쉭.
미세한 파공성과 함께 갈라지는 공간.
어둠 속에서 붉은 섬광이 번뜩인 그 순간, 위팽과 철무백은 온 힘을 다해 신형을 뒤집었다.
피핏!
뜨겁다.
분명 한 뼘 차이로 공격을 피했음에도, 압력을 이기지 못한 목덜미의 살갗이 갈라진다.
그러나 불현듯 찾아온 그 아릿한 통증은, 혼잡하던 머릿속을 오히려 차갑게 식혀 주었다.
‘이건…….’
잠시 크게 뜨였던 위팽과 철무백의 눈동자가 이내 깊게 가라앉았다.
지금의 회피는 단순한 우연이나, 본능에 따른 움직임이 아니다.
동정어옹과의 대련을 통해 익힌 감각과 기술. 그 외의 모든 것이 합쳐져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 있었던 그 수많은 대련의 절반은, 두 사람의 합공(合攻)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이제는 눈빛만 보아도 안다.
스치듯 허공에서 교차한 시선과 함께, 위팽과 철무백의 신형이 동시에 흐릿해졌다.
파팟!
그들은 좌우로 나뉘어 쏘아졌다. 피로 물든 아수라장 속에서 서로를 향해 날붙이를 휘두르는 적아(敵我)를 뛰어넘어, 가파른 암벽을 밟으며 내달렸다.
동정어옹의 그것보다 빠르고 강한 괴물의 강기를 온 힘을 다해 피해 내며.
서걱, 콰아아앙!
수백 여년에 걸쳐 형성되었을 단단한 암벽이 두부처럼 갈라지고, 그 안으로 스며든 막강한 기운이 사방을 찢어발겨도 위팽과 철무백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눈앞의 적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으니까.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서거나, 줄어드는 거리만큼 늘어나는 크고 작은 상처 따위에 주춤했다가는 자신들보다도 한발 앞서 나아가고 있는 저 청년을 볼 면목이 없으니까.
‘이 공자.’
‘진천검(振天劍).’
지금 이 순간, 위팽과 철무백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쉼 없이 빗발치는 강기의 소나기 속에서, 망설임 없이 적을 향해 달려드는 진무경의 모습을.
옅은 핏물을 흩뿌리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의 단단한 등과 두 다리를.
더불어 문득 생각했다.
빛도 들지 않는 어둠을 벗어나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온 그가.
진태경과 청풍이라는 그늘에 잠시 가려져 있던 또 한 명의 천재가 이 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그리고 마침내, 보았다.
스아아.
새하얀 검신을 타고 미끄러지는 달빛.
아니, 위팽과 철무백의 그것보다 더욱 휘황한 빛을 내뿜는 거대한 검기(劍氣)를.
쉬익.
느려진 세상 속.
비스듬히 내리그어진 푸른 검기가, 마조의 붉은 강기와 맞닿았다.
* * *
콰아아아앙!
그건 일순간 모두의 손발을 멈추게 만든 폭발이자, 협곡을 떨어 울리는 충격이었다.
그와 더불어, 폭발의 중심에 선 누군가에게는 기쁨과 경악이기도 했다.
콰아아아.
“으하, 으하하하하!”
사방으로 비산 하는 암석의 파편과 뿌옇게 솟아오른 먼지구름 너머, 실성한 사람처럼 미친 듯이 웃어젖히던 마조는 벼락처럼 손을 내뻗었다.
퍼엉!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며 드러난 시야, 일장에 걸쳐 깊게 파인 고랑 끝에 선 진무경의 모습을 본 마조가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이런, 이런 천하의 발칙한 놈을 보았나!”
막강한 살기와 기쁨이 뒤섞인다. 양손에 쥔 두 자루의 검이 파르르 떨리는 이유는, 비단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뿐만이 아니었다.
툭.
자신의 발뒤꿈치에서 전해지는 단단한 감촉의 정체를, 마조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위였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세 걸음 뒤에 있었던, 그러나 이제는 그와 맞닿게 된 바위의 파편.
핏물에 흠뻑 젖은 가죽신으로부터 느껴지는 그 특유의 강도와 서늘함이, 마조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군. 누군가를 상대로 물러선 적이 언제였는지.”
맞다.
다가온 것은 바위가 아니다.
마조가, 자신이 물러난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물러나게 만들었다.
고작 이립도 되지 않은 핏덩이가, 정마대전부터 지금까지 피로 물든 일생을 살아온 늙은 노괴(老怪)를.
비록 세 걸음과 일장의 격차는 컸으나,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마조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똑똑히 보았다.
각기 다른 두 줄기의 검기와 강기가 맞닿기 직전, 저 핏덩이의 손끝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궤적을.
바다처럼 푸르렀던 그 빛을.
“그래, 그랬군.”
철벅.
마조가 천천히 내디딘 걸음이 피 웅덩이를 밟았다.
비대한 체구를 증명하듯, 그의 무거운 발걸음을 따라 핏물이 흘러넘쳤다.
“내심 희한했었지. 동정어옹, 그 늙은이와 싸우면서도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네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며칠 전, 그는 선봉대의 전멸 소식과 함께 전령이 가져온 케식 백인장의 수급에서 검귀(劍鬼)의 흔적을 보았다.
“그것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흥미가 동했다. 그만큼 완벽한 솜씨였으니.”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짐승도, 인간도, 그리고 무공도.
각자의 죽음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무림인의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매끄러운 수급의 단면을 보며, 마조는 지난 수십여 년간 차갑게 식어 있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 명맥이 끊겼다고 알려진 신공절학(神功絶學)의 흔적을 발견해서?
혹은 자신과 비견될 만한 강자의 솜씨를 느껴서?
틀렸다.
동정어옹이라는 초절정 고수를 상대하면서도 검귀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던 이유를, 마조는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일격(一擊).”
수백, 수천 번을 보더라도 군더더기 없는.
실로 눈부시고, 아름답기까지 한.
그야말로 완벽한 일격.
바로 그 단 한 번의 움직임.
눈앞의 젊은 검귀는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
수 갑자의 공력을 가진 것도, 천하를 오시할 만한 신공절학을 익힌 것도 아니다.
다만, 무색(無色)하고도 무취(無臭)했다.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다.
마치 손 쓸 새도 없이 누군가의 생명을 집어삼키는 무형지독(無形之毒)처럼.
어둠 속에서 은밀히 다가와 목을 베어 버리는 살수처럼.
“놀랍군. 아니, 경이로워.”
진심이 담긴 탄성과 함께 진무경을 바라보는 마조의 눈에는, 일말의 후회와 안타까움마저 깃들어 있었다.
“어째서, 왜 너 같은 놈을 지금 만난 거지?”
퉤.
검붉은 피가래를 뱉어 낸 진무경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훨씬 일찍 만났어도, 너 같은 비루먹은 돼지 새끼를 스승님이라고 부를 일은 없었을 거다.”
위팽, 철무백과 함께 포위하듯 다가오는 그를 향해 마조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이냐!’
일 년. 아니 삼 년만 늦게 만났다면 정말 기쁨으로 전신이 떨릴 만큼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진무경의 앞에는, 반쯤 무너진 벽만이 존재할 뿐이니까.
하지만…….
그 기쁨의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진무경은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안타깝구나. 진심으로.”
스아아아.
마조의 전신에서, 붉은 혈광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