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168)
168 저분이 우리 도련님이야
아니, 아무리 갑자기 급습당해 경황이 없었다고는 해도 왜 이렇게 된 거야.
멀리에서 본 우리 군의 모습은 마치 적군에 패배해, 그 틈을 노려 도망치던 탈주병이 적병에 습격된 것 같았다.
말이 좀 복잡하지만 진짜로 느낌이 그래.
그나마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건 악귀처럼 눈이 시뻘겋게 된 병사들 덕분인 것 같다.
상당수의 병사는 지치고 힘들어 팔조차 제대로 들기 어려워 보였다.
몸은 적을 향해 있는데 엉덩이가 뒤로 빠져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악귀 형상을 한 이들은 아무래도 우리 공작가 병사인 것 같다.
하지만 진짜로 왜 저렇게 된 거지.
해군은 몰라도 우리나라의 마법사는 최강이라고 들었다.
적과의 병력 차이가 크다고는 해도 우리 공작가의 마법사가 많이 달라붙었으니 어느 정도 보완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우리 마법사도 그다지 큰 전력이 되지 못한 모양이다.
정말 왜 이렇게 됐어.
아군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좋지 않다.
진짜로 좋지 않아.
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가 다 우리 아군 거야.
나는 엉덩이 고통을 참으며 말을 재촉했다.
며칠간 혹사된 엉덩이는 철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지만, 지금 그딴 걸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차분히 앉아서 말안장에 대한 고찰과 발명에 힘을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면 아예 말은 포기하고 마차만 타던가.
미리 날려 보낸 정령 나비가 나를 보고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칭찬받을 시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늘 전체가 번쩍번쩍 빛나며 이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구름도 아니고, 진짜 하늘이 이동하는 것 같다.
“….”
아니, 아니야, 지금은 아니다.
지금 너희가 오면 시야 가린다.
수천 마리도 아니고 수십만은 족히 되는 녀석들이 주위로 몰려들면 진짜로 빛밖에 보이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 싸워야 하는데 주변이 온통 빛이면 장님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정말 안 된다.
하지만 나비들이 이쪽을 향해 몰려오자 우리 군 쪽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올랐다.
지금까지 시름시름 앓고 죽어가던 토끼가 갑자기 호랑이로 돌변한 듯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천둥인 줄 알았네.
깜짝 놀라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얼굴은 이래도 그 속에 있는 건 지구의 샐러리맨 소시민이라구.
옆을 달리던 무관이 놀라 손을 뻗었지만, 다행히 어머니를 닮아 운동신경은 좋은 편이다.
내 몸은 떨어질 뻔한 순간 곧바로 제 위치를 잡았다.
덕분에 무사했지는 않았지만 식겁했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아마 무관도 그랬겠지.
어쨌든 나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날렸던 정령나비는 제 몫을 단단히 한 것 같다.
병사들 사기는 내가 봐도 무서울 만큼 높아져 있었다.
좋았어.
나는 정령나비의 빛무리를 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근데 진짜 시야가 가려 죽겠네.
아무것도 안 보인다.
*
이 세상에는 정령이 있습니다.
물론 그걸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을 사람은 모두가 정령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우리 마을에는 먼 옛날 정령왕께서 우연히 들러 마셨다는 연못이 있습니다.
아니, 그 말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정령왕께서 마신 연못 근처에 사람이 모여 살다 마을이 된 거니까요.
원인과 결과가 다릅니다.
하지만 그런 전설 따위로 마을 사람이 정령의 존재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마을에 정령이 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써 알게 된 거지요.
우리 마을의 정령은 정령왕께서 잠시 들렀던 연못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보이지는 않아요.
정령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연못 근처에 공물로 과일이나 빵 같은 음식을 놓으면 눈앞에서 그게 조금씩 사라집니다.
보이지 않는 개미가 야금야금 음식을 먹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조금씩.
실제로는 음식 자체가 없어진다기보다는 그 내용물이 어디론가 흡수되어 껍데기만 남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공물을 바치면 은혜로운 봄비가 내리거나 마구 쏟아지던 장대비가 잠시 멈춥니다.
겨울에는 한없이 내리던 눈이 멈추기도 하지요.
이 세상에서 어린아이는 쉽게 죽지만, 우리 마을의 아이들은 질병이나 사고에서 지켜집니다.
우물에 떨어질 뻔한 아이가 갑자기 일어난 바람에 밀려 무사했던 일이나, 큰 곰이 숲에서 나와 마을을 덮쳤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쫓겨 도망친 일 등,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 우리 마을에는 많이 일어납니다.
어릴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공물을 바쳐온 우리 마을 노인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수명을 누리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려 구십 세까지 살았죠.
그가 죽을 때는 마치 마중하러 온 것처럼 방 안의 공기가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가끔 물고기가 수면 위로 튀는 것처럼 뭔가가 팔딱거리는 것도 느껴졌지요.
제가 직접 보았으니 거짓이나 과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반짝이는 나비가 쏟아져 날아왔을 때, 그것이 정령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았습니다.
공작가 병사들이 뭔가 외치기 전에요.
우리 마을에 있는 정령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렬한 힘이 밀려와 피부가 얼얼해질 정도였으니,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걸 깨달았을 겁니다.
정령은 거짓부렁이라고 말하던 우리 백인대장까지도 멍청한 얼굴로 하늘을 덮은 빛무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맙소사.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야만인,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공작가 병사들은 그 남자가 나타나자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도련님이라고 환호했습니다.
공작가 병사들이 도련님이라고 하면, 네, 그렇죠, 헬가의 아들일 겁니다.
헬가와 클라우스 님의 이야기는 당연히 우리 마을에도 널리 퍼졌습니다.
알고 있어요.
근래에는 헬가의 아들이 나타났다고 온 세상이 떠들썩했기 때문에 우리 부대 병사들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보는 건 처음이지만요.
인간이 저렇게 크고 무섭게 생길 수도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헬가의 아들, 공작가 병사가 아니어도 일단 모두가 도련님이라고 부르게 된 남자가 도착하자 정령이 분명한 빛의 나비들은 모두 그에게 몰려갔습니다.
정령이 사랑하는 인간이라고 모두가 알았죠.
우리나라는 갑자기 나타난 자알의 군대에 밀려 병사가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 부대도 마찬가지죠.
옆에 있던 병사가 적의 마법사가 날린 공격에 속절없이 죽는 모습을 벌써 다섯 번이나 목격했습니다.
물론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옆에, 혹은 앞뒤에 있던 병사 얘기입니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은 용기를 꺾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서 죽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령이 나타나, 심지어 그 정령과 그들이 사랑하는 인간이 우리 아군에 있습니다.
정령의 축복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죠.
우리 마음에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나, 너가 아니라 우리예요.
개인이 아니라 전체가 모두 같은 마음이라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한 몸 한뜻이 된 것 같아요.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마치 정령이 우리를 묶는 것 같았죠.
우리 발밑에 단단한 뭔가가 생겨 지지해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남자, 아니, 도련님이 빛에 싸여 이쪽을 향해 달려오자, 아군은 용기백배해 함성을 질렀습니다.
하고자 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냥 저절로 피부가 떨리고 입에서 함성이 터집니다.
반면에 지금까지 기세등등하던 적군은 쪼그라들었죠.
하하하.
꼴좋다.
우리를 향해 찌르던 창에 힘이 없어진 걸 느꼈습니다.
얼굴만 봐도 알겠어요.
왁! 하고 소리치면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것처럼, 적은 완전히 겁먹었습니다.
지금까지 대장들은 계속 적을 향해 나아가라고 외치며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명령이 내리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적을 향해 달립니다.
자기도 모르게 발이 적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공격해!
죽여버려라.
지금이라면 모두, 적을 모조리 섬멸할 수 있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였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지대는 완만하게 아주 조금 높아, 도련님과 그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갈라지는 곳이 보였습니다.
왜인지 모르지만 도련님이 빛무리와 함께 적을 향해 달려가고, 다른 병사들은 아군 쪽으로 옵니다.
그리고 뭔가를 크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닿았던 모양입니다.
공작님이 당황한 듯 급히 손짓으로 무관들에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러자 공작가의 대장들이 갑자기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뒤로! 물러서라! 뒤로!”
“퇴각!”
“퇴각하라!”
“서둘러!”
“잘못하면 휘말려 죽는다!”
아니, 지금까지 죽는 한이 있어도 적을 찌르고 죽으라던 공작가의 대장들이 다들 단체로 미친 건가요.
제일 하단 병사들까지도 지금 달려가 적을 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도망치라니.
지금처럼 사기가 하늘을 찌를 때 적을 쳐야 합니다.
한데 갑자기 도망치라고 하다니, 이건 진짜로 미친 짓일 겁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도련님의 등장을 환영하며 앞으로 내달리던 공작가 병사들이, 이번에는 얼굴이 흙색이 되어 몸을 돌리고 도망쳐 옵니다.
우리를 향해서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우리 쪽을 향해 아군이 죽을 둥 살 둥 달려오고 있습니다.
공작가는 이 장소에서 가장 수가 많은데, 그들이 모두 꽁지 빠져라 도망치는 겁니다.
잘못하면 밟혀 죽게 생겼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영지의 병사들도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 사이 빛의 나비들은 다시 우리와 적이 있는 허공으로 날아오고 빙글빙글 하늘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즐거운 것 같아요.
우리는 도망치면서 나비의 현란한 회오리 춤, 말이 이상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네요, 어쨌든 회오리를 보았습니다.
빙글빙글빙글빙글.
여기저기서 나비로 만든 회오리가 돌기 시작합니다.
그걸 본 공작가 병사들이 더욱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우리 뒤에 있었는데 미친 듯이 달려 그들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한두 명이 아닙니다.
공작가 말단 병사는 물론 대장들도, 심지어 높으신 무관님과 공작님까지 말을 타고 도망치십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짐작도 가지 않는데, 어쨌든 우리 군은 적에게서 일단 멀리 떨어졌습니다.
그 사이 적의 마법사들이 도련님을 향해 공격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은.
맙소사.
저게 뭐지.
도망치던 병사들이 무심코 걸음을 멈췄습니다.
도련님을 향해 바람과 불, 물이 날아갔지만 근처에 도착하면 마치 투명한 뭔가에 막힌 것처럼 옆으로 퍼져버립니다.
도련님이 뭔가 하는 것도 아닌데요.
“멍청아. 구경할 때가 아니야. 달려! 달리라구!”
몇 번 눈빛만 교환한 적 있던 공작가 병사가 옆을 지나쳐 달리면서 외쳤습니다.
그제야 정신 차리고 다시 달리면서 물어봤습니다.
“… 왜, 왜 도망치는 겁니까?”
“나도 몰라! 씨X!”
“어… 뭐라구요?”
“잘은 몰라. 모르지만, 우리 도련님은 드래곤 학살자라구. 그때 드래곤뿐 아니라 그 근처가 왕창 박살 났다는 말도 있고, 저 뒤에 철갑 기사단 보이지?”
달리면서도 공작가 병사는 말을 잘했습니다.
빛 때문에 철갑 기사 같은 건 보지 못했지만 헐떡거리며 네, 대답하자 공작가 병사가 외쳤습니다.
“저 기사단이 다뷔토 백작가를 하루아침에 몰살해버린 그 기사단이라구.”
그건 금시초문입니다.
다뷔토 백작가라고 하면 굉장히 실력 있는 마도구사 가문입니다.
그 정도는 소문에 어두운 우리 마을에서도 알만큼 유명하지만, 그 가문이 망했다는 건 몰랐습니다.
우리는 영지에서 급히 올라온 농민 무지렁이 병사입니다.
왕도에서 가깝기는 해도 평생 그곳에 갈 일은 없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죠.
왕도의 소문은 아주 유명하지 않으면 여간해서는 빨리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구구절절 말할 때가 아닙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공작가 병사도 달리면서 말하느라 힘들었는지 숨을 헐떡이며 악쓰듯 말했습니다.
“우리 도련님은 드래곤 학살자에 철갑기사단이야. 그걸 알고 있는데, 거기에다 대고 도련님이 공격하실 테니 서둘러 피하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님이 명령 내리신 거야. 도망치지 않고 배기냐구!”
뭔지 잘 모르겠지만 도련님 공격이 무서워서 피한다는 사실만은 알았습니다.
그게 정말 이렇게 꽁지 빠지도록 도망칠 일인지는 정말로 모르겠지만요.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팔다리는 어느새 바위처럼 무거워져 더 이상은 때려죽인다 해도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 돌아보니 도련님이 빛의 나비를 이끌고 적의 코앞까지 도착해 있었습니다.
도련님 근처의 나비가 파르르파르르 날개를 떱니다.
왠지 기뻐하는 것 같아요.
우리 병사나 적병 근처에서 회오리 춤을 추던 나비들도 날개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웅웅… 웅웅… 웅웅….
허공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립니다.
왠지 무서운 마음에 주먹을 쥐는데, 공작가 병사가 중얼거렸습니다.
“시작됐다.”
그 말은 틀렸다고 금방 알았습니다.
공작가 병사도 알았겠죠.
도련님의 공격은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렸으니까요.
그런 건 뭔가가 시작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한마디로 그냥 ‘공격했다’로 끝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도련님이 크게 팔을 휘둘러 치자 뭔가 엄청난 것이 적을 향해 쏟아졌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마치… 마치… 그래, 공기 전체를… 이 너른 허공 전체를 도련님이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데 허공의 모든 것이 도련님의 동작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걸 알겠어요.
모두가 느꼈을 겁니다.
우리 근처의 공기도 출렁거리며 흔들렸습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우리 모두의 심장이 조이고,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흐를 것 같습니다.
정말로 왜인지 모르겠지만 거룩한 존재에 닿은 듯한 기분이었어요.
두려운데 기쁘고 감동이 밀려오는데 왠지 온몸이 떨리고…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도련님이 쏜 무언가에 실려 빛의 나비가 적을 향해 쏟아지듯 날아갔습니다.
신난다는 듯이 작은 회오리 춤을 추면서요.
아니, 그건 정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련님이 쏜 보이지 않는 바람에 정령이 휩쓸린 것 같다고 해야겠죠.
아니, 그것도 아닌가.
도련님이 쏜 바람에, 정령들이 회오리 춤을 추며 즐겁게 날아갔습니다.
우리 근처의 나비는 스스로 날아 도련님이 쏜 무언가에 합류했습니다.
대체 뭐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습니다.
도련님의 바람이 땅에 닿은 것처럼 보인 순간이었습니다.
콰콰콰콰!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습니다.
공기가 우리 얼굴을 향해 확 밀려옵니다.
“오… 맙소사….”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데, 다음 순간 우리 앞에 놓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팔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리고 빛의 나비가 즐거운 듯이 그쪽으로 날아갔을 뿐인데, 방금까지 적병이 있던 자리에는 땅이 팬 자리가 보일 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와 적이 맞붙어 싸우던 지점의 적병이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깊이 팬 땅에 점점이 있는 것은 어쩌면 피, 아니, 살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맙소사.
대체 우리는 뭘 본 걸까요.
방금까지 적병이 있던 자리가 완전히 비어 있습니다.
진짜… 이게 무슨….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빈 공간을 사이에 둔 적병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아군이 모두 살점, 아니 땅의 점박이 같은 걸로 변했으니 두렵겠지요.
대장이고 병사고 마법사고 할 것 없이 모두 도망칩니다.
아, 이런.
우리 쪽도 무사하지 않습니다.
공작가 무관들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다친 병사를 이쪽으로!”
“부상병을 데려와!”
지금 말하는 부상병은 적병한테 다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피하지 못해 적병과 함께 날아간 아군을 말하는 것입니다.
적병에 비하면 그저 약간 밀려난 정도지만, 그래도 세찬 바람에 우수수 병사들이 쓰러졌습니다.
대부분 스스로 일어났지만, 간혹 팔다리 중 어딘가가 부러진 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우리도 가자구. 도와야지.”
잠시 멍청하니 서 있던 공작가 병사가 불쑥 말하더니, 부상병을 향해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웃기 시작했습니다.
마쳤나 싶어 바라보자, 병사가 큰 소리로 웃으며 이쪽의 어깨를 팡팡 쳤습니다.
“저분이 우리 도련님일세.”
아아, 자랑이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군.
“….”
뭐, 우리한테도 저런 도련님이 있으면 자랑했을 겁니다.
무리도 아니죠.
같은 마을에서 끌려와 병사가 된 친구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살았구나, 저놈.
격전이 벌어질 때는 친구의 모습을 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정말 다행이다 싶어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친구 놈이 별안간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땅에 이마를 대고 깊숙이 절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위에 있던 몇몇 병사가 따라서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행동은 순식간에 전염되어 옆으로 퍼졌습니다.
적은 없어지고 도망치고, 아군은 바람에 눕는 보리 이삭처럼 너 나 할 것 없이 옆에서 옆으로 엎드리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도련님의 모습이 멀리에서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바람에 실려 날아갔던 빛의 나비가 주인을 향해 달려가는 개처럼 팔랑팔랑 도련님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감동이 차올라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 엎드렸죠.
정령이 인간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왜 저런 모습으로.
기왕이면 조금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으면 좋았을 겁니다.
그런 생각이 아주 약간만 들었습니다.
아마 다른 이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고 대신 고맙습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도련님.
물론 우리의 도련님은 아니지만,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근처 병사 대부분이 엎드린 상황에서, 서 있는 사람은 공작가 병사들뿐입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듯 으쓱으쓱 어깨를 흔들며 웃고 있었습니다.
“우리 도련님이야.”
옆에 서 있던 공작가 병사가 으스대며 다시 말합니다.
알고 있어요.
아까 똑같은 말을 들었으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밖에 없던 우리 병사들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 전염된 것처럼 옆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무관과 아군 병사가 부상당한 이들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저쪽에 가서 도와야 하는데, 뒤늦게 팔다리가 풀려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안심되어 그런 거겠지요.
한 발 늦게 공작가 병사들이 부상병을 돕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