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87
#986화
사실,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적천강의 무거운 표정과 어조.
그리고 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비통함은 화왕(火王)이라는 거인이 쉽게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으니.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불길한 직감은 늘 빗나가는 법이 없다.
“오셨구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인물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약왕당주였다.
도착과 동시에 봇짐을 챙겨 떠나는 그를 향해, 적천강이 나직한 목소리를 건넸다.
“당부했던 대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주게.”
“…….”
“고맙네. 자넨 훌륭한 의원이야.”
아무런 대답 없이 살짝 고개를 숙인 약왕당주가 떠나자, 우리는 비로소 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사람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 생각보다 일찍 데려왔군. 워낙 다리가 짧은 늙은이라 앞으로 칠 주야는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며칠 만에 정신을 차린 또 한 명의 거인.
가벼운 농담과 함께 껄껄 웃는 벽력도왕(霹靂刀王)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는, 어깨를 툭 치는 적천강의 손길에 뒤늦게 포권을 취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를 다해서.
“무림말학 진태경이 팽 대협을 뵙습니다.”
“아서라. 과한 겸손은 오히려 독이 되는 법. 네 녀석이 말학이면, 천하의 무림말학은 전부 뒈졌다더냐?”
나를 보며 흡족하게 웃은 벽력도왕의 시선이 적천강을 향했다.
“이제 보니 이 친구가 괜한 엄살을 떨었구먼. 날이 갈수록 위아래 없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녀석이라고 그렇게 투덜대더니만.”
“친구는 니미럴. 한참 어린놈이 웃어른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애써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답하지만, 그럼에도 감출 수 없는 침잠한 눈빛.
그런 적천강의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벽력도왕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으허허. 뭐가 그리 억울해?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네놈은 삼강오륜(三綱五倫)도 모르느냐? 장유유서 못 들어봤어?”
“그거 알면, 누가 대신 밥 먹여 주나? 아니면 무공이 더 강해져?”
“됐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팽가 놈이랑 이런 얘기를 하는 노부가 등신이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모습, 보기 좋군. 쉰내 풀풀 풍기는 늙은이랑 대화하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던 참인데 잘됐어. 안 그러느냐?”
벽력도왕이 툭 던진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희 스승님이 좀 늙긴 하셨죠.”
“뭐라? 으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벽력도왕의 창백한 안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억지로 쥐어 짜낸 것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웃음소리였다.
‘아니, 분명 그렇겠지.’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당장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벽력도왕이 품은 기운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곳곳에 금이 간 유리그릇처럼.
당장이라도 사그라질 불꽃처럼.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무거운 목소리로 꺼낸 한 마디에, 내가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음을 직감한 벽력도왕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 확실히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로구나. 화왕이 다른 건 몰라도 제자 하나는 잘 키웠어.”
“…….”
“그리 죽상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 같은 무림인에게 있어 살고 죽는 문제란 그런 것이니.”
맞다.
무림인의 삶이란 늘 그렇다.
그리고 숱한 위협과 암계가 도사린 도산검림(刀山劍林)을 일평생 헤쳐 나온 벽력도왕은, 담담하게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참으로 긴 꿈을 꾸었다. 그 속에서 지난 일생을 되돌아볼 수 있었지. 물론 모용백, 그 친구의 젊을 적 모습도 오랜만에 봤고.”
“친구는 니미럴. 쳐죽일 놈이지.”
적천강이 툭 던진 그 말에, 피식 실소를 흘린 벽력도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두 지난 일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찌 고스란히 주워 담겠나. 다만 결과적으로 암천의 흉계를 막고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족할 뿐.”
적천강만큼이나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그는, 연못처럼 잔잔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성라대연(星羅大宴)에서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머지않아 큰일을 해낼 녀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검성의 제자와 함께 천하를 지켜 낼 동량이라는 것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지.”
물론 그때만 해도 나는 미숙했다.
지금처럼 숱한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도 못했고, 혈주(血主)라는 괴물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토록 빨리 성장할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지.”
죽음의 위기는 몸집을 부풀리며 연이어 찾아왔고, 그로 인한 성장은 가팔랐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본 이들조차 눈을 의심할 만큼.
“그것이 곧장 너를 찾은 이유다. 내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기운을 가장 값지게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지.”
“……그 말씀은.”
“평범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지만, 하북의 대호(大虎)는 다를 것이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벽력도왕의 모습에, 나는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며칠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린 벽력도왕이, 죽음을 코앞에 둔 그가 왜 자신의 혈육이 아닌 나를 먼저 찾았던 것인지.
“가져가거라. 노부에게 남은 모든 것을.”
벽력도왕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그 순간.
띠링.
돌발 퀘스트, [격체전공(隔體傳功)]이 생성되었습니다.
!!경고, 경고!!
해당 퀘스트의 진행 과정에 있어 극도의 위험성이 동반됩니다.
돌발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 / N
나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떠오른 홀로그램 창 너머, 웃고 있는 벽력도왕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입을 열었다.
“왜, 왜 하필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돌아오는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믿고 있으니까.”
“……!”
“나 한 사람만의 믿음이 아니다. 법왕(法王)이, 네 스승이, 이제는 온 천하가 너를 믿는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조여들고 혈류가 빠르게 솟구치는 듯했다.
그 사이에서, 벽력도왕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로 전해졌다.
“이 모든 것은 네가 아닌 천하를 위한 것. 그 이상의 이유가 더 필요하느냐?”
“아닙니다.”
작게 심호흡한 내가 말을 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벽력도왕의 파리한 안색 위로 웃음이 스쳤다.
“가부좌를 틀어라.”
띠링.
– 돌발 퀘스트, [격체전공]을 수락하셨습니다!
* * *
공력(功力)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무형의 기운이다.
무공을 익힌 이들은 이 공력을 신체 내부에 쌓아 육신과 정신을 더욱 강건하게 가다듬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인의 영역에 발을 딛기 위해 고된 수련을 반복한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힘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몸 안에 축적된 기운이 커질수록, 그로 인한 후폭풍의 크기 역시 비례하여 부풀어 오르니까.
잘못된 구결을 따라 공력을 무리하여 운용했다가는 불구가 되기에 십상이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심마(心魔)에 빠져 반쯤 미치광이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드높은 경지를 갈망하는 무림인들의 욕구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그들은 보다 안정적으로,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 온갖 발상을 떠올렸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놀라운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공력을 쌓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넘겨받는다면?’
‘죽음을 목전에 둔 노고수의 힘을 이어받아? 엥? 이거 완전히 석청 아니냐?’
아득한 과거, 격체전공(隔體傳功)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탄생과 동시에 결코 행동에 옮겨서는 안 되는 금기(禁忌)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겉보기에만 달콤했을 뿐, 실상은 양날의 검이었으니까.
아니, 양날의 검이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우스울 정도로 실패한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니까.
‘스, 스승님!’
‘안 돼!’
죽고, 죽고, 또 죽었다.
천운으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기혈이 뒤엉켜 폐인이 되거나 본래의 무위를 영영 되찾을 수 없었고, 그 과정에서 당대를 주름잡던 초절정 고수들과 뛰어난 후기지수들을 잃어야 했다.
그렇기에 벽력도왕이 진태경에게 격체전공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적천강은 반사적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미쳤나?’
‘전혀.’
‘아니, 미친 게 확실해. 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길길이 날뛰었을 테니.’
‘내 비록 깨어난 지 반 시진밖에 안 됐지만, 머릿속은 터무니없이 맑아. 일평생 이 정도로 총명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니까.’
‘그거참 빌어먹게 축하할 일이로군. 그럼 이제 겨우 천자문을 뗄 수 있게 된 건가?’
‘흰소리는 집어치우게. 이게 마냥 미친 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사실, 벽력도왕의 말이 맞았다.
적천강도 처음에만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꾸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이 미친 짓거리가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 일인지 가늠하고 있었으니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네의 그 잘난 제자라면 격체전공을 감당할 수 있을 걸세. 청풍 그 아이와 함께 천무지체(天武肢體)라는 천운을 타고난 녀석 아닌가.’
‘……천무지체라.’
‘그뿐만이었다면 나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걸세. 녀석은 하늘이 내린 근골에, 무인으로서 지닌 역량과 깨달음의 깊이도 충분해.’
아마 몇 달 전이었다면, 적천강은 그 어떤 강권에도 제자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 제안을 한 이가, 수십여 년간 미운 정을 쌓아 온 끝에 죽음을 목전에 둔 벽력도왕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진태경에게 직접 진실을 전해 들은 적천강은 달랐다.
‘가능성이 있다. 아니, 충분해.’
기나긴 무림사에서도 유례가 없었던, 경지에 오른 두 초절정 고수 간의 격체전공.
거기에 더해 천무지체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초인의 육신을 가진 진태경에게는, 또 하나의 기이한 힘이 존재했다.
뇌반업(牢倍業).
육신을 정화하고, 부상마저 회복시킬 수 있다는 신력(神力).
그 힘만 있다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회는 있다.
더군다나…….
‘이미 녀석은 격체전공에 한 번 성공한 전력이 있다.’
적천강도 뒤늦게서야 들었던 이야기였다.
진태경이 사천당문의 지하 뇌옥에 갇혀 있던 마교의 대마두, 천력마(天力魔)의 공력을 받아 서천마군을 쓰러트렸다는 것은.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제자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만큼 놀랐지만, 그 당시와 지금의 차이는 명백했다.
위급했던 상황도. 진태경이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이룩해 낸 무위도.
‘할 수 있다. 아니…….’
해낼 것이다.
반드시.
굳은 의지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적천강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거궐혈(巨闕穴)을 통해 맞닿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화아아악.
미증유(未曾有)의 공력이, 사방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