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89
#988화
어느 순간부터인가, 벽력도왕 팽철후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수 갑자의 공력이, 전신에 깃든 모든 힘이 녹아내리듯 사라졌음에도 주름진 입가에 맺힌 선명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시야를 밝게 물들이고 있는 휘황한 빛무리가 그러하듯이.
스아아아.
휘몰아치는 바람.
그 안에 스며든 미증유의 기운이 부풀어 오르고, 저마다의 색을 지닌 세 가지의 빛은 쉼 없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뒤섞였다.
그리고 마침내, 변화했다.
화악!
삽시간에 끓어오르는 그 뜨거운 공기 속에서, 벽력도왕은 똑똑히 보았다.
찬란하게 피어오른 세 개의 꽃봉오리를.
아니, 정확히는 가부좌를 튼 채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는 한 청년을.
‘그래, 그렇겠지.’
무림에 속한 모든 이가 꿈꿔 마지않는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경지를 지켜보고 있음에도, 벽력도왕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는 과거 그가 지나왔던 길이자, 누군가의 현재였으니까.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
열화문의 계승자이자, 화왕 적천강의 후인.
벽력도왕은 알고 있었다. 동시에 믿고 있었다.
고작 이 년 전에야 약관을 넘긴 저 핏덩이에게 있어, 삼화취정의 경지는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머무른 하나의 계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진태경은 다음 계단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벽력도왕의 믿음은 이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화륵.
불현듯 타들어 가는 세 개의 꽃봉오리.
치열한 힘겨루기 끝에 칠흑처럼 어두운 기운을 집어삼킨 극양(極陽)의 화염이 다섯 개의 고리를 완성한 순간, 벽력도왕은 실소를 터트렸다.
‘삼화취정을 넘어, 오기조원(五氣朝元)이라.’
아마 진태경은 모를 것이다.
저 다섯 개의 고리에 담긴 정확한 의미를.
그러나 벽력도왕은 안다.
아니, 천하 무림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기조원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는 것은, 이 광활한 구주 천하에서 왕이라 불릴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이었으므로.
하지만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치지직!
화염과 뇌전이 뒤얽혔다.
앞서 어둠을 집어삼킨 겁화(劫火)와 벽력(霹靂)의 싸움은 치열했고, 또한 처절했다.
허공에 떠오른 진태경의 신형이 고통으로 떨려올 만큼.
그의 전신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거대한 울림이, 전각 너머 온 사방으로 뻗어 나갈 만큼.
“갈(喝)-!”
찰나의 순간.
불현듯 터져 나온 적천강의 일갈에 사시나무처럼 떨던 몸뚱어리의 경련이 천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지금 느끼고 있을 끔찍한 격통을 증명하듯,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도 새로운 감정이 깃들었다.
의지.
그것은 의지였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겠다는, 이 벽을 넘어 더 높은 곳에 닿겠다는 강렬한 의지.
그리고 그러한 진태경의 의지를 느꼈을 때, 벽력도왕은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선택이, 옳았다.’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그의 만면에 피어올랐다.
곧이어 일평생에 걸쳐 축적한 공력이, 그 길었던 세월이, 한 줌밖에 남지 않았던 생기(生氣)가 화염에 녹아드는 광경을 바라보며 벽력도왕 팽철후는 입을 열었다.
마음과는 전혀 다른, 애써 퉁명스러운 어조로.
“염병할. 열화문에 좋은 일만 해 주고 가는군.”
아득한 빛무리 속,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 기운에 휘감긴 제자를 바라보던 늙은 스승이 대꾸했다.
“억울하면 자식이라도 더 낳지 그랬느냐. 좀 더 노력했다면 저런 녀석 하나쯤은 팽가에 나왔을지도 모를 텐데.”
“이런 정신 나간 늙은이를 봤나. 운 좋게 괴물 같은 놈을 제자로 들였다고 못 하는 소리가 없군.”
“그래. 맞다. 노부는 운이 좋았지.”
“빌어먹을. 인정하지 마.”
“어째서?”
“그렇게 쉽게 인정해 버리면 할 말이 없어지니까.”
화왕 적천강과 벽력도왕 팽철후.
두 거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혹시 그거 기억나나?”
“기억? 뭘?”
“아마 정마대전이 끝난 직후였던가, 다 같이 모여서 기념 삼아 한잔했을 때.”
“아, 네놈이 노부에게 깝죽대다가 코피 터진 그 날?”
벽력도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은 똑바로 하지. 그전까지는 막상막하였어.”
“그랬지. 한 삼십여 초까지는. 그런데 결국 처맞았잖나. 명백히 노부가 한 수 위였어.”
“……끝까지 유치하게 구는군. 사람 안 변한다는 옛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됐다는 소리지. 여하간 노부의 완승이었다.”
“지긋지긋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 많은 나이는 전부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아마도 오십여 년 전이었다면, 지금쯤 분명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노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씁쓸함을 애써 감추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오래전에 지나가 버린 세월과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리고 적천강은, 어느덧 새하얀 백발이 되어 버린 그를 바라보며 짐짓 얼굴을 굳혔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 늙은이 취급할 거면 나이 제대로 따져서 공대(恭待)하라 그리 일렀거늘.”
“제기랄. 또 그놈의 나이 얘기로군.”
“지금까지 한 수백 번은 말했는데, 대가리가 만년한철이라 기억을 못 하는 게냐?”
“듣기 싫은 소리는 그쯤에서 집어치우게. 알겠어, 알았다고. 그깟 공대 해 주면 될 거 아니오?”
“하여간 팽가 놈들은…… 지금 뭐라고?”
문득 놀라서 말까지 멈춘 적천강의 반응에, 벽력도왕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왜, 이제는 하도 늙는 바람에 귀까지 먹으셨소? 적 형(兄).”
“……!”
“쯧쯧. 겉모습만 회춘하면 뭐 하나. 나이만 많았지 실속이 없어, 실속이.”
들으라는 듯 혀를 차는 그의 모습을,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물끄러미 응시하던 적천강이 불현듯 소리 내어 웃었다.
“어라, 왜 웃소?”
“그냥, 오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서 그랬다. 불만 있느냐?”
“불만이야 항상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아우가 형에게 대들 수 있나.”
아우.
그 별것 아닌 두 글자에 가슴 한구석이 울렁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적천강은 흐릿해져 가는 입가의 미소를 애써 되살리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네놈이 정신을 차렸구나. 언제까지 그렇게 뻗대나 늘 궁금했었는데.”
“어허, 아우에게 네놈이라니. 적 형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오.”
“그럼, 지금부터 팽 아우라고 부르면 되나?”
이번에는 벽력도왕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비워 낸 뒤, 잔주름과 검버섯으로 가득해진 그의 얼굴 곳곳에 깊은 골이 팼다.
“아니, 그 호칭은 안 쓰는 것이 좋겠소. 적 형이 그런 말을 하니 오장육부까지 간지러워지는 기분이라.”
“이런 염병할 놈 같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그래, 차라리 훨씬 낫소. 드디어 내가 아는 화왕 적천강으로 돌아오셨군.”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어 보인 벽력도왕이, 부드러워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적 형.”
적천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변한 벽력도왕의 어조와 표정이.
이제는 완연한 노인의 그것이 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되어 적천강의 목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적천강의 모습을, 벽력도왕은 모두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적 형만큼은…… 변치 마시오.”
“……!”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그 모습 그대로 이 무림에 남아 주시오.”
아득한 세월이 흘렀다.
해와 달이 쉼 없이 자리를 바꾸고, 그에 맞춰 강산은 옷을 바꿔입었으며, 힘찬 울음소리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들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변치 않은 이들 또한 있었다.
비록 세월의 흐름에 따라 육신은 노쇠해졌을지언정,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지닌 그들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운이 좋았소.”
흐릿해져 가는 벽력도왕의 눈동자에, 지난 세월이 유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일대를 호령하는 하북팽가의 핏줄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흘러간 유년 시절.
북방을 넘어 천하에까지 이름을 떨친 소싯적의 나날들.
그리고.
“그 끔찍한 전란(戰亂) 속에서도,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벗들이 있었지.”
“……그래, 그랬지.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적천강이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용히 입술을 깨문 그는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적 형.”
“말하거라. 듣고 있다.”
“혹시 기억하고 있소? 내가 버릇처럼 했던 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적천강이 입을 열었다.
“무릇 사내라면, 전장에서 당당히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했지.”
“기억하고 있었구려.”
“그럴 수밖에. 하루에도 몇 번씩 말했으니까.”
“맞소. 그럴 때마다 적 형이 내 주둥이를 찢어 놓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지.”
옛 기억을 떠올린 벽력도왕은 즐겁게 웃었지만, 천둥처럼 우렁차던 웃음소리 대신 흘러나온 것은 희미한 숨결이었다.
“그 말, 취소하겠소. 막상 여기까지 와 보니…… 이런 죽음도 제법 나쁘지는 않구려.”
벽력도왕은 자꾸만 기울어지려는 고개를 힘주어 들어 올렸다.
그리고 굽어진 허리를 곧게 펴고, 똑바로 응시했다.
적천강의 어깨너머, 짙은 빛무리에 휩싸인 채 허공에 떠올라 있는 누군가를.
뿌득. 으드득.
파육음과 함께 전신 곳곳으로 번져가는 잔 떨림.
자신도 겪지 못한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과정에 들어선 진태경의 모습이, 기쁨에 물든 벽력도왕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등봉조극(登峰造極).’
마침내 봉우리에 올라 극을 이루었으니, 이는 지상에서 가장 드높음과 동시에 하늘과 가장 가까운 길이라.
“적 형. 보이시오?”
감격으로 떨려오는 벽력도왕의 음성에, 적천강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보고 있다. 노부의 하나뿐인 제자이자, 네 모든 것을 물려받은 후인(後人)을.”
“그래, 그렇구려.”
죽음에 젖어든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었다.
이제 벽력도왕의 눈에는 더 이상 적천강의 얼굴도, 진태경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서서히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 꺼지지 않는 환한 빛무리를 볼 수 있었다.
“저, 저 아이는…….”
벽력도왕은 숨을 헐떡였다.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어둠 너머에서 또렷하게 빛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이 남긴 미래이자, 희망을 향해.
그리고 이내, 전신을 짓누르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빛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승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산봉우리를 향해.
죽음이라는 또 다른 등봉조극을 향해.
툭.
그 무엇에도 닿지 못한 채 힘없이 떨어지는 손끝.
조용히 눈을 감은 적천강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잘 가거라. 팽가 놈아.”
아우라는 두 글자는, 언젠가 다시 만날 그 날을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그것이 벽력도왕, 아니 팽철후와의 마지막 약속이었으니.
적 형이 아닌, 화왕 적천강에게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
화아악.
마침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는 빛무리를 느끼며, 적천강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