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Magical Girl RAW novel - Chapter (110)
마법소녀 아저씨 110화(110/671)
110. 패러독스 패러다임 패러세이즘(1)
“여기도 오랜만이군.”
아무것도 없이 넓기만 한 광장.
그나마 눈에 띄는 거라면 중앙에 솟아오른 돌기둥이 있겠지만, 그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옛날엔 어떤 바보가 망치를 휘둘러 즉석에서 만들어 낸 돌조각이 잔뜩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없는 평범한 광장일 뿐.
약속 시각까지 주변을 둘러보며 과거를 추억하려 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어 지루할 뿐이었다.
이런 데를 약속 장소로 삼다니.
주변에 적당한 장소가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럴 거면 같이 왔으면 됐던 것 아닌가.
무슨 ‘여자는 준비할 게 많아서 말이죠.’ 이딴 소리를 하고 있어.
제 딴에는 농담이겠지만, 이어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꺼림칙할 뿐.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 혼잣말을 내뱉고, 광장 중앙의 기둥을 등받이 삼아 꿇어앉았다.
기다린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질퍽.
어떠한 소리 없이, 백색 소음조차 없던 침묵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끈적거리는 것이 움직여 오는 소리.
“왔냐.”
혼잣말을 내뱉으며,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색색의 간호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다.
“…개성 있긴 하군.”
여기서 지내던 동안 흔히 보이던 흰색이나 검정뿐 아니라.
빨강부터, 보라까지의 형형색색의 무지개색부터 시작해.
금속 재질이나, 무광, 투명색까지.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군대처럼 일시 분란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수간호사들 수가 저리 많았나.
다 합치면 일개 중대는 될 것 같아 보이는 숫자.
저것조차도 절반 이상은 아직 지부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 하면,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천천히 광장으로 진입하던 그것들은 대열의 끝이 광장에 진입한 순간 좌우로 흩어지며 빠르게 사라졌다.
포위진인가.
전투를 상정한 듯, 수간호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손에 구현하며 빠르게 흩어졌다.
그렇게 간호사들이 사라지고 남은 빈자리. 길게 뻗은 거리에서, 가죽옷의 그녀가 걸어왔다.
방독면 안쪽 유리는 들숨으로 뿌옇게 흐려져 표정을 읽을 수 없고, 항상 몸을 조이고 있던 가죽 벨트는 모두 풀려서는 길게 늘어져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으며. 테크웨어의 특징인 많은 주머니에는 광택 나는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의 완전한 전투태세.
아무래도 진심으로 싸울 생각인 듯싶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제 있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 * *
“아저씨. 내일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어요?”
“내일? 내일은 일 끝나서 돌아갈 예정이잖아.”
처음 임무를 받을 때는 기한 내에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옥시모론을 끌어들였지만, 여러 변수가 겹쳐 보고서 작성도 감찰도 예정에 맞춰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아직도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감찰을 맡긴 건진 모르겠지만, 보고서를 읽고 놀랄 현석이의 얼굴을 상상하니, 나름 즐거워졌다.
“이야기하다 갑자기 웃지 마시고요. 여기 있는 것도 내일이 마지막이라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비행기 시간이야 널널하니 상관없다만, 꼭 여기서 해야 하냐?”
“예, 여기서만 할 수 있어서요.”
여기서만 가능한 거라.
잠시 기억을 뒤져보았지만, 딱 ‘이거다.’하고 떠오르는 게 없다.
주변에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겠는가. 관리국 지부야 나름대로 즐길 거리가 있긴 하지만, 장기간 거주하는 직원들을 위한 편의시설일 뿐. 비슷한 것을 찾자면 서울에 돌아가고도 얼마든지 있다.
이 주변에만 있고…. 나름대로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장소라면….
“거기 할아버지 음식점 다시 가게? 이미 떠난다고 작별 인사도 끝냈잖아. 마음에 걸리는 거 있어?”
단골이 된 음식점밖에 없었다.
관리국의 사내 식당이 맛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각국에서 모이는 직원들을 배려한 것인지, 자극이 부족하기에 직원들도 자주 가는 가게.
“아뇨, 좀 더 단순한 거예요.”
그 말과 함께, 옥시모론이 얼굴을 내 쪽으로 쭉 내밀었다.
방독면 렌즈 너머로 보이는, 빛나는 미소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랑 진심으로 싸워 주세요.”
* * *
“어제 대답을 못 들었다만.”
어제 그녀는 내 질문에 미소를 띠며 얼버무릴 뿐이었다.
우리가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할 리는 없으니, 이것이 대련임은 확실. 그렇지만, 그 이유를 모르겠다.
대련이라면 정식으로 관리국에 신청을 넣어서 하면 된다. 요즘 영웅들은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것에 관심이 없어 자주 쓰이진 않지만, 여전히 힘을 숭상하는 무인도 있고, 새로운 영웅 중에서도 백시현처럼 이레귤러는 있기 마련.
혹여, 수술실을 무대로 하고 싶은 거라면 장소를 지정하면 된다.
그러니 나로서는 이런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따라가….
“아저씨. 지금, 왜 대련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계시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약간 무감정한 목소리로.
너무도 무감정한 목소리에 놀라 그녀의 표정을 읽으려 했으나.
그 행동 또한 그녀가 뒤집어쓴 방독면에 막혀버렸다.
“…옥시모론?”
“옥시모론이 아니에요.”
그녀가 다가왔다.
벨트를 질질 끌며.
“저는 리브. 이 수술실의 주인이자. 집도의. 그리고….”
그녀가 메스를 손에 들었고.
“이 자리에서 어떤 영웅에게 구해졌던 여자아이랍니다.”
그녀가 날아들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키잉.
귓가에 얕게 깔리는 금속음.
갑자기 뛰어오른 옥시모론의 메스를 막기 위해, 급히 망치를 소환하면서 생긴 소리.
“칫.”
그 소리를 들으며 혀를 찼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공격이 들어와 반사적으로 막긴 했지만, 아직 옥시모론을 공격할 생각이 들진 않는다.
“야! 이게 무슨 짓….”
오한이 몰려온다.
뭔가가 온다.
그것을 느낀 순간,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빠르게 고개를 틀고, 망치를 목가에 세워 올렸다.
키잉.
또다시 귓가에 울리는 금속음.
시야를 잠식하는 은빛 번쩍임.
옥시모론의 오른손에 들린 메스가, 내 경동맥을 노려왔다.
날 죽이겠다는 명백한 의지가 담긴 일격.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검고 검은 방독면뿐.
아무래도, 각오해야 할 것 같다.
생각과 동시에, 의식을 바꾸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오랜 친구가 아닌, 날 살해하려는 누군가라고.
쿵.
그 생각과 동시에 리미터가 해제되었고, 곧바로 망치를 휘둘렀다.
콰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
“읏.”
아픔을 참는, 그녀의 목소리.
내가 곧바로 공격하리라 예상하지 못한 걸까. 그녀는 빠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망치가 더 빨랐고, 그 결과로써 그녀의 팔이 부러졌다.
본래라면 이 시점에서 전투가 끝났어야 했지만. 옥시모론도 역전의 용사라는 것일까.
옥시모론은 팔이 부러지는 와중에도 주사기를 던져 나를 견제하며, 망치의 힘을 역이용해 뒤로 도망쳤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렇지만.
“느려.”
나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잡고자 발을 굴러 돌진했다.
그녀가 도주하는 속도보다 내가 땅을 질주하는 속도가 더 빨랐기에. 그녀와 마주쳤다.
바로 돌진하여 자세가 엉거주춤했지만, 이런 자세에서 망치를 휘두르는 것은 이미 익숙했기에, 몸은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았고.
그대로, 그녀의 몸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노리는 것은 팔이나 다리.
상대를 무력화시키고, 전투를 끝낼 수 있는 부위들.
한 번에 끝낸다.
옥시모론을 적으로 인지하고 의식을 바꿨음에도, 나는 그리 생각을 이어 나갔다.
옥시모론을 죽이는 것은 논외, 그렇다면 전투를 빠르게 끝낸….
질퍽.
붉은 뭔가가 지면에서 솟아올랐다.
시선이 마주친다.
내 앞을 가로막은 채, 나를 보고 씩 웃고 있는 간호사.
…그렇군. 간호사는 수술실 내부를 이동할 수 있었지.
그것을 떠올렸다고 해도, 대처할 방법이 없다.
빠르게 옥시모론을 끝내고자 극도로 가속한 상황인 데다가.
붉은색의 간호사는 자신이 충돌하는 것도 상관없는 듯, 내 바로 앞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대로, 땅을 걷어찼다.
조금이라도 더 가속하고자.
붉은 수간호사와는 안면이 있다. 아침에 늦잠을 자면 아침을 가지고 와서 나를 노려보았었지. 그렇기에 박살 내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이해해다오.
그대로 수간호사를 들이받았다.
펑.
물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끈적이는 점액이 흩날린다.
저항감이 느껴진다.
끈적이는 무언가를 강제로 돌파하며 생긴 저항감.
단순히 기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돌진 속도가 줄어들었으니. 그리고, 옥시모론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질퍽. 질퍽. 질퍽.
그 기묘한 거품 소리와 함께, 그것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지면에서 솟아오른 이.
저 멀리에서 달려오는 이.
주인이 위험에 처함에 따라, 본능이라도 각성했는지, 인간형을 무너트리고 반쯤 점액질로 변해 질퍽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빨리 끝내야겠어.
옥시모론과 사투를 벌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지만, 저것들이 모인다면 생각보다 귀찮아질 것 같다.
붉은 수간호사 하나도 생각보다 저항이 격했는데 저 녀석들이 사방에서 날 포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빨리 끝내자는 생각에 다시 가속한 순간.
질퍽.
끈적이는 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강하게 당겨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돌진을 막을 정도로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속도를 늦추기엔 충분했고,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 힘의 정체를 확인했다.
웃고 있는 붉은 조각.
몸이 산산이 조각났음에도 주인을 지키고자, 남은 팔을 지면에 붙여 내 다리를 잡아당긴 것.
그로서 자신의 역을 다했다는 듯, 그것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얼굴에 시선이 쏠려, 잠시 내 행동이 늦어졌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0.1초도 되지 않았으리라.
그렇지만, 그 잠깐은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것들이 도착했다.
각자가 각각의 무기.
뼈톱, 메스, 오스테오돔, 강력 제세동기, 플라이어, 말렛, 드릴, 클리버, 전기톱, 고주파 발생기와 같은 의료용 도구를 들고.
그것들을 올바르지 않은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도구는, 이제 나를 파괴하기 위해 휘둘러졌다.
물론 그것들이 내 몸에 닿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최상위 간호사 다섯 정도가 A급 하위, 대부분은 B급 중위 정도인가.
너무나도 명백한 실력의 차이.
S급과도 충분히 겨뤄 볼 만한 A급 상위나 최상위면 모를까, A급 하위가 다섯이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검은 간호사가 휘두르는 전기톱은 내 망치를 긁으며 팔에 약간의 상처만을 남겼고, 회색빛 간호사가 들고 날뛰는 전기충격기는 내 몸에 닿지조차 못하였다.
정말, 의미가 없는 공격들이지만.
그 행동에는 의미가 있었다.
백여 명의 지성체가 달려들어 제대로 된 상처조차 입히지 못하고, 내가 망치만 휘둘러도 두셋씩 터져나갔지만.
그들은 나를 붙잡았다.
전투계 S급 최상위 중 넷.
영웅의 극한에 이른 나를.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백시현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무기를 잘 다뤘다는 점.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왔다는 점.
다수를 부리는 물량계 영웅과 다르게 공격이 단순하지 않았다는 점. 그러면서도, 어지간한 파트너 이상으로 연계가 좋았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나를 붙잡는 데 성공했고.
또다시 은빛 섬광이 날아들었다.
간호사들과 질적으로 다른, 최상위 영웅의 힘이 담긴 수많은 주사기가, 간호사의 몸을 관통하여 날아들었다.
옥시모론인가.
아무래도 팔을 회복한 모양이다.
그 말은, 눈앞의 간호사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해냈다는 이야기.
몸에 박힌 주사기 몇 개를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은 수간호사는 절반 정도.
옥시모론은 부러진 팔을 복구했다.
내 상황은….
몸에는 잔 상처 몇 개.
옷 손상.
그리고, 옥시모론이 투척한 주사기에 들어있던 약이 수면제나 진정제 계열이었는지.
조금씩 졸려오기 시작했다.
흠.
다 따져보면….
재수 없으면 지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