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95
#994화
시스템은 종종, 아니 어쩌면 꽤 자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서를 퀘스트라는 이름으로 불쑥 내밀고는 한다.
바로 지금처럼.
퀘스트
[알 수 없는 목소리]어느 날부터인가, 당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이번이 처음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당신은 목소리의 주인과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만남의 순간이 부디 불행하지 않기를.
등급 : 無
제한 : 진태경
임무 : 계속해서 생존 (진행 중)
보상 : ???
실패 : ???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또 지랄이네.’
거, 좀 명확하게 알려 주면 블루 스크린이라도 뜨나.
처음부터 끝까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모호한 설명들.
물론 이러한 퀘스트를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시스템은 답안지가 아니다.
나아가는 방향과 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정보를 알려 주는 표지판에 가깝다.
내 선택에 따라 표지판에 그려진 화살표의 형태가 변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처럼 해석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홀로그램 창 속의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스무고개와도 같은 저 글들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퀘스트 설명란에 적힌 마지막 두 문장은 내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과 만날 수 있다고? 그것도 머지않은 미래에?’
머지않은, 이라.
시간이 상대적인 것임을 생각한다면 매우 모호한 표현이다.
코흘리개 어린아이에게 있어 일 년이라는 시간은 길고도 아득하지만, 백발이 성성한 노인에게는 찰나와 다름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나로서는 시스템이 말하는 저 ‘머지않은’ 미래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며칠. 몇 달. 혹은…… 아니다.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몇 년이나 되는 시간을 저렇게 뭉뚱그려 놓지는 않았겠지.
‘당장 며칠은 너무 빠르고, 년 단위는 너무 길 테니 결국은 몇 달 안에 벌어질 일이라고 이해하는 게 합리적인데.’
그렇다면 불행 운운하는 마지막 문장은 뭘까.
그리고 이처럼 수수께끼와 같은 퀘스트의 원인이나 다름없는, 그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나와 벽력도왕, 심지어 노야의 이목마저 속이고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 나만의 심상(心想)에 개입할 수 있을 정도의 누군가.’
격체전공(隔體傳功)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나와 벽력도왕은 기운을 건네주고 받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적천강은 달랐다.
그는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대법을 위해 호법을 섰고, 그런 만큼 온 힘을 다해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이제는 십왕(十王)을 넘어 세 명의 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절정 고수의 이목을 피해서 내게 목소리를 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닐 것이다.
‘전무후무한 수준의 은잠술을 익힌 고금제일의 살수거나, 노야보다 최소 두 수 이상 앞서는 고수라면.’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서 단 두 명뿐이다.
그중 전자에 해당하는 이는 고금제일의 살수임은 분명하나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이유도, 성공 가능성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또 다른 한 명은 다르다.
온 세상의 경이(驚異), 그 자체.
홀로 이 광활한 천하를 굽어보는 하늘이자, 인간의 몸으로 신이라 불리게 된 존재.
“……무신(武神)?”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그 두 글자에, 순간 등골이 찌르르 울렸다.
무신. 바로 그 무신이라니.
‘그럴 리가 없어.’
무신이 자취를 감춘 지 무려 반세기다.
그는 처음 세상에 나타났을 때와 같이 홀연히 떠났고, 이제는 천하의 그 누구도 무신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아니, 이제는 생사의 여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이는 무신이 남긴 서신을 통해 나를 찾아낸 궁성조차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말도 안 돼.’
하지만 현실적으로 오늘과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은 무신뿐이다.
내가 아는 한, 오직 그만이 이른바 삼성(三星)이라 불리는 초인들을 넘어선 압도적인 존재니까.
그리고 어쩌면 나는, 천하의 그 누구보다 무신이라는 존재에 감춰진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만약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어떤 생각에,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황궁에서 처음으로 나누었던 궁성과의 깊은 대화.
이후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 마음 한구석에서만 홀로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이름이 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천태민.’
아득한 공간 너머에 존재하는 또 한 명의 절대자.
천마(天魔)에 맞서 평화를 되찾은 무신이 그러했듯, 마왕 아스모데우스라는 악마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영웅.
아레스 길드의 비밀구역에서 마법과 과학이 결합된 생명 유지 장치를 단 채, 깊은 잠에 빠진 듯 의식을 잃은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 위로 흐릿하게 겹쳐지는, 한 여인의 목소리 역시도.
‘선택받은 자를 위해 남기신 전언(傳言)이 있다.’
‘전언이라니, 그게 무슨.’
‘신력(神力). 선택받은 자가 지닌 그 신력과 강철과도 같은 의지로 위기를 헤쳐나가라 하셨지. 바로…….’
그날, 나를 응시하는 궁성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뒤이어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귓가를 울렸던 그 음성도.
‘바로, 당신께서 그러하셨듯이.’
그 순간에 느꼈던 충격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아니, 분명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렴풋이 생각하면서도 이내 실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던, 생각지도 못한 퍼즐이 끼워 맞춰진 순간이었으니까.
신력.
선택받은 자만이 지닌 괴이한 힘.
지금의 내게, 그리고 과거의 무신에게 깃들었던 이능(異能).
만약 무신이 궁성에게 남긴 전언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면, 이는 곧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했다.
‘시스템 사용자. 플레이어(Player).’
아마도 그것이 바로 무신의 진정한 정체일 것이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도탄에 빠진 천하를 구한 뒤 사라진, 전에도 없었고 과거에도 나타나지 않을 불세출의 대영웅에게 숨겨진 진실.
그러나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천태민과 무신은, 결코 동일 인물이 될 수 없다.’
캡슐 사용 설명서에 따르면 시스템은 오직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힘.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불현듯 찾아온 두통을 느꼈다.
각각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두 영웅.
그들이 보인 행적은 놀라울 만큼 서로를 닮아있었고, 두 사람에 대해 알아 갈수록 나 역시 어렴풋이 떠올리곤 했다.
어쩌면 천태민이, 혹은 무신이 나와 같은 능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고. 그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무신과 천태민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하나가 아닌 전혀 다른 개인으로서 존재한다면, 그들이 무슨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다만 지금 이 순간에도 바늘처럼 뇌리를 쑤시는 이 두통을, 의혹을 조금이라도 해결할 방법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돌아간다. 바로 지금.’
그래.
답은 한 곳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와 무림.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이어진 두 세계에서, 나는 이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적기(適期)다.
산서성의 위기에 관한 중요 퀘스트도 완료했고, 그로 인해 막혀있던 로그아웃 기능 역시 자유로워졌으니까.
‘한 달. 혹은 두달.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천태민에 관해서도 자세히 알아보려는 목적 뿐만이 아니다.
당장 로그인 직전 벌어졌던 도플갱어 사건의 후폭풍도 처리해야 한다.
더군다나 놈이 소멸하기 전 남겼던 의미심장한 말들은 또 다른 후환(後患)을 암시하고 있어, 무림에서 숨 가쁜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던 차였다.
‘돌아가면 알 수 있겠지. 도플갱어가 왜 그런 말을 남긴 것인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했는지.’
결정이 내려졌으니 망설임도 없다. 나는 침상에 곧게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설령 현대에서 두어 달을 보낸다 하더라도 무림에서는 기껏해야 세 시진 남짓한 짧은 시간.
창밖 저 멀리에서부터 빠르게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침소에 도착한 그가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현대로 떠난, 아니 깊이 잠들어 있는 내 모습일 것이다.
‘로그아웃.’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으며 익숙한 명령어를 읊은 다음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을.
삐비비빅!
– [로그아웃]이 실패했습니다!
– [시스템]이 당신의 [로그아웃] 명령어를 거부합니다!
– Error! Error!
– 시스템 오류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로그아웃] 기능이 비활성화됩니다!
– 알 수 없는 오류! [임시 점검]이 시작됩니다!
……뭐라고?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겼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러나 귓가를 파고든 시스템 음성도, 허공에 떠오른 수십여 개의 에러 메시지도 변하지 않았고 나는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혔다.
‘로그아웃 거부라니, 도대체 어째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아니, 있었긴 했지만 그건 중요한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을 때뿐이었고 그마저도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시스템 오류? 임시 점검?’
업데이트라면 모를까.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언제나 절대적이었던 시스템에 오류라니, 말도 되지 않는 일 아닌가.
“이게 무슨……!”
본능처럼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신음. 입술을 질끈 깨문 나는 마음속으로 쉼 없이 소리쳤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다.
아무것도.
연달아 이어진 명령어와 함께 우수수 쏟아져 나온 홀로그램 창에는 시스템 오류라는 글자만 선명했고, 이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멍하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아니, 굳이 꼽자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어느새 문 앞까지 가까워진 인기척의 주인이 침소로 들어오기 전, 한발 앞서 그가 불청객임을 인지시켜 주는 것.
“들어오지 마. 나 지금…… 빌어먹을. 아무튼 바쁘니까.”
볼 것도 없이 혁무진이라고 생각했고, 녀석이 아니라면 화룡각 대원 중 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조금 전 로그아웃을 시도했을 때처럼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달칵.
“한 핏줄이라 그런지, 이런 것까지 통하는구나.”
다음 순간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 아니 진위경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내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