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93
#992화
지금 이 공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적천강이라는 사실은, 내게 있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이미 나에 관한 진실을 알고 있었고,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들을 웬 정신 나간 놈의 헛소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게 마지막이었느냐?”
“네. 꿈에서 깬 후에는 뭐, 노야께서도 아시는 대로고요.”
마침내 마주한 진실로 인한 충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실제로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극심한 혼란을 느끼며 홀로 허우적거려야 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염병할. 말 그대로 괴이(怪異)하기 짝이 없는 일이로군.”
신음처럼 뇌까린 적천강이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왜요?”
“아니, 그. 뭐 달라진 건 없느냐?”
“달라진 거요? 당연히 있죠.”
“뭣이!”
깜짝 놀란 적천강의 외침.
나는 아직도 완전히 마르지 않은 식은땀으로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몸과, 그것과는 별개로 힘이 넘쳐흐르는 전신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일단 기분은 더럽고, 몸 상태는 아주 좋네요.”
적천강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리고?”
“끝인데요.”
“……그게 전부냐?”
“네.”
짜게 식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적천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차라리 그게 낫겠군.”
이 의견에는 나 역시 내심 동의를 표했다.
기분이 매우 더러워지긴 했어도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니까.
그보다 더욱 큰 문제는, 이 알 수 없는 현상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었다.
“노파심에 하나 물어보자면, 혹시 일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적천강의 물음에 단호하게 대답한 내가 덧붙였다.
“그래서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만약 이번 일이 앞으로 벌어질 무언가의 전조(前兆)라면…….”
“말이 씨가 되는 법. 그런 재수 옴 붙은 소리는 꺼내지도 마라.”
“꼭 사람이 물을 줘야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차라리 이렇게라도 최대한 예측해서 대비하는 편이 백배 낫죠.”
“……이런 상황에서도 청산유수가 따로 없구먼.”
적천강은 좋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딱히 내 반박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연륜을 지닌 그였으니 내심으로는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결국 벌어질 일은 어떻게든 벌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 일이 그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만약 처음부터 네 녀석과 진태경…… 제기랄.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그래, 그 망나니 놈과 의식이 뒤섞여 있었다면 말이 되지 않겠느냐?”
짧은 침묵을 거쳐 흘러나온 적천강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 겁니다. 아니, 확실히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처음부터 아무런 기억이 없었으니까요. 만약 노야께서 말씀하신 대로 의식이 합쳐진 상태였다면, 아주 사소한 기억 하나라도 남아 있었어야 그나마 아귀가 맞아떨어집니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똑똑히 기억한다.
기루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나는 무림이 가상현실 게임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던 상태였다.
내가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정확히 모르는 채로 월화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렇게 최소한의 정보만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너무 기본적인 정보라서 진위경에게는 기억이 잘못되었다는 거짓말까지 해야 했고.’
자그마한 기억의 편린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이 낯선 세상에 훨씬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여느 웹소설 속 주인공처럼, 극심한 두통과 함께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는 기억을 흡수한다든지.
하지만 현실과 소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막 첫걸음을 내디딘 나에게 주어진 것은 현대와 같은 이름 석 자.
그리고 주색에 찌들어 반쯤 썩어빠진 몸뚱어리가 전부였으니까.
“…….”
다시 생각해 보니까 존나 열 받네.
여하튼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한낱 망나니에 지나지 않았던 이 세상의 진태경과 내 의식은 완전한 별개다.
아니, 별개였다.
적어도 오늘, 저 이상한 꿈을 꾸기 전까지는.
“네 녀석이 그토록 단언하니 우선은 알겠다. 하지만 그 망나니의 기억이 이렇게 꿈으로나마 나타났다는 건…….”
흐려지는 말꼬리.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적천강이 마침내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네 안 어딘가에, 망나니 놈의 의식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나 역시 내심 생각하고 있던 가설 중 하나였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아무래도 그 무게가 남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빌어먹을. 이건 무슨 한 지붕 두 가족도 아니고.’
분명 한때는 이런 부분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태원진가의 진태경으로 살게 된 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정확히는 이 낯선 세상이 게임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했을 때였다.
두 개의 세상.
같은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의 나.
설령 대가리가 만년한철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한 번쯤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몸이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 몸뚱어리의 본래 주인은 어떻게 된 것일까.
남아있는 육신과 달리, 그 망나니의 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계속해서 붙들고 있기에는, 매 순간 엄습해 오는 위기의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내가 이 몸을 차지함과 동시에 사라졌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어쩌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그 고물 캡슐을 만든 누군가도, 그 결과를 더욱 바람직하게 여겼을 거라 생각하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지금만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배를 어루만졌다.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적천강이 입을 열기 전까지.
“복잡한 심경은 이해하지만, 뭔 애를 밴 것도 아니고 갑자기 배를 쓰다듬고 자빠졌느냐. 털 숭숭 난 사내새끼가.”
“……아니, 무심코 그럴 수도 있죠.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하세요?”
이게 바로 미디어의 무서움인가.
내 안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니 본능적으로 배에 손이 가 버렸다.
영유아 관련 CF를 하도 많이 본 부작용이라고 내심 중얼거리며, 나는 슬그머니 배에 올려져 있던 손을 가슴으로 옮긴 뒤 적천강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가슴에 뭐가 얹히기라도 했느냐? 울분이 막, 어? 미친 듯이 솟구쳐서 열이 뻗쳐?”
“……그냥 해 본 겁니다.”
“그래, 그렇다 치고 배에서 가슴. 그다음은 어딜 만질 생각이냐?”
“머리요.”
내 대답을 들은 적천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 마라. 병신 같다.”
“네.”
안 그래도 왜 이랬나 슬슬 후회가 들던 참이었다.
잽싸게 손을 회수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적천강이 깊은 한숨을 흘렸다.
“왜 그러세요?”
“네 녀석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걱정이 돼서 그런다.”
“뭐가요?”
“노부가 그 망나니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 본 바에 의하면 어지간한 등신 머저리던데, 어느 날 갑자기 그놈이 네 몸뚱어리를 차지해도 눈치채지 못할 것 아니냐.”
“아, 저도 똑같은 등신 머저리라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정확하게 알아들었구나.”
“거 좀, 말씀이 심하시네. 듣는 사람 서운하게.”
“네 녀석이 서운하면 어쩔 건데. 도대체 뭘 할 수 있는데? 응? 이…….”
“아니, 왜 이렇게 급발진을 하십니까. 진정하세요, 진정.”
마지막 순간에야 다행히 이성을 되찾은 적천강이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하튼, 이 문제는 계속해서 노부와 상의하거라. 알겠느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죠. 노야가 아니면 제가 누구랑 이런 문제를 두고 대화하겠습니까.”
이건 선택이기 이전에 필수다.
여기저기 말했다가 한 마디라도 새어나갔다가는, 신룡에서 광룡(狂龍)이 되는 건 순식간일 테니까.
그나마 적천강도 직접 보고 겪은 게 있으니 순순히 믿어 준 거지, 사실 지금 당장 나에 관한 진실이 천하에 알려진다면 전례 없는 사술을 쓴다며 나를 찢어 죽이려는 정파의 협객들이 대기표를 뽑고 기다릴 것이다.
혹시 아나, 무림 공적으로 천주(天主)와 동기동창이 될지.
그러나 당연한 내 대답에, 적천강은 고개를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노부를 제외하더라도 한 명이 더 있지. 벌써 잊었느냐?”
“누구…… 아.”
본능적으로 되묻던 나는 입맛을 다셨다.
맞다.
한 명이 더 있긴 하다.
이런 주제로 깊은 대화를 나눌 만큼 가깝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진실에 근접해 있는 또 한 명이.
‘그래, 궁성(弓星)이 있었지.’
그러나 궁성에 관한 부분은 아직도 살짝 조심스럽다.
아니, 실은 살짝이 아니라 매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어.’
말 그대로다.
궁성과의 거리감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특히 황궁에 머무를 때는 몇 번이나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음에도, 정해진 선 그 이상을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벽.
궁성과 나 사이에는 그것이 존재했다.
아니, 그녀는 모두에게 그렇게 대하는 듯했다.
누군가가 벽을 허물고 다가오려 할 때면, 그녀는 소리 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마치 같은 극을 지닌 자석을 만난 것처럼.
그것이 답인 것처럼.
‘하지만 궁성이라면 무언가를 알 수도 있어. 진실의 일부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서신의 내용을 믿고 장장 수십여 년간 나를, 정확히는 ‘선택받은 자’를 찾아 천하를 떠돌았던 그녀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적천강. 그리고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절대자, 무신(武神)을 제외한다면 궁성이야말로 적격임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 전에 그녀가 이 대화에 응해야겠지만.
“노야. 그렇다면 혹시…….”
하지만 내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이어질 내용을 짐작한 적천강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당장 궁성을 만나는 건 무리다. 아직도 하북(河北)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하북…….”
“분위기가 완전히 안정되지 않아 팽가의 가주도 아직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니, 아마도 조금 더 시일이 걸리겠지.”
하북. 그리고 팽가.
그 두 개의 단어를 듣는 순간, 불현듯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렸다.
삶의 끝자락에 선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떠났을,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분은, 벽력도왕께서는…….”
“떠났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건넨 물음에, 짤막하게 대답한 적천강이 문득 덧붙였다.
“웃고 있더군. 꼴 보기 싫을 만큼 아주 환하게.”
“……!”
“되었다. 그것으로 된 거야.”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적천강이 떠난 빈자리에는 적막함이 찾아왔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마침내 찾아온 고요함이.
‘시스템창 오픈.’
띠링.
맑은 종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