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76
#975화
제아무리 잘 훈련받은 사냥개라고 해도 홀로 맹수를 쓰러트릴 수는 없다.
타고난 태생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맹수로 태어나, 원하는 목적을 위해 사냥개가 된 자무카는 달랐다.
그는 훈련받은 맹수였다.
어떤 적과도 맞설 수 있는 포식자의 힘과 사냥개로서의 충성심을 고루 갖춘.
그렇기에 주인의 부름이 들려온 그 순간, 단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릴 수 있었다.
“자무카!”
기다렸던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자무카는 온 힘을 다해 곡도를 흩뿌렸다.
콰앙!
허공에서 격돌하는 두 갈래의 강기.
잠력단의 효능으로 더욱 어둡고 거대해진 암녹빛 도강(刀罡)이 청백색의 불꽃을 잠시나마 밀어 낸 그때, 자무카의 발끝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쉭.
순간 흐릿해지는 신형.
찰나의 시간 속에서 발휘된 이형환위(移形換位)와 함께, 자무카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십여 장의 공간을 가로질렀다.
지금껏 만난 그 어떤 사냥감들보다도 흉포하고 강력한, 화왕(火王)이라는 맹수를 향해.
‘단 일격. 일격이면 충분하다.’
자무카의 몸놀림에는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이 스며들어 있었고, 그것은 결코 근거 없는 허세가 아니었다.
하북팽가의 패도적인 무공에 맞서기 위해 극쾌(極快)만을 추구해 온 세월이 장장 오십여 년.
제아무리 신룡(神龍)이라 불리는 진태경이라 하더라도 그 장구한 세월의 차이를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무카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더군다나…….
‘이 힘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 꺼풀을 벗고 새롭게 태어난 애벌레처럼 온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지면을 스치듯 나아가는 발끝도, 양손 가득 그러쥔 애병도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모든 힘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낸 잠력단의 효능은, 이 순간조차도 자무카의 전신 깊숙한 곳에서 쉴 새 없이 들끓고 있었다.
오감(五感)을 넘어 개방된 여섯 번째 감각이, 등 뒤에서 들이닥치는 한 줄기의 불꽃마저 손쉽게 회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쐐애애액!
자무카는 달려가는 속도를 더하며 고개를 틀었다. 진태경의 손을 떠나 공간을 가로지르며 쏘아진 창날이 그의 목덜미를 스쳐 암벽에 틀어박혔다.
꽈아앙!
날카로운 암석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일어나려는 먼지구름 위를 뛰어넘은 자무카의 신형이 바람을 지우며 치달았다.
‘쓰러트린다. 반드시.’
자무카가 품은 각오는 주인을 향한 사냥개의 충성심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처음부터 충성심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온 것이 아닌, 상대의 무력과 그의 목적이 맞물려 굴복이라는 결과를 낳았으니.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비록 꾸며 내고 거짓된 충성이라 해도 북천마군은 확실한 대가를 약속했고, 암천(暗天)이 지닌 힘은 그를 초원의 왕이자 북방의 패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힘차게 내리그어지는 자무카의 일격은 그의 원대한 야망에 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슈확.
느려진 세상 속, 제대로 된 반응조차 하지 못한 듯 여전히 북천마군과 대치 중인 적천강의 뒷모습은 무주공산(無主空山) 그 자체.
소리마저 앞질러 들이닥친 암녹색 강기가 자무카의 눈동자를 물들였다.
‘끝났다.’
자무카는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이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격이라고.
설령 그 상대가 화왕 적천강이라는 거인이라 해도, 죽음이라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느낌표처럼 떠오른 그 확신이 물음표로 뒤바뀌는 데에는 고작 찰나의 시간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화악.
불현듯 등 뒤에서 전해지는 끔찍한 열기.
그와 동시에 섬광처럼 뻗어 나온 누군가의 손끝이, 초원의 풍습에 따라 변발(辮髮)로 땋아 올린 자무카의 기다란 머리카락에 닿았다.
아니, 닿았다고 느낀 순간 그의 머리는 이미 뒤로 젖혀지고 있었다.
덥석.
우악스러운 힘으로 머리카락을 잡아채는 손길. 동시에 젖혀진 상반신을 따라 본래의 궤적을 잃고 휘청이는 곡도.
순간 엄습하는 고통과 경악 속에서, 자무카는 문득 깨달았다.
이토록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 적천강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던 이유를.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어.’
틀림없다.
적천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믿고 있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제자를.
세월로는 판별할 수 없는, 제자의 신위(神威)를.
쉭!
적천강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텅 빈 허공을 베어 가르는 암녹색 강기.
고통과 아쉬움으로 이를 악문 자무카의 귓가로, 나직한 음성이 닿았다.
“머리 예쁘게 땋았네.”
“……!”
“딱 뜯어내기 좋게.”
우직, 콰드득!
순간, 자무카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머리카락과 두피가 통째로 뜯겨 나가는 격통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른 그는 신형을 돌려세우며 곡도를 휘둘렀다.
후우웅!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욱 거세게 솟구친 암녹색 강기가 공간을 찢어발겼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에 걸쳐 완성한 극쾌의 도법.
그러나 자무카는 까맣게 몰랐다.
정확히는,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섬광과도 같은 일격으로 광활한 초원을 평정한 그의 힘과 속도가, 진태경이 지난 이 년간 끊임없이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얻은 깨달음과 보상보다 뒤떨어진다는 것을.
퍼엉!
화염신장(火焰神掌).
찰나의 순간 공기마저 불사르며 들이닥친 그 강대한 화염에 자무카의 상반신이 들썩였다. 상상할 수도 없던 열기가 전신의 혈도를 불사르고 헤집었다.
‘아.’
아득해진 시야 속, 자무카는 단전 깊숙한 곳에서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삼켰다.
하지만 동시에, 이 끔찍하리만치 강한 일격을 허용하고도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희망의 불씨를 느낄 수 있었다.
잠력단.
끊임없이 샘솟는 힘의 원천.
진작 허물어지고도 남았을 자무카의 전신을 지탱하는 생명력의 근원.
‘아직, 아직……!’
자무카는 이를 악물었다.
온 힘을 다해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려던 도파를 말아쥐고, 진태경의 가슴을 향해 내리찍었다.
카득, 퍼걱!
허공에서 뒤섞이는 상반된 두 줄기의 소음.
그리고.
“아, 더럽게 아프네.”
검붉은 핏물을 뒤집어쓴 채 고통 어린 신음을 토해 내는 진태경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무카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어떻, 게.”
개울가의 징검다리처럼 군데군데 끊어진 음성.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어떻게 이 일격을 막을 수 있었는지.
도대체 무슨 조화를 부렸기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넝마가 된 옷자락 사이로 비치던 맨살 위에 붉은빛이 도는 갑옷이 나타난 것인지.
“이건. 쿨럭, 이건 말도…….”
콰드득.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흩어지는 목소리.
마치 갈고리처럼 자무카의 옆구리에 쑤셔 박은 다섯 개의 손가락을 비틀며, 진태경이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서로 쉽게 쉽게 가면 되지, 왜 끈질기게 버티고 그러냐. 이건 나중에 쓰려고 아껴 뒀던 건데.”
무슨 말일까.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해결되지 못한 의문과 함께, 자무카는 홀린 듯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강기도, 예리하기 그지없던 도신도 이제는 온통 꺼지고 무뎌졌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극. 철그렁.
끝끝내 화룡갑(火龍甲)을 뚫지 못한 곡도가 주인의 미련을 대신하듯 갑옷의 표면을 긁으며 손에서 미끄러진 그 순간.
퍼엉.
다시 한번 터져 나온 화염신장의 열기와 함께, 자무카는 자신의 몸속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진 폭발음을 들을 수 있었다.
“커……헉!”
아득하게 물드는 시야. 먹먹해진 귓가.
남의 것처럼 낯설다.
수백 리 밖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핏물의 뜨거움도, 북천마군의 것이 분명한 외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전신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부수는 손길만이 선명했다.
펑. 펑. 퍼어엉.
자무카의 신형이 휘청였다. 무시무시한 힘에 휩쓸리면서도 뒷걸음질조차 칠 수 없었다.
영혼이 새하얗게 불타는 듯한 격통 속.
옆구리에 틀어박힌 다섯 개의 손가락이 그의 몸뚱어리를 갈고리처럼 옭아매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일권(一拳), 일장(一掌)이 그의 시야를 뒤덮으며 청백색의 소나기가 되어 쏟아지고 있었다.
잠력단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이 힘을 다할 때까지.
영원히 샘솟을 것만 같던, 그 거대한 기운의 바다가 메마를 때까지.
그리고 어느 순간, 자무카는 더 이상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털썩.
가을 끝자락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자무카는 허물어졌다.
힘없이 위를 향해 움직인 그의 눈동자에는 끝없이 펼쳐진 어두컴컴한 밤하늘이, 거인처럼 우뚝 선 진태경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너는, 너는…….’
도대체 무엇이냐.
미처 머릿속에서 완성되지 못한 한 줄기 생각과 함께, 자무카의 세상이 기울었다.
털썩.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열기 속, 까맣게 그을린 채 숨이 끊어진 초원의 왕을 내려다보던 진태경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후우.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숨결.
그러나 막대한 공력이 실린 일격을 연달아 쏟아부었음에도, 하얗게 질려 있던 그의 입술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역행하는 것처럼.
소진되고, 닳아 없어졌던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처럼.
띠링. 띠링. 띠링.
– [Lv.173 자무카]를 처치하셨습니다!
–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 막대한 명성치를 획득하셨습니다!
– 당신의 명성이 [대초원]을 떨어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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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의 귓가에만 울려 퍼지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허공을 물들이는 반투명한 글자들.
그 끝에, 누군가가 그토록 기다렸던 세 글자가 있었다.
– 레벨 업!
“이제야 좀 살맛 나네.”
제때 찾아온 행운을 전신으로 느끼며, 진태경은 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태산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선 적천강의 어깨너머, 눈을 부릅뜬 채 이곳을 바라보는 북천마군을 향해 웃어 보였다.
“둘이었는데, 이제 혼자네?”
으득.
부서질 듯이 이를 악문 북천마군이, 온 힘을 다해 적천강을 밀어 냈다.
콰드득! 쾅!
거대한 힘의 충돌과 함께,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튕겨 나가는 두 개의 신형.
충격파를 상쇄하는 대신 오히려 속도를 더해 물러나는 북천마군의 모습에, 그 의도를 즉시 간파한 적천강이 일갈을 내질렀다.
“놈-!”
그러나 북천마군은 멈추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고 공간을 지워 내며, 비좁은 협곡의 출구를 향해 쏘아졌다.
쐐애애액! 쾅!
협곡 곳곳을 메운 거대한 암석들이 가볍게 내지른 일권에 박살 난다. 빈틈없이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과 막강한 충돌의 여파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산서인들을 향해, 북천마군은 창을 뻗었다.
고오옹.
일그러지는 공간. 그 중심에서 불길하리만치 눈부신 섬광을 토해 내는 창날.
그러나 미증유의 기운이 실린 그 일격이 산서인들을 휩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슈확!
거대한 빛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북천마군을 향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