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62
#961화
어둠을 가르며 피어오르는 은은한 혈광(血光)을 본 순간, 항산호 철무백은 비로소 깨달았다.
마조라는 생소한 별호로 스스로를 소개한 저 비대한 노인의 정체를.
“혈혼비마(血魂肥魔).”
신음처럼 흘러나온 한 마디에 마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같은 어린놈이 어찌…….”
몇 년 후면 환갑에 접어드는 철무백이었지만, 그런 노강호조차 마조의 눈에는 새파란 애송이나 다름없는 나이.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조에게 있어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오랜만에 듣게 된 옛 별호 때문이었다.
혈혼비마.
살인을 사냥이라 여기며, 수많은 마인들 중에서도 유독 죽음과 피에 집착한 탓에 얻게 된 그 별호에는 조롱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살쪘다는 의미를 지닌 비(肥).
그 한 글자는 매번 마조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 빌어먹을 별호도 오랜만에 듣는군. 그동안 하도 많이 죽여 댔더니 이제는 노부를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놈들이 부지기수였거든.”
정파에서 보낸 추살대도, 딴에는 비위를 맞추겠답시고 연신 굽신거리던 사파 떨거지도, 심지어 한때 제법 친했던 마인들까지도 죽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치는 자신의 별호를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외관과는 영 어울리지도 않는, 마조(魔鳥)라는 별호를 스스로 지었겠나.
한데 항산호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별호를 지닌 새파란 어린놈이 잠시 묻어 두었던 불쾌한 추억을 끄집어냈다.
‘감히.’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마조는 마음속 살생부의 첫 줄에 철무백의 이름을 적으며 입을 열었다.
“네놈 같은 애새끼가 노부와 일면식이 있을 리는 없고……. 누구냐, 네 스승이?”
까득.
두 주먹을 말아 쥔 철무백이 대답했다.
“권호(拳豪).”
“권호?”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가던 마조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
사실 물어보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또 죽여 왔던 일생이다. 그 숫자가 일천을 넘겼을 때부터는 세지도 않고 구태여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권호는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별호였다.
자신과 생사결을 벌이고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라는 점에서 더더욱.
“이런 기막힌 인연을 봤나. 네 녀석이 권호의 제자라고? 아니, 그전에 그런 몸뚱어리로 후계를 키워냈단 말이냐?”
마조는 분노도 잊은 채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철무백은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스승님을 모욕하지 마라. 너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분이셨으니.”
“그래, 어련하겠나. 권사(拳士)로서의 생명이 끝장난 와중에도 제자를 키워 냈으니 근성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지. 양팔을 잘라 냈을 때 놈의 표정이 어땠는지 네놈도 봤어야 했는데.”
“……!”
“이거, 지금에서야 다시 보니 제법 호화로운 잔칫상이었군. 태원진가의 젊은 검귀에, 수라멸권(修羅滅拳)의 후계자까지.”
흡족한 눈빛으로 좌중을 쓸어 보는 마조의 모습에 위팽이 침을 탁 뱉었다.
“나는 안 보이나?”
“그럴 리가. 잠시 후면 죽어 나자빠져 있을 네놈의 시체가 벌써부터 눈앞에 선한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그런 건 나약한 것들이 지껄이는 개소리지.”
쿵.
나아간 발걸음과 함께 주름 잡힌 살집이 출렁였다.
마조는 육중한 체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 사람을 훑었다.
“자, 그럼…….”
쉭.
“누구부터 죽여 줄까.”
단 한 걸음.
수 장에 달하는 거리를 지우며 들이닥친 마조의 양손에서, 두 자루의 검이 호선을 그렸다.
마치 핏빛 발톱을 지닌 한 마리의 새처럼.
쉬이잉!
* * *
쉬쉭, 콰드드득!
광풍이 휘몰아친다.
막강한 압력이 공기를 집어삼키며 살갗을 찢었고, 굉음과 함께 솟구친 흙 알갱이와 바위의 파편은 사방을 후려쳤다.
– 이 공자!
귓가를 파고드는 위팽의 전음.
마조의 강기를 피해 연달아 물러서던 진무경은 불현듯 고개를 꺾었다.
후웅.
예리하기 그지없는 두 줄기의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습을 피한 진무경의 모습에, 초승달처럼 휘어진 신월도(新月刀)를 꼬나 쥔 케식 두 명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서걱!
핏빛 섬광이 번뜩였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자신들이 어떻게, 무슨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모르는 케식들은 온순하게 쓰러졌다.
목 없는 시체가 되어 허물어지는 그들의 등 뒤에는 그 이유를 설명해 줄 한 사람이 거대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네놈들이 감히 내 먹잇감을 훔쳐 먹으려 들어?”
콰직!
혈혼비마. 혹은 마조.
별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대한 체구를 지닌 노인은 쓰러진 케식들의 시체를 성난 얼굴로 짓밟았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들이닥치는 또 다른 먹잇감들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혹은, 신경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놈!”
항산호 철무백.
오래전 어느 극악무도한 마두에게 양팔을 잃은 위대한 권사의 제자이자, 벗의 외동딸을 도와 항산검문의 호법이 된 그는 노호성과 함께 일권(一拳)을 내질렀다.
후우우웅, 펑!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간다. 회전을 가미하여 쏘아진 주먹 끝에서 뻗어 나간 권기(拳氣)가 스승의 원수를 휩쓸었다.
아니,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보였다.
슈확!
주인을 닮아 불그스름하게 물든 장검이 공간을 갈랐다.
막아서는 모든 것을 잿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 같던 권기가 힘없이 사그라지며 흩어지는 광경에, 마조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확실히 스승보다는 못하군. 내가 알던 그 수라멸권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야.”
그러나 마조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수라멸권은 이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던 권각지공이고, 철무백의 현재 경지는 과거의 권호에 비해도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수라멸권이, 철무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마조 자신이 강해졌을 뿐이라는 것을.
“오너라!”
마조는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고, 먹잇감들의 움직임은 선명하면서도 느리게 보였다.
마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읽는 것처럼, 그는 사각(斜角)에서 비스듬히 찔러 들어오는 섬광을 향해 검신을 곧추세웠다.
꽈앙!
단순히 검과 검이 맞닿은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
마조는 막강한 반발력에 의해 신음을 흘리며 튕겨 나가는 위팽을 향해 비대한 신형을 내쏘았다.
흔들림 없는 확신과 함께.
‘우선 하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사람이 나이가 들면 죽음을 맞이하듯이 세상 모든 것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는 법.
마조에게는 위팽의 죽음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나이에 비해 훌륭한 경지를 이룬 절정 고수.
귀검이라는 별호가 납득이 될 만큼 실전적인 검법을 구사하는 뛰어난 검수(劍手).
하지만 마조의 눈에 비친 위팽은 딱 거기까지였다.
노력과 운이 따른다면 십수 년 안에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설지도 모르나, 그날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오늘 이 협곡에서 자신을 만났다는 것은, 하늘이 이미 위팽을 버렸다는 증거니까.
벽을 넘지 못한 자와 넘어선 자.
절정과 초절정의 차이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귀신이 되거라. 네 별호처럼.’
마조는 혈광을 번뜩이며 두 자루의 검을 휘둘렀다.
왼손에 쥔 소검은 동료를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철무백에게. 오른손에 쥔 장검은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서는 위팽에게.
그리고 그 격돌의 결과는, 마조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콰득, 카가가각!
“……!”
두 자루의 검신으로부터 전해지는 적잖은 반발력.
서로 다른 세 갈래의 기운이 뒤섞여 피워 내는 그 휘황한 불꽃을 바라보는 마조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뭐?’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끼는 당혹감의 크기는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철무백과 위팽.
벽을 넘어서지 못한 그 하룻강아지들이, 한 끼 식사에 불과한 먹잇감들이 자신의 일격을 막았다.
하찮은 권기와 검기 따위로, 그것도 마조가 전력을 다한 검강(劍罡)에 맞서 버티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마조는 타고난 살인자이자 사냥꾼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먹잇감들은 무공 그 자체에 대한 깨달음도, 몸 안에 품고 있는 공력도 자신에 비하면 한참이나 떨어진다는 것을.
한데, 그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낱 절정 고수 따위가 수 갑자의 공력을 실어 휘두른 강기를 정면에서 맞받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쿨럭. 촤아악.
갈라진 입술 사이로 내장 조각이 섞인 핏물이 쏟아진다.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굳어 버린 마조를 향해, 철무백과 위팽은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핏빛 강기에 맞서 간신히 버티는 것이 고작인 지금 이 순간에도 강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고 있는 새하얀 권갑(拳鉀)과 검신 뒤에서.
그리고 짙은 핏물로도 가리지 못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두 무림인의 애병을 본 마조는,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사실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초절정 고수의 강기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강기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만년한철(萬年寒鐵)……!’
마조는 생각지도 못한 진실에 숨을 삼켰다.
어찌 알았겠는가.
긴 세월을 살아온 그조차도 손에 넣지 못했던 신병이기(神兵利器)가, 변방에 속한 산서성의 두 절정 고수의 손에 들려 있을 줄은.
동시에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만년한철이라 생각한 저 병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백여 년간 강을 지키던 어느 영물의 뼈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그가 드러낸 빈틈은, 아직 쓰러지지 않은 누군가에게 있어 곧 기회나 다름없었다.
‘흡!’
위팽은 온 힘을 쥐어 짜내어 검을 비틀었다.
손목은 이미 부러졌고 손아귀는 너덜거렸지만, 그는 극심한 내상으로 차오르는 핏물을 삼키며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기운을 비스듬히 흘려보냈다.
까드드득!
새하얀 검신을 타고 미끄러진 장검이 지면을 파고들었다.
검에 실려 있던 힘만큼이나, 아주 깊숙이.
푹!
뒤늦게 당혹감에서 벗어난 마조의 눈동자에 분노가 떠오른 바로 그 순간.
콰드득!
철무백이 서서히 권갑을 밀어 내던 소검을, 그 짧은 검신을 뒤덮은 강기를 움켜잡았다.
우직. 까드득.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밀려드는 아득한 고통.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에, 권갑 안의 살갗이 뭉개지고 뼈가 으스러진다.
만약 수신룡의 뼈로 만든 신병이기가 없었다면 강기에 닿는 순간 그의 양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터.
그러나 철무백은 결코 그것을 놓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신음조차 흘러나오지 않고, 엄청난 공력을 감당하지 못한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와중에도 온 힘을 다해 검신을 부여잡았다.
오래전, 두 팔 없이도 자신을 가르쳤던 훌륭한 스승을 떠올리며.
또한 못난 제자를 대신하여 놈의 숨통을 끊어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리고, 그 소망이 마침내 한 사람의 검에 닿았다.
솨악.
소름 끼치도록 희미한 파공성.
한 줄기 벼락처럼 나아간 섬광이, 마조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