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92
#991화
의식을 잃거나 깊은 잠에 빠졌을 때마다 모종의 꿈에 사로잡히는 것은, 내게 있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꿈이 곧 마음의 창구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내가 미처 떨쳐 내지 못한 고민과 남아 있는 기억들은 이리저리 뒤섞이고 합쳐져 꿈이라는 허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었으니까.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이나 이유가 있고, 꿈 역시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래.
분명 그럴 터였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바로는.
그런데 어째서…….
‘나는 왜,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지?’
흐릿한 시야 속에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저 몽롱하다.
소름 끼치도록 생생했던 다른 꿈들과 달리, 지금의 나는 주위를 둘러싼 허상들을 제대로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불현듯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뒤늦게나마 이 몽롱함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녀석, 많이 졸린 모양이구나.’
졸리다.
나는 비로소 그 사실을 인지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렸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깜빡이던 눈의 움직임도, 지금의 고갯짓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내 의지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응. 나 졸려.’
물에 잠긴 듯 먹먹한 목소리였지만 하나는 알겠다.
지금의 나는 아이다.
칭얼거리는 것이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어린아이.
그렇게 한 가지 의문은 해결되었지만, 새롭게 떠오른 의문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아이의 칭얼거림을 받아 주고 있는 저 낯선 목소리의 남자는 누구인가.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인데.’
목소리가 무슨 주민등록증도 아니고, 듣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꿈속에 나타날 정도의 인물이라면 익숙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희뿌연 시야 속에서 들려오는 저 음성도, 노이즈 낀 TV 화면처럼 느릿느릿 재생되고 있는 이 허상도.
그리고 내 것이 아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아이의 한마디를 듣는 순간, 이 알 수 없는 낯섦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 나 자도 돼?’
만약 스스로의 의지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었다면, 나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마주한 진실은 그만큼 놀라우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버지라고?’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가장 오래된 기억의 서랍을 거꾸로 뒤집어 흔들어도 이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흐릿하게나마 뇌리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목소리도, 몽롱한 시야 속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음성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까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흐른 그때.
아버지라 불린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좋은 꿈 꾸거라. 우리 아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과 다정한 어투.
이내 어둠으로 곤두박질치는 시야 속에서, 사내의 마지막 한 마디가 아스라이 울려 퍼졌다.
‘……아.’
비록 흐릿하지만, 똑똑히 들었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음성을. 그 이름을.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충격에 머릿속 사고(思考)가 정지한 그 순간.
화아악.
칠흑 같은 어둠 너머로 쏟아져 내린 빛이, 깊은 잠에 빠진 아이를 감싸 안았다.
아니, 나를.
* * *
누군가가 내게 의식을 되찾을 때마다 무엇을 가장 먼저 보게 되느냐 묻는다면, 나는 천장이라고 대답하겠다.
혹은 호법(護法)이라는 명목으로 방 한구석에 처박혀 코까지 골며 잠든 혁무진의 모습이나, 내가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고 있던 적천강의 얼굴이라든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무엇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허억, 헉.
마치 용수철처럼 튕기듯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질식사 직전에 몰린다면 이런 상태일까.
겨우 되찾은 시야는 녹아내리는 촛농처럼 흐물거렸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제각각의 목소리들은 천둥과도 같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약왕……. 와라! 어서!”
“……장님, 조장님!”
“이게 뭐……!”
아직 꿈인가? 아니면 현실?
무엇하나 분간되지 않는 그 상황 속에서, 혼란에 사로잡힌 내가 본능처럼 다가오는 손길들을 연신 뿌리치던 그때였다.
누군가의 단단한 손아귀가 내 어깻죽지를 붙잡은 것은.
덥석.
이 와중에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강인한 힘.
그로 인한 미약한 통증과 함께, 알 수 없는 온기가 손아귀를 통해 전해졌다.
스아아아.
한껏 경직되어 있던 몸이 부드럽게 풀렸다.
이 광활한 천하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혈도의 경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극양(極陽)의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나는 그제야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노야.”
참았던 숨과 함께 토해 낸 한 마디에,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잠시, 아주 잠시만 그대로 있거라.”
나는 적천강의 말에 따라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존재하는 이곳이 허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쉴 새 없이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박동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눈을 뜬 나는, 고요하면서도 선명한 세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근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도.
“미련한 놈 같으니.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느냐?”
불쑥 던져진 적천강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요.”
“아직이라는 뜻이군.”
“혹시 저 한 대만 세게 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뭐라?”
“한 번. 딱 한 번요. 정말 봐주는 것 없이, 진심을 담아서.”
“…….”
“부탁드립니다.”
굳은 얼굴로 부탁하는 내 모습에, 적천강이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들었다.
“오냐. 알았다.”
화륵.
삽시간에 일어난 백색 화염이 굳게 말아 쥔 주먹을 휘감으며 타오른다.
거두절미하고 멸염신권(滅炎神拳)의 일초(一招)를 쏘아 보내려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엄청 뜨겁네요.”
“새삼스럽게 무슨 헛소리냐. 원래 우리 열화문 무공이 다 그렇지.”
“뜨거운 게 느껴지는 걸 보니 확실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적천강이 고개를 내저었다.
“노부가 보기에는 아직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요.”
“진심으로 하라며.”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부탁까지 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하실 거였으면 세 번까지는 거절하셨어야죠. 그게 예의 아닙니까.”
“미친놈이로고. 노부가 제갈천강이냐? 방정맞은 주둥이 그만 놀리고 딱 대라.”
말과는 달리 주먹을 거둔 적천강이 손을 까딱이자, 침상 옆 탁자에 놓여 있던 물병이 쏘아지듯 날아왔다.
“뭣 하느냐. 목부터 축이지 않고.”
“감사합니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가득 찬 물병을 단번에 비웠다.
차가운 냉수가 메말라 있던 목을 시원하게 쓸어내리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후우.”
“왜, 이제야 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느냐?”
“어느 정도는요.”
처음 깨어났을 때와 똑같은 대답에, 적천강이 다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금은?”
“……와, 생시! 매우 생시! 온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기뻐요!”
“좋아. 이제야 겨우 노부가 알던 천둥벌거숭이로 돌아왔구먼.”
“조금 전에는 아니었습니까?”
“몰라서 묻느냐? 천지 분간도 안 되는지 깨어나자마자 난동을 피우기에 모두 내보냈다.”
“음.”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너무나도 큰 혼란스러움에 몸부림치고, 붙잡으려는 손길들을 본능적으로 떨쳐 냈으니.
더군다나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눈앞에 떡 하니 놓여 있었다.
“개판이네요.”
본래의 형체를 잃고 산산조각 난 파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적천강이 크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아주 개판이지.”
“이것도 제가 한 겁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 말씀은…….”
“네 큰형 되는 놈이 난동을 피우더군. 덩치는 산만 한 것이 눈물까지 질질 짜면서 나갈 수 없다고 어찌나 버티던지. 별수 없이 노부가 직접 손을 썼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적천강을 바라보았다.
“죽이셨습니까?”
“네 녀석부터 죽여 주랴?”
“아뇨. 농담입니다.”
“노부는 아니다.”
“오.”
한참 예전 같았다면 다이너마이트가 자동 장착된 똥줄을 붙잡고 카운트를 셌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무런 대답 없이 피식 웃는 내 모습에, 적천강이 작게 혀를 찼다.
“염병할. 이제는 노부를 아주 개똥으로 아는구먼.”
“어허, 또 틱틱대신다. 다 아시면서.”
“알기는 개뿔이. 그보다…… 무엇 때문이냐?”
흐려지는 말꼬리에 덧붙여진 짤막한 물음.
나는 어느새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등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단순히 꿈 때문입니다.”
“대관절 어떤 악몽이었기에?”
“아뇨. 악몽이라기보다는……. 잘 모르겠어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꿈이어서.”
대답을 하면서도 느껴지는 묘한 기분에, 나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왠지 모르게 낯익은 상황.
그러나 찰나 지간에 엄습해온 기시감은, 뒤이어 들려온 적천강의 심각한 목소리에 지워졌다.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혹여 그 악몽이 네 안에 깃든 심마(心魔)의 흔적일 수도 있으니.”
잠깐의 망설임을 떨쳐낸 내가 대답했다.
“아마도 아닐 겁니다. 그건 그냥, 일종의 기억이었어요.”
“불행한 기억도 심마의 흔적이 될 수 있지. 노부 역시 그러한 과거에 사로잡혀 끝끝내 파멸을 맞이하는 자들을 보았던 적이 있다.”
적천강이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나 역시 알고 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트라우마라고나 할까.
무림인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지고한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단 강대한 공력과 무공뿐만이 아니다.
심상(心想)의 수련을 통해 얻는, 정신적인 깨달음.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어야만 그 길을 계속해서 걸어 나갈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치유되지 못하고 얼룩진 마음의 병마는 심상의 수련하는 단계에 접어든 이들에게 있어 실로 치명적이다.
‘노야가 조필. 아니, 장천을 잃은 직후부터 노환을 앓았던 것처럼.’
그렇기에 적천강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접근하는 것 역시 결코 과민반응은 아니었다.
세인들이 알고 있는 화왕 적천강은 겁화(劫火)나 다름없는 성미를 지녔지만, 그 내면에는 아득한 세월 동안 다듬어 온 신중함과 지혜가 숨겨져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한 적천강의 의견에도 망설임 없이 단언할 수 있었다.
“심마가 아닙니다.”
확신에 찬 한 마디에 얼굴을 굳힌 적천강을 응시하며,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기억은, 애초에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네 것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나는 어느덧 파르르 떨리는 호흡을 삼켰다.
그리고, 동시에 떠올렸다.
한없이 몽롱했던 꿈속의 세상에서, 깊은 잠에 빠져드는 아이의 귓가에 흐릿하게 스며들었던 사내의 목소리를.
아니, 또 다른 아버지의 목소리를.
‘좋은 꿈 꾸거라. 우리 아들……. 태경아.’
그것은 내 기억인 동시에, ‘너’라 부를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태원진가의 삼공자 진태경.
가문의 수치이자, 이 몸의 본래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