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90
#989화
천면호리(千面狐狸) 송호는 그날도 눈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예정이었다.
고작 한 시진도 되지 않는 숙면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만 하더라도, 그의 머릿속에는 일각(一刻) 단위로 나뉜 하루의 일과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상관을 찾은 은영각 요원의 손에 들린 붉은색 전서(傳書)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천면호리는 깨달았다.
오늘의 일과가, 결코 계획대로 흘러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잡혀 있던 회의는 취소일세. 대신 일 다경 안에 내당(內堂)의 간부들을 소집하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전달토록 하겠습니다.”
“외당(外堂)은 어찌 되어 가고 있나.”
“이미 경계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각 성으로 보낼 전서응 역시 모든 준비를 끝낸 채로 각주님의 명을 기다리…….”
“당장 출발시키도록 하게. 나는 그사이에 맹주(盟主)님을 뵙고 오도록 하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명령을 전달한 천면호리는 바쁜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검성(劍星) 매종학은 가부좌를 튼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지 않은 소식을 듣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인데. 해 뜰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리지 그랬나.”
호숫가의 물처럼 투명한 목소리와 눈빛.
평소에는 그저 세상 태평하게만 보였던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의 침착한 모습에, 천면호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글쎄, 잘은 모르겠네. 다만 오늘따라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더군.”
천천히 눈을 뜬 매종학이 천면호리를 응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손에 들린 붉은색 전서를.
“그래, 이번에는 누구인가.”
매종학의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변치 않고 그대로인 것 또한 있는 법.
비보(悲報)를 의미하는 붉은 서신도 그중 하나였다.
과거 정마대전에서 중요한 인물이 죽거나,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때마다 그들은 침통한 마음으로 붉은색의 전서를 작성하고는 했다.
바로 지금, 천면호리의 손에 들린 그것처럼.
“맹주님.”
“괜찮으니 말하게. 그 적서(赤書)에 적힌 이름을.”
잠시 망설이던 천면호리가 침통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태원진가에 머무르고 계시던 벽력도왕(霹靂刀王)께서 결국…….”
“그만. 되었네.”
손을 내저은 매종학이 씁쓸한 얼굴로 뇌까렸다.
“그래, 결국 그리되었군.”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자네가? 아니야. 굳이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그건 바로 맹주인 나겠지.”
천면호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촉망받는 후기지수로, 함께 힘을 합쳐 전란을 헤쳐 나온 전우로 수십여 년간 교분을 쌓아 온 두 사람이다.
지금만큼은 맹주가 아닌 고인의 벗으로 이 소식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어야 했고, 다행히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팽 선배는, 어찌 가셨다던가.”
“마지막까지 웃으며 떠나셨다고 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아시고, 격체전공(隔體傳功)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남기셨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에는 가장 중요한 누구에게, 가 빠져 있었으나 매종학은 구태여 되묻지 않았다.
천면호리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뇌리에 떠오른 한 사람의 이름이 있었기에.
“진태경. 분명 그 아이겠군.”
“예. 매우 위험한 시도이긴 했으나, 대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매종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태경을 직접 겪어 본 그로서는 이번 격체전공의 성공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 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도무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니.”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천면호리의 보고에는, 매종학마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허, 환골탈태(換骨奪胎)라.”
천무지체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면, 환골탈태는 강대한 공력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후천적으로 신체를 완벽하게 재조립하는 과정.
설령 죽음을 앞둔 백발의 노인이라 해도 젊음을 되찾고, 놀라운 무공의 증진을 겪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환골탈태다.
한데 누구나 꿈꿔 마지않은 그 환골탈태의 행운이 고작 약관 어림의 청년에게 주어졌다니.
전서에 쓰인 내용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읽어 준 천면호리마저 믿기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이 진정…… 가능한 일입니까?”
“믿지 못하는 눈치로군.”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째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장장 천 년에 달하는 무림사(武林史)를 통틀어 환골탈태를 경험한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제가 아는 바로는 고작 스물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하지만 자네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네.”
“무엇입니까?”
되묻는 천면호리를 향해, 매종학은 대답 대신 한 손을 펼쳤다.
“다섯.”
“그게 무슨…….”
“고작 스무 명도 되지 않는 그들 중, 작금의 이 시대에서만 벌써 다섯 명이라는 뜻이지.”
“……!”
“아니, 이제 여섯 명이 되겠군.”
무신과 삼성.
화왕 적천강과 그의 제자인 열화신룡 진태경까지.
읊조림과 함께 한 손가락을 더한 매종학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 않나? 환골탈태를 겪은 이들은 지난 천년을 통틀어도 고작 스물 남짓에 불과한데, 정파 무림으로만 쳐도 이미 여섯이니.”
“그건…….”
“자네도 스스로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을 걸세. 다만 겉으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지.”
매종학이 가부좌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을 것처럼 평범한 용모와 분위기. 그러나 천면호리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투명하리만치 맑았다.
“우리는 실로 괴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네. 상식의 경계선은 이미 허물어진 지 오래고, 상상할 수 없었던 거대한 암운(暗雲)이 천하에 드리워졌지.”
과거 오십여 년 전, 무신과 천마라는 두 절대자가 동시대에 등장했다.
그뿐인가.
정사마를 아울러 수십여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그 언저리를 장식했고, 전례 없던 힘을 지닌 초인들의 대전이 시작되었다.
삼성과 십왕, 경천동지할 힘을 지닌 마교와 사파의 대마두들.
그리고…….
“이제는 그 시절의 마교를 아득히 뛰어넘는, 암천(暗天)이 나타났지.”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가, 혹은 사람이 시대를 만드는 것인가.
지금껏 수많은 갑론을박을 낳은 그 화두의 명확한 답은 그 누구도 찾지 못했고, 검성 매종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지금의 이 시대가, 그저 단순한 난세(亂世)가 아니라는 것을 내심 깨닫고 있었다.
혼란한 시대로 인해 탄생한, 혹은 그런 시대를 만들어 가는 초인들 간의 대립으로 가려진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해하지 못할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과 끔찍한 형태의 괴물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천주라는 자.”
깊어진 눈동자로, 매종학은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간혹 그런 생각을 떠올리곤 한다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누군가에 의해 짜인 농간이 아닌가 하는.”
매종학은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머나먼 동쪽으로부터 번져오는 햇살을 빼곡히 가리며,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새하얀 눈송이들이 보였다.
초가을의 눈. 그것도 엄청난 폭설(暴雪).
따뜻한 기후를 지닌 하남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아니 유례없었던 현상이 몇 달 전을 기점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비단 하남뿐만이 아니라, 천하 각지에서.
변화는 지상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모두의 머리 위에 놓여 있던 하늘이, 법왕 굉도가 일찍이 예견했던 천기(天氣)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자네는 이해할 수 있겠나? 이 모든 것을.”
매종학의 물음에, 천면호리 송호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덧 그의 등허리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저는,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잘게 떨리는 음성.
무신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며 천마가 이끄는 십만 마도와 맞서 싸웠던 그조차도, 앞에 놓인 미래를 떠올리자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건 마치…….
‘인세(人世)의 경계를 벗어난 무언가.’
혀끝에 맴도는 그 한마디를, 천면호리는 차마 토해 내지 못하고 삼켰다.
믿을 수 없었으니까.
아니, 믿기 싫었으니까.
그리고 이처럼 동요하는 천면호리의 모습을, 매종학은 투명한 눈동자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송 각주. 자네의 상관이자 무림맹의 맹주로서 한마디만 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
“다른 그 누구보다 두려워하게. 늘 적들을 경계하고, 의심해야만 해. 자네와 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네.”
매종학의 말에 담긴 의미를, 천면호리는 즉시 알아들었다.
“맹주님의 말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고맙군. 자네는 냉철하고 영민한 사람이야. 내가 봐 왔던 사람 중에서도 가장……은 아니고 열 손가락 안에 들지.”
천면호리가 실소를 흘렸다.
“제 위로 제법 많은 모양이군요.”
“계산은 정확해야 하지 않겠나. 섭섭해도 이해하게.”
“그 말씀은 안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이로군.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만으로도 이미 자네 머릿속은 정신없이 바쁠 테니.”
“물론입니다. 그럼 이만.”
흐릿하게 웃은 매종학은, 처음 왔을 때처럼 바쁜 걸음으로 떠나가는 천면호리를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붉은 전서를 천천히 읽은 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이렇게, 다시 한번 누군가를 떠나보내는군.”
벽력도왕과의 교분을 떠나, 그의 죽음은 정파 무림 전체에 있어 크나큰 손실이었다.
유구하게 흘러간 세월 속에서 십왕(十王)의 절반이 스러졌고,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던 그들 중 또 한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다만 벽력도왕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는 것은, 거인의 마지막 발걸음이 남긴 흔적 때문이리라.
“열화신룡 진태경.”
줄곧 뇌리에 맴돌던 그 이름을, 매종학은 조용히 읊조렸다.
비록 벽력도왕이라는 큰 별이 졌으나, 새롭게 떠오른 별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아니, 이미 그 전부터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룡(神龍)이라는 별호를 증명하듯이.
‘머지않아 두 마리의 용이, 마침내 하늘에 오르겠구나.’
매종학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천하 무림의 거인으로 거듭난 진태경과, 자신이 친손자처럼 키워 낸 마지막 후인이 이 괴이한 시대의 중심이 되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쯤 아주 먼 곳에서 뒤늦게나마 산서성의 소식을 접했을 청풍을 떠올리며, 손에 쥔 전서에 공력을 주입했다.
화륵. 파스슥.
삼매진화(三昧眞火)의 불꽃이, 매종학의 투명한 눈동자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