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140)
140 똑같은 얼굴
아레논 왕은 묵묵히 보고를 들은 뒤 눈을 감았다.
이건 마음을 숨기기 위한 버릇이다.
당황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에 맞닥뜨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 그는 이렇게 잠시 눈을 감는다.
이런 식으로 한 호흡 두면 실수할 가능성이 훨씬 줄어든다.
젊을 적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다.
아레논 왕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잠깐 사이에 다뷔토 백작가가 쑥밭이 되었다고 들었다.
마도구사 대부분이 죽은 것 같다는 보고였다.
‘거대한 갑옷을 입은 자들이 순식간에 건물을 모두 무너뜨리고 사람을 죽였다고?’
어째서….
갑옷 기사에 관한 이야기는 왕가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왕궁에 정체불명의 갑옷기사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아, 그것이구나, 하고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클라우스의 자식이 나타났을 때부터 은근히 생각하고 있던 일이다.
한데 어째서 뜬금없이 그들이 다뷔토 백작가에 나타나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는가.
‘그게 말이 되나.’
방금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되풀이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클라우스.’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가슴이 따끔해졌다.
클라우스가 돌아왔다.
오랫동안 헬가한테 잡혀 숲에 머물던 그가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손은 닿지 않는다.
‘설마 헬가를 데리고 오다니.’
예상 밖이었다.
공작가가 클라우스를 되찾기 위해 마의숲으로 병사를 보낸 것처럼, 왕가에서도 그를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만일 성공하면 그걸 빌미로 클라우스를 왕가에 가져올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 앞에서는 물론이지만 남들 모르는 뒤에서도 그는 여러 번 마의숲에 병사를 보냈다.
결과는 전멸.
공작가의 추적대에는 그래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다른 가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왕가의 병사는 예외 없이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헬가가 왕가를 증오하는 듯했다.
왜 그런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클라우스가 헬가를 데리고 돌아옴으로써 알았다.
클라우스가 헬가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든 것이다.
왕가의 병사는 용서하지 말라고.
둘의 모습을 보니 알 것 같았다.
헬가는 클라우스의 손안에 있다.
자기도 모르게 실망스러운 숨이 샌다.
헬가만 해도 버거운데 거기에 라파라는 자식까지.
이전보다 훨씬 손대기 어려워졌다.
손에 닿지 않는 보석이 되었다.
‘클라우스만 왕가에 데려왔어도….’
그가 왕가 손안에 있다면 지금의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다.
그걸 상정하고 존재하지 않는 공주까지 허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클라우스를 손에 넣으면 그 자식을 공주의 아이로 위장할 생각이었다.
아레논 왕은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입술이 저절로 앙다물어졌다.
왕가에 남은 정령인은 이제 왕 자신뿐이다.
왕세자는 남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 일반인이었다.
그 눈동자 색이 보랏빛으로 보이는 건 마녀의 약을 눈동자에 바른 덕분이다.
하지만 그 약은 부작용이 있어 생명을 갉아먹는다.
왕세자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한 명도 낳지 못했어.’
그는 왕이면서도 정령인을 낳지 못했다.
수많은 여자가 그의 아들과 딸을 낳았지만, 태어난 것은 모두 일반인.
그는 왕가의 마지막 남은 정령인이다.
왕가의 피는 그를 끝으로 끊기고 만다.
‘클라우스만 얻는다면.’
분명 클라우스는 라파 외에도 정령인을 낳는다.
어째서 지금 그에게 자식이 한 명뿐인지 잘은 몰라도, 아레논 왕은 확신하고 있었다.
클라우스는 분명 더 많은 정령인을 낳을 수 있다.
클라우스의 아름다운 얼굴과, 왕가에서 비밀리에 전해져오는 초상화의 모습이 겹쳤다.
정령인은 보통 남자로 태어난다.
아레논 왕이 알기로 공작가에서 여아가 태어난 적은 없었다.
왕가도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초기, 정령인의 피가 매우 짙었을 때의 일이다.
왕가에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공주가 태어났다.
당시의 왕은 공주를 사산한 것으로 처리한 뒤 깊은 내궁의 탑에 가둬 몰래 길렀다.
기록을 보면 출산한 왕비조차도 공주의 생존을 몰랐던 것 같다.
탑에 갇힌 공주에게는 혈통 좋은 남자를 몇 명 붙였다.
공주는 젊은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 그가 나이 들면 다시 새로운 남편을 탑에 들이는 형식으로 임신이 가능한 나이까지 계속 아이를 낳았다.
당시 왕의 결정을 비난할 수는 없다.
공주는 정략의 말로 사용하는 일이 많지만, 정령인으로 태어난 아이를 다른 나라나 가문에 보낼 수는 없다.
왕가 안에서 길러야 한다.
왕자도 정령인은 왕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후궁을 만들어 왕궁 안에서 살게 하면서 여러 여자를 붙여 아이를 낳게 했다.
그 당시 정령인의 수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많았지만 그래도 매우 적었다.
겨우 수십에 불과한 정령인의 수는 늘릴 수 있는 한 늘려야만 했다.
정령인의 피를 지키는 것은 왕족의 의무다.
정령인으로 태어난 왕자와 공주는 물론, 왕 역시 그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라를 지키고 부흥하는 것보다 왕가에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숨겨진 공주가 낳은 아이는 모두 열셋.
그중 다섯이 정령인이었다.
한 명에게서 그토록 많은 정령인이 태어난 일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다.
공주가 가진 힘은 별것 아니었지만 그녀가 낳은 아이는 일반 인간조차 모두 힘이 강했다.
왕가 안에서 그녀는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공주의 자식은 모두 왕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것으로 처리되어, 한 명은 훗날 왕이 되었다.
그 왕이 이 땅의 국토를 크게 늘려 강하게 만든 군왕이다.
그 자신 매우 강한 마법사요 무장이었지만, 그가 전장에 나갈 때마다 따라다니는 철갑 기사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강했다.
전장에 서면 병사가 움직이지 않아도 수십의 철갑 기사단만으로 승리할 정도로 강한 기사단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기사단의 모습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의 말에는 발이 없고, 그들의 투구 안에는 눈이 없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기사단은 자국 내에서만 조금 알려졌다.
적국에서는 그 존재 자체를 모르고 전쟁이 끝났다.
살아남은 적병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 기사단을 목격한 적은 모두 죽기 때문에.
왕국의 수호신.
당시의 왕은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클라우스….’
아레논 왕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기록에 따르면 숨겨 기른 공주는 정령과 대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작은 생물이 날아다닌다거나 그들이 자신을 ‘우리 왕과 똑같은 얼굴’이라고 말한다며 정령왕이 누구인지 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공주에 대한 기록은 얇은 두루마리 하나 정도로 매우 적지만, 공주의 부왕은 후대를 위해 섬세한 초상화를 별도로 한 장 남겼다.
그 초상화 속의 얼굴은 클라우스와 똑같았다.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똑같은 얼굴이다.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그 얼굴에 특별한 것이 있다고, 아레논 왕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갖고 싶었다.
왕가의 마지막 정령인이 되어, 이 핏줄을 끝내고 싶지 않다고 절실하게 원했는데.
“하하. 드디어 완전히 손을 놓게 되나.”
무심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눈을 뜬다.
어쩔 수 없어.
갑옷기사가 왜 다뷔토 백작가를 그리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이제 클라우스는 포기해야 한다.
오래전 공주의 아들에게 철갑 기사단이 충성했던 것처럼, 지금은 아마 클라우스의 아들 라파에게 그들이 붙어 있을 것이다.
철갑 기사단은 그 시대의 가장 강한 정령인 아래에 붙는다.
과거 몇 번이나 그들이 나타났지만 항상 같았다.
그들의 분노를 사면 왕가는 끝장이다.
그들에게 왕가의 수호신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다름 아닌 왕가이고, 무엇보다 철갑 기사단은 인간 세상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간의 법은 아무 소용 없었다.
정령인의 피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섬기는 정령인을 해치면, 그게 비록 정령의 피를 이은 자라도 죽인다.
예외는 없다고 기록에 남아있었다.
‘왕가에서 이제 정령의 피는 사라지는 건가.’
수는 많이 줄었어도 피가 남은 건 공작가뿐이다.
클라우스를 가져오는 것이 안 된다면 남아있는 방법은 하나, 공작가에서 후계를 데려와 왕으로 세우거나, 정령인과의 혼인을 추진하는 수밖에 없다.
클라우스가 안 된다면 라파를, 라파가 안 된다면 그 후를.
생각을 정하고 고개 들자, 시종장이 등에서 벗어난 어둠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시종장.”
“예, 폐하.”
“아마 잠시 기다리면 공작이 올 거야. 오자마자 이곳으로 데려오게. 안내는 그대가 직접 해.”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시종장을 향해 왕은 한마디 덧붙였다.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게. 왕족을 대하는 이상으로 극진하게 대접하도록.”
“….”
시종장의 눈동자에 동요가 달린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정령인에 대해서 시종장은 모른다.
정령인 기록이 있는 작은 서고에는 왕족만 접근할 수 있다.
서고 열쇠 자체가 이 세상에 오직 두 개뿐이고, 한 개는 왕이, 다른 하나는 왕세자가 갖는다.
둘 중 누군가와 동행하지 않는다면 서고에는 들어갈 수조차 없다.
서고를 관리하는 시종은 있지만 청소만 겨우 할 뿐 그가 기록을 보는 일은 없다.
가장 신뢰하는 시종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시종장도 정령인이라는 존재에 관해 아는 것은 아닐 텐데, 그래도 오래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뭔가 느낀 모양이다.
몸을 돌려 나가는 시종장의 눈가에 반짝 눈물이 빛난 것처럼 보였다.
*
왕궁에 도착하자 정문에 근위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오면 곧바로 본궁으로 안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벌써 보고가 들어간 모양이다.
한 가문이, 그것도 마도구사만 모여 있는 가문의 본가가 전멸한 건 역시 큰일인 모양이다.
아니, 당연히 큰일이겠지.
몇 명 죽은 것도 아니고 건물이며 사람이 몽땅 다 죽었다는데.
심지어 우리 마차 뒤에는 갑옷기사들이 졸래졸래 따라오고 있다.
반은 아버지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다뷔토 가문 사람들을 생각해서 아버지가 거부한 것 같다.
조금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와 우리 꽁무니에 붙었다.
모두 온 건 아니고 그래도 서넛 정도는 아버지 곁에 남은 모양이다.
숫자가 모자랐다.
어쩌면 다른 곳으로 샜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뭐, 그건 아니겠지.
본궁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시종장이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마차에서 내리자 시종장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조금 전에 기침하셨습니다. 곧바로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 안내를 부탁하네.”
나와 할아버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갑옷기사들도 따라온다.
왕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움찔하며 쳐다봤지만 막지 않았다.
시종장의 시선이 언뜻 갑옷기사를 향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도 타고 있는데 이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놔둘 모양이다.
아니, 거기에서는 그만두라고 말해야지.
그게 왕궁을 지키는 병사와 왕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시종장의 역할이 아닐까.
한 가문을 괴멸하고 온 놈들인데 그런 것들을 그대로 들어가게 해서야 쓰나.
물론 그 원흉이 나를 따라다니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내 마음이 그렇다.
공연히 따라 들어갔다가 난동을 피우면 어쩌나 하는 것도 걱정이고.
“….”
갑옷기사 이놈들, 아무래도 모두가 말을 타고 왕궁 건물 안으로 들어갈 생각인 것 같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들이 하는 대로 그냥 놔두라고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비록 왕을 존중하는 마음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왕족이 어떻게 되든 알 바는 아니지만, 역시 이건 아니야.
나는 건물에 들어가다 말고 몸을 돌렸다.
뒤따라오던 갑옷기사단이 움찔하고 멈춘다.
내가 또 두들겨 팰까 봐 놀란 모양이다.
괜찮아.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마구 두들겨 패지는 않는다.
멈춰 선 갑옷기사단 앞으로 다가가자, 놈들의 말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왕궁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와 갑옷기사단에 쏠린다.
나는 사람들 이목을 신경 쓰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네놈들은 들어오지 마라. 여기서 기다려.”
알아들을까?
이놈들이 인간의 말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아버지를 지키라고 하니 정말로 아버지한테 반이 붙어간 걸 보면 분명하다.
다만 알아들을 때가 있고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저희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걸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전에 경험해 본 말만 알아듣는 걸 수도 있다.
내 생각에는 후자가 아닐까 싶다.
나는 정지하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몸짓 언어는 만국 공통어다.
인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놈들에게도 통하겠지.
“….”
정말 통했다.
말로 할 때는 어리둥절하던 놈들이 손바닥을 보자 멈춘다.
역시 몸짓 언어는 인간 아닌 전혀 다른 생물한테도 통하는구나.
이 경우는 무생물이라고 해야 하나.
묘한 곳에서 감탄하는데 갑옷기사 중 하나가 앞으로 말을 몰아 나왔다.
나한테 제일 먼저 두들겨 맞은 놈이다.
다른 놈들보다 훨씬 많은 머리를 창에 꿰뚫어 달고 다니던 놈.
다시 한번 손바닥을 내밀었지만, 녀석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만은 따라간다는 뜻인 것 같다.
“….”
와우, 대화가 통해.
이놈들하고 말이 통하다니, 왠지 눈물이 날 것처럼 기쁘다.
조금 더 나아가서 인간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것도 가르치고 싶다.
적어도 한 가문을 몰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대로 잘 가면 그런 날도 언젠가는 오는 게 아닐까.
내가 잠시 감동 아닌 감동을 하고 있는데,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이제 가는 게 좋겠다. 폐하를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지.”
“네, 할아버님.”
그렇지.
우리가 직접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번에는 우리 쪽이 약한 입장이다.
왕을 기다리게 해서 심기가 불편해지면 우리 손해일 것이다.
하아, 저 웬수 같은 놈들 때문에.
나는 다시 우울한 심정이 되어 시종장의 뒤를 따랐다.
등 뒤에서 철커덕철커덕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깨달았는데 저 소리는 연결 부위에서 나는 것이다.
제대로 묶여있지 않으니 움직일 때마다 부딪히는 것 같아.
진짜 인간이었다면 하는 동작마다 갑옷이 부딪히지는 않을 텐데.
그게 정상일 것이다.
“….”
그래, 저놈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말이 안 통하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죽이는 거다.
저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사실이 떠오를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음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