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71
#970화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흐릿한 어둠 속에서, 진무경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그의 앞에 놓인 단 하나뿐인 길을 직시하고 있었다.
미래이면서, 미래일 수 없는 그것.
영원한 죽음을.
‘끝이군.’
진무경 자신조차 놀랄 만큼, 지금 이 순간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의 마음은 차분했다.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을 만큼, 온 힘을 다해 싸웠고 마침내 그 힘이 다했으니까.
혼(渾)과 신(身).
그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남은 것은 없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한 자루의 창이, 그 창날에 깃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그럼에도 아직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에 남아 있는 한 줄기의 후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승에 남아 있을 이들에 대한 것이리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사후(死後)의 세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지금 당장 검은 도포로 전신을 둘러싼 창백한 얼굴의 저승사자가 나타나, 그를 쇠사슬로 포박하여 염라대왕 앞에 세운다 해도 상관없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 태원진가의 이 공자로 떳떳한 삶을 살았으니.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살업(殺業)이었으니.
그러나 이제는 떠나야 한다.
모두를 뒤로 한 채, 알려지지 않은 어둠 너머로 끌려가야만 한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지키고자 했으나, 끝끝내 지키지 못한 모든 것들을 이곳에 남겨 두고서.
‘……안 돼. 그것만은.’
그 순간, 진무경은 이를 악물었다.
서서히 잠겨 가는 의식을 억지로 일깨우며, 흘러나오지 않는 외침을 마음속으로 토해 냈다.
최선?
무엇이 최선이란 말인가.
어찌 이토록 나약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단 말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숨이 끊기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그는 일어나야 했다. 고동치는 심장의 박동이 멎는 그 순간까지 맞서 싸워야 했다.
‘나는, 나는……!’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악문 잇새로는 비릿한 혈향이 풍겼다.
그러나 진무경이 스스로 혀를 깨물면서까지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몸뚱어리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였고, 잔인한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쉬익.
귓가를 파고드는 파공성이 선명하다. 흐릿하게 물든 시야 속, 비스듬히 떨어져 내리는 섬광은 유난히도 느리게 느껴졌다.
지금껏 살아온 일생을 반추(反芻)할 수 있을 만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밉살맞기 그지없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만약 나 대신 네 녀석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달라졌겠지. 모든 것이.’
진무경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창날을 바라보며, 어디에도 닿지 않을 공허한 목소리를 마음속으로 흘렸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우에게.
‘아무래도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다.’
이 년 전, 두 형제는 수련동의 벽을 사이에 두고 약속했다.
성라대연(星羅大宴).
천하를 수놓은 무수한 별들의 연회에서 만나자고.
그리고 그날의 약속을, 진무경은 끝끝내 지키지 못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진무경 스스로가 느끼는 자신의 성취가 턱없이 부족해서였다.
처음 검을 들었을 무렵에는 훌륭한 무인이 되고 싶었고, 그 이후에는 태원진가의 긍지이자 자랑스러운 아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떳떳한 형이 되고 싶었다.
신룡(神龍)이 되어 훨훨 날아가는 아우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 청풍이라는 벽을 넘어설 만큼 강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되는군.’
진천검(振天劍) 진무경.
또 다른 괴물들에 가려진, 젊은 천재에게 주어진 기회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어둠 속에서 갈고닦은 그의 검은 오늘 이 협곡을 환하게 밝힐 만큼 눈부셨으나, 그 찰나의 빛줄기는 길고 깊은 밤에 파묻혀 사라질 것이다.
영원히.
‘빌어먹을.’
진무경은 반쯤 감겨 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다가오는 죽음에도 눈을 감지 않는 것은 그에게 남은 무인으로서의 긍지이자 꺾이지 않은 투지요, 동시에 골칫덩어리 아우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기 위함이다.
비록, 그 목소리가 어디에도 닿지 않을지라도.
“……미안하다.”
그리고 진무경의 입술 사이로 간신히 쥐어 짜낸 음성이 흘러나온 바로 그 순간.
꽈아아아앙!
하늘이, 땅이 뒤흔들렸다.
어둡고 흐릿하기만 하던 진무경의 세상이 청백색으로 물들고,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던 섬광이 방향을 꺾어 휘둘려졌다.
어느덧 빛보다 빠르게, 굉음조차 앞질러 들이닥친 끔찍한 열기를 향해.
아니, 끔찍한 열기가 실린 한 자루의 창을 향해.
고오오옹.
바람이 지워졌다. 공기가 멈췄다.
찰나의 순간 서로를 향해 맞닿은 두 줄기의 기운이 반경 수십여 장을 감싸 안으며, 이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콰아아아아!
귓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과 함께 협곡 내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충격파.
깊게 파인 구덩이 속에 쓰러져 있던 진무경은 본능처럼 손을 뻗었다.
이미 혼절한 철무백과 위팽의 신형을 온 힘을 다해 부여잡은 채, 폭풍우에 휩쓸리듯 사방으로 날아가는 인마(人馬)의 시체와 무수한 암석의 파편을 보았다.
주위의 모든 것을 휘감은 그 아득한 섬광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뒷모습도 함께.
쿨럭.
검붉은 핏물을 토해 낸 진무경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살아생전의 미련 때문에 죽어서도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니야.’
생생했다.
망자(亡者)에게 허락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지금 이 순간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암석의 파편이 할퀴고 지나간 피부에서 올라오는 쓰라린 통증도. 비명을 질러 대는 전신의 근육과 극심한 내상으로 뒤틀린 오장육부에서 솟구치는 핏물도.
마지막으로, 그의 귓가로 흘러들어온 누군가의 낯익은 목소리도.
“뭘 그렇게 토악질을 해. 어제 과음이라도 했나.”
그 순간, 진무경의 신형이 덜컥 굳었다.
튀어나올 듯이 크게 뜨인 두 눈동자에는 격랑이 휘몰아쳤다.
확실하다.
환각이 아니다. 환청도 아니다.
이건, 이건…….
“등이라도 좀 두드려 주고 싶은데. 상황이 상황이라 그건 안 되겠네.”
가라앉아가는 굉음 너머로 또렷하게 들렸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섬광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주먹이 들어 올려지는, 저 밉살맞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언제부터인가 자신보다 넓고 단단한 등을 갖게 된 망나니의 뒷모습이.
“너……!”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오른 것일까.
진무경은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손을 들었다.
이미 한계를 벗어나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끝으로, 하나뿐인 아우의 옷자락을 향해 뻗었다.
스륵.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마찰음.
그 순간, 넝마가 된 장포의 끝자락을 스친 것은 진무경의 손길이 아닌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전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손길이 아닌 모두를 지켜 달라는 간절한 염원이었으니.
툭.
힘없이 떨어지는 손길. 축 늘어지는 전신.
그러나 마침내 모든 힘을 다하고 의식을 잃어버린 못난 형의 앞에는, 이 년간의 외유를 끝내고 돌아온 망나니 아우가 우뚝 서 있었다.
십여 장 밖에서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낯선 얼굴을 한 반백의 중년인을 마주한 채.
“하나만 묻자.”
화염이 줄기줄기 쏟아지는 안광. 그에 반하여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네가, 우리 형 팼냐?”
탕아(蕩兒)가 돌아왔다.
하늘을 떨어 울리는 용이 되어서.
나직한 음성 너머로, 산서인들이 목놓아 내지르는 울음 섞인 환호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얼마 전, 누군가 내게 말했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지 말라고.
그들을 조금 더 믿어 보라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깨닫고 있었다.
그 말이 옳았다는 것을.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사방이 피바다였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몸뚱어리에서 떨어져 나간 팔다리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말과 사람의 시체가 작은 동산을 이루며 비좁은 협곡 안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유목민들의 것이었다.
어림잡아도 최소 두 배 이상의 적.
단순한 머릿수를 떠나 전력 면에서도 확연하게 밀리는 상황에서도 산서인들은 꺾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온 힘을 쥐어 짜내어 적들과 맞섰다.
관군도, 무림인도, 심지어는 무공이라면 일초반식조차 익히지 못했을 양민도.
마지막으로, 진무경도.
‘최선을 다한 거야.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떨쳐 내면서.’
약자가 강자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 그들의 희생이 더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진무경의 염원도 확실하게 이어받았다.
우우웅. 쾅!
손을 뻗자, 굉음과 함께 암벽 깊숙이 파고들었던 한 자루의 창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몸을 비틀어 내게 다가온다.
짧은 여행을 끝마치고 되돌아온 백염(白炎)이 손아귀 안에서 작게 몸을 떨었다.
창날을 휘감은 청백색의 화염은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는 동시에, 차가운 밤공기를 뜨겁게 달구며 눈앞의 적을 향해 넘실거렸다.
[Lv.??? 모용백]유목민들이 사용하는 돌격창과 흡사한 형태의, 거무튀튀한 색의 창을 그러쥔 채 우뚝 서 있는 반백의 중년인.
예리하게 날 선 [기감]으로 읽어 낸 그 시스템 창을 보았을 때, 내심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눈앞의 현실은 곧 진실이다.
나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지금껏 이름만 들어 보았던 모용세가의 가주를 바라보았다.
암천이 중원 무림이라는 거대한 숲에 숨겨 두었던 또 하나의 칼날, 북천마군(北天魔君)을.
“물었잖아. 네가 우리 형 팼냐고.”
잠시 침묵하던 북천마군이 입술을 뗐다.
“이거 참.”
전신을 훑는 눈빛.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의 방문에 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여러모로.”
그럴 거다. 여러모로.
나는 언제든지 출수(出手)할 수 있게 창날을 곧추세우며 대답했다.
“왜 골치가 아프고 그러냐. 보는 사람 걱정 되게.”
지금의 내게 모용세가의 가주가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암천의 주구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북천마군임이 틀림없는 모용백과 그 뒤에서 한껏 굳은 얼굴을 한 유목민을 쓰러트리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이참에 그냥 골을 깨부수는 거 어때. 더 아플 일도 없게.”
저벅.
한 걸음을 내디디며, 북천마군이 담담한 어투로 대꾸했다.
“처음 듣는 치료법이로군.”
“내가 보기보다 의술에 조예가 있어. 신의(神醫) 옆에서 보고 배웠거든.”
“글쎄. 그렇다고 해도 그 방법은 아마 곤란할 것 같은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투명한 시선으로, 북천마군이 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지금 같은 상태로는 더더욱.”
부정하고 싶지만, 놈의 판단은 정확했다.
잠도, 식사도, 운기조식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장장 만 리에 달하는 거리를 가로지르기 위해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뭐, 그건 그렇지.”
저벅.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던 발걸음이 불현듯 멈춘다. 북천마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네 말이 맞다고. 솔직히 이대로는 좀. 아니, 상당히 빡세지.”
“그게 무슨…….”
흐려지는 말꼬리. 나는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는 북천마군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서, 겸사겸사 아는 사람 좀 데려왔지.”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북천마군이 깨닫기도 전에, 두 줄기의 파공성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