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72
#971화
인간의 감각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범인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오감이 발달한 무림인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약육강식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혹독한 수련을 통해 예리하게 가다듬은 감각으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지금 북천마군이 그러하듯이.
“그래서, 겸사겸사 아는 사람 좀 데려왔지.”
열화신룡 진태경.
엄청난 기세로 등장한 것과는 달리,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애송이의 여유로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북천마군의 머릿속에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누군가의 별호와 이름도 함께.
‘화왕(火王) 적천강.’
정사지간을 아우르는 거인이자, 구화산의 노괴.
그리고 태원진가의 망나니 삼공자를 제자로 거둔, 한 사람의 스승이기도 한 그를 떠올린 북천마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다는 건.’
북천마군은 확신했다.
언제부터, 어디부터인지는 모르나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비록 모든 계획이 생각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라지만, 적어도 진태경과 적천강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이다.
‘정보가 새어 나갔군.’
그러나 그 생각이 누가, 어떻게, 라는 의문으로 이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쉬익, 후우우웅!
하나는 은밀하면서도 쾌속하고, 또 다른 하나는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광풍과도 같다.
이미 오감을 넘어 육감(六感)에 도달한 감각을 통해 전해지는 두 줄기의 파공성에, 북천마군은 미간을 좁혔다.
하나가 아닌 둘.
그것이 가진 의미는 크다.
파공성이 들려온 방향이, 정면의 지상이 아닌 좌우로 늘어선 암벽 위라는 사실보다도.
콰아아아앙!
삼십여 장이 넘는 아득한 높이의 암벽 위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
여러 사람이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이 뒤섞인 그것은 마치 천둥과도 같았다.
누군가의 생명을 집어삼키고, 때아닌 소나기를 부르는 천둥.
투둑. 투두둑.
북천마군의 곁에서 숨죽인 채 어둠에 잠긴 암벽 위를 올려다보던 자무카는, 불현듯 얼굴에 닿는 뜨거운 액체를 느낄 수 있었다.
붉고, 끈적한 핏물을.
“……!”
자무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고, 북천마군의 눈빛은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 모두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으니까.
전멸(全滅).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며 암벽 위로 올려보냈던 유목민들은 이제 없다.
촌각이라 부를 수조차 없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모조리 죽음을 맞이했거나, 사로잡힌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북천마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숨에 암벽 위를 휩쓸어 버린 두 괴물의 정체였다.
“하나는 당연히 네 스승일 테고, 다른 하나는 누구지?”
북천마군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건조한 음성에, 아직 설익은 젊은 괴물이 짐짓 준엄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허, 스스로 알아낼 생각을 해야지.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그 나이 처먹고 답안지부터 들춰 보려고 하나.”
북천마군은 순간 진태경의 머리통을 갈라서 들춰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암벽 위의 괴물들은 그가 발걸음을 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슈확!
비좁은 협곡 안이 환하게 물든다. 공간을 가로지르며 들이닥친 한 줄기의 섬광을 향해, 북천마군은 망설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창을 휘둘렀다.
쾅!
날붙이끼리의 충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굉음.
찰나의 격돌과 함께 튕겨 나가 지면 깊숙이 틀어박힌 섬광의 정체를 확인한 북천마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돌격창?”
틀림없다. 그것은 초원의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흔하기 짝이 없는 형태의 돌격창이었다.
또한 동시에, 단순한 투창(投槍)의 수법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쾌속한 일격이기도 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쏘아진 화살처럼.
‘잠깐. 그렇다면 설마?’
북천마군은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때마침 흩어진 먹구름 사이로 비친 달빛 아래, 장창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활을 든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궁성(弓星).”
신음처럼 흘러나온 뇌까림.
동시에 다시 한번 빗발치는 섬광.
콰아아아!
눈부신 속도로 움직이는 활시위와 함께 파공성이 울려 퍼진다.
십여 자루의 돌격창을 마치 화살처럼 가볍게 쏘아 보낸 궁성은, 천천히 힘을 주어 활시위를 당겼다.
우우웅.
파르르 떨리는 공간.
공력으로 이어진 은빛 선을 따라 응집한 휘황한 기운이 화살의 형태를 그려 내고, 이내 거대한 힘을 머금고 쏘아졌다.
북천마군이 아닌, 또 다른 적들을 향해.
화아아아악!
짙은 어둠이 찢어졌다.
전장의 모두가 그 눈부시도록 파괴적인 섬광을 볼 수 있었다.
쉰 목소리로 끊임없이 함성을 내지르며 협곡 안의 적들을 베어 넘기던 산서인들도.
그런 그들에 의해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하던 유목민들도.
그리고 협곡 너머의 너른 분지에서, 유목민들과 모용세가에 포위당한 채 힘겨운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던 하북팽가의 무인들도.
“저게 도대체 뭐…….”
뒤늦게 허공에서 쏟아지는 십여 줄기의 섬광을 발견한 케식 백인장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지금 막 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의문 어린 목소리가, 곧 그의 유언이 되리라는 것을.
더불어 그를 비롯한 수백여 명의 아군이 이승에서 보는 마지막 광경이 되리라는 것을.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땅이 뒤집힌다.
주인을 알 수 없는 피 분수와 함께 솟구친 누군가의 팔과 다리가, 혹은 형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살점과 내장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콰드드득, 철퍽.
뒤늦게 지면 위로 떨어진 핏물과 살점들이 모두의 귓가를 파고든다.
생각지도 못한 모용세가의 배신으로 사방을 포위당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 가고 있던 하북팽가의 가주, 철혈도(鐵血刀) 팽철영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협곡을 등진 채 수십여 명의 적들을 단신으로 상대하던 그는 미처 보지도 못했다.
그저 문득 하늘이 밝아졌다고 느꼈고, 등골이 오싹해지더니 본능적으로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눈동자를 찌르는 휘황한 빛에 눈을 감았다 뜨자,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적들은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형태로.
상반신이 사라지거나, 팔다리가 뜯겨 나간 채로.
“으어, 으아아아!”
“크아아아악!”
고통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것은 몸이지만, 고통은 인지하는 것은 두뇌다.
뒤늦게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인지한 그들은 처절한 비명을 토해 냈다.
섬광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수백여 명과는 달리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엄습하는 고통에 몸부림쳤고, 모두를 얼어붙게 한 끔찍한 비명이 잦아들기도 전에 다시 한번 하늘이 환하게 물들었다.
화아아악.
그 순간, 팽철영은 깨달았다.
평소였다면 넋 놓고 바라보았을 저 눈부신 빛줄기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더불어 그 죽음이, 자신을 비롯한 하북팽가의 무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쳐라-!”
공포는 전염되고, 희망은 타오른다.
피와 시체로 뒤덮인 분지 위를 환하게 물들이는 섬광을 등진 채, 하북팽가의 무인들은 이미 허물어진 포위망을 갈기갈기 찢어 부수며 나아갔다.
전장에 선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맹렬한 함성과 함께.
저 멀리, 비좁은 협곡 깊은 곳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질 정도로.
“듣기 좋네. 물론 당신한테는 아니겠지만.”
북천마군은 웃고 있는 진태경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익살스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깊게 가라앉아 있는 어린놈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궁성이라니.’
그녀의 존재만큼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 자리에 나타나기에는 너무나도 오래된 과거의 망령이었으니.
“여유를 부린 이유가 있었군.”
짧은 침묵 끝에 흘러나온 한마디. 그와 함께 이제야 대략적인 정황을 깨달은 북천마군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래, 황궁이었나.”
궁성의 등장과 함께 흩어져 있던 머릿속 실마리가 이어진다.
진태경이 이곳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 암천이 황도를 중심으로 펼친 계획의 성공 유무.
마지막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던 궁성이 어디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지도.
“하지만, 어떻게 이토록 빠르게 알아차린 거지?”
북천마군이 불쑥 던진 물음에, 진태경이 대답했다.
“네 친구가 알려 주던데.”
“친구?”
“동천마군(東天魔君).”
“……!”
“그러니까 평소에 좀 친하게 지내지 그랬냐. 같이 밥도 자주 먹고, 강호의 도리에 따라 품번도 공유하고. 뭐, 나야 더 늦기 전에 알았으니 천만다행이었지만.”
밉살맞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 진태경이 덧붙였다.
“잠시 후에 만나면 나 대신 감사 인사나 전해 줘. 죽어 마땅한 놈이긴 했는데 마지막에는 조금 신경 쓰이더라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북천마군이 고소를 머금었다.
“정중하게 거절하도록 하지.”
“왜, 그 정도까지 사이가 안 좋아? 혹시 예전에 삼각관계였나?”
“미친놈. 도무지 혓바닥이 쉬지를 않는군.”
“안 그래도 슬슬 그만할 생각이야. 이제는 몸도 좀 움직일 만하고.”
진태경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흐릿해졌다.
지칠 대로 지친 상황 속, 진무경을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쏘아 보냈던 일격으로 비롯된 탈력감은 이미 가라앉힌 후였다.
“고맙다. 숨 고를 때까지 기다려 줘서.”
그런 진태경을, 북천마군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애초에 스스로의 의지로 시간을 내어준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나오지 그러나, 화왕.”
텅 빈 허공을 향한 북천마군의 한 마디에,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던 인영이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안타깝군. 한 발자국이라도 뗐으면 네놈의 사지를 불태워 버렸을 텐데.”
“글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북천마군은 대답과 함께 창 자루를 비스듬히 움켜쥐었다.
오래전에 흘러가 버린 아득한 과거, 전장에서 마주친 적 있던 적천강의 기억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증유(未曾有)의 기운이 창날을 타고 솟구쳤다.
“많이 컸구나. 하룻강아지 주제에 노부의 앞에서 반말이나 찍찍 싸며 배짱도 부릴 줄 알고.”
적천강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활짝 펼쳐진 그의 양손을 타고 백색의 겁화가 넘실거렸다.
“언제부터였느냐. 놈들과 손을 잡은 것이.”
“희한한 일이군. 견원지간(犬猿之間) 같던 두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서 똑같은 질문을 하다니.”
그 순간, 적천강은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지금 북천마군이 누구를 말하는지, 그리고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자 녀석이 팽가 놈에게 큰 빚을 졌으니, 네놈의 목숨으로 갚아야겠군.”
“두 사람이 함께 떠나게, 저승으로.”
북천마군은 담담한 대답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스륵.
혀를 타고 녹아드는 붉은 색의 단환.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진태경의 창날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