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Magical Girl RAW novel - Chapter (194)
마법소녀 아저씨 194화(194/671)
194. 마열차(3)
문을 넘기 직전, 저 빌어먹을 것을 처리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찰나.
“■■—–■.”
갑작스레 알’셸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쏟아내었다.
“뭐 하냐.”
“잠시 기다려 주시길.”
그렇게 손을 휘저은 지 10초가량 흘렀을까.
파직.
어두운 방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일며, 푸른 빛이 방을 가득 채웠다.
“…정말 뭐 하냐.”
“단순한 뒤처리입니다. 이하람 님이 다하지 못하신 일을 한 것뿐이죠.”
흠?
“조금 전 연기를 처리했습니다. 이제 재생이고 부활이고 뭐고 없죠.”
“무슨 변덕이냐.”
네놈이 그럴 리 없잖아.
“단순한 서비스입니다. 이하람 님이 제 말을 들어 주신 것도 있고….”
알’셸은 말끝을 흐리며, 보이지 않는 천장. 저 너머 어둠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답지 않게, 감정에 젖은 채.
* * *
“알’셸?”
내가 그리 질문을 던지자.
“예.”
이상하리만큼 순수한 어투로 그는 곧바로 답을 해왔다.
아마, 내가 자기 말을 순순히 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이리라.
그렇기에, 나 또한 그에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질문을 던졌다.
“뭐냐 여기.”
“문이 엄청 많아요! 포요!”
“….”
질문에 알’셸이 난처해하며 촉수를 꼬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 것은.
아마,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리라.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멀쩡하지 않고, 그 분위기까지 해괴하기 짝이 없었으니.
지금까지 이계처럼 규칙성이 없다는 의미의 해괴함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규칙적이어서. 의문이 생길 뿐.
끝없이 늘어선 붉은 카펫.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복도.
상하좌우로 늘어선 똑같이 생긴 수없이 많은 문.
슬쩍 오른쪽의 문을 바라보니, 문패엔 난생처음 보는 글자가 적혀있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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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아래의 문을 보자.
그 또한 같은 방식으로 적혀있었다.
단지, 가장 뒤에 달린 1이 4였을 뿐.
그럼 위쪽은 2고, 좌측은 3이려나.
흥미가 돋아, 위아래를 살펴보니. 예상대로 그리 적혀있었다.
노크라도 해 볼까 했지만, 왠지 건드렸다간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잠시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이계의 무질서함에 지친 심신을 안정시킬 때쯤.
“저나, 그 만나셨던 분이 이걸 마열차라고 했던 것 기억합니까?”
마침내 알’셸이 입을 열었다.
“그랬지.”
“그런데, 그 괴상한 벌레 덩이는 인공세계 데미우르고스라 말했죠.”
“끝나면 깨워 주세요. 포요.”
“그랬…던가?”
솔직히 기억도 안 나는데. 관심도 없고.
일단 저 빌어먹을 운호는 잠든 김에 주머니에 처박아두고.
“예, 뭐, 별 상관없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할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일 뿐이니까요.”
그리 말하는 알’셸은 저 무한한 복도를 향해 걸어가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일단, 걸으면서 이야기하죠. 계속 거기 서 있을 순 없으니까요.”
알’셸이 묘하게 안쓰러운 분위기를 둘렀기 때문일까. 나는 그에 응하며,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데미우르고스. 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그것은 이하람 님이 지구의 존재이기에 그리 번역된 것입니다. 이계의 번역은 참으로 오묘하죠. 혹시, 그 단어의 뜻을 아십니까?”
“몰라.”
뭔가 시꺼먼 이름 같긴 한데.
“대단한 이름은 아닙니다. 설명하기 좀 복잡하긴 합니다만…. 요약하면. 거짓된 악신이라 할 수 있겠군요.”
거짓된 악신이라. 꽤 흥미로운 주제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데. 이름이야 막 붙일 수 있는 거 아니냐.”
당장 뇌신만 해도 번개의 신인데, 갸가 무슨 신이라기엔 한참 모자라지.
“꽤 중요한 요소입니다. 지금은 마열차라 불리는 이 거체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알’셸은 그리 말하며, 분홍 그라데이션이 섞인 흰 피부를 띄었다.
그는 천천히 팔을 뻗어, 녹색으로 물든 벽지를 쓰다듬었다. 마치, 애완동물을 쓰다듬는 것처럼. 자비롭게.
“거짓된 악신. 그것은 그들을 비방하고자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약간의 분노가 담긴 목소리, 그렇지만 피부색은 여전히 흰색과 분홍빛인 채였다.
알’셸이 말을 끝내며 벽에서 손을 떼고 다시 걷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를 따랐다.
그렇게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엄청난 가속이 일어났다.
문은 뒤편으로 밀려나고, 복도는 그 속도 탓인지 회색으로 물들었다.
그렇지만, 우리 둘은 단순히 걸을 뿐.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복도 전체가 뒤로 밀려 나갔다.
“그들에게 세계를 잃은 자들이. 탈출하여, 힘과 기술을 모아서 만든 거대한 인공세계.”
잿빛으로 가속한 세계 속에서. 알’셸은 계속해서 말을 자아냈다.
“세계를 잃은 자들의 거주지, 끝없는 이계를 떠도는 규칙의 장소.”
조금씩, 조금씩. 알’셸의 목소리에 감정이 잦아들었다.
“저 너머의 존재에게 칼을 박을 자들을 위한 훈련소.”
그에 맞춰, 가속된 복도의 속도 또한 점차 느려졌고, 그 덕에, 어떤 문에 달린 문패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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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수많은 자가 스스로를 단련했던 장소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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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와 관련 없이, 순수한 기술로 만든 물질 세계의 피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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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은 타락하여. 자기 보신과 탑승자의 권태만을 위해 존재하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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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그 문패에 달린 손잡이를 알’셸이 돌렸고.
그는 열린 문을 붙잡으며 도어보이처럼,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 종족의 마지막 유산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하람 님.”
공손하게. 정말로 공손하게.
그답지 않게.
* * *
그가 열어준 방은, 어딘가와 똑 닮은 방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결사의 어떤 방.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알’셸의 사무실.
단순히 형태만 닮은 것이 아닌지. 알’셸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몸을 움직여 커피를 끓이기 시작했다.
덧붙여, 내가 곧바로 자리 잡은 소파 또한,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푹신함 그대로였고.
“과자도 있어요?”
더더더 덧붙여, 운호는 알’셸 옆으로 달려가 그리 물어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저걸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처넣겠지만, 이번만큼은 조용히 참아 주었다.
가륵. 가르르륵.
바삭. 바삭.
커피콩 갈리는 소리.
식탁 위에 자리한 운호가 비스킷을 씹어 먹는 소리.
이어, 물이 끓는다거나. 주륵 하고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퀴휴우우 키휴우.”
방 안에서 입을 여는 것은, 배를 채우고 태평하게 잠자는 운호뿐이었다.
나도 저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으면 좋겠네.
다리를 꼬고, 커피를 내오는 것을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달칵.
마침내, 커피잔 두 개가 식탁에 놓이고, 알’셸이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달칵.
내가 먼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이계에서 잠깐 지내, 모든 자극에 민감해진 탓일까.
쓴맛과 미미한 단맛. 그리고, 희미한 뒤끝이 혀를 감돌았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커피의 맛.
그에 조금 기운이 나, 다 들이키지 않고 다시 컵을 내려놓았다.
반대편에 앉은 알’셸은 유심히 나를 바라보더니, 잔이 놓임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지 않습니까?”
“어떤 것 말이냐?”
“이 방이 왜 제 지구에 있는 사무실과 똑같이 생겼냐 든지. 데미우르고스의 정체라든지. 왜 여길 탔냐든지. 이것저것 있잖습니까.”
알’셸의 말꼬리가 길어진 것을 보아하니, 오히려 저 녀석이 나한테 말하고 싶나 본데.
그렇지만, 나한테 남의 한탄을 들어주는 취미 따윈 없다. 그것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상관없는 고해성사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듣는 것이 아닌, 대화를 하고자 입을 열었다.
“대충 예상은 가는데. 이 숙소는 자기가 사는 장소를 모방하거나 뭐 그런 거겠고, 데미우르고스는 네 말대로 이계에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방주 뭐 그런 거겠지. 탄 건…. 안전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 들어올 땐 힘들더라도, 나갈 때는 쉽다든가.”
그 모자이크 여자의 장소와 정반대로 말이지.
“대체로 옳군요. 그럼 자세한 이야기와 향후 계획에 앞서, 잠깐 운호를 깨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는 녀석은 왜?”
그냥 놔두지?
저 녀석도 피곤해 보이는데.
“좌표를 확인해, 마열차에서 하차할 타이밍을 계산해야 하니 말이죠. 아무리 안전하다고 한들, 평생 여기 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도 그렇군.
알’셸의 말에 납득한 나는, 운호를 깨우고자 커피잔을 손에 들었다.
“웅냐 웅냐.”
마침 운호는 천장을 향해 드러누워 입을 웅얼거리고 있었고.
“일어나라.”
쪼르륵.
그 좁은 입을 향해, 약간의 커피를 흘려 넣었다.
“끄르르르르륵. 크학? 뭔가요?! 수중 이계침식이라도 일어난 건가욬?!”
그러자 운호는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물론, 입에 들어갔던 커피를 사방으로 기침하며 뱉어낸 것은 덤으로.
아깝게.
내가 한 일이긴 하지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정말, 이계에 잠식된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자극에 굶주렸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알’셸의 커피에 아깝다는 생각을 품게 될 줄이야.
뭐, 그건 어쨌건.
“잘 잤냐?”
“아직 졸린 데요. 방금 뭐였죠?”
음. 아직 졸립구나. 근데 숙제를 끝내기 전까지는 못 자.
“운호야.”
“네?”
“좌표 마법 쓸 수 있다고 했지?”
“그럼요!”
“그럼 그거 성공할 때까지 시전하면 자도 돼.”
“…성공할 때까지요? 성공률 1%인데요?”
“대충 100번만 하면 되겠네.”
“아… 그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독립 시행인지라. 실제 100. 읍!”
대추야자를 튕겨 옆에서 끼어드는 문어 놈의 입을 틀어막았다.
망할 이과 문어는 나가 죽으시고.
“일단… 해 볼 텐데…. 끝내면 자도 돼요?”
“그래, 결과는 알’셸한테 알려주고.”
“우웅. 알겠어요.”
그 말이 끝나자, 운호는 팔을 번쩍 들며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번쩍, 콰직.
번쩍, 콰직.
번쩍, 번쩍, 쾅.
…마법진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폭발도 하네.
저런 마법일지는 몰랐지만, 이미 시킨 것을 충실히 시행하는 운호에게 뭐라 할 마음이 들지 않아. 다시 알’셸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 그럼 뭘 말하고 싶었냐.”
“음. 우선, 이 데미우르…. 쓸데없이 긴 이름이니 그냥 마열차라 호칭하겠습니다. 마열차에는 특이한 기능이 있습니다.”
“어떤 기능?”
“아까 이하람 님이 방주라고 간략히 말씀하셨습니다만, 마열차는 방주의 역할만을 하지 않습니다. 적을 무찌를 이를 벼려내는 훈련장이기도 하죠.”
흠.
“벼려내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화폐죠.”
팅.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와 함께, 알’셸의 머리 위에 기나긴 문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문자는 문에 달린 문패와 마찬가지로 읽을 수 없는 문자였지만, 뜻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숫자. 대략 40~50 자리는 되지 않을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지구에도 있는 말이었죠. 그 말 그대로 마열차에 거주하며 먹고 살기 위해서는 화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화폐는 네 가지 행동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하는 알’셸은 네 개의 손가락을 편 후.
첫 손가락을 굽혔다.
“첫째. 거래. 폭력이든 실제 거래든 뭐든 좋습니다. 다른 한쪽에게 화폐를 건네주는 거죠.”
팅.
또다시 그런 소리가 들리고, 알’셸의 숫자가 줄어듦과 동시에.
번쩍, 번쩍, 우웅.
“와! 벌써 성공…. 어라? 이 숫자는 뭐죠?”
펑.
엉뚱하게도, 식탁 한구석에서 마법을 펼치던 운호가 폭발했다.
머리 위에, 약간의 숫자를 남기고.
…재수도 없지.
잠시 그런 생각을 품고, 옆자리에서 일어난 대참사를 무시한 채, 알’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셸은 운호의 그 재수 없음에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곧 표정을 고치고 손가락을 굽혔다.
“둘째. 훈련입니다. 마열차의 거주 구역 밖에서는 수많은 괴물이 있죠. 그걸 퇴치하면 됩니다.”
“그 괴물은 어디서 나오는데?”
“…처음 여기 올 때 그 시험들을 기억하십니까?”
“그걸 기억 못 하면 사람이게?”
또 열불이 나려고 하네.
“본래 시험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그것은 어찌 되었건. 마열차가 이계를 움직이며 삼키는 것은 시험을 받는 지성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거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물자들, 지성 없는 짐승이나.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물들이 있죠.”
…그냥 다 처먹는 괴물이란 거네.
그리고 겸사겸사 그거 처분용으로 탑승자들을 사용하는 거고.
“그래 이해했어. 다음으로 가자.”
내 말에 알’셸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굽혔다.
“셋째. 기여입니다. 마열차의 유지를 도와주는 것이죠. 첫 방에서 만났던 그 검은 연기가 있겠군요. 물론 물자 생산 등도 있지만, 이것은 1번과 겹칩니다. 전투계열이 아니더라도 먹고 사는 방법은 마련해 줘야 하니 말이죠.”
그에 대해서는 뭐라 따로 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셸 또한 별 관심은 없는지 마지막 손가락을 굽혔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처음으로 알’셸이 말을 망설였다.
이것을 꺼내고 싶지 않은 듯.
잠깐의 시간.
3초 남짓이었으나, 알’셸을 감싼 기운 탓인지 몇 배는 길게 느껴졌고.
“…강탈입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타인을 죽이는 것으로, 대상자의 화폐 일부를 얻을 수 있죠. 이는 둘째와 다른, 탑승자 사이에서만 이루어집니다.”
“흐응.”
솔직히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물론,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다.
잘 짜인 구조 아닌가.
방주랍시고 그저 사람들을 모아두는 용도가 아니고, 방주에 남고 싶으면 뭔가를 하라는 구조.
마치, 지구 사회에서 먹고살고 싶으면 일을 하라는 것처럼.
다만, 그것이 게임이나 판타지에서 볼 법한 사냥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평범한 사회라면, 소외자에게 지원이 있겠으나. 알’셸은 이것이 저 문어 놈들이 만든 유산이라고 했지.
그럼, 달성하지 못한 자에 대한 처분은 뻔하다.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고, 당연한 듯이 이계로 내던지겠지. 아니면, 일정 기간 수익이 없다면 거주하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든가.
그렇지만, 우리에게 있어 그게 문제가 되나?
“그래서. 그걸 설명해 준 의도가 뭐냐. 우리보고 나가서 벌어 오라는 건 아닐 거 아냐.”
당장 눈앞에 셀 수도 없는 숫자를 달고 계신 고인물 알’셸이 있는데.
“그렇죠. 화폐라면 썩어 넘칠 만큼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붕.
바람 소리가 들리고.
나는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알’셸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비꼬거나 하는 의도가 아니고, 진심이 철철 묻어나는 모습으로.
“…여기서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좋습니다. 절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알’셸의 피부가. 희게 물들었다.
“본래, 저는 이 유산을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긴 시간 동안 다시 만나지 못했죠.”
알’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그를 만나고 처음으로, 절실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어떤 거짓도.
어떤 광기도.
어떤 흥분도 없는.
순수한 그의 맨 목소리.
“그에 후회하고, 몇 번이고 찾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었죠. 당연합니다. 이계는 그런 장소니까요.”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여길 다시 만나게 되었고. 제가 떠날 때 존재하던 작은 뒤틀림이 얼마나 커져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조금 전 알’셸이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본래 시험은 저런 식이 아니었다고.
문어 종족이 만든 이상 분명 가혹했겠지만, 저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는 이야기.
“저는. 이것을 되돌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알’셸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내릴 때까지만이라도. 부디 협력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내리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는다면. 깔끔하게 포기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