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65
#964화
드드득.
잔잔하게 고여 있던 피 웅덩이에 파문이 떠오른다.
자그마한 돌 부스러기도, 눈을 부릅뜬 채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시체들도 잘게 떨렸다.
‘이건.’
모두가 작지만 선명한 진동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직감할 수 있었다.
지진?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이 진동은 최소 수천에 달하는 인마(人馬)가 이곳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 잔인한 징조는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깊은 절망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와아아아아!
휘이이익!
협곡 안이 함성으로 가득 찼다.
마조의 죽음으로 인해 단번에 사기가 꺾여 있던 유목민들은 기성(奇聲)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지원군이다!”
“자무카 칸께서 오셨다!”
진무경이 마조를 쓰러트림으로써 전황(戰況)을 뒤집었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의 경우였다.
자무카.
산서인들로서는 이름조차 생소한, 서쪽 초원의 지배자이자 광활한 대초원의 절대자가 등장한 것으로도 모자라 최소 수천에 달하는 지원군이 합류한 상황.
조금씩 꺼져 가는 불씨처럼 연신 뒤로 밀려나던 유목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조금 전까지 침략자들을 몰아붙이던 산서인들은 잊고 있던 피로와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을 이끄는 한 사람 역시도.
‘이제는,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진위경은 침음성을 삼켰다.
지금까지의 격전을 증명하는 것처럼, 총사령관인 그의 검에도 적들로부터 비롯된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분명 최선을 다해 싸웠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아군의 사기를 북돋으며, 중간중간 몇 번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빈틈없는 지시로 협곡의 입구를 물 샐 틈 없이 틀어막았다.
산서성 전체에서 쥐어 짜낸, 만오천의 병력.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만오천이나 되는 병력에서 주력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의 숫자는 총원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그들마저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들을 상대로 싸우며 적지 않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하나의 적을 쓰러트리면 둘이, 둘을 쓰러트리면 다섯이.
다섯을 쓰러트리면 열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여전히 수만의 적들이 기다리고 있다.
비좁은 협곡을 둘러싼 이 길고도 끔찍한 소모전에서, 결국 먼저 부서지는 것은 바위가 아닌 돌멩이다.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진위경은 거칠게 호흡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하고, 먹먹하다.
층층이 쌓인 시체를 타 넘어 서로에게 돌격한 적과 아군이 뒤얽히고, 못 박힌 듯 서 있던 그를 향한 가솔의 외침은 적들의 함성에 파묻혀 개울가의 징검다리처럼 뚝뚝 끊겨 있었다.
“……서, 어서!”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으나, 진위경은 가솔의 뜻을 고스란히 읽어 낼 수 있었다.
힘주어 옷소매를 당기는 손길.
절망과 다급함으로 가득한 표정.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비단 눈앞의 가솔뿐만이 아니다.
주위의 모두가, 태원진가의 무인들은 물론 산하 문파의 장문인들과 관군들이 그를 향해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서 물러나라고.
당신은 살아야 한다고.
‘그래, 그렇겠지.’
진위경은 저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승패의 저울추는 이미 기울었고, 초원의 침략자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다.
아니, 초원 깊숙이 심어진 암천의 저력이 너무나도 무시무시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퇴각 명령을 내리는 것만이 상책이다.
최전선의 병력이 결사 항전하여 시간을 버는 동안, 총사령관인 자신은 남아 있는 병력을 수습하여 물러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방책이었다.
하지만…….
‘그 총사령관이, 꼭 나일 필요는 없겠지.’
희미하게 웃은 진위경은 느슨하게 풀려 있던 검 자루를 굳게 말아쥐었다.
지난 수년간 검보다 붓이 익숙했던 삶을 살아 온 그였으나, 한 사람의 절정 고수로서 지닌 검기(劍氣)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서걱!
호위들을 뚫고 접근하던 케식 하나가 맥없이 쓰러진다.
군더더기 없는 솜씨로 적의 목을 베어 내며 나아가는 진위경의 모습에, 가솔이 황급히 재차 그의 뒤를 따랐다.
“소가주님, 어째서……!”
푸푹!
또 하나의 목숨을 취한 진위경이 입을 열었다.
“항산검문의 문주, 이소월에게 전하게. 지금 이 순간부터 그녀에게 모든 뒷일을 맡기겠다고.”
“……!”
“가게, 어서!”
진위경은 외침과 함께 힘차게 검을 흩뿌렸다.
전투에서 진 패장(敗將)이 돌아갈 곳은 없다. 수많은 아군의 목숨을 희생시킨 그가 남아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이다.
‘영민한 그녀라면 잘 해낼 수 있겠지.’
무거운 마음의 짐을 덜어내니 검이 가볍다. 돌격창과 화살이 스쳐 지나가며 만들어 낸 상처에서 비롯된 고통에, 전신의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모두에게 약속했다. 이 땅을, 산서성을 지키겠노라고.’
동시에 다짐했었다.
모두가 겁에 질려 도망친다 해도 자신만큼은 이 자리에 남을 것이라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함께할 것이라고.
“오너라! 나, 진위경. 태원진가의 소가주가 여기 있다!”
콰드득!
맹수처럼 부르짖으며 나아가는 진위경의 모습에, 주춤하던 산서인들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전율이 정수리를 타고 전신을 관통한다.
저곳이다.
오랫동안 찾아왔던 한 사람이 바로 저곳에 있다.
이 척박한 땅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진정한 산서성의 맹주(盟主)가.
“으아아아아!”
“소가주를, 산서성을 지켜라!”
협곡을 떨어 울리는 거대한 함성과 함께, 산서인들은 온 힘을 다해 돌격했다.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단 한 사람도.
* * *
진무경은 불현듯 전신에 스며드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것은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육신의 고통이자,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막연함이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까?’
진무경은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흐릿했던 달빛마저 먹구름에 잡아먹힌 하늘은 언제나 그래 왔듯이 아무런 대답도 들려 주지 않았다.
다만 이 또한 운명이라는 듯, 말없이 모두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적과 아군을.
이승을 떠나 더는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시체들을.
그리고 그 중심에 우뚝 선 두 사람.
진무경과 자무카를.
“좋은 검이군. 신병이기(神兵利器)라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자무카의 시선은 천천히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도 새하얗게 빛나는 검신과 진무경, 마지막으로 피 웅덩이에 처박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마조의 시체를 향해.
“놈은 늘 스스로를 사냥꾼이라고 칭했지. 살아온 세월이 무색할 만큼 오만하고, 멍청했어.”
담담한 눈빛과 말투.
마조의 죽음에 대해 조금의 아쉬움도 내비치지 않는 자무카의 모습에, 진무경은 검 자루를 쥔 손아귀에 힘을 더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그 말을 들었다면 슬퍼했겠군. 주인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사냥개라는 소리니까.”
“주인?”
“제법 아끼던 수하였을 텐데. 아닌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만들기 위해 던진 말이었지만, 그런 진무경을 바라보는 자무카의 눈빛은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실망이군.”
“뭐?”
“차라리 세 치 혀 대신 그 검으로 말하게. 자네 같은 사람에게 격장지계(激將之計)는 어울리지 않아.”
“……!”
“아직 한참 어설퍼. 물론 그전에 상대를 잘못 고른 것도 크겠지. 저기 누워 있는 한심한 놈처럼.”
마조의 시체를 향한 그의 경멸 어린 시선에, 진무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무카의 말이 옳았다.
마조의 죽음을 이용해 상대방의 빈틈을 유도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무카는 가장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녔던 사냥개를 잃었음에도 아무런 심경의 변화가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 없게도 한편으로는 달가워하기까지 하는 듯했다.
‘뭐지? 도대체 어째서?’
진무경의 의문에 사로잡힌 그때, 흥미로운 눈빛으로 눈앞의 검귀를 바라보고 있던 자무카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 검, 휘두르지 않을 거라면 이만 내려놓는 것이 어떤가?”
순간, 자무카의 말뜻을 이해한 진무경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항복하라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항복?”
미간을 찌푸린 자무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굴복하라는 뜻이지. 주인을 향해 배를 뒤집어 까고, 꼬리도 흔들고 발등도 핥는 개처럼.”
“……!”
“새로운 사냥개가 되어 줘야겠네. 다행히도 때마침 괜찮은 목줄이 하나 비었거든.”
진무경은 대답 대신 말없이 자무카를 응시했다.
그리고 불쑥 입을 열었다.
“혈혼비마, 아니 마조도 내게 비슷한 말을 했었지.”
“혹시 제자로 삼겠다던가?”
“돼지 울음소리라 귀 기울여 듣지는 않았지만, 비슷해.”
“놀랄 일도 아니로군. 그놈이라면 자네를 수련시켜서 언젠가는 직접 해치웠을 테니까. 물론 지금의 꼴을 보아하니, 그 상황이 되더라도 되려 자신이 죽었겠지만.”
담담하게 뇌까린 자무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해하지는 말아 줬으면 하네. 나는 마조와 달라.”
“아무리 봐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놈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개로 키우려는 것뿐일세. 적절한 시기가 되면 목줄을 풀어 줄 수도 있고.”
“그래, 그러시겠지.”
스릉.
서늘하게 흩뿌려지는 예기(銳氣).
천천히 검을 곧추 세운 진무경은 새하얀 검신 너머로 말을 이었다.
“네놈이 말하는 그 적절한 시기가 됐을 때쯤이면, 내가 지키려는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테고.”
이야기는 끝났다. 미련도 없다.
사냥개가 되어 살아남을 바에는 한 명의 인간으로, 태원진가의 이공자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옳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진무경에게 있어, 자무카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개소리였다.
적어도 다음 순간 들려온, 자무카의 한마디를 듣기 전까지는.
“살려 주지. 자네는 물론 저들 모두를.”
“……뭐?”
“단지 지켜야 할 것이 있어 사냥개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내가 충분한 먹이를 주겠다는 뜻일세.”
눈을 부릅뜬 진무경을 응시하며, 자무카는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전장을 가리켰다.
“혹시 알고 있나? 사냥개를 길들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것을.”
단순히 목줄을 채운다고 끝이 아니다.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사냥개는, 목줄이 풀리는 순간 또 하나의 맹수가 되어 주인을 물어 버린다.
“하지만, 가장 굶주렸을 때라면 어떨까.”
단단한 목줄에 구속되어 며칠 밤낮을 굶은 사냥개는 온순해진다. 누군가를 깨물 힘도 남아 있지 않고, 난생처음 겪는 무력감에 자신이 짐승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그때일세. 주인이 나타나 먹이를 던져 주는 것은.”
슥.
자무카는 진무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텅 빈 손바닥 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진무경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 대신, 협곡 안에서 결사항전을 이어가는 수많은 산서인들의 모습이.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목숨이.
“……!”
진무경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눈앞의 상대를 향한 두려움 때문에?
틀렸다.
그건 희망이었다.
아주 잠시.
잠시 동안만 의(義)를 배신하고, 협(俠)을 외면하면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
이미 결말이 예정된 혈투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저들을, 하나뿐인 형님과 자신의 등 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두 절정고수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
“무경아!”
“안 된다! 절대!”
위팽과 철무백.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 짜내어 외치는 두 사람을, 진무경은 깊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미안합니다. 두 분 모두.”
“……!”
“……!”
위팽과 철무백은 눈을 부릅떴고, 자무카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런 자무카를 바라보며, 진무경은 입술을 뗐다.
“혹시 내가 말했던가?”
“말이라니. 무슨?”
“날 제자로 삼겠다는 어느 돼지 새끼한테, 뭐라고 대답해 줬었는지.”
조금 전보다 흐릿해진 미소를 띤 자무카를 향해, 진무경은 발걸음을 뗐다.
씹어 뱉는듯한 한 마디와 함께.
“개좆이나 빨아라.”
“……!”
자무카의 안색이 굳은 그 순간.
부우우우!
저 멀리, 수십여 개의 뿔피리가 동시에 토해 내는 울림이 협곡에 닿았다.
그리고 저 다급한 뿔피리 소리에 의미를, 자무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습(敵襲)!’
동시에 깨달았다.
조금 전 협곡 안의 모두가 느꼈던 그 진동은, 유목민들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