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74
#973화
불가항력이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나 통용된다.
추수보다 가뭄을 먼저 맞닥트린 농민에게도, 병석에 누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병자에게도.
그리고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힘을 지닌 어느 여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막았어야 했는데.’
궁성은 침음성을 흘렸다.
아득한 높이의 암벽 위, 지상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섬뜩한 혈광(血光)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일단의 무리였다.
서걱! 콰드드득!
하나같이 붉게 충혈된 눈. 거침없이 나아가는 창칼을 따라 자욱하게 맺혀 가는 피 안개.
물경 수만여 명이 뒤얽힌 이 드넓은 전장에서 이백이라는 숫자는 한 줌에 불과했지만, 잠력단(潛力團)의 효능으로 저마다의 한계를 벗어난 그들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위협적이었다.
이제는 불과 이천여 명밖에 남지 않은 하북팽가의 무인들에게는 더더욱.
크아아악!
밤공기를 뚫고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
마침내 하북팽가가 자랑하는 연환패왕진(連環覇王陣)을 깨트린 적들의 모습에, 궁성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적들은 위협적일 뿐만 아니라 영리했다.
이미 몇 차례에 걸쳐 퍼부어진 궁성의 공격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자 즉각 분산을 택했고, 곧장 아군의 중심을 파고들어 잇따른 추가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으니.
‘이대로 공격을 계속한다면, 아군마저 휘말린다.’
물론 이백여 명의 케식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처리해야 할 적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차고 넘쳤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초원의 대군세.
이미 몇 시진 째 이어지는 전투에서 산서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손해를 본 것이 틀림없음에도, 아직도 이만에 달하는 병력이 남아 있다.
지금처럼 암벽 위의 고지를 점한 채 온 힘이 바닥날 때까지 화살 비를 퍼붓는다면, 막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는 것쯤은 자명한 사실.
그러나 궁성의 앞에 놓인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이대로 공격을 계속한다면 수많은 적을 쓰러트릴 수는 있겠지만, 그때는 하북팽가의 무인들이 모조리 전멸한 후일 것이다.
뜻이 섰으니 더 이상의 망설임은 필요 없다.
‘나서야 한다. 내가 직접.’
철컥.
거대한 활을 힘주어 비틀자 나타난 기이한 형태의 곡도(曲刀) 두 자루.
양 손아귀로 전해지는 서늘한 그 감촉과 함께, 궁성은 암벽을 박차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솨아악.
전신을 스치는 차가운 밤바람에 섬단 같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기라도 한 듯, 연달아 텅 빈 허공을 밟으며 지상으로 향하던 그녀의 고개가 문득 등 뒤를 향했다.
강대한 기운의 파동에 휩싸인 비좁은 협곡 내부.
이제는 어둠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그곳에 있을 누군가에게, 그녀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살아남아라. 그리고 다시 한번 증명해 보아라.’
선택받은 자.
열화신룡 진태경.
무겁게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그의 이름과 함께, 궁성의 신형이 아득한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슈확!
그녀의 양손에 들린 두 자루의 곡도가 예리한 바람이 되어 공간을 난도질했다.
* * *
궁성이 떠났다.
협곡 너머에 펼쳐진 또 다른 전장으로.
이곳에 남아 있는 나와 적천강이 아니라, 하북팽가의 무인들을 돕기 위해서.
그러나 저 멀리 허공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서운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적천강 역시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생각은 달랐겠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군.”
불쑥 입을 연 북천마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희는 왜 매번, 항상 어찌 이리 어리석은 선택만을 골라서 하는 것인지.”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젓는 놈의 모습에,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렇겠지. 어차피 너 같은 새끼들은 수십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테니까.”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을 그저 승리를 위한 장기 말로 생각하는 북천마군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비롯한 이 자리의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유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정(正)과 마(魔)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척도라는 것을.
“말세야, 말세. 모용세가의 가주라는 인간이 뒤통수나 까고, 좀 후달린다 싶으니까 약이나 빨아 재끼고. 안 그래요?”
내 물음에 적천강이 입을 열었다.
“오래 살다 보면 종종 짐승보다 못한 것들을 마주치게 되는 법이지. 거죽을 뒤집어쓰고 사람인 척 흉내 내는, 번드르르한 말과 웃음으로 시커먼 속내를 감춘 채 살아가는 놈들을.”
목소리는 서늘하고 안광은 뜨겁게 타오른다.
지금 이 순간. 적천강의 분노는 오롯이 북천마군을 향해 있었다.
“과거에는 그저 음흉한 구석이 있는 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죽여 버릴 걸 그랬군.”
내게는 북천마군이지만, 적천강에게는 모용백이다.
일면식도 없는 나와는 달리, 일찍이 전우로서 함께 전장을 누빈 적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왜 그러지 않았나. 화왕. 그것이 날 죽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을 텐데.”
비웃음 섞인 북천마군의 대답에 적천강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느냐?”
“당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나?”
드드드득.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공간 속, 북천마군의 전신에서 솟아오른 막강한 기세가 사방을 짓눌렀다.
적천강의 그것보다도 더욱 거칠고 거대한, 미증유의 기운이.
“지금부터 똑똑히 알려 주지. 두 번째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의 귓가를 파고드는 나직한 한 마디와 함께, 북천마군의 신형이 사라졌다.
쉭.
희미한 파공성을 앞질러 나아가는 움직임.
그러나 나는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음속(音速)마저 뛰어넘어 쏘아지는 북천마군의 신형을.
공간을 가르며 휘둘려지는 놈의 창날과 주인의 뒤를 따라 달려드는 충성스러운 사냥개의 존재를.
슈확!
내리그어진 창날을 따라 뒤늦은 바람이 일어난 그 순간.
나는 상반신으로 파고드는 섬광을 향해 손에 쥐고 있던 백염을 쳐올렸다.
콰앙!
창과 창이 부딪히며 난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
백염의 창날을 타고 발끝까지 전해진 어마어마한 압력에 지면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가로막힌 창날 너머, 찰나의 순간 마주친 북천마군의 눈동자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너 같은 핏덩이가 어떻게?’
더없이 익숙한 눈빛이다.
크게 뜨인 눈동자도, 그 안에 담겨 있는 물음표도.
그리고 지금껏 나를 맞닥트린 수많은 적들은, 자신들의 눈빛에 실린 물음표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느낌표를 피워 올려야 했다.
바로 지금처럼.
카드드득!
이를 악물며 창대를 쳐올렸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전신의 근육이,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이 솟아올라 창날을 짓누르던 거대한 압력을 떨쳐 냈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눈을 부릅뜬 북천마군의 신형이 밀려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인보다 한발 늦게 목적지에 도달한 사냥개가 이빨을 드러낸 것은.
쐐액!
충격파로 일어난 먼지구름이 솟구치기도 전에 갈라진다.
공간을 격하고 섬광처럼 휘둘려진 곡도(曲刀)가 내 정수리를 파고들려던 찰나, 등 뒤의 공기가 뜨겁게 타올랐다.
화아악.
닿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살과 뼈를 녹이고, 영혼마저 불사를 것 같은 끔찍한 열기.
‘화염신장(火焰神掌).’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그 익숙한 기운을 느낀 순간,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퍼어어엉!
뒤통수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화염의 응집체.
타들어 간 것처럼 뜨거워진 뒤통수를 느끼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한 마리의 맹수처럼 곡도를 내리긋던 늙은 유목민의 신형은 이미 세찬 속도로 튕겨 나가는 중이었다.
콰드드득!
발끝을 따라 이어지는 깊은 고랑.
삼 장에 가까운 거리를 물러난 늙은 유목민을 향해 적천강이 코를 킁킁거렸다.
“염병할. 어디서 말똥 냄새가 진동한다 했더니 웬 오랑캐 놈 때문이었군.”
“……!”
“네놈 표정이 제법 볼만하구나. 왜, 한바탕 화끈한 맛을 보니 말똥과 잡초로 가득한 초원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느냐?”
폼은 일시적이나 클래스는 영원한 법.
적천강의 신들린 혀 드리블에 늙은 유목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그 순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전하군. 남의 속을 뒤집어 놓는 그 혓바닥은.”
적천강을 향한 한 마디. 동시에 내게 못 박힌 시선.
그런 북천마군의 모습을 본 적천강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주둥이 놀리는 솜씨는 이놈이 노부보다 몇 수 위지.”
“쓸데없는 부분에서 스승을 넘어섰군.”
적천강이 피식 웃었다.
“글쎄. 단지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쯤은 네놈도 알고 있을 터인데.”
북천마군은 대답 대신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 놈이 느끼는 저 감정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단 북천마군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혈주도, 서천마군도, 남천마후와 동천마군도.
그리고 그 외의 또 다른 적들도.
그들에게 있어 내 존재는 어떤 식으로도 해석되지 않는 불가해(不可解)에 가까웠고, 지금껏 나를 거쳐 간 적들 중 누구도 답을 찾지 못한 그 의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크기를 더해 갔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만큼 강해진 거겠지.’
돌이켜 보면 지난 이 년 동안 수없이 겪었던 사건 속에서 벌어진 전투는 언제나 힘겨웠다.
적들은 항상 강했고, 나는 늘 그들보다 약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승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쳐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이토록 매번 생사의 기로를 오가는 이유는,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더욱더 강한 적들이 계속해서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 역시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그토록 강대한 무위를 지녔던 대장로도, 진무경과의 합공으로 간신히 쓰러트릴 수 있었던 풍양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악몽이나 다름없는 신위를 지녔던 암천의 마군(魔君)과 마후(魔后)들도.
매번 죽을 위기를 겪어야 했던 그들과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더듬어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때. 그 순간, 이렇게 움직였다면 훨씬 수월하게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이제야 알았다.
단순한 후회이자 미련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내가 발전했다는 증거라는 것을.
단순히 시스템 창이 알려주는 수치를 떠나, 오롯이 한 사람의 무인(武人)으로서 성장했다는 확실한 지표였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성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기. 이건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불쑥 입을 연 나는, 북천마군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마치 어려운 과제를 낸 교수님을 향해 질문하는 학생처럼.
“조금 전에, 창을 위로 튕겨 내는 것보다 불알을 걷어차는 게 훨씬 더 나았겠지?”
그 순간, 교수님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