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Magical Girl RAW novel - Chapter (164)
마법소녀 아저씨 164화(164/671)
164. 붉은 군대
“그러니까, 그렇게 멀리 있으면 차를 타자고.”
성난 내 목소리가 모스크바의 고요하고 넓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안 됩니다.”
“그러니까. 왜 안 되는데? 내가 타면 또 차 터질까 그러냐?”
“아무리 이하람 씨라 한들, 두 명이 차를 탔다고 터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차가 왜 필요합니까? 그냥 달리는 게 더 빠른데.”
옳은 말이다. 자동차 따위보다 우리 둘의 달리기 속도가 더 빠른 건 당연한 이야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여긴 시베리아 벌판이 아니라고. 귀찮아 죽겠네.”
모스크바 한복판이라는 점.
가뜩이나 밟고 뛰어다닐 빌딩이 없어, 보행자를 피하지도 못하는데 속도를 냈다간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러니 우리 둘은,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뭐, 좋은 기회 아닙니까? 가끔 이렇게 모든 걸 내버려 두고 천천히 걷는 것도 나쁘지 않죠.”
“이 속도로 가다간 일주일은 걸어야 도착하겠다.”
비행기를 타고 오길래 모스크바 근처에 있는 줄 알았더니. 뭐? 북극해 근처에 있다고?
아니 그럴 거면 오던 도중 비행기에서 내려달라고 하던가.
귀찮게 모스크바까지 와서 왜 삽질을 해야 하는 건지 원.
“시가지만 벗어나면 되잖습니까. 천천히 가죠. 천천히.”
천천히는 개뿔.
“차가 싫으면 지하철도 있고….”
결국, 그 느긋한 모습에 폭발한 나는 입을 열며 분노를 쏟아내려 했으나.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러니, 이번은 제 말을 들어주시길.”
내 친우는 모든 말을 틀어막는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아. 그래. 미안. 잠깐 잊어버렸다.”
내가 여기 온 이유도, 내 옆에 있는 친구가 어떤 마음으로 그곳을 향하는지도.
소련에 대한 짜증과 사라지지 않은 감정을,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친우에게 내뱉었다.
어휴. 멍청한 단세포야.
감정을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고 매번 자문자답하면 뭐 하니, 매번 이렇게 중요할 때 감정에 잡혀서 중요한 걸 날려 먹는데.
후우.
한숨을 내쉰 후, 끓어오르는 짜증을 삭히고자, 차갑게 식힌 금속 막대를 악물었다.
이빨과 혀를 타고 전해지는 시베리아의 차가운 냉기.
기분이 한결 낫군.
“그럼 이렇게 걷기만 하지 말고, 기왕 모스크바에 왔으니 식당도 좀 들리고 하지 그러냐.”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기분 나쁘게. 동양권에서는 안 하던 일을 하면 죽을 때가 됐다고 하던데, 곧 죽을 생각이십니까?”
…이놈 말본새 좀 보게.
“야. 네가 울적해하니 좀 관광도 하고 그러자는데 이러기냐?”
“아, 그런 의도셨는지요?”
라이브러리안은 그제야 내 배려를 알아차리고선,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답을 내뱉었다.
이어, 혼잣말을 시작했으나.
“흠. 전 개인적으로 소련 쪽 음식은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죠. 그렇다고 즐길 거리라고 해 봐야…. 이미 반쯤 군사 도시가 된 모스크바에 얼마나 있을는지….”
내용이 가관이구만.
하. 친구가 배려를 해줬는데, 음식 취향이 아니시란다.
망할 이과생 양키놈. 이래서 네가 나 말고 친구가 없는 거야.
터벅. 터벅.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바보 한 명과.
그걸 친구랍시고 불쌍하게 쳐다보는 정신 상태가 양호한 마법소녀.
그 둘의 발걸음이 계속해서 이어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저기 일반 음식점이 보이는군요. 어디, 한번 들어가 볼까요.”
라이브러리안이 갑작스레 목소리를 깔며, 길가의 음식점을 가리켰다.
얼핏 보면 자연스럽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부자연스럽게 느낄 정도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붉은 안광을 깜빡이며.
“아, 그러지 뭐. 어차피 내가 아는 모스크바 맛집은 여기서 정반대에 있으니.”
그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맞장구를 치며 음식점을 향해 발길을 틀었다.
어딜 보아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음식점을 향해.
* * *
우리를 제외하면, 손님이 단 둘뿐인 음식점. 거기서 식사를 하며 어마어마한 불만에 잠겨있다.
“음식이 영 아냐.”
입안에 담긴, 괴상한 맛을 보드카로 지워내며, 내뱉은 한마디.
“그럽니까? 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만.”
반대편에 앉아, 나와 같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그리 내뱉는 무감정한 기계 놈의 답.
내 오감이라면 맛이 간 지 오래기에, 음식에 대해서라면 보통 타인의 의견을 들어주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겠다.
“이게 까샤야? 까샤냐고.”
회색빛을 띤 희멀건 죽.
답도 없는 자칭 까샤를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불만을 퍼부었다.
“이 요리 이름이 까샤였습니까? 오트밀인 줄 알았습니다만.”
그 점이 이 요리의 문제지.
까샤랍시고 팔았는데, 나온 게 오트밀이야.
그것도 더럽게 구린 오트밀.
“그래, 네가 봐도 오트밀이지? 대체 향신료는 어디로 가고, 우유는 어디로 간 거냐?”
본래 까샤도 귀리에 물을 탄 음식이니 비슷하단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배곯을 때는 그리 먹는 것도 당연했고.
근데 여기는 식당이잖아. 망할 소비에트 놈들.
“저희 오트밀도 질 좋게 만들면 그리 만듭니다만.”
“이게 질이라도 좋아 보이냐? 그냥 물과 귀리를 1:1로 섞은 다음 끓인 것 같다만.”
“제 대학원생 시절 주식이었죠.”
아, 그러세요?
빌어먹을 엘리트. 빌어먹을 이과생.
그런 불만을 담고, 숟가락으로 까샤 비슷한 무언가를 휘젓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럼 다른 걸 드시지 그러십니까? 보르시도 있고, 양고기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마찬가지인 게 문제지.
“보르시? 이 시큼털털한 유사 식초 말이냐?”
“숟가락이 향한 방향으로 추론해보자면 그렇겠군요.”
“양고기는 이 힘줄 누린내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말하는 거고?”
“지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씹고 있는 걸 말한다면 그렇겠군요.”
그래, 이 폐기물 대잔치 중에 그나마 입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니까.
고기란 대단하구만, 이렇게 망쳐놔도 입에는 들어간다니.
그렇다고 한들, 입이 더러워지는 것은 변함없었기에, 이 식탁 위에서 가장 성스러운 물건을 쥐어 들었다.
성스러운 병의 주둥이를 손아귀에 쥔 채, 엄지를 튕기자.
뽕.
신성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뽑혀 나갔다.
투명한 병에 담긴, 신성하고도 투명한 액체.
병 주둥이와 내 주둥이를 맞추고, 단숨에 들이켰다.
꿀렁. 꿀렁.
아름다운 소리가 입에서 귀로 전해지고.
화려한 따스함이 입안을 맴돌다가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잠깐의 행복.
그러나, 병에 담긴 성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병을 입에서 뽑아냈다.
뽕.
“…보드카를 그렇게 마시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요.”
“이 쓰레기더미에서 어떻게든 입을 헹구려면 별수 있냐? 아, 보드카 한 병 더 가져다 주세요.”
소련 놈들이 술은 잘 만든단 말이야.
눈앞에 놓인 음식 쓰레기와 비교하자면, 천상의 맛이나 다름없는 술.
평소에도 보드카를 즐기지만, 지금 먹는 술만큼 감미롭진 않으리라.
“음식이 쓰레기라고 하신 것치고는 나름 즐기시는 것 같군요.”
역시 들켰나. 너무 기쁘게 보드카를 마신 모양이다.
“그야, 음식으로써는 폐기물이지만, 안주로써는 최저 합격점은 되거든.”
이 까샤도 씹는 알맹이가 남아있어서 맛은 별로지만, 안주로 먹기에는 둔한 혀를 일깨워 주고.
보르시도 메인치고는 영 완성도가 그렇지만, 짠맛과 시큼함이 강해 안주로는 나쁘지 않다.
양고기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누린내는 꽤 술과 잘 어울리니.
그에 대해 난 동의하는 편이다.
“그건 다행이군요. 전 술을 배우려 아무리 노력해 봐도 잘 모르겠던지라 이해하기 힘들지만요.”
그래? 그럼 마침 잘되었네.
“살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돌아가면 내가 술이라도 가르쳐주마.”
나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술잔을 기울이는 방법은 알려줄 수 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 말한 라이브러리안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시죠.”
흠. 벌써 가게?
보드카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다른 손님들도 불편하신 모양이고.
“아. 죄송하지만 보드카는 됐습니다. 계산 부탁드려요.”
막 냉장고에서 꺼낸 듯한 차가운 술을 가져다주는 종업원에게 손을 내밀어 거절의 의미를 알린 후, 이어 카드를 내밀었다.
별다른 문제 없이 계산이 끝나고.
우리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식당 밖으로 나왔다.
잠시 실내에 있던 탓일까.
시베리아의 찬바람은 식당에 들어갈 때보다 무자비하게 우리를 흩고 지나갔다.
“어디가 좋겠냐.”
“분석 결과, 저 골목길이 좋을 것 같더군요.”
“그래.”
우리는 그렇게 짧게 대화를 나눈 후, 찬바람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며 골목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 * *
“이 골목이 맞나?”
“예.”
“…멍청한 양키놈들. 막다른 길인 걸 모르나 보지?”
귓가에 적들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우리가 누구며,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적.
“…뭐 하는 놈들일까.”
적들과 다르게, 극도로 낮춘 목소리로 라이브러리안에게 물었다.
“제 예상으로는 KGB 소속 영웅 같군요.”
KGB? 내 생각에는 아닌데.
그쪽 애들이 이렇게 멍청하게 일 처리를 할 리 없잖아.
타국 영웅을 미행하다가, 같은 식당에서 밥까지 먹고, 그대로 쫓아 온다고?
유치원 애들한테 미행을 시켜도 그것보단 잘하겠다.
더욱이.
“KGB 애들이 뭣 하러 이러냐, 걔들 특기인 아무 말 대잔치 서류 던지기 써서 구속하면 충분할 텐데.”
“그건 저야 모르죠. 다만, 저들이 통신 중 사용하던 코드 네임이 KGB 타입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그냥 KGB를 동경하는 바보들 아닐까.
“뭐… 붙잡아 보면 알겠지.”
“도와드릴까요?”
“길만 막아줘.”
짧은 작전의 교환이 끝나고.
쿵.
곧바로 힘을 해방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뭣?!”
쿵.
머리가 붙잡힌 덩치 큰 남성이 벽에 박히는 소리.
일단 한 놈.
쿵.
전투 자세를 취하려다, 주먹에 얻어맞고 쓰레기통과 충돌하는 소리.
“본…본부! 예상보다 훨씬 강….”
쾅.
골목을 벗어나, 도망가려던 남자가 스스로 벽에 부딪히는 소리.
“아…?”
자신의 힘을 사용해서 부딪힌 탓일까.
기절하지 않은 채 코피를 흘리고 있는 그 남자는, 눈앞에 갑작스레 생겨난 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다르잖아! 분명 아무 기록도 없는 영웅….”
최후의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일까.
남자는 통신기를 향해 미친 듯이 악다구니를 쓰고 있지만.
그 통신은 절대 닿지 않을 것이다.
지직—. 지지지지직.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하듯, 남자의 손에 들린 통신기에서는 노이즈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자. 그럼 심문을 시작해 볼까.
“뭐 하는 놈이냐.”
“양키 놈들에게 해줄 말은 없….”
우직. 콰득.
플라스틱이 부서지는 소리.
생물체의 단말이 부서지는 소리.
“아아아아아악!”
통신기와 손이 부서진 남자가, 내뱉는 비명.
“다시 묻겠다. 뭐 하는 놈이냐.”
“…허윽. 억….”
남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남자를 나는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헉….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없다.”
마침내 남자는 고통을 가라앉힌 듯, 비장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우리 붉은 군대가 네놈들 따위에 무너질 줄 아느냐. 마로조프 미하일로비치 동지께서는 반드시….”
뭐라 말하든 별 관심 없는데.
“라이브러리안. 이놈 말 더 듣기 싫은데, 찾았냐?”
“예. 찾았습니다. 자료도 모두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이놈들 계획이 뭐든?”
“쿠데타를 일으킨 후, 저희 둘을 인질로 해서 관리국과 협상한다는 계획이더군요. 저희를 노리고 일을 벌인 게 아니라, 아무 영웅이나 상관없던 모양입니다.”
재수도 없는 데다가, 미치기까지 한 놈들이네.
관리국에 칼을 내밀어? 그 짓 했다가 소련 상층부가 갈려 나간 게 얼마나 됐다고.
“…그…그걸 어떻게.”
아, 그래서 이따위 놈들이 나선 거구나.
그 숙청을 겪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녀석들이나 참가한 계획.
그리고 그 계획은.
“라이브러리안. 확보할 수 있냐?”
“그거라면.”
펑.
소비에트 시내 어딘가, 아마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들리는 폭발음.
소리의 원천을 찾아 고개를 들자,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흰 연기가 보여왔다.
“이미 처리했습니다.”
라이브러리안 한 명에게 저지당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