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86
#985화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하염없이 흩날리는 꽃비를 뒤로한 채, 무림인과 양민이 뒤섞인 수만여 명의 사람들은 팔천협을 떠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떠난 이들을 위한 위령제이자 뒤늦은 중양절은 그렇게 끝났지만, 남은 이들은 계속해서 내일을. 모레를 향해 나아가야 했으니까.
그리고 태원진가로 귀환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만일을 대비하여 남겨 둔 일부 가솔들뿐만이 아니었다.
“부족하지만 무림맹의 당주직을 맡고 있는 황 모라고 합니다. 맹주(盟主)님의 명을 전언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자신의 신분을 밝힌 무림맹의 사자(使者)가 그렇게 덧붙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삼 형제를 향해 쏠렸다.
보다 정확히는, 진위경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렇습니까.”
아직 벌겋게 물든 눈가와는 달리 담담한 목소리.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진위경은 침착한 태도로 무림맹의 사자를 이끌었다.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우선은 안으로 드셔서 여독을 푸시지요.”
“진 대협께서 이리 신경 써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 순간, 태원진가에 속한 중진들과 산하 문주들의 낯빛 위로 숨길 수 없는 감회가 스쳤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지 깊게 고개를 숙이는 사자의 모습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공경과 존경 때문만이 아니었다.
대협(大俠).
단 두 글자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는 남달랐다.
툭 하면 서로를 치켜세우며 허세 떨기 바쁜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무림맹에서도 당주라는 요직을 맡은 강호의 명숙(名宿)이 사자의 자격으로 찾아와 저리 불렀다는 점에서 더더욱.
‘변해 가는구나. 모든 것이.’
나 역시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더 이상 진위경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비를 대신해서 몰락해 가는 가문을 이끌던 소가주도, 소협도 아니다.
산서성의 패자이자, 이 땅의 모든 이에게 인정받은 또 한 사람의 맹주였다.
아니, 이제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불쑥 귓가에 닿은 혁무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냐.”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무진아.”
“예.”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게 만들어 줘?”
“……아니, 저는 그냥 얼른 뒤따라 가시라고 말씀드리려고 한 겁니다. 혼자서 가만히 서 있으시길래.”
혁무진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는 진위경의 뒤로, 무림맹의 사자와 가문의 중진들. 그리고 이소월과 같은 태원진가 산하의 문주들이 나란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슬픔과, 곧 현실로 이루어질 무언가에 대한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하지만 나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라, 어디 가세요?”
“몰라. 그냥 가고 싶은 곳으로.”
“그게 무슨. 다른 분들은 몰라도 조장님이 저 자리에 빠지시면 안 될 것 같은데.”
“상관없어. 어차피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
“예?”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이내 헐레벌떡 내 뒤를 쫓아오는 혁무진의 인기척을 느끼며 나는 피식 웃었다.
동시에 문득 떠올렸다.
팔천협.
수많은 목숨을 집어삼킨 그 비좁은 협곡에서, 흩날리는 꽃비 사이로 울려 퍼졌던 맑은 종소리를.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리던 홀로그램 창을.
띠링. 띠리링.
– 세상이 열린 이래,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광활한 대지와 바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체들과 그들 중 극소수만이 지닌 강대한 권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열흘 붉은 꽃은 없고(花無十日紅), 제아무리 높은 권세도 십 년을 넘기지 못하니(權不十年).
– 다만 나무의 뿌리가 깊으면 가지 또한 무성하고(根深枝茂), 샘이 깊은 물은 더 멀리 흘러가(源遠流長), 마침내 많은 이가 머물러 쉴 수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시스템이 알려 주었듯이, 오래된 고목 나무처럼 썩어 가던 태원진가는 이제 하나의 숲이 되었다.
수많은 가지 끝에서 열매를 틔우고, 바다와 같은 호수를 만들었다.
지금껏 내가 보고 겪은 그들은 힘이 없을지언정 언제나 정당했으며, 인의로웠다.
분노와 탐욕에 사로잡혀 잘못된 길을 택한 누군가와는 달리.
– [모용세가]는 몰락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천하오대세가]의 일원이 아닙니다.
– 바야흐로, [태원진가(太原進家)]의 명성이 온 천하에 울려 퍼집니다!
– [태원진가]의 명성과 권세가 [천하오대세가]의 일원으로 격상됩니다!
구파일방. 천하 오대세가.
지난 수백여 년간 천하 무림을 지탱해 왔던 열다섯 개의 기둥.
그리고 이제, 태원진가는 그 거대한 기둥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무림맹이 임명했기 때문도, 다른 강호의 명숙들이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온 천하가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들이 인정했다.
수만의 대군에 맞서 싸운 태원진가의 용기를.
무림이라는 울타리뿐만 아니라 이 땅을, 백성들을 지키고자 했던 의기(義氣)를.
하여, 한때의 영광을 뒤로한 채 서서히 몰락해 가던 변방의 무가(武家)는 그 어느 때보다 하나가 되어 강해질 수 있었다.
– 칭호, [명가의 자제]가 삭제됩니다!
– 새로운 칭호, [명문세가의 직계]를 획득하셨습니다!
– 소속된 가문의 입지가 상승함에 따라, 막대한 명성치를 획득합니다!
– 히든 퀘스트, [켠 김에 오대세가까지]를 성공적으로 완료하셨습니다!
– 매우 희귀한 업적, [아빠, 어디 갔어]를 달성했습니다. 각자의 노력으로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난 태원진가의 삼 형제에게 영광과 축복이 있기를!
– [진위경]과 [진무경]에게 [놀라운 자연 치유]의 효능과 각종 보너스 버프를 부여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위의 효력은 해당 인물들에게 표시되지 않습니다.
– 업적 달성 보상으로 보너스 스탯 10을 획득했습니다!
–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 업!
– 막대한 명성치를 획득했습니다!
– 이제 당신의 이름과 명성은 무림을 넘어 천하 곳곳에 닿았습니다. 당신은 [천자]가 임명한 [제후]이며, [화왕 적천강]의 후인이자, 한 사람의 위대한 무인입니다.
– 당신의 족적(足跡)이 역사에 새겨집니다.
– 무림인들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드넓은 하늘과 세 개의 별 아래, 단 열 명의 무인에게만 허락되었던 그 영광스러운 칭호를. 새로운 젊은 왕의 탄생을.
–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저 멀리에서 태풍을 불러오듯이, 당신의 크고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갈 테니까요.
–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것을.
– 무운(武運)을 빕니다.
평소보다도 훨씬 길었던.
그래서 더욱 많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던 시스템 창은 언제나 그렇듯 무운을 빈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아주 오랜만에, 별다른 후속 퀘스트도 없이.
하지만 바로 그 부분이, 마침내 찾아온 평화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을 찜찜하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뭐지? 분명히 또 다른 일이 터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강해지는 게 좋았던 단계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퀘스트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필연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반드시 있어 왔고, 그만큼 내가 짊어진 마음의 짐도 무거워졌으니.
게다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큰 위기가 무림 전체에 드리워진 시점이었다.
‘이번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서, 주춤하고 있을 놈들이 아닐 텐데.’
항상 그랬다.
암천은 지금까지 무림 전역에서 여러 번의 흉계를 벌였고, 법왕(法王) 굉도를 시해하며 소림사의 신물인 녹옥불장을 탈취한 이후로는 딱히 성공이라 부를 만한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천에서. 호북에서.
그리고 남만과 황궁에 이어 이곳 산서성에서조차 놈들은 쉼 없이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모용세가의 배신과 유목민들의 침공은 분명히 엄청난 일이었지.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드러난 암천의 전력은, 아직 예상치에 훨씬 못 미쳐.’
암천 내에서도 핵심 인물임이 틀림없을 네 명의 마군과 마후를 제외한다면, 지금껏 맞서 싸운 적들은 절반 이상이 배신자들과 하수인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현지에서 전력을 조달한 것과 같았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나서지 않고 있다. 왜지? 그리고 왜 이런 실패뿐인 소모전을 계속해서 이어 가는 거지?’
무의식적으로 나아가던 발걸음도 멈춰 세운 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문득 떠올렸다.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백. 북천마군(北天魔君)이라는 이름으로 최후를 맞이했던 그와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를.
‘너희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래. 계속해서 희망을 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뭐?’
‘이런 상황에 처하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군. 서천마군이, 남천마후가, 그리고 동천마군이 왜 실패했을까. 분명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던 계획이 어찌하여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것일까.’
그 알 수 없는 말에 담긴 의미를, 우리는 끝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북천마군은 결국 그 말의 의미를 말해 주지 않은 채 죽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놈의 심장에 창날을 박아 넣은 후에도, 마침내 모든 전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담담하기 그지없었던 목소리와 표정을.
그때의 북천마군은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고, 직후 선천지기(先天之氣)마저 끌어올림으로써 그것을 증명했다.
‘단순히 평정심을 흔들기 위한 말은 아니었어.’
나는 안다.
예정된 죽음 앞에 선 이가 얼마나 진솔해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선택한 생애의 끝자락에서, 거짓을 입에 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굳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물론 당시의 북천마군이 보인 어투와 태도를 보면,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그 예측이 너무나도 현실성이 없었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마치 처음부터 이 상황이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는 듯이, 혹은 본인 역시 이용당했다는 듯한 느낌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치열했던 전투가 끝난 이후, 이런 내 의견을 들은 적천강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대답했었다.
‘운명은 니미럴 놈의 운명. 그리고 비록 쳐죽일 연놈들이긴 하지만, 저만한 실력을 지닌 고수들은 뭐 땅 파서 캐낸다더냐?’
‘음. 아무래도 좀 이상하긴 하죠?’
‘천주(天主). 그놈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저런 놈들을 한낱 버리는 패로 쓸 수는 없다. 멸염신권으로 대가리 두어 번 깨진 후라면 모를까.’
맞다.
세상 그 어디에도 최상위의 초절정 고수들을 졸(卒)로 쓰는 미친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궁성은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오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마 무슨 말을 했더라도 적천강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럼 도대체 그 말을 한 이유가, 이상할 만큼 잠잠한 이 상황이 뭐냐고.’
나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저 죽기 전에 한번 씨부려 본 헛소리인지. 아니면 나를 비롯한 모두가 짐작할 수 없는 또 다른 의미인지.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를 붙잡고 있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쩐지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더니만, 여기에 있었구먼.”
적천강.
어느 때보다 무거운 얼굴을 한 그가, 침잠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따라오너라. 네 녀석을 보고 싶어 하는 놈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