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91
#990화
벽력도왕 팽철후.
하북팽가의 태상가주이자, 정마대전이 낳은 또 한 명의 거인이 쓰러졌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성난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그분만큼은 굳건히 버티시리라 믿었건만……. 기어코 이리되는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하니 도왕(刀王)께서 이처럼 덧없이 떠나실 줄이야.”
“덧없이? 그런 헛소리는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꺼내지 말게. 팽 대협께서는 마지막까지 의기(義氣)를 잃지 않으셨어.”
“그만하게. 저 친구도 몰라서 한 소리겠나. 그저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지.”
“알고 있네. 빌어먹을. 나도 알고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비보(悲報)를 접한 무림인들은 하나같이 애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십왕(十王)이라는 별호에 깃든 의미는 그만큼 남달랐으니까.
그러나 모든 이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법왕 굉도도.
수많은 마교도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독왕 당사문도.
마지막으로 화왕 적천강이라는 압도적인 존재를 제외한다면, 십왕의 실질적인 수좌(隨坐)나 다름없던 벽력도왕마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인은 노화로 인한 자연사도, 병사도 아니었다.
“모두 잊지 말게. 그분들은 협의를 위해 싸우다 명예롭게 전사(戰死)하셨고, 그에 대한 복수는 곧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정파 무림의 상징이자, 의기의 표상이었던 노강호들의 잇따른 죽음.
무림인들은 그렇게 애통함이라는 감정 위에 분노를 덧칠했다.
떠나간 이들의 복수를 위해.
마교 이후 처음으로 나타난, 그 어느 때보다 위협적인 힘을 드러낸 새로운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암천(暗天)과 맞서 싸울 자, 누구인가!”
“검을 들고 일어나라! 구주천하를 위해, 정의와 협의를 위해 저 천인공노할 악귀들과 맞서 싸우라!”
거리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힘찬 외침들은 이제 예삿일이었다.
모용세가의 일례를 반면교사 삼은 일파(一派)의 문주와 가주들은 잦은 회동 속에서 묵은 감정을 털어 냈고, 혈기로 들끓는 젊은이들은 피 한 방울 묻혀 보지 못한 병장기를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휘둘렀다.
돌멩이가 움직여도 자국이 남는 법인데, 그것이 태산(太山)이라면 오죽할까.
비좁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산서성에서의 혈전.
이른바 팔천혈겁(八天血劫)이라 불리게 된 사건과 벽력도왕의 죽음은 마지막 기폭제나 다름없었다.
아직 정확한 전력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천하 곳곳에서 숱한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암천의 행보에 두려움을 품고 있던 이들도, 일찍이 암천과 맞서는 것에 대해 비교적 미온한 반응을 보이던 정사지간의 무림인들도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암천의 손에 들린 저 예리하기 그지없는 칼날이, 정파 무림뿐만이 아니라 천하 전체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한 파장은, 이제 무림이라는 울타리를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래,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정가촌에서 온 장팔입니다.”
“장팔? 정가촌에서 왔다면서 왜 장씨야?”
“예?”
“왜 장팔이냐고.”
“아, 그것이…….”
“그것이, 뭐?”
“아버지가 외지인입니다.”
“외지인이라. 그럼 데릴사위라 이거로군. 정가촌에 정착한.”
“예, 예. 그렇지요.”
“나이는?”
“올해로 약관이 되었습니다.”
모병관으로 임명된 하급 관리는 눈앞의 청년. 아니, 소년이라 불려야 마땅할 지원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약관?”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그럼 모친의 존함은 어찌 되시나?”
“예?”
“이야기를 죽 들어보니 얼굴도 왠지 낯이 익기도 하고, 내가 아는 사람 같기도 해서 말이야. 혹시 아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만약 맞다면 전공(戰功)을 쌓기에 괜찮은 곳으로 보내 주지.”
하급 관리의 은근한 목소리에, 소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니까. 그래서 모친 존함은?”
소년은 잠시 망설였지만, 갈등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비록 집안의 허락은 받지 못했으나, 마음에 품은 의기와 풍운(風雲)의 꿈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만약 눈앞의 하급 관리와 부모님이 친분이 있다면, 좋은 전장에 배치되어 눈부신 공적을 쌓아 소년 장수가 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나도. 나도 반드시 그분처럼.’
마음의 결정은 이미 내렸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상을 떠올리며 용기를 얻은 소년은, 어설프게나마 제 손으로 직접 깎아 만든 죽창(竹槍)을 힘껏 말아쥐며 입을 열었다.
“그, 감나무 집 오씨댁 둘째 딸이라고 하면 인근에서는 어느 정도 알 거라고 하셨…….”
“가라.”
“예?”
“아버지는 정씨고, 어머니는 오씨인데 왜 정가촌에 살아?”
“……!”
“왜, 할 말이 남았나?”
이미 다 안다는 듯,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을 노려보는 하급 관리의 모습에 경직되어 있던 소년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사실 저희 집안 전체가 외지인 출신이라…….”
“뭐 하나. 이놈 당장 끌어내!”
“헉, 나리! 안 됩니다! 진짜 안 됩니다! 저를 내치시면 진짜 후회하실 겁니다!”
소년은 강렬한 의지를 담아 눈을 부릅떴고, 이와 같은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하급 관리는 소년의 양팔을 붙든 관병에게 지시했다.
“궁둥이 세 대만 두들겨서 쫓아내게. 약관? 약관은 개뿔이. 어린 놈의 새끼가 어딜 거짓부렁으로도 모자라서 어른한테 눈을 부릅뜨고 있어.”
“나리이!”
애타게 부르짖었음에도 반전은 없었다.
황실의 포고문이 온 천하 곳곳에 퍼진 이후,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과 끓어오르는 혈기를 참지 못한 이들로 각 성의 관청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로 인해 암천은커녕 과로로 죽게 생긴 하급 관리는 나이까지 속여 입대하려는 소년들에게 학을 뗀 상황이었으니.
“두 대 더 때려!”
“안 돼애!”
“돼!”
결국 관병에 의해 호되게 엉덩이를 걷어차인 소년은 초라하게 쫓겨났고, 관청 밖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던 지원자들은 그 광경을 보며 숙덕였다.
“내 동생보다 어려 보이는데.”
“그래도 어린놈이 의기가 제법이오. 대가리가 영 빡통인 게 문제지만.”
“한데, 저 아이가 어디에서 온 누구라고 했소?”
“알아봤자 소용없소. 어차피 지어낸 말이 뻔한데 뭘.”
“아니, 그래도 꼭 알아야겠소.”
“왜 굳이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요?”
“나도 지어냈으니까.”
“…….”
“괜히 출신지 지명이 겹치면 안 되잖소. 들키면 나도 저 꼴 날 텐데.”
“……혹시 나이가 어찌 되시오?”
“열여섯.”
“지랄 마시오. 얼굴은 이미 백전노장인데.”
“고맙습니다, 형님. 저는 무사히 통과하겠네요. 그리고 이 사실은 비밀로 해 주세요.”
“……아니, 농담이 아니었다고?”
모두가 충격의 구렁텅이에 빠진 그때, 늙수그레한 용모를 한 지원자가 비틀비틀 일어나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너, 몇 살이냐?”
넋 놓은 눈빛으로 관청을 바라보던 소년이 대답했다.
“열여섯입니다.”
“나랑 동갑이네. 이것도 인연인데 말 편하게 해.”
“지나가는 개새끼도 안 믿을 소리 하지 마십시오. 가뜩이나 기분 더러우니까.”
“진짠데.”
“안 속아……요.”
“그보다 너, 그 창 어디서 났어?”
우물쭈물하던 소년이 대답했다.
“직접 깎아서……요.”
“우리 또래는 보통 검을 쓰지 않나? 나처럼.”
그 순간, 복잡하던 소년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누가 그딴 소리를 해? 창이야말로 만병지왕인데.”
“이제야 말을 놓네. 그리고 난 검이 최고라고 한 적은 없어. 그냥 보통은 그렇다는 거지.”
“아.”
“병장기 문제로 괜히 발끈하는 거 보니까 하나는 알겠네. 너,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 온 거지?”
다 안다는 듯이 건넨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소년이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분이야.”
“뭐?”
“그분. 그 사람이 아니라, 그분이라고.”
풀 죽어 있던 모습은 이제 온 데 간 데 찾을 수 없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소년은 지금 막 관청에서 쫓겨 났다는 사실도 잊은 채 생기 넘치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열화신룡 진태경. 난 그분처럼 될 거야. 반드시!”
누구나 각자가 원하는 목표가 있는 법.
소년에게는 진태경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런 목표였다.
온 천하가 주시하는 강호의 젊은 협객이자, 하늘 같은 천자께서 친히 임명하신 고귀한 열후(列侯).
선망했고, 존경했다.
당당한 걸음으로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머지않아 그분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는 포부에 들떠 있었다.
물론 현실은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 났지만.
“젠장.”
소년이 침울하게 고개를 떨군 그때였다.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불쑥 들려온 것은.
“우와! 너무 멋져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소년은 눈을 깜빡였다. 아니, 관청 밖에서 대기하던 지원자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뭐야, 이 사람은?’
‘언제 나타났지? 조금 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어. 아닌가? 있었나?’
‘다시 생각해 보니까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얼떨떨하게 주고받는 눈빛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문들.
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된 갈피를 잡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모두의 앞에 나타난 청년은 환하게 웃으며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할아. 아니, 누구한테 들었는데.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건 좋은 거랬어요!”
“예, 예?”
소년은 당황 어린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먼지로 뒤범벅이 된 장삼(長衫) 때문인지 평범을 넘어 후줄근해 보이는 외모.
아마도 그 때문일까.
갑작스러운 등장과 안면 트기에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경계심보다는 알 수 없는 친근함이 소년을 비롯한 모두를 휘감고 있었다.
이건 마치. 마치…….
그래.
‘동네에 꼭 한 명쯤 있는, 모자란 형.’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의 생각이 일치했고,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티 하나 없는 저 순백의 웃음을 보라.
악의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는 냇가의 물보다 맑았고, 곧이어 소년의 손을 움켜쥔 째 연신 흔들어 대는 모습은 어린아이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멋있어요! 반드시 열화신룡처럼 되겠다니. 정말로 대단해요!”
그나마 양손이 구속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소년이 의식의 끈을 되찾을 수 있던 것은, 뻐근해진 어깻죽지 덕분이었다.
“저, 저기 손을 좀.”
“아, 미안해요. 기분이 좋아서 그만. 많이 아팠어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저 표정을 보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대관절 어디의 뉘신지.”
“그냥 지나가는 협객이에요. 소협처럼 천하를 구하고자 하는!”
가슴을 쭉 편 채 토해 내는 당당한 외침에, 소년을 비롯한 모두는 확신했다.
‘모자란 놈 맞구나.’
그리고 그 확신을 증명하듯, 청년은 이상해진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해서 하고싶은 말들을 떠벌렸다.
“그런데 소협. 열화신룡처럼 되고 싶다면서 관청에는 왜 왔어요? 차라리 태원진가로 직접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텐데.”
“아, 그게 워낙 거리가 멀어서요. 살아생전 백 리 밖으로도 나가본 적이 없는 제가 어찌…….”
“멀긴 하지만, 그 정도로 멀진 않던데?”
“멀지 않다고요? 이곳, 청해(靑海)에서 산서까지가?”
“생각보다 금방 가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곳곳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청해성에서 산서성까지는 과장 조금 보태서 만 리에 달하는 거리.
봇짐 몇 개를 짊어 매고 천하를 종횡하는 늙은 보부상들과, 어지간한 대형 표국조차 이 정도의 장거리 의뢰는 가급적 받지 않는다.
그만큼 고되고 미치도록 지겨운 여정이니까.
이동을 업으로 삼는 그들조차 이럴진대, 하물며 서쪽 끄트머리의 변방에 속한 청해성의 사람들은 어떻겠나.
그야말로 모자란 놈이나 할 수 있는 헛소리였다.
물론, 남들의 비웃음을 받을 만큼 허무맹랑한 꿈을 품은 소년의 귀에는 조금 다르게 들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요?”
“네. 그럼요! 설령 먼 곳에 있는 태원진가가 아니더라도 다른 선택지는 있는걸요? 예를 들면…….”
“혹시 곤륜파(崑崙派)를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어, 알아요?”
“네. 이곳 사람이니 당연하게도 잘 압니다. 곤륜에 입문하기에는 제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도요.”
한숨을 푹 내쉰 소년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흑룡마문(黑龍魔門)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요. 무림맹에 속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뿌리는 사파잖아요. 여전히 영 좋지 않은 소문도 있는 것 같고.”
“으음. 그럼 다른 문파들은…….”
“조금씩만 다를 뿐, 결국 상황은 비슷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군문에 들어 병법을 익히고, 언젠가 일군을 이끄는 장군이 되는 것이 그분의 명성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길이겠죠.”
한바탕 말을 쏟아 낸 소년은 문득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생면부지의, 그것도 한참 모자라 보이는 청년에게 이런 말을 해서 무엇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뵙죠.”
“어어, 잠깐만요.”
청년의 부름에도 소년은 멈추지 않고 털레털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시무룩한 얼굴로 바라보는 청년의 옆으로, 동그란 얼굴이 불쑥 솟아올랐다.
“형, 여기서 뭐하고 있어? 한참 찾았잖아.”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한 아이의 모습에, 모자란 형을 찾으러 왔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피식피식 웃으며 관심을 껐다.
지금 이 순간, 저 귀여운 아이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음산한 목소리를 청년의 귓가에 쑤셔 박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말했지. 한 번만 더 말없이 사라지면 검성의 제자고 나발이고 죽여 버린다고.
청년, 청풍이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 죄송해요. 금방 다녀오려고 했는데.
– 노부와 전생에 원수라도 졌느냐?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지?
– 이유가 있었어요.
– 말해 봐라.
– 빙당호로가 떨어졌어요.
– 이런 호로새끼를 봤나……!
살성(殺星)의 깊은 탄식을 들으며, 청풍은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한 사람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웃었다.
– 헤헤. 혹시 제가 말한 적 있었나요? 은인이 저 처음 봤을 때 빙당호로를…….
– 닥쳐라. 제발.
청해성에서, 살성은 고통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