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47)
047 갑옷은 방어구지
마녀는 ‘어쩐지’라는 감각으로 움직인다.
어쩐지 오늘은 산책 가기가 싫다고 생각하고 나가지 않으면 산사태가 일어나 산책길이 흙에 파묻힌다든가, 어쩐지 오늘은 약초가 만지고 싶어져서 약을 만들면 최고 품질이 나오는 식이다.
그래서 마녀는 정해진 일이 있거나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이 있어도, ‘어쩐지’가 생기면 대개는 그쪽의 감각을 따랐다.
다만 그 어쩐지의 감각은 때로는 정말로 그냥 어쩐지라는 정도의 일이다.
정답이 없는 애매한 감각이고 맞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마녀끼리는 어쩐지라는 것으로 통해도 그걸 평범한 사람한테 설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말해도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다.
‘어쩐지’는 정말로 어쩐지 싶은 거니까.
이번에도 라파가 붙이고 온 갑옷이 정령의 갑옷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냥이랄까, 어쩐지 스승님의 말이 떠올랐을 뿐이다.
정령의 계약도 마찬가지였다.
마녀가 아니라면 계약은 백 번 해 봤자 아무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법사라고 해도 마찬가지.
정령의 계약이 효과 있는 건 마녀뿐이다.
해 봤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어쩐지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타티아나도 정령의 계약을 해본 적은 없다.
정말로 마녀가 정령의 계약을 할 수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으… 안 되면 어떻게 하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지만 라파의 몸에 갑옷이 붙어 있는 걸 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정상이 아니야.
본 순간 알았다.
끔찍한 것이 이 갑옷에 있다.
뭔지 모르지만 그냥 소름이 끼쳤다.
스승님에게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가 한꺼번에 뒤죽박죽되어 머릿속에 쏟아졌다.
인간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물건이라든가, 불행을 불러들이는 저주, 인간을 다른 생물로 바꿔 버리는 기묘한 물건.
스승님은 신비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어릴 때는 이 세상이 온통 두려운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했다.
숲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거라구.
그녀가 그렇게 겁먹고 있다는 사실을 스승님은 나중에야 알고 그게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어릴 때 새겨진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 같다.
팔갑옷을 본 순간 어릴 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있는 건 정말 소름끼치게 잔인하고 슬픈 거라고.
두려움을 감추고 갑옷에 손을 댔을 때야 겨우 마음이 조금 놓였다.
갑옷은 매우 끔찍한 물건이었지만 적어도 그 깊은 곳에는 다정한 것이 있다.
그녀에게 안심감을 주는 뭔가가 있었다.
어쩌면 정령이라 불리는 것이.
‘후우.’
타티아나는 크게 숨을 쉬었다.
괜찮아, 나는 마녀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다.
마녀는 차를 마신다.
별로 좋아하는 향도, 맛도 아니지만, 쓴맛이 나서 오히려 싫지만, 마녀는 그런 거라고 스승님에게 들은 이후 노력해서 하루 한 번 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이상한 냄새가 나는 차는 싫어.
입에 넣을 때마다 뱉고 싶어졌다.
그래도 이제 웃는 얼굴로 마실 수 있다.
마녀니까.
그녀는 스승님한테 인정받은 훌륭한 마녀다.
‘내 직감을 믿어야 해.’
정령의 계약은 라파에게 도움이 될 거다.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팔갑옷 속에 있는 뭔가가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저 남자와 연결되고 싶어, 이 갑갑하고 소름 끼치는 곳에서 나가 저 남자와 닿고 싶다고.
“그럼 시작하네요.”
갑옷에 손을 댄 채 말하자, 라파가 어깨를 조금 늘어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 제발 빨리 부탁해.”
“좋아요, 진짜 시작해요.”
긴장으로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간절하고 진정한 바람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다.
언젠가 스승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타티아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했다.
부디 이 남자에게 행운이, 정령의 축복 있기를.
*
타티아나가 갑옷에 손을 대고 깊이 심호흡한다.
굉장히 긴장한 모양이다.
그 모습이 마치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과학실험에 참여한 것처럼 보여서, 믿어도 되는가 아주 조금 고민했다.
하지만 뭐, 그녀 외에는 저주나 정령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
지금부터 아는 사람을 찾아 떠돌아다니기에는 이 갑옷이 왠지 불길하고, 그런 데 자세한 사람이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으니 나한테는 그녀밖에 선택권이 없는 거야.
하아.
“정령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 그대에게 명하노니, 세계의 법칙을 건너 내게 귀 기울여라.”
타티아나는 긴장한 채 그렇게 말하다 말고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갑옷에서 손을 떼고 나한테 파닥파닥 손짓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이 계약은 타티아나가 아니라 내가 하는 거였지.
몸에 이미 닿아 있는데 굳이 손을 대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갑옷에 왼쪽 손을 댄다.
타티아나가 작은 소리로 주문을 속삭였다.
“….”
아무래도 중2병 세 배쯤 걸린 대사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서요.”
타티아나가 작은 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녀가 말해주는 대로 따라 했다.
작은 소리로.
“정령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 그대에게 명하노니, 세계의 법칙을 건너 내게 귀 기울여라. 네 힘을 빌려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라. 그대가 이 세계에 머무는 시간, 나는 네 소유자이니, 세계의 법칙을 넘어 내 말에 따르라. 네 힘은 곧 나의 것이요, 내 영혼은 너의 친우이리라. 들어라, 속하라, 따르라, 정령아.”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쥐구멍이 있다면 벌써 들어갔을 것처럼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 창피함을 무릅쓰고 주문을 외웠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번쩍거리거나 머릿속에서 뭔가가 속삭이거나, 하다못해 바람 한 가닥도 불지 않는다.
뭐야, 이거.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정령의 계약인지 뭔지는 역시 안 되는 건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내가 실망하는데 타티아나가 가만히 갑옷을 쳐다보더니 살짝 손가락을 댔다.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갑옷 부위가 카랑, 맑은 소리를 내며 깨졌다.
“어….”
카랑 카랑 카랑.
내가 보고 있는 가운데, 갑옷을 이루고 있는 쇳조각이 맑은 소리를 내며 점점 부서져 갔다.
도미노가 무너지는 것 같다.
만들어진 순서를 되돌아가는 것처럼 차례차례 부서진 팔갑옷은 마침내 한 조각도 남지 않게 되었다.
“됐다.”
타티아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잠시 갑옷이 있던 자리를 보다 내게 시선을 돌린다.
“됐어요. 계약이 이뤄졌어. 맙소사.”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배는 커진 것 같다.
“라파 씨… 마녀였어요?”
“아니. 난 남잔데.”
“마녀는 여자 남자 구분이 없어요. 그냥 마녀인 거죠.”
갑옷이 깨진 것으로 타티아나는 내가 마녀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아닐 거다.
어쨌든 팔갑옷이 없어져서 다행이… 어라. 나는 팔을 움직여보다 멈칫했다.
팔을 굽혔다 펴고, 옆구리에 붙이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
이거.
내 표정이 굳자,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요?”
그녀는 계약이 된 게 기쁜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건드렸다.
있어.
보이지 않지만 뭔가가 있다.
내가 팔을 더듬거리자, 타티아나가 손을 뻗었다.
“왜 그래요, 라파 씨… 음?”
내 팔을 만지려던 타티아나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뭔가 있네요?”
“….”
“갑옷인가.”
“….”
분명히 갑옷은 깨져서 부스러기가 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내 팔에는 여전히 뭔가가 있었다.
그것도 이번에는 한스처럼 갑옷을 낀 형태로 뭔가가 둘러져 있다.
그냥 붙어 있는 게 아니라 갑옷을 끼고 있는 거야.
타티아나는 내 팔을 더듬더듬 만져본 뒤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계약은 이뤄졌거든요. 갑옷이 깨진 것만 봐도 그렇고.”
“근데 이건 왜 이런 거지?”
내 말에 타티아나가 미안한 듯이 말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갑옷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
“정령의 갑옷이니까.”
이봐, 그러면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게 아닐까.
아니, 아니, 뭔가가 팔에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기다.
공기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물론 지금 만져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실체 없는 공기니까 해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기 힘보다 더 강해졌던 한스의 그 저주는 없어졌겠지.
그래, 그럴 거다.
아까의 그 중2병 주문에도 정령인지 뭔지는 내 말을 따르라고 했으니 괜찮을 거야.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식은땀도 조금 나는 것 같아.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찻잔에 손을 뻗었다.
차라도 먹으면서 마음을 진정시키자.
아까 반쯤 먹다 남긴 차는 이미 식었는지 더 이상 김이 나지 않았다.
찻잔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막 넣고 잡았을 때였다.
콰직!
손잡이가 부러졌다.
“….”
나는 내 손에 잡혀있는 손잡이를 보았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나는 손을 몇 번 오므렸다 편 뒤 조용히 일어났다.
항상 들고 다니는 도끼 앞에 선다.
찻잔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원래 힘이 강하니 실수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도끼는 어릴 때부터 함께 크다시피 한 물건이다.
제2의 손이라고 할까.
이 도끼를 어떻게 잡으며 어떻게 휘두르고 다뤄야 하는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도끼를 잡았다.
콰직!
부러졌다.
“라파 씨, 엄청난 괴력이군요.”
타티아나가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난처한 듯 말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방긋 웃는다.
어이, 이봐. 지금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 것 같은데 그럴 상황이 아니야.
“타티아나, 정령의 계약은 정말 이뤄진 건가?”
“네.”
“뭔가 증거 같은 게 있어?”
타티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냥 감이기 때문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낸다.
“… 혹시 저주가 발동한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갑자기 모든 물건을 부수는 손이 되지 않았을 것 같다.
타티아나가 머리를 붕붕 저었다.
“그건 절대로 아니에요. 당신은 확실히 정령하고 계약했어요. 그리고 그건 저주라든가 그런 나쁜 게 아니에요. 지금도 그 손에서 나쁜 건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된 걸까.
타티아나를 원망하거나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녀에게 해도 좋다고 허락한 건 나니까, 책임도 내가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워.
‘이게 저주가 아니면 대체 뭐가 저주지.’
내가 멍하니 서 있자 타티아나가 다가와 오른팔을 잡았다.
내 피부에 직접 닿지 못한 채 약간 허공에 그녀의 손바닥이 떠 있었다.
대체 뭐지.
타티아나는 가만히 내 손을 잡고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분명 좋은 건데… 나쁜 건 아닌데….”
그녀가 너무 풀이 죽어서 나도 모르게 쓰다듬으려다 얼른 주먹을 잡았다.
잘못해서 그녀의 머리가….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왼손으로 부러진 도끼를 한 번 잡아 안전한 것을 확인한 뒤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행히 왼손은 원래와 같은 모양이다.
나는 왼손으로 타티아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괜찮아. 뭔가 방법이 있겠지.”
“미안해요.”
“아니, 너 때문이 아니야.”
삐빗, 머리 위에서 렐라의 소리가 울렸다.
렐라가 날개를 퍼덕여 속도를 조절하며 내 어깨로 뛰어내렸다.
어깨 끄트머리로 뒤뚱뒤뚱 걸어가더니 몸을 앞으로 구부려 콕 내 팔을 쫀다.
그 순간, 공기 같은 것이 화악 퍼지며 렐라를 튕겼다.
“삐빗!”
렐라가 붕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깜짝 놀라 왼손을 뻗는데, 렐라는 퍼덕퍼덕 날갯짓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다.
타티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나… 나… 방금 렐라 깃털이 밀리는 걸 봤거든요. 근데 꼭 투명한 뭔가가 이렇게, 둥글게 퍼지면서 렐라를 밀어낸 것 같았어요.”
“….”
설마.
“갑옷은… 방어구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령의 계약인지 뭔지 때문에 내 팔에 공기 방어막 같은 게 생긴 걸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갑옷 형태지만 뭔가가 나를 건드리면 방패나 돔처럼 펼쳐지는.
타티아나가 의기양양한 듯 가슴을 내밀었다.
“거봐요. 나쁜 건 아니에요. 당신을 지켜주는 걸 거예요. 분명히 그래요.”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다.
방어막이면 방어막이지, 어째서 뭔가 만지면 만지는 족족 다 부서지는데.
하아.
나는 길게 한숨 쉬었다.
일단 당분간은 오른손으로 아무것도 만지지 말자.
잘못하면 대형 참사다.
“삐빗!”
렐라가 침대를 타고 올라와 나를 향해 뛰어내렸다.
파닥파닥 날개를 움직여 내 팔 쪽으로 향한다.
한 번 한 거니 위험하지는 않겠지.
가만히 보고 있자, 렐라가 닿기 직전 확실히 공기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렐라의 잿빛 깃털이 투명한 뭔가에 부딪힌 듯하더니, 곧바로 탄력 있는 고무에 튕기는 것처럼 뒤로 밀렸다.
삐빗!
놀이동산에 온 기분인가.
렐라가 즐거운 듯 소리 내며 데구르르 허공을 굴러, 날갯짓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