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83
#982화
나는 이기적인 놈이다.
나와 내 주위 사람들만 행복할 수만 있다면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터지든지 말든지 크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나 자신이 변화했다는 것을 종종 느끼고는 한다.
이를테면, 스스로를 자책하며 질질 짜는 누군가가 신경 쓰여서 웃기지도 않는 촌극을 벌인 때라든지.
“가끔 조장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진무경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전각을 빠져나온 지 한참.
말없이 걷던 도중 혁무진이 불쑥 꺼내 든 한마디에 내가 대꾸했다.
“생각하지 마. 아니, 그냥 말을 하지 마.”
“왜요?”
“듣기 싫으니까.”
“괜히 부끄러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맞다.
계속해서 빤히 날 응시하는 혁무진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였으니까.
“그냥…….”
“그냥?”
“왠지 모르게 신경 쓰여서 오지랖 한번 떨어 본 거야. 딱 그 정도인 거지.”
그리고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진무경에게 해 주었던 말은, 내가 오랜 고민 끝에 찾아낸 결론이기도 했다.
과연 그것이 정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대부분의 문제는 시간과 경험을 통해 해결된다.
답은 누군가가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니까.
‘녀석에게는 이제 겨우 첫걸음이겠지.’
태원진가가 배출해 낸 희대의 천재이자 이 세상에서만큼은 내 형이지만, 진무경의 나이는 이제 고작 이십 대 중반.
무공만 갈고 닦아 온 만큼 실전 경험은 손에 꼽고, 그로 인한 상실감에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다.
그런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면, 낯간지러운 말 몇 마디쯤은 수십 수백 번이라도 해 줄 수 있다.
진무경의 마음과 발끝은,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도(正道)를 향해 뻗어 있으니까.
녀석이 성장할수록, 조금 더 살 만한 세상이 될 테니까.
‘걸어라. 주저앉지 말고 계속해서 걷고 또 걸어라.’
그 길의 끝에, 답이 있다.
빛이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진심으로.
“그런데 조장님.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됩니까?”
“뭘.”
“이 방향 아닙니다. 이대로 계속 가면 막다른 길이에요.”
잠시 침묵하던 나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혁무진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 이 새끼야.”
“그게 좀, 갑자기 눈에 힘주고 멋있는 표정을 짓고 계시길래.”
“…….”
때리고 싶다.
진심으로.
* * *
진무경에게 모두 말하지 못했을 정도로, 지난 사흘 동안 있었던 일들은 무수히 많았다.
물경 수만에 달하는 적과 아군이 뒤얽힌 대전투.
산서인들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그날로부터 벌써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것이 남긴 여파와 후유증은 실로 막심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청객들이 어지르고 더럽히고 나면, 뒤처리는 결국 집주인의 몫으로 남는 법.
승리를 거두었던 그날부터 진위경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고, 전투의 피로를 완전히 회복하기도 전에 사태 수습에 나서야 했다.
물론, 주위에서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지만.
“내 지금부터 소가주께 세 가지 선택지를 드리리다. 우선 하나씩 전부 듣고 나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시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약왕당주였다.
얼핏 보면 단순히 고집 센 할아버지처럼 생긴 그는, 침착한 어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흉흉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대침과 진위경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계속 말 안 듣고 일만 하다가 골병들어서 죽든가, 지금이라도 치료받고 쉬엄쉬엄하면서 오래 살든가. 그것도 아니면 길게 갈 것 없이 내 손에 뒈지든가. 무엇으로 하시겠소?”
진위경은 그제야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고,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뒤에서 치열한 갑론을박을 펼쳤다.
그날 진위경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했던 이유가 피로 때문이냐, 아니면 약왕당주의 대침 때문이냐로.
그리고 혁무진은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대침 때문입니다. 그때 그 노인네 눈 못 보셨어요? 의술을 안 익혔으면 지금쯤 암천에서 한자리 꿰차고 있었을 겁니다.”
여하간 중요한 사실은 진위경이 고집을 꺾었다는 것이었고, 그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또 다른 이들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약왕당주인지 뭔지 하는 저 돌팔이 말이 백번 옳다. 네 녀석은 몸이나 추스르고 있거라. 남은 일은 다른 놈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인즉.”
중양절의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아직 모든 위협이 사라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
그러나 화왕(火王) 적천강이라는 거인의 존재감은 일말의 걱정마저 씻은 듯이 사라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장장 수십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비로소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궁성(弓星)의 존재 역시도.
“하북(河北)에 다녀오마.”
전투가 끝나자마자 짧은 한마디를 남긴 궁성은 곧장 떠났다.
벽력도왕의 아들이자 하북팽가의 현 가주, 철혈도(鐵血刀) 팽철영도 거동이 가능한 가솔들을 이끌고 그녀와 함께 하북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북천마군, 아니 모용백의 배신은 그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이는 곧 모용세가 전체가 암천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뜻했고, 그로부터 이틀 뒤 태원진가로 도착한 전서응에 적힌 소식은 그 예측의 일부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앞서 예상했다시피, 하북에서 변고가 있었다.”
비록 여러 사람의 강권에 못 이겨 휴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진위경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서응이 태원진가에 도착한 동시에 소식을 접한 진위경은 그 즉시 나를 불러 하북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모용세가는 처음부터 산서와 하북 두 곳을 동시에 노린 모양이다. 우리를 지원하겠다는 명분으로 하북을 가로지르는 한편, 일부 병력을 남겨 팽가를 기습했다는구나.”
중양절에 휘몰아쳤던 피바람은 산서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던 모용세가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벽력도왕을 비롯한 주력 고수 상당수가 빠져나가 있던 하북팽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목숨을 걸고 결사항전한 끝에 간신히 본가를 지켜 낼 수 있었다고 했다.
“하나 그것도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틀만 늦어졌더라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겠지.”
하지만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마침내 가주인 팽철영이 나타났다.
노호성과 함께 나타난 그의 뒤에는 가주를 따라 산서성에서 귀환한 가솔 오백여 명과, 하북팽가의 가신 격이라 할 수 있는 진주언가(晋州彦家)의 무인 수백이 있었다.
아마도 그뿐이었다면 하북팽가의 입장에서는 힘겨운 전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한 하북팽가는 이미 극심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고, 팽철영이 거느린 병력은 지치고 급조된 병력 일천이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들의 선두에는, 하북팽가의 가주인 팽철영조차 감히 앞에 설 수 없는 거인이 있었다.
“궁성 선배께서 결심하신 이상,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겠지.”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승리였고, 모용세가로서는 끔찍한 패배였다.
재기불능(再起不能)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을 정도의 패배.
그렇게 모용세가는 궤멸했다.
소가주인 모용영휘를 비롯한 수십여 명의 적들은 간신히 전장을 빠져나가 자취를 감추었지만, 글쎄.
“어딘가에 숨겨 둔 이동진(移動眞)이 아니라면 금세 붙잡힐 것이다. 온 사방에 우리의 이목이 있으니.”
진위경의 장담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암천이 드리운 먹구름이 모두의 머리 위를 뒤덮더라도, 아직 천하의 주인은 정파 무림이니까.
모용세가는 천하를 적으로 돌렸다.
태원진가와 하북팽가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는 이상 드넓은 중원으로 도망칠 수 없고, 동쪽의 대해(大海)에는 대국의 군함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놈들의 뿌리이자 무법자들의 종착역이나 다름없는 대초원은, 이미 태원진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부족민들을 풀어 놈들을 쫓게. 세상 끝까지라도.”
그것은 부탁이 아니었다.
산서성의 맹주이자 위대한 승리자이며, 패배한 사냥개를 굴복시킨 주인으로서 진위경이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었다.
“자네로서도 후환(後患)을 남겨서는 안 되겠지. 그렇지 않나, 테무르.”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때 광활한 초원을 아우르는 대칸을 꿈꾸었던 젊은 부족장은 힘없이 복종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진 패장이고, 죽음이 두려워 형제와 부족민을 배신한 비겁자였으니까.
전자에 대해서는 자무카와 북천마군의 흉계에 휘말렸다는 명분과 태원진가에 굴복함으로써 더 큰 희생을 막았다는 거짓 면죄부를 쥐여 주었지만, 후자는 달랐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면 테무르는 죽는다.
우리도, 암천도 아닌 자신의 부족민들에게.
그것이 진위경이 틀어쥔 목줄이었고, 사냥개는 감히 배신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진위경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용세가에 합공을 가한 그 순간부터, 그 외의 모든 선택지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역겹지만, 목줄을 틀어쥔 이상 아군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놈이다.’
테무르의 그 알량한 비겁함과 생존 본능 탓에 희생된 목숨이 몇 명인가.
“가라. 보고 있으면 열 받으니까.”
내 경멸 섞인 어조에 고개를 떨군 테무르는 그렇게 떠났고, 나는 남아 있는 문제를 완전히 처리해 줄 해결사를 불렀다.
“불렀나?”
어디서나 모두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휘황한 황금빛 갑옷.
옆구리에 낀 투구만큼이나 딱딱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말투를 지닌 그.
금의위의 천호(千戶) 정호군을 향해 나는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왜 이렇게 멀쩡해?”
“그만큼 잘 싸웠다는 증거지.”
“마지막에 와서 숟가락만 얹은 건 아니고?”
“그것이 수천 리 길을 마다하고 도우러 온 은인에게 할 말인가?”
“마, 그 전에 내가 도운 것도 생각해야지. 그때 황궁에서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어쩌긴, 궁성께서 도우셨겠지.”
“……어라,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걸 그대로 인정할 줄은 몰랐군.”
잠시 내려앉은 침묵 속, 나와 정호군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향해 실소를 터트렸다.
이래저래 괜한 장난을 치긴 했지만 고마운 놈이다.
녀석이 내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어.”
“부탁?”
“그래. 어쩌면 조금, 아니 상당히 어려운 부탁이 될 수도 있겠지.”
“누군가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군.”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호군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거절한다.”
“아.”
칼날 같은 어조.
예상치 못한 단호한 거절에 내가 침음성을 삼킨 그때, 정호군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명령.”
“뭐?”
“사사로운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 하지만 명령이라면 다르지.”
그제야 정호군의 의도를 깨달은 내가 실소를 흘렸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그것이 대국의, 군문의 법도(法度)니까.”
재미있는 녀석이다.
한편으로는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정호군 같은 이가 있기에, 대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나는 입을 열었다.
“금의위 천호 정호군.”
언제 그랬냐는 듯, 정호군이 공손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하십시오.”
“휘하의 금의위를 이끌고, 요녕(遼寧)으로 향하라.”
요녕성.
모용세가의 본거지이자, 마지막 후환.
내 명령에, 정호군이 갑옷을 두드렸다.
“상산후(上山侯)의 명을 받드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