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Magical Girl RAW novel - Chapter (507)
마법소녀 아저씨 506화(507/671)
506. 연속성
노력이란 무엇일까.
아마 할 때는 잘될 줄 알고 시간을 투자하는, 압도적으로 쓸모없는 시간 낭비를 이르는 단어일 것이다.
내 이런 말이 노력에 대한 폄하라고 말하든, 노력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반박하든, 아니면 편견이라고 주장하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래서, 오른손은 부패했고 온몸에 화상을 입으셨다고요? 아저씨?”
이 꼬락서니를 보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했건만, 이런 결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노력은 무가치하다.
나를 이런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박히게 만들어주었으니까.
아마 나는 곧 죽지 않을까.
“차라리 날 죽여라.”
“안 죽잖아요.”
그렇지.
사실 이쯤 되니 내가 어떻게 해야 죽을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뭐 이건 이미 몇 번이나 생각했던 것이니 넘어가고.
지금 중요한 사실은 내가 옥시모론에게 죽는 것보다 심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옥시모론이 뽑아낸 가죽 벨트에 몸이 칭칭 감긴 것은 뭐 흔히 있는 일이니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신변의 위험을 느껴도 이걸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암만 봐도 옥시모론이 여태 보아왔던 약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수상쩍은 무언가가 담긴 주사기를 볼펜 돌리듯 손위에서 빠르게 회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왜 약이 요즘 컴퓨터처럼 빨주노초파남보로 빛나고 있는 거지?
컴퓨터에 붙은 부품들이 온갖 색으로 정신 사납게 빛나는 것은 신경이 거슬릴 뿐이지만.
그와 비슷한 색으로 발광하는 무언가가 내 몸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목숨을 걱정해야 할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발광하는 약물은 잘 보면 압도적인 질량이건 점성이건 내가 모르는 무언가든 뭐든 가지고 있기라도 하는지, 옥시모론의 손 위에서 고속으로 주사기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액체가 움직이는 기색이 없이 잠잠히 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제가 분명히 절대 안정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말했었지.”
반백 년에 가까운 삶에서 우러난 지혜를 사용해 말을 자아낸다.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조용히 그 사람의 뒷말을 반복해주며 반성하는 척하라는, 지혜로운 처세술.
인터넷에서 봤다.
“대답은 잘하시는데, 그럼 이걸 제가 일어나신 이후 몇 번이나 말했는지 기억하시나요. 아저씨.”
음. 이건 뒷말을 못 따라 하는데.
역시 인터넷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세 번?”
“아쉽지만, 열 번도 넘었네요. 손가락이 모자라서 기억을 못 하시나 보죠?”
옥시모론은 그리 말하곤 실실 웃기 시작했다.
…웃음과 다르게 화난 것이 분명하지만.
당장 말투만 봐도 가시가 돋아 있지 않은가.
자 그럼 나는 옥시모론에게 어떤 대응을 해야 할까.
솟아올라라 반백 년의 삶이여.
나에게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줘.
“…흠.”
“왜 그러시죠. 아.저.씨.”
방독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옥시모론의 머리 어딘가에 분노의 혈관이 튀어나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내가 이런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처세술이 좋았다면 애초에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또 노력의 무의미함이 드러나는군.
평생 망치나 무기류 휘둘러봐야 뭐하나 싶다. 이런 상황에서 입을 여는 기술은 안 알려주는데.
다음에 제자 녀석들을 보면 싸움 기술보단 처세술 책 한 권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줘야겠어.
그리고 관리국 녀석들 입단속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도.
영웅의 진료 내역은 비밀이라길래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어느새 내 주치의로 지정된 옥시모론에게 모든 정보가 넘어갈 줄이야.
언제 내 동의도 없이 그런 계약이 체결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 내 자기결정권도 빼앗긴 건 아니겠지.
인장을 어디에 뒀더라.
아무튼, 그렇게 내가 기나긴 인생을 돌아보며, 걸어온 길이 잘못됨을 후회하고 절망하는 사이.
“그래서. 어떤 게 좋으신가요.”
“…뭐가.”
그냥 명예롭게 죽여줘.
이런 치욕. 더는 견딜 수 없다.
“이 선택지 중 하나 고르세요.”
그리 말하는 옥시모론은 손가락을 네 개 들어 올렸으니.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1번. 완전히 나을 때까지 의식을 잃고 푹 잔다.”
시작부터 고르기 싫어지는 선택지로군. 넘기자.
설마 이것보다 안 좋은 게 나오겠어.
“2번. 완전히 나을 때까지 의식만 남긴 전신 마비 상태에 빠진다.”
“…뭐?”
선택지 상태가 많이 미쳤는데.
너도 머리가 망가진 거니 옥시모론?
“걱정 마세요. 눈 정도는 움직이게 해드릴 테니까요. 요즘은 눈만 가지고도 조작할 수 있는 입력 장치가 많이 있거든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니.
차라리 첫 번째가 나을 지경이다. 야.
…남은 두 개는 더 낫지 않을까?
설마 저것보다 더 끔찍한 게 있진 않을….
“3번. 마법사 의회가 기술 지원한 폐쇄 공간에 감금당한다.”
…그거 시간 가속 왕창 때려 박은 미친 공간 아니었나?
말이 좋아 폐쇄 공간이지 아무것도 없는 독방이잖아.
세상에 이젠 인터넷도 없네.
여기까지 나열된 모든 선택지가 끔찍한 상황이건만.
수많은 위기 상황에서 날 구해준 본능은 아직 더 위험한 게 남아있다며 경종을 울리고 있다.
“…네 번째는?”
어쩐지, 옥시모른의 표정에 비틀린 미소가 떠오른 느낌이 들었다.
끝의 존재들처럼, 망가진 웃음이.
“4번. 이 약을 맞고 얌전해진다.”
그 말과 동시에, 옥시모론은 주사기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계속 오만가지 색으로 발광하는, 이계에서 온 색채와도 같은 무언가를.
“…무슨 약인데.”
물어봐선 안 된다.
들어서는 안 된다.
세상엔 알아선 안 될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올 바다와 접하며 알게 되지 않았던가.
세상엔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것들이 존재하며, 그로부터 시선을 돌려야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저 약의 존재 또한 내게 그런 것임이 분명하건만.
아직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여기까지 와서도 현실을 부정하며 도주하려는 내 가냘픈 정신이 이런 선택지를 택하고 말았다.
입 밖으로 문장을 내뱉음과 동시에, 나 자신의 파멸을 인지하면서도.
“아, 별거 아니에요. 라이브러리안 박사님이랑, 메테오르 씨, 그리고 누구더라. 괴인 결사 소속이셨는데. 무슨 독?”
드러그 독. 잔드레드로군.
점점 저 약의 위험성이 폭증한다.
“…아무튼, 개처럼 생기신 분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약이에요. 상대방을 얌전하게 만드는, 뭐 진정제 비슷한 약이죠.”
‘비슷한 약.’
절대 진정제같이 얌전한 약이 아니란 사실은 잘 알겠다.
그런 약은 이미 넘치도록 있는데 굳이 저런 라인업으로 새로운 약을 개발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특히 메테오르가 끼어있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 녀석은 이과도 아니잖아.
“…진정제 아니지?”
“뭐 효과는 비슷해요. 여성성을 강제 주입해 얌전하게 만든다. 성별에 따른 편견이라고도 하지만, 호르몬상에 그런 효과가 있긴 한걸요. 실제론 그런 효과가 메인은 아니기도 하고, 이게 호르몬도 아니지만.”
응? 뭐?
여성성이 뭐가 어쨌다고?
호르몬은 아니지만, 아무튼 뭐?
“…뭐?”
“아 말이 너무 길었나요. 맞으면 금방 이해하실 거예요.”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지금 다. 몽땅. 100%. 이해했거든?
“야! 옥시모론! 이거 풀어!”
아니, 진짜로 이건 아니야.
이 새끼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뭔 생각으로 저딴 걸 만드는 건데.
저런 걸 만들어서 대체 누가 좋아하는데.
가죽 벨트는 왜 또 이렇게 질겨?
제발 좀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시바님 야훼님 아부라미츠다님 브라만님 조상신님 염라대왕님 대충 아무나 좋으니까 저 좀 살려주세요.
정말 인생 최대의 위기니까 좀 와주라고 망할.
그렇게 실컷 발버둥 쳤건만.
“걱정하지 마세요. 효과가 영구적이진 않거든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신 조작 계통 약물이라 힘을 되찾으시면 쉽게 푸실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의 기억은 임마.
수치스러운 기억은 예수님이 원죄랑 같이 가져가 주신다든?
“응끼야아악!”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 수없이 많은 문장이 있지만,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비명뿐.
세상이 무너지는 압도적인 공포에 저항할 수 없는, 덧없이 작은 인간이 이성을 잃고 내지르는 비명뿐.
이런 비명도 저 약을 맞고 나면, 내뱉을 입과 함께 사라지고 말겠지.
저 약엔 말도 안 될 만큼의 절망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얌전한 여자아이답지 않으니 해선 안 된다든가. 날뛰는 것도 여자아이로서 보기 흉하니 안 된다든가.
그 외에도 내 얄팍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수많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먼 훗날 그 시기를 떠올리기만 하여도 수치심만으로 내 인격을 무너트리고 존재를 소멸시킬, 무시무시한 전략 병기로서 존재하는 약.
저 약의 존재 자체가 내 인생을 컨트롤하려는 거대한 음모 아닐까.
이번 일이 무사히 넘어가고, 기억을 봉인하는 것으로 나 자신의 인격을 어찌어찌 지킨다고 하더라도.
내가 만약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하면, ‘그때 찍은 동영상이 있는데 보시겠어요?’ 같은 식으로 협박하기 위한, 완벽한 내 전용 목줄을 만들 속셈임이 분명하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하며 잔혹하면서도 거대한 계획인가.
옥시모론은 고철 로봇 라이브러리안이나, 여자 옷 애호가 메테오르, 똥개 잔드레드 정도만 언급했지만, 흑막이 여럿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외형부터 변태인 성인 등급 문어 알’셸이나, 말보다 주먹이 빠른 광속의 주먹 뇌신이나, 이상할 정도로 내게 여성 옷을 입히고 싶어 하던 배은망덕한 한아빈, 마법소녀 옷을 내게 입힌 돼지 운호.
엊그제 소리친 관리국 직원, 어제 내가 쥐어박은 대머리 민간인.
그 외 기타 등등.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존재가 그 변태적 취향을 내게 들이미는 것이 틀림없다.
세상은 썩었고, 유일한 정의는 나 하나뿐인 절망적인 상황.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끔찍한 국제조약 위반 고문이 백주대낮에 펼쳐질 리 없다.
생각해라 이하람.
이 끔찍한 고문이자 인격 말살 세뇌 수단에서 벗어날 방법을.
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난 평생 프릴 흩날리는 샤랄라한 여자아이라는 끔찍한 과거를 떠안고 살아야 한단 말이다.
수많은 과거의 트라우마도 앞으로 펼쳐질 끔찍한 미래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벼울 것이 분명하기에.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어쩐지 세계가 느려지고, 사고가 빨라지는 느낌이 든다.
초집중으로 인한 사고 가속.
죽음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주마등과도 같은 감각.
그 속에서 나는 생각했고.
곧, 이 상황을 빠져나갈 가장 완벽한 답을 찾았다.
“…2번.”
“예?”
내 말에 주사기를 들이밀던 옥시모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내 승리는 확정되었다.
“2번. 전신 마비를 택하마.”
인터넷이라도 있으니 그게 어디냐.
몸이 불편하긴 하겠지만, 회복에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
어떠냐 옥시모론.
나는 네가 보여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다.
선택의 여지를 줌으로써 내 정신을 옭아매려 한 것 같지만, 그건 큰 실책이었어 옥시모론.
내 정신은 그런 협박 따위에 무너질 만큼 가볍지 않단다.
자 어서 하거라. 옥시모론.
몸의 치료를 위해서라면 그깟 전신 마비. 견뎌주마!
“자! 어서!”
그 누구도 떠올리지 못할 심오한 책략을 짜낸 나는 발버둥을 멈춘 채 기쁜 마음으로 옥시모론을 재촉했고.
“예, 약 들어갑니다.”
옥시모론은 내게 약을 주사했다.
손에 들린, 묵직한 무지개색 발광체를.
“….”
어라.
2번 선택지. 어디로 간 걸까.
“…어째…서?”
나는 흐려지는 의식으로, 마지막 단말마를 짜냈고.
옥시모론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꽁꽁 묶여계시는데, 선택지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아저씬 종종 굉장히 순진하시더라.”
제기랄….
결국, 막대한 지혜가 있다 한들 그걸 떠받들 힘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단 뜻인가.
정의가 사악한 악의에 처참히 유린당하며 무너지는구나.
그리 생각하며, 난 어두워져 가는 의식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검게 물드는 의식 너머.
이어질 미래에 시작될 치욕을 멀리 늦추고자.
그렇지만, 검은 심연은 날 점차 잠식했고.
사라져가는 의식의 사이에서.
나는 갈망했다.
힘… 더 큰 힘을….
모조리 조져버릴 힘을….
그렇게, 내 의식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