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104)
104 일단 피하자
정식으로 혼인이 이뤄진 뒤부터 밤은 타티아나의 방에서 지내고 있다.
이 세계의 부부는 밤에 남편이 아내 방으로 찾아가 함께 지낸다.
방의 구조를 보면 당연하다 싶다.
정말 이상하지만 이 세상의 귀족은 거실에 침대를 놓는 거야.
침실은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드나드는 거실에 침대가 있고, 그 한쪽에는 손님맞이용 공간이 떡하니 마련되어 있었다.
여관에서 지낼 때야 공간이 협소하니까 거실이고 침실이고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몰랐는데 여기 와서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침대가 부를 과시하는 광고탑 같다.
거실에 들어가자 마자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도 그렇지만,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게 눈에 보인다.
값비싼 융단 커튼이 침대 사방에 드리워지고 금사 은사 섞인 얇은 레이스 천이 몇 겹이나 장식되어 있었다.
이 세상의 레이스는 모두 수작업이고 굉장히 비싸다.
대부분은 외국에서 들여온다고 들었다.
공작가에 납품되는 레이스는 그중에서도 비싼 걸 거다.
그 비싼 레이스를 침대 지붕에서부터 감아 여러 겹으로 드리우는 건, 한마디로 돈을 주렁주렁 걸어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레이스가 얼마나 비싼지 알고 보면 침대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같다.
아니, 금사와 은사 때문에 실제로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구나.
침대 자재 역시 모르는 내가 봐도 엄청나게 비싼 나무일 것 같다.
이 방에는 집사나 시종이 계속해서 드나들고, 정말 중요하고 친밀한 손님이 오면 방에서 접대하기도 하므로 이런 곳에서는 부인과 함께 누워 있을 수 없다.
아마 그래서 부부관계를 위한 밤에는 아내 방으로 가는 게 아닐까.
부인용 방도 삐까뻔쩍 화려하고 돈을 발라놓기는 마찬가지지만, 그쪽에는 시종도 한정된 사람만.
남자는 거의 드나들지 않는다.
대부분은 시녀와 하녀만 출입했다.
나와 타티아나가 함께 있을 때는 그나마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조용하고 평화롭다.
이곳에 온 뒤로 나의 치유는 타티아나와 함께인 밤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랄까, 나는 집무실에서 돌아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타티아나와 함께 지내고 아침이 되면 내방으로 돌아간다.
거기에서 옷 입고 집무실로 간 뒤, 일하다 돌아오면 다시 타티아나 방으로 가는 게 내 일상이었다.
내가 일하는 동안 타티아나는 매디즈 부인에게 매너와 공작가에 대한 교육을 받거나 약초를 돌본다.
둘이 오붓하게 지내는 건 밤부터 아침까지.
평민으로 바깥에서 지낼 때에 비하면 함께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아마 그걸 알기 때문에 우리 둘이 함께일 때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않는 걸 거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여정 급한 게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아직 타티아나 방에 있는데 집사가 시녀한테 전갈을 부탁하다니.
그것도 새벽에.
“죄송합니다, 라파 님.”
타티아나의 시녀 겸 교육계인 매디즈 부인이 침대 옆에 선 채 고개를 조금 숙였다.
타티아나는 아이처럼 곤히 자고 있다.
그녀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
지금 아래 속옷만 입고 있는 거야.
나는 지구에 살 때부터 잘 때는 벗고 자는 파다.
어떻게 하지. 나 거의 벌거벗은 셈인데.
아무리 상대가 나이가 많아도 여성은 여성이다.
남자라면 몰라도 여자한테 속옷 차림 보이는 취미는 없다.
곤란해 움직이지 못하는데 매디즈 부인이 가운을 펼쳤다.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한 것 같아도 미묘하게 내 몸에서 빗나가 있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부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매디즈 부인은 마네킹이라도 된 것처럼 무표정이다.
행동도 물 흐르듯 부드러워 옷 입히는 기계를 대하는 것 같았다.
“….”
이 세상에서는 이런 것도 평범한 일인지 모른다.
어쨌든 매디즈 부인의 얼굴은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아.
이럴 때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평상심, 평상심.
부끄러워하면 진짜 부끄럽게 되는 거야.
상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 아니 그냥 마네킹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옷 갈아입는 마네킹이라든가.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침대에서 빠져나와 재빨리 가운을 걸쳤다.
내 얼굴부터 목 가슴 배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발바닥 밑까지, 아마 새빨갛게 되었을 거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지.
지금은 야만인이어도 한때 현대인이었던 내 수치심은 어중간하게 지구 기준이다.
진짜 부끄러워 죽겠다.
수치로 죽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서 다행이야.
그런 것도 사망 원인에 포함됐다면 내가 제일 먼저 수치심으로 죽었다.
두꺼운 벨벳 가운을 걸치고 도망치듯 중간문으로 향한다.
집사가 문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은쟁반을 받쳐 들고 있다.
그 위에 밀랍 봉인이 붙은 서신이 한 통 올려져 있었다.
이게 내 수치심의 원인인 것 같다.
“도련님,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시급히 지시받아야 할 일이 생겨 무례한 줄 알면서도 두 분의 시간을 방해했습니다. 다뷔토 백작가에서 이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뷔토라고 하면, 설마 아버지의 정부인이었다는….”
그리고 어머니가 죽여버렸다는 사람의 친정.
거기에 더해 할아버지가 경계하라고 했던 마도구사 가문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집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뷔토의 전 당주가 사망한 모양입니다. 새 당주 부부가 도련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아무리 방문 예고라 해도 원래 이런 시간에는 사람을 보내지 않는다.
예의에 어긋나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다뷔토의 새 당주가 마침 이 근처에 일이 있어 왔다가 방문하자는 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상대방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급히 방문 예고장을 보냈다고.
“그들이 방문하고자 하는 시간이 오늘 오후입니다.”
뭐?
그건 너무 급하지 않아?
“예법에 맞는 건 아니겠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 사회에서 일종의 이단입니다. 워낙 그런 특성의 사람들이 모인 가문이지요. 무례한 일을 해도 다른 가문에서는 원래 그런 곳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이 정도로 예의 없는 일은 굉장히 드뭅니다만.”
집사의 이마에 굵은 혈관이 튀어나왔다.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드물다.
아마 굉장히 굉장히 무례한 행동인 모양이다.
이 시간에 다른 가문으로 사람을 보내는 것도, 당일 방문을 예고하는 것도.
“….”
어쨌든 만나지 않는다.
만날 수 없어.
이 시대 귀족의 후계자는 보통 혈연, 그것도 자식이다.
후계자 아들이라는 이유로 야만인 피가 들어간 나까지 공작가에서 끌어들이는 형국이다.
핏줄 아닌 사람이 당주 자리를 잇는 경우는 없다.
마도구사 가문이라 해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죽인 사람의 가족을 만나 무얼 말할까.
더구나 할아버지가 경고할 정도의 상대다.
만나서 좋을 일은 없을 거다.
‘욕이라도 한마디 하려는 건가.’
아니면 결투?
마도구로 죽이고 싶어?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안 좋은 결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내가 있다는 걸 밝혔나?”
집사가 빙긋 웃었다.
내 말의 뜻을 금방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닙니다, 도련님. 무례한 상대에게 불쾌감을 보이기 위해 아무 대응 없이 편지만 받고 돌려보냈습니다. 상대 쪽에서 이쪽의 불쾌감을 제대로 알아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도련님이 여기에 계신지 아닌지, 그들로서는 확인하지 못한 채 돌아간 셈입니다.”
귀족 사회에서 통용되는 표현들이 있다.
집사가 방금 한 말도 그런 것이다.
제대로 된 대응 없이 그냥 돌려보내는 건 아는 사람한테는 최대한의 불만 표시에 속했다.
일종의 경고다.
다음에도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해질 거라는.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면 귀족 사회에서 해나가기가 어렵다.
다만 다뷔토 백작가는 원래 귀족보다는 마도구사가 본질이다.
귀족 사회에서의 입지보다는 마도구 업 자체가 중요하다.
그 때문에 귀족과의 관계가 안 좋은데도 아슬아슬하게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귀족과의 관계가 더 이상 나빠지면 곤란하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귀족 사회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중이고 자식 교육에도 힘쓰는 모양이지만 쉽지 않다고 들었다.
신흥 귀족이라는 점도 있을 것이다.
마도구사로서는 필요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같은 선에 서 있는 건 불쾌하다는 반응이 많다고 한다.
그 때문에 공작가와의 혼인은 다뷔토 측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회였다.
공작가와 연결됨으로써 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귀족 사회에 받아들여질 확률이 급격히 높아진다.
그런 기대는 어머니가 완전히 박살 내 버렸지만.
“….”
생각하면 할수록 만나서 좋을 일이 없다.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 받을 일밖에 없네.
아버지는 어쩌자고 어머니가 그런 일 하는 걸 그대로 보고 있었단 말인가.
부모를 잘 아는 나로서는 아버지가 한마디만 해도 어머니가 그런 행동에 나서다가도 중도하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작게 숨 쉬었다.
옛날 일에 신경쓸 때가 아니다.
현재 일에 집중하자.
일단 만나지 않는 쪽으로.
내가 이 가문에 들어옴으로써, 이쪽이 상대 가문의 사람을 죽인 게 되는 셈이다.
저쪽에서 방문하겠다는데 거절하기에는 모가 선다.
아무래도 면목이 없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피하는 수밖에 없겠지.
“우리 부부는 어제부터 영지를 돌아보러 나간 걸로 하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눌러앉지는 않을 거다.
만일 며칠이 되든 기다리겠다고 하면 나는 그것보다 늦게 돌아오면 된다.
집사가 빙그레 웃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처음부터 그 생각이었던 것 같다.
정답 맞힌 아이를 보는 표정이 되어 있다.
뿌듯해하는 얼굴이다.
어라, 어쩌면 매디즈 부인이 타티아나의 교육 담당인 것처럼, 이 집사는 할아버지가 나한테 붙인 교육계 혹은 상담역일지 모르겠다.
“나는 정답을 맞혔어?”
내가 히죽 웃자, 집사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도련님을 시험해 보자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의 역할은 도련님이 다른 이에게 해 입지 않고 온화한 일상을 이어 나가도록 곁에서 돕는 것입니다.”
“….”
“다만 기쁘게 생각했지요. 귀족 사회는 웃는 얼굴로 보이지 않는 칼을 상대방 심장에 찔러 넣는 곳입니다. 도련님께서 유연한 사고로 대처하시는 성품이라면 조금 더 지내기 쉬우실 겁니다. 마음 깊이 안도했습니다.”
에노르토스 사람의 단순한 성격이 있을까 걱정했던 모양이다.
그쪽 사람들은 마음을 숨기거나 거짓말하는데 서툴다고 생각되는 것 같으니까.
내가 볼 때는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결정하면 정오 이전에 나가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하는데, 집사가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사무관들이 몇 군데 가실 만한 곳을 뽑아두었습니다.”
집사장이 내민 것은 십여 군데의 장소가 적힌 목록이었다.
몇 군데는 보고서에서 본 곳이다.
만일의 경우에도 놀지 말고 현장에 가서 일하라는 건가.
“보좌관으로는 그레고르가 붙을 예정입니다. 연락해두었으니 잠시 뒤 이곳에 도착합니다. 부인의 시중을 들 사람으로는 매디즈 부인과….”
물 흐르는 것처럼 다음에서 다음으로 일이 진행된다.
여행 준비는 사용인들이 알아서 한다.
온실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 타티아나가 뭔가 해야 할 것은 없다.
타티아나는 일찍 깨울 필요 없이 평상시처럼 일어나면 된다.
몇 가지 미리 정해야 두어야 할 일을 지시한 뒤 집사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해가 막 뜰 무렵이 되자 그레고르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우리가 갈 곳은 이곳에서 이틀 정도 걸리는 작은 도시로 결정되었다.
이틀 전에 보고서로 봤던 곳이라 도시 이름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는 뜻이다.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다.
의아한 마음에 왜 그곳인지 묻자 그레고르가 빙긋 웃었다.
“그곳은 겨울이 되어도 경치가 아름답습니다. 한겨울에 피는 꽃을 재배하는 곳이라서요. 그곳에서 키운 꽃은 공작가에도 납품되지만 다른 곳으로도 판매됩니다. 꽤 귀중한 수입원이에요. 그래서 공작님과 클라우스 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걸음하셨죠.”
그레고르는 말을 고르는 것처럼 잠시 생각했다.
“아름다운 곳이에요. 도련님 마음에도 드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 오신 뒤로 부인과 오붓하게 지낼 시간도 없으셨고… 약간의 욕심이라면 도련님이 이곳을 사랑하셨으면 하는 바람도 좀 있습니다.”
그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주제넘지만 도련님을 계속 지켜보면서 생각했죠. 이분이 우리 땅, 우리 영민을 사랑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분명 좋은 영주가 되실 테니까요.”
“….”
아니, 그 마음은 이해하고 싶지만, 내가 좋은 영주가 될 싹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전생 평범한 샐러리맨이었고 지금은 한때 전사를 꿈꿨던 야만인이다.
영주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자질도 없다.
없는 걸 봤다고 해봐야 곤란할 뿐이지.
하지만 그런 말을 하기에도 조금 그렇다.
그레고르는 왜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이 사람의 꿈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도 못 할 짓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애매하게 웃은 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왠지 신혼여행을 권유받은 기분이네.’
그렇게 생각하면 왠지 들뜬다.
골치아픈 일을 피할 생각이었는데 도리어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그레고르나 사무관들이 그런 마음이 되었으면 싶어 그 도시를 권해준 걸까.
정오가 될 무렵에는 이미 떠날 준비가 끝났다.
렐라와 불사조는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눈치챘는지 이미 지붕 위에 올라가 앉았고, 만드라고라는 화분에 담겼다.
만드라고라는 타티아나가 마차 안에 데리고 들어가 앉았다.
“….”
분명 사람은 둘인데, 왠지 다섯 명이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다.
이상하네.
내가 타티아나 옆에 앉자, 바닥에 놓은 화분에서 가느다란 잔뿌리가 기어 나와 손목을 감는다.
타티아나의 손에도 만드라고라의 뿌리가 감겨, 마치 아이가 부모 손을 양쪽으로 잡은 것처럼 되었다.
신혼여행은 신혼여행인데 애 딸린 신혼여행 같다.
진짜 이상하네, 이거.
애도 생기기 전에 애 아빠가 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