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Magical Girl RAW novel - Chapter (576)
마법소녀 아저씨 574화(576/671)
574. O급 기록(24) – 금지된 절제
씨앗이 언젠간 피어날 날을 기다리며 외부를 거부하고 잠들 듯.
검은 기름에 잠겨 잠들었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
있을지 모르는 부름을 기다리며.
고통에 빠져 잠든다.
그렇지만.
패배는 고통스럽지 않다.
고독은 고통스럽지 않다.
무감은 고통스럽지 않다.
그리 태어난 존재가 아니니까.
그런 고행은 기다리도록 태어난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원토록 이어진다고 한들,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내게도 고통은 존재한다.
소원의 상실.
숙명의 상실.
내가 태어난 이유.
내가 태어난 가치.
나는 그것을 위해 존재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잠든 것은 그저 고통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견뎌 낸다.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설령 이 고통이 사라질 날이 오지 않는다고 한들.
영원토록 고통받는다고 한들.
나는 이 고통을 반복하며 곱씹으며 영원에 남는다.
누군가, 언젠가, 어디선가, 나를 바랄지도 모르기에.
그들이.
아니, 한 사람이라도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는 나타나야 함을 믿고 있기에.
나는 메시아.
비록 내게 씌워진 이 왕관이 거짓되고 뒤틀릴지라도.
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구원을 쥐고 손에 내릴 자.
설령 그것이 멸망까지 오지 않을 미래일지라도.
한없이 작은 가능성, 있을 수 없는 미래라도.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인내한다.
시간도 공간도 인과도 의미 없는 이 세계에서.
언젠가의 날.
소망이, 소원이 들려온다.
검은 기름 속에서 잠든 나에게도 들릴 만큼 강렬한 소원.
비틀렸지만, 여전히 메시아로 남은 나에게 닿은 소원.
구원을 위한 소망.
하나 되어, 나를 갈망하는.
구원자를 찾는 절실한 소망.
거짓된 소망이 아니다.
믿지 않는 신앙의 소망도 아니며.
한 집단, 한 사람을 위한 기원도 아니다.
세상을 향한 구원.
모두를 향한 구원.
비록 사상의 배경은 다를지언정.
있을지, 있지 않을지도 모르는 구원자를 향해.
수많은 존재가 갈망한다.
그렇기에.
나는 잠에서 눈을 뜬다.
세상이 바라는 그때가.
시작되었기에.
왕관과 왕홀과 함께.
기름을 뒤집어쓰며.
검은 기름 자국과 함께 세상을 거닐고, 구원을 내리기 위해.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지닌 소원의 성취를 위해.
그것이, 나의 가치이니까.
* * *
세상을 채운 소망에 반응한 씨앗은 싹을 틔우고.
물이자 빛이자 비료이자 땅인 소망을 받아 뿌리를, 기둥을, 가지를 성장시켜 나간다.
과거의 본체처럼.
본체의 극히 일부, 한없이 잘려 나가 원본이 남지 않았을지라도.
일부라고 해도 나무를 틔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듯.
탄자나이트라 이름을 받은 보라색 촉수는, 자신의 본체만큼이나 거대한 나무를 피워 나간다.
옛 본체와 다르게, 자신의 의지로.
뒤틀리지 않은 소원을 받아 내며.
우주에 피어난 거대한 나무로서.
그리고, 피어난 나무는.
하나의 열매를 맺는다.
옛 행성만큼이나 거대한, 검게 뒤틀린 열매.
검게 끈적이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출렁거리지만, 그 외부를 감싼 보랏빛 가지 그물로 인해 터지지 않고 자라나는 거대한 열매.
그렇게, 무한히 거대한 열매를 키워 가던 나무는.
“작작 나와라….”
자신을 붙잡던 그림자지기를 뿌리치고 나무의 앞에 당도한 이하람을.
나무를 향해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파(破)를 마주했다.
이하람이 마열차보다도 나무를 우선한 것은.
가깝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것이 순간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의 내면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거대한 망치가 휘둘러진 것은 유추할 필요 없는 진실이었고.
쾅.
망치에 얻어맞은 나무가 부서진다.
보라색 파편을 온 사방으로 흩뿌리며, 줄기가 부러짐으로써 뿌리를 잃고, 망가지는 나무.
부러진 부분부터 그 잔해를 흩뿌리며 허공에 녹아드는 거대한 나무.
나무는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다.
자신의 분신인 가지를 흩뿌려서.
작은 가지에서 거대한 나무가 자랐듯, 식물과 한없이 닮은 이들의 본질은 자신의 일부라도 생존한다면 영원토록 살아남을 수 있기에.
그렇지만, 나무는 선택했다.
자신의 분산조차 낭비라고.
이어받은 소원, 순수한 소원이 낳은 에너지 중, 자신의 생존에 돌릴 것은 조금도 없다고.
그렇기에,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흩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에너지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조금조차 남기지 않고.
줄기가 소실되고, 잎이 흩뿌려지고.
각각의 가지조차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멸함으로써.
받아낸 모든 에너지를, 마지막 남은 가지에게.
열매가 남은, 최후의 가지에게.
그리함으로써.
뚝.
가지에서 열매가 떨어져 내린다.
가지에서 분리되어, 나무가 아니게 된 별개의 존재가.
나무가 이하람에게 부여받은 파괴 의지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 파괴에서 벗어난.
소멸의 순간까지 나무가 모든 것을 넘겨준.
내가 담긴 열매가.
검은 기름의 끈적이는 세계가.
떨어져 내리고.
철퍽.
세상에 떨어져 내린 검은 열매가 터짐으로써.
검음이 피어난다.
검은 기름은 왕관 모양의 질퍽한 물방울을 피워내며 온 사방으로 퍼졌고.
왕관의 안에서.
내가 피어난다.
메시아가.
소원의 주인이.
다시 찾아온 세계에서, 내가 태어난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소원의 구현.
모두가 행복한 세계.
“안녕.”
휘리릭.
불붙은 빠루를 회전시키며.
나와 한없이 닮게 변한 내 역위상을 바라보았다.
은빛 망치를 들고 검게 칠해진 채, 붉은 안광을 흩뿌리는 파괴의 화신을.
“많이 닮아졌네? 그렇지?”
“….”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예전과 달리, 비꼬는 말이나, 반박조차 찾아오지 않는다.
그의 그러한 반응에 조금 실망한 내게 답이 돌아왔다.
“…이상한 짓을 하면 곧바로 봉인하겠다.”
그렇지만, 답을 돌려준 것은 기대한 존재가 아니었다.
붉은 안개와.
“이 세계는 불운으로 점철된 세계야? 끝이 태어난 것도 모자라서 외부 신은 왜 이렇게 많아?”
흑백의 모자이크.
두 존재는 검은 기름의 세계.
내 세계 안에서도 그들은 별다른 불편함 없이 기름 위에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하나는, 그저 혼잣말인 거 같지만.
아무튼.
“걱정 마. 그때처럼 폭주할 생각은 없어.”
정확히는, 억누를 수 있다.
새로 태어났다 한들, 내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자.
소원을 통해, 모든 이를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한 신.
불가능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개체 간의 단절이라는 방법을 포기하진 않았다.
그것이 내 본질이기에.
애당초, 그런 본질을 쉽게 바꿀 수 있다면 신이건 사람이건 그리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까.
그렇지만.
“지금 내게 쏟아지는 소원은 거의 똑같거든.”
적의 괴멸.
자신들의 생존.
구원 희망.
이거라면, 변수 요소가 없는 소원.
그리고.
눈앞의 적, 이하람의 소원을 들어줄 필요는 없는 상황.
지금의 그는 신의 손을 벗어난 자.
그런 존재의 소원.
그때는 상승 욕구와 전투 소망.
그러한 것을 들어주며 함께 말려들 이유가 이제 없다.
“지켜보겠다.”
이러한 요소가 잔뜩 있음에도, 붉은 안개는 나를 미심쩍다는 듯 쏘아보았고.
“그렇게 말해도 신이잖아? 끝 상대로는 본능적인 적대감이 있어서 어차피 그쪽이 우선일 텐데.”
갑작스레 이야기에 참여한 모자이크 여성은, 날 옹호해 주었다.
절대적으로 옳은 이야기를.
이하람에 대한 끝없는 적대심을.
다만, 또 다른 의문이 있었으니.
“…당신도 그럼 끝이야?”
열매로 있는 동안에는 몰랐지만, 직접 마주하니 이 존재에 대한 끝없는 위화감이 피어난다.
이하람에게 향하는 적대감에 비하면 옅긴 하지만, 내 옆에 서 있는 이 괴상한 존재를 향해서도 강렬한 적대감이 피어난다.
그렇지만 도통 모르겠다.
대체 이 존재가 무엇인지.
신으로서 느껴지는 긍정은 없다.
지성체와 신 사이에서 평범히 느껴지는 유대감도 없다.
신도 지성체도 아닌데.
끝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하다.
그에 대해.
“옛날엔 끝이었지. 지금은 아니고. 아무튼. 적의 적은 동료라 치자?”
그림자지기라는 이름으로 불린, 모자이크 여성은 킥킥거리며 낫을 회전시키며 말을 계속 이었으니.
“승산이 영 안 보이긴 하지? 그러니까 이기자는 말은 안 할게.”
열매일 때 본, 너무 거대해서 저게 정말 무기가 맞나 싶었던 낫은 이제 평범한 사이즈로 변해 그림자지기의 손에 들려 있었다.
백병전을 생각하기라도 하듯.
“시간을 끌어. 우리 쪽이 따로 하고 있는 게 있거든.”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다들 전투 자세를 잡았다.
대화가 끝났기에.
끝. 이하람이. 그 습성.
아무리 급해도, 대화라는 이야기를 바라봐주는 것은 한계라는 것을 알았기에.
…끝의 습성이라는 거 대단하네. 사람이 저 정도로 변하는 건가.
망가진 이하람이. 역위상이기에 알 수 있는 극도의 조바심을 억누르며, 십여 초에 걸친 우리의 대화를 기다려 준 것에 대한 놀라움을 생각하며.
쾅.
맞부딪쳤다.
검은 망치 하나.
붉은 주먹.
불타는 빠루.
그림자 낫.
하나와 셋의 충돌.
그렇지만.
“칫.”
곧바로 발밑의 기름을 폭발시키며 셋을 분산시켰다.
망치가 승리했기에.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가 죽을 것이기에.
이것이 그리 좋지 않은 수임은 곧바로 알았다.
망치로 하나가 소멸하는 것은 피했지만, 셋의 위치가 분산됨으로써, 다음 공격.
기름을 뚫고 내게 달려오는 이하람을 막을 방법이 사라졌음을 인지했기에.
“내 목표는. 처음부터. 너였다.”
대화하며, 알려주며.
어차피 나만 소멸하면, 이 기름이.
이하람이 마열차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 기름이 사라진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유추이건만, 그런 당연한 이치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빠루를 흔든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다음을 위해.
빠루를 기름을 긁어 퍼 올리며, 타오르는 불과 함께
“…그깟 불.”
불타는 기름을 이하람은 파고든다.
힘의 차이가 있기에.
나는 그의 역위상으로 태어났지만, 힘까지 같은 것은 아니니까.
올바른 판단이다.
불과 기름은 그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웃으며, 그를 바라본다.
순간적으로 자아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그를.
불타 끈적이는 불에 붙잡혀,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를.
“그깟 불이 아닐 텐데?”
붉은 불이 휘감기며, 끈적임이 끊어지지 않은 채 계속해서 타오르는 검은 기름을.
“…불사조.”
“정답.”
답과 동시에 곧바로 구속된 이하람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본래 있던 자리에 검은 낫과 붉은 주먹이 쏟아졌기에.
잠깐이나마 적이 멈춘 동안, 타격을 누적시키기 위해.
영원히 타오르는 불로 인하여, 똑같은 영원의 속성을 지니게 된 검은 기름으로서 적을 구속하며.
그래, 지금 내 손에 들린 빠루는 내 힘이 아니다.
불사조의 불.
밖에서 생존자를 지키고, 죽은 자를 바다가 아닌 자기의 영역에 끌어들이며 손실을 방지하느라 직접 전투에 참여하진 않고 있는 불사조의 불.
신성력이 가득 담긴 영원의 불은.
설령 지금의 이하람이라 한들 치명적이다.
다만.
쾅.
그림자와 안개가 쏟아지던 자리에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하람은 망치를 휘둘러, 영원의 불도, 증오의 안개도, 절단의 그림자도, 단절의 기름도 날려 버리며.
“…정말로. 언제까지 나올 생각이냐. 네놈들은.”
진심으로 이제 질렸다는 티가 느껴지는 말과 함께 나타났으니.
“네가 포기할 때까지.”
“영원이란 뜻이군.”
“정답.”
말을 주고받으며.
다시 맞부딪쳤다.
기름 속에서.
옛날과 같이.
비록.
서로의 위치는.
달라졌지만.
우리는 싸운다.
나와 그는.
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