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70
#969화
그 찰나의 순간을, 산서인들은 보지 못했다.
말과 사람의 사체. 거기에 더하여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바위 틈새를 메운 적들을 온 힘을 다해 밀어붙이느라.
아니, 설령 가까이에 있었다 해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십왕(十王)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초절정 고수의 기감을 속일 만큼 자연스럽고, 쾌속한 일격이었으니.
서걱!
마치 타들어 가는 듯한 격통 속, 벽력도왕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허물어지려는 신형을 바로잡았다.
거대한 쇠망치처럼 뇌리를 후려친, 믿을 수 없는 진실에 몸을 떨며.
‘그래, 그랬던 것이었나.’
이제야 알았다. 비로소 깨달았다.
장성을 넘어 하북을 침략한 젊은 부족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야심에 걸맞은 실력을 지녔었다고는 하나, 그저 뛰어난 유목민에 불과했던 자가 강대한 공력과 초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공절학(神功絶學)을 익힐 수 있었던 이유.
그날, 자무카는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살려 준 것이다.
그를 추격하던 모용세가가, 그들을 이끌던 누군가가.
‘모용백.’
분노와 고통으로 아득해진 시야 속, 떨리는 손길로 깊숙이 베어진 가슴을 지혈한 벽력도왕은 경악에 물든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족과 유목민.
그 사이 어딘가에 멈춰선 듯한 이국적인 용모의 중년인을.
“대단하군. 그 상황에서도 용케 반응하다니.”
고요한 연못처럼 잔잔한 음성.
그러나 언제 뽑아 들었는지 모를 그의 검은, 이미 섬광 같은 속도로 내리그어지고 있었다.
쉬익!
거센 파공성.
벗이라 믿었던 모용백의 거침없는 일격에, 벽력도왕은 눈을 부릅떴다.
마지막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던 덕분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으나 딱 거기까지다.
가슴팍을 깊게 훑고 지나간 강기의 여파는, 그의 전신을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만들었다.
쾅! 카드드득!
아슬아슬하게 검신을 가로막은 대도가 휘청인다.
공력이 흐트러졌음에도 공격을 막아 낸 벽력도왕의 모습에, 모용백이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역시, 무식하기까지 한 그 용력은 여전하군.”
“모용백, 네놈이 어찌……!”
벽력도왕은 피가 터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모용세가와 하북팽가.
하북팽가와 모용세가.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는 두 가문이 반목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불과했다.
이미 흐르는 세월과 함께 지나가 버린, 케케묵은 지난날의 흔적.
그렇기에 벽력도왕은 이 순간에조차 믿어지지 않았다.
정마대전에서 등을 맞대고 싸웠던 전우가, 젊었을 적의 경쟁자에서 벗이 되어 함께 늙어 간 모용백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아니, 이 땅의 모두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냐.”
분노와 충격으로 거칠어진 호흡.
벽력도왕은 파르르 떨리는 날붙이 너머로 보이는 배신자를 향해, 터져 나간 입술을 달싹였다.
“암천(暗天)과 손을 잡은 것이.”
그리고 그 물음에 되돌아온 대답은, 더욱 강해진 힘으로 대도를 짓누르는 검신과 그 끝에 실린 강기였다.
스걱.
벽력도왕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뜨겁다. 검보다 먼저 살갗에 닿은 모용백의 강기가 그의 쇄골를 파고들고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쇄골을 이루는 살과 뼈를 가르고, 그 아래 심장 어림에 이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크아아악!”
악문 잇새 사이로 터져 나오는 핏물.
벽력도왕은 성난 대호처럼 울부짖으며 대도를 쳐올렸다.
분노로 고통을 지워 내고, 하북팽가의 가주에게만 허락된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으로 전신의 모든 공력을 도신으로 쏟아 보냈다.
꽈앙!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떨어져 나가는 검신.
엉망이 된 내부의 혈도와 강기에 의해 갈라진 쇄골에서 끔찍할 정도의 고통이 전해졌으나, 벽력도왕은 강철보다 더한 인내심으로 참아 내며 손을 뻗었다.
“놈!”
퍼엉!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갔다.
하북팽가가 자랑하는 절기,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의 일 초는 소리조차 앞질러 광포한 기세로 모용백을 휩쓸었다.
적어도 아주 잠깐 동안은, 그렇게 보였다.
슈확!
섬광이 번뜩였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람과 함께 쏘아진 장력을 일검에 베어 가른 모용백의 신형이 흐릿해졌다고 느낀 순간, 벽력도왕의 머릿속에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이형환위(移形換位)!’
쇄골을 지혈할 틈도, 대도를 휘두를 시간도 없다.
벽력도왕은 그저 온 힘을 다해 신형을 비틀었다. 찰나의 기척이 느껴진 등 뒤를 향해 돌아서며 일권을 휘둘렀다.
후웅.
닿았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신이 아닌, 주먹 끝에서 뭉개지는 바람이.
동시에 느꼈다.
허공을 후려친 그의 일권 아래에서, 서늘한 살기(殺氣)를 흩뿌리며 쏘아지는 섬광을.
“……!”
느려진 세상 속, 눈을 부릅뜬 벽력도왕은 이성이 아닌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일평생 품에서 떨어트린 적 없던 대도(刀把)를 놓고, 가슴을 향해 다가오는 섬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푸욱.
선명하고 느리게 울려 퍼지는 파육음.
다급하게 끌어올린 수강(手罡)을 두부처럼 파고든 뾰족한 검 끝이 살과 뼈를 가르고 손등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 정도 장애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목적지를 향해 계속해서 뻗어 나갔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른 벽력도왕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움켜쥘 때까지.
콰드득!
그 순간 검이 멈추었다.
아니, 정확히는 부서졌다고 해야 옳았다.
투둑.
핏물과 함께 떨어지는 날붙이의 파편.
순식간에 손이 짓이겨지는 그 아득한 고통을 이기지 못한 벽력도왕의 전신이 석상처럼 굳었다.
그렇기에 크게 뜨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용백을, 이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몸으로 일장(一掌)을 내뻗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화아악.
시야를 물들이는 휘황한 빛무리 너머, 모용백의 나직한 음성이 마치 꿈결처럼 흐릿하게 벽력도왕의 귓가에 닿았다.
“잘 싸웠네. 투사(鬪士)답게.”
그리고.
펑.
몸속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진 한 줄기의 폭발음과 함께, 벽력도왕의 세상이 뒤집혔다.
* * *
순간, 거대한 진동이 협곡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앙!
땅이 뒤흔들렸다. 굉음과 함께 암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를 만큼 긴 세월 동안 퇴적된 자연의 산물조차 이럴진대,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드드드득!
암벽의 일부였던 바위가, 그 위로 엄청난 무게를 지닌 흙과 모래가 쏟아졌다. 동시에 미친 듯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희뿌연 먼지구름 속에서도, 모용백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재해(災害)와도 같은 현상을 일으킨 자신의 손을 천천히 그러쥔 채, 반경 수십여 장의 모든 것을 기감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막 들썩이는 흙더미 사이로 새어 나온 누군가의 희미한 기침 소리도 역시.
쿨럭.
모용백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손을 뻗어, 소리의 주인을 짓누르고 있던 흙더미의 무게를 덜어 줄 뿐이었다.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물건도 함께.
우우웅.
손짓과 함께 흘러나온 막대한 기운에 공기가 흔들린다. 곧이어 보이지 않는 끈에 당겨지듯, 지면 깊숙이 틀어박혀 있던 한 자루의 창이 그의 손에 붙잡혔다.
누군가의 살과 뼈를 관통했다는 증거인, 붉은 선혈을 흘리며.
“감사합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자무카의 목소리에, 모용백이 입을 열었다.
“왜 내 지시를 따르지 않았나. 분명 최대한 시간을 끌라고 했을 터인데.”
“그건…….”
“벽력도왕이라는 별호가 우습게 보였나 보군.”
뭐라 대답하려던 자무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맞는 말이다. 그는 구원자의 명령을 어겼다.
벽력도왕을 상대로도 분전하자 욕심이 생겼고,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모용백의 명령을 조금씩 머리에서 지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적어도 자신만큼은 잠력단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명령도 함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 그럴 테지. 그것을 삼켰다면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도 못했을 테니.”
잠력단은 양날의 검이다.
적풍단주 풍양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손에 들어간 초기 단계의 것도 그렇지만, 개량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잠력단도 엄청난 중독성과 악효과를 지녔다.
그러니 한낱 졸(卒)에 지나지 않는 이들이라면 모를까, 대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자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 자무카가 복용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를 전면에 앞세운 모용백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몸 상태는?”
“생각하시는 것만큼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운기(運氣)를 끝마치면 내상은 곧 나아질 듯합니다.”
말과는 달리 한쪽 어깻죽지가 거의 반이나 잘려 나가 있는 상태였지만, 도객(刀客)으로서의 생명이 위태로워진 와중에도 자무카의 표정에는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구원자가, 오래전 모용백이 ‘우리’라고 말한 암천이 얼마나 신비롭고 강력한 집단인지.
그렇기에 근심 따위는 한 줌도 깃들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이제는 구천(九泉)을 떠돌게 생긴 그놈은 저와 다른 처지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때였다.
시종일관 한 방향에 고정되어있던 모용백의 시선이, 자무카로 옮겨간 것은.
“아직 멀었군.”
“그게 무슨…….”
말꼬리를 흐린 자무카가, 순간 앞서 모용백이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놈이, 벽력도왕이 살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직도?”
그의 물음은 당연했다.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으니까.
일말의 방심도, 자비도 없는 모용백의 손속에 처참하게 무너지던 벽력도왕의 모습을.
실로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일장에 격중당하여, 암벽 깊이 처박혀 피를 토해내던 그 시체 같은 몰골을.
하지만 자무카와 달리, 모용백은 무수한 흙과 바위로 뒤덮인 그곳에서 느껴지는 아주 가느다란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질긴 목숨이군. 언제나 그랬듯이.’
생각해 보면 모용백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벽력도왕은, 팽철후는 늘 그랬다.
타고난 용력과 강건한 육체를 바탕으로 하북팽가뿐만 아니라 천하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확연한 두각을 드러냈고, 숱한 전장에서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늘 살아남았지. 언제나.’
그랬기에, 모용백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벽력도왕의 숨통을 끊어 낼 생각이었다.
더불어 앞뒤로 무너져 내린 암벽으로 인하여 주위의 모든 이목이 차단된 지금, 혹시 모를 위험 요소인 벽력도왕을 비롯한 모든 생존자를 없애야 했다.
비밀은 늦게 밝혀질수록 유리하니까.
그래야 머지않아 도착할 또 다른 구파일방의 지원군을 상대로, 다시 한번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테니까.
‘화산과 종남이 도착하기까지는 최소 반나절.’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모용백은 바로 이 자리에서 정파의 지원군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그때는 벽력도왕은 물론, 협곡 너머에서 모용세가의 뜻하지 않은 기습을 받아 무너지고 있을 하북팽가의 무인들도.
갑작스럽게 무너진 암벽을 뒤로한 채 유목민들을 도륙하고 있을 산서인들도 처리된 후겠지만.
물론 그 전에, 흙더미 속에서 숨죽인 채 살아남아 있는 쥐새끼들을 깜빡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서걱.
빛살처럼 휘둘려진 창날에, 두부처럼 갈라지는 거대한 바위와 흙더미.
그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철무백과 위팽을 감싸 안고 있는 진무경을, 모용백은 담담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손에 쥔 창을 곧장 내리그었다.
아니, 내리그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후우웅.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마 무시한 파공성에, 모용백은 본능처럼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보았다.
꽈아아아앙!
산산이 부서지는 암벽의 산을 무너트리며 들이닥친, 한 자루의 창을.
그 시리도록 투명한 창날에 실린, 청백색의 화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