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100)
100 마도구사를 조심해라
전날에 이어 오늘은 아침부터 서류 작업에 착수했다.
할아버지는 어제 못 간 신전에 오늘이라도 발걸음하고 싶어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다 해놓은 일을 확인만 한다 해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있다.
그걸 확인해놓고 싶었다.
그 때문에 책상을 나란히 붙여놓고 할아버지와 서류를 확인하며 가끔 질문하거나 조언을 받았다.
영지를 다스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떤 건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어떻게 미치는지,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응하는 게 가장 좋을지, 그런 것들을 포괄적으로 대강 듣는다.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다.
어제는 한 시간 정도 쉬고 돌아왔지만 그때부터 안색도 많이 나아졌다.
겨우 그 정도의 휴식으로 이렇게 나아졌는데 대체 얼마나 쉬지 않고 일했으면 그런 얼굴이 된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격무였을 것이다.
이 세계는 위아래 할 것 없이 사는 이 전체가 블랙인 것 같다.
귀족은 영지일로, 평민은 먹고살기 위해.
위부터 아래까지 검정 일색이다.
“….”
한데 진짜로 이놈의 일이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책상을 덮은 것들이 없어졌다 싶으면 다시 새로운 서류뭉치가 올라온다.
그래도 조금 줄어들었겠지 생각하고 서류 상자를 보면 그 높이가 똑같아.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할아버님, 언제나 이렇게 일하셨습니까? 이건 일하는 게 아니라 무슨 홍수 난 강물에 빠진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어. 영주라는 건 그런 것이다.”
“제가 처리하면 평생 끝날 것 같지 않아요. 할아버지는 굉장히 빠르시네요.”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웃는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러느냐. 네 아버지 클라우스는 정말 유능했다. 나보다 업무 처리의 속도가 두 배는 빨랐어. 그 녀석은 정말 타고난 영주였는데….”
튀는 듯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우울해졌다.
아버지를 생각하는지 눈동자가 공간 너머를 보는 것 같다.
“….”
진짜인가.
아버지가 그렇게 유능하다니 왠지 이상하다.
사냥은커녕 장작조차 패지 못하는 아버지는 숲에서 가장 무능한 사람이었는데.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봐도 아버지가 숲 생활에 능숙했던 기억이 없다.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내가 한 게 아니다.
아버지 당신이 그렇게 말하며 재미있어했던 거야.
나 무능하네, 라고.
하지만 추억에 잠긴 할아버지가 조용히 하는 말은 정반대다.
아버지는 자랑의 아들로, 엄청난 능력자였던 것 같아.
‘적재적소라고, 사람은 있는 곳에 따라 이렇게나 평가가 달라지는구나.’
아버지가 한때 나무를 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금방 그만뒀다.
아버지가 한 개 쪼갤 동안 다섯 살밖에 안 된 나는 백 개 정도 쪼개는 거다.
심지어 어린 내가 지켜보지 않으면 아버지는 뿔토끼처럼 약한 마물한테 위협당해 생명의 위기에 몰렸다.
바로 집 근처 뒷마당에서.
숲에서 뿔토끼는 어머니조차 경계하지 않고 집 근처에 놔둘 만큼 약한 놈인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아버지한테는 그마저 위협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는 뿔토끼는 검으로 쉽게 상대할 수 있겠지만 숲에 사는 놈들은 크기가 두서너 배는 크고 힘도 강하다.
아버지가 어느 정도 칼을 쓸 줄 안다 해도 혼자서 놈들을 당해 내기는 어려웠다.
아버지는 무관보다는 문관 스타일이니까.
결국 아버지는 가급적 집 안에 머물고, 집 근처를 산책할 때도 나나 어머니와 함께가 아니면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집안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갈대 바구니 정도는 소일거리 삼아 만들곤 했지만 그것도 아이가 만든 것처럼 형편없어 물건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바느질이나 요리도 한 번 정도는 손을 댄 모양이지만 전혀 재주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숲의 생활은 즐겁게 보였다.
‘아버지는 귀족이라 그런지 놀고먹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잘 보냈지.’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둔 종이와 잉크, 어디서 구한 건지 잘 모를 것 같은 물감 같은 걸로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읊기도 했다.
종종 나한테도 강제로 차례가 와서 해야 했지만 시 짓는 재주는 내게 없었다.
그걸 읊는 재능도.
그때마다 아버지는 박장대소하고, 어머니는 굳은 얼굴로 소리 죽여 웃곤 했다.
내게는 그림 그리는 재주도 없었다.
아버지는 용이 살아나 튀어나올 것처럼 잘 그렸지만, 내가 그리면 인형 눈알 붙인 해마처럼 되었다.
나는 외모도 그렇고, 예술적인 재능도, 아버지에게는 뭔가 물려받은 게 정말 없었구나.
유일하게 내가 받은 것이 보라색 눈동자다.
어머니 유전자, 정말 강하네.
가끔은 어머니와 나, 아버지 셋이 함께 피크닉 같은 것도 다녔다.
그래봐야 샘이나 꽃이 만발한 장소를 찾아내, 나는 혼자 뛰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지킬 뿐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정말 즐거운 기억이다.
할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딘가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무실에서 일하던 사무관들이 어느새 손을 멈추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눈물짓는 사람도 있다.
특히 엔데스에서 날 스토킹하던 그레고르는 커다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뺨으로 떨어지는 눈물이 폭포 같다.
“….”
아니, 분위기가 왜 이래.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려고 주절주절했지만 반응이 이러면 조금 부끄럽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부끄럽네.
숲의 아버지 이야기에는 필수로 나와 어머니 이야기가 들어가고 내 어릴 적의 흑역사도 나온다.
벌통을 따려다 얼굴을 쏘여 두어 배로 불었던 일이나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혼비백산했던 일 등.
게다가 어릴 때라고 해서 천사처럼 귀여웠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이 얼굴 그대로의 아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집 떠날 때까지 나를 아들로 귀여워해 준 아버지는 의외로 마음이 강철이다.
나라면 열 살에 이미 덩치가 산만 한 아들이 귀여울 것 같지가 않아.
… 그래, 전혀 안 귀엽다.
조금 침울해지는데 할아버지가 내 손 등을 툭툭 치며 웃었다.
“그토록 생생한 클라우스는 처음 들어보는구나. 이곳에 있을 때 그 아이는 내내 어른스럽고 틈이 없었는데.”
숲에서의 아버지는 생생하다기보다 느긋했다.
말 그대로 한량이다.
귀족으로서의 예절이나 행동은 틀림없지만, 어쩐지 할아버지가 말하는 사람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느낌이다.
진짜로 같은 사람 말하는 게 맞나.
동명이인이라든가, 어머니가 사실은 공작가의 클라우스를 납치하다 버리고 오겐이라는 남자를, 아니, 오겐은 아버지의 둘째 이름이라고 나중에 들었지.
클라우스 오겐 어쩌구저쩌구하는 이름이 두 사람이 있을 리는 없으니 내 아버지가 맞기는 맞는데.
할아버지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조금 줄였다.
“내일은 시간이 없을 거다. 혼인이 끝나면 나는 곧바로 출발하니까.”
“….”
“그 전에 너에게 한마디 해둬야 할 일이 있구나.”
“예, 할아버님. 말씀하세요.”
할아버지는 작게 한숨 쉰 뒤 내 손을 잡았다.
물끄러미 손을 바라본다.
“네가 정령의 갑옷을 얻었다고 들었다.”
“예.”
“그 갑옷을 만든 게 누구인지 아느냐?”
“천재적인 마도사가 오래전에 만들었다고 들었지만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마도구사 가문 출신이 만든 것이다. 네 아버지의 죽은 부인이 바로 그 가문 사람이지.”
“….”
“너와 나처럼 강하면 모를까, 마도구와 마법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네 아버지의 혼인도 그래서 그쪽과 이어진 것이지만….”
어느새 사무관들이 모두 집무실을 나갔다.
집사장만 구석에 서 있었다.
“널 데려오기 전에 네 어미를 원망하던 가문과는 모두 매듭을 지었다. 개인이 적대시하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지만 가문에서 항의하거나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곳은 없어. 한 군데만 빼면.”
“….”
“하지만 마지막까지 강하게 거절하던 그 가문에서 연락이 왔다. 원한은 모두 물에 흘리자고.”
그러면 된 게 아닐까.
뭐가 문제인가.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할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게 그들의 진심이라고 믿지 않는다. 지금까지 강경하던 그들의 태도가 너무 급작스럽게 바뀌었어.”
마법사와 달리 마도구사는 대부분 일반인이다.
드물게 힘이 있더라도 매우 약해 마법사라고 볼 수 없는 정도였다.
하지만 강한 마법사와 유능한 마도구사, 둘 중 누군가와 생명을 걸고 싸운다면 주의해야 할 것은 마도구사 쪽이다.
그들은 마법사가 생각하지 못하는 도구를 이용해 상대를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다.
“네가 우연히 정령의 갑옷에 닿아 몸에 지니게 된 것처럼, 그들은 마법사가 경계하지 않을 때 우리를 해치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 그들은 미리 경계하기가 어려운 종류의 적이야.”
특히 그 마도구사 가문에는 특출난 사람이 많이 나온다.
세간에 나오지 않은 마도구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정령의 갑옷을 만들어낸 것만 봐도 그들의 두려움을 알 수 있다.
“최대한 위험은 줄일 생각이지만 너도 그들이 다가오면 경계해야 한다.”
“예, 할아버님.”
저주의 갑옷이 또 달라붙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지금에야 저주가 아니게 되었지만 영문을 모를 때에는 상당히 무서웠다.
다시 겪고 싶지 않아.
솔직히 끼고 있는 이놈의 정령 갑옷도 뺄 방법을 찾으면 어디엔가 갖다 버리고 싶다.
드물기는 하지만 나도 모르게 발동해버리는 거야.
내가 한 말을 가끔 자기에게 한 걸로 착각하는 것 같다.
이미 내 몸에 붙어버려서 어쩔 수 없는 것 같지만, 정말로 버릴 수 있다면 버리고 싶어.
‘하아… 하지만 실체가 없는데 어디에다 버릴 거야.’
지금에 와서 후회해 봤자 늦었어도, 이놈이 녹슨 쇠장갑이었을 때 어떻게든 버렸어야 했다.
정령이 그 안에서 튀어나오기 전에.
하아아아아아아.
혼인하는 날에는 새벽 일찍 잠이 깼다.
사방은 아직 캄캄하다.
두 번째 혼인이라 별로 크게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까만 허공을 보면서 어서 빨리 하늘이 맑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사람과 두 번 결혼하다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방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질 무렵 집사장과 시종이 들어왔다.
귀족 집에서는 윗도리부터 바지, 신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시종이 입는 걸 도와준다.
거절하면 옆에서 지켜보며 호시탐탐 도울 기회를 노렸다.
조금만 내 손이 늦으면 시종이 도움을 주기 때문에 방심할 틈이 없다.
포식자한테 노려지는 토끼가 이런 심정일지 모른다.
혼자 입기 곤란한 부분만 도움을 받으면서 옷을 모두 착용하면 그 뒤는 보석이었다.
다른 때는 거절하지만 오늘은 혼인이라는 것도 있어서 가만있었다.
평소보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옷에 몇 개의 보석이 더해졌다.
근육이 많은 몸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박력이 장난 아니다.
옷은 멋지고 분명 나한테도 어느 정도 어울리는 것 같은데, 멋있다기보다는 범접하지 못할 두려움만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뭐야, 이거. 새신랑이 아니라 최종보스 같잖아.
어깨가 축 늘어졌다.
시간이 되자 집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타티아나가 머무는 건물로 향했다.
타티아나는 이날을 위해 준비했던 드레스를 입고 내 머리색과 비슷한 은빛 베일을 얼굴에 드리웠다.
머리띠와 비슷하게 생긴 장식이 베일을 잡고 있다.
거기에 달린 보석은 내 눈동자와 같은 보라색이었다.
예전에 할머니가 사용한 장식품이라고 하는데 물려받았다.
공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자식이 생겨 며느리가 시집오면 다시 물려주는 거라고 들었다.
무겁다.
며느리가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물건을 어째서 우리한테 주는 거야.
그거 후계자라는 말과 비슷한 거 아닌가?
의미가 너무 무거워서 내 마음도 함께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 장식을 머리에 얹고 예쁜 드레스를 몸에 두른 타티아나는 평소보다 두 배 반 이상 예쁘다.
“정말 예쁘다, 타티아나. 여신이 내려온 줄 알았어.”
입에 설탕을 바른 듯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아니, 설탕을 발랐으면 이것보다는 더 그럴싸한 게 나왔겠구나.
베일 너머로도 알만큼 타티아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살짝 나를 올려다보더니 부끄러운 듯 말한다.
“라파 씨도… 정말 멋져요.”
타티아나는 혹시 눈이 나쁜 거 아닌가.
“….”
얼굴이 붉어진 건 내 말이 아니라 내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후후, 라파 씨, 얼굴이 빨개졌어요. 엄청나네요.”
너 때문에 그래, 타티아나.
내 외모를 보고 멋지다는 여자는 정말 머리털 나고 처음이다.
“평생 아낄게. 타티아나 너만 본다.”
원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지금 새삼스럽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