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90)
090 독 반지와 가짜 공주
본궁에서 떨어진 작은 별궁.
일 년 내내, 이 년, 삼 년, 해가 지나도 이곳에 외부 사람의 발이 닿는 경우는 없다.
완전히 바깥과 차단된 별궁만의 작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리아나 공주라고 불리는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하얗다.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외부와 단절되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곳에도 다른 곳처럼 평등하게 눈이 내린다.
그것이 너무 이상해서 그녀는 몸에 쌓이는 눈도 떨어뜨리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 눈처럼 나도 언젠가 다른 곳에 발 디뎌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일은 평생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이곳에 공주가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이다.
왜 그런 게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리아나 공주는 별궁에서 살아야 한다고 들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뭔가를 먹고 입고 사회에 필요한 걸 익히며 또 뭔가를 소비해야 한다.
리아나 공주가 살아있다면 당연히 그녀도.
그래서 하루에 두 번 정중하게 만들어진 음식이 별궁에 들어오고 가정교사 겸 감시인인 시녀 두 명의 감시 아래 식사를 했다.
별궁 바깥에서 들여온 식사는 그녀가 먹을 즈음에는 차갑게 식어 있어, 분명 화려한 모습인데 맛이 없었다.
옷과 구두, 약간의 장식품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꼬박꼬박 새로운 것이 별궁으로 옮겨졌다.
그녀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한동안은 착용하지만, 때가 되면 다시 거두어 어디론가 가져가버렸다.
그것은 모두 리아나 공주가 별궁에 살고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걸 거다.
시녀들은 그런 모든 생활을 하루 종일 지켜보았다.
식사할 때도 곁에서 제대로 식사 예절을 지키는지 미비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고, 걷고 서고 앉는 모든 행동을 감시한다.
너는 공주가 아니다, 가짜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뭔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면서 공주처럼 행동하라고 강요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처음에는 의문도 아무것도 품지 못하고 허둥지둥 따랐지만, 오랫동안 혼자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절망이 조금씩 풀처럼 자라 마음을 덮쳤다.
별궁 내 약간의 공간과 방, 거기에 딸린 작은 정원이 세상의 전부.
외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건 방에 딸린 작은 정원에 설 때뿐이다.
그나마도 손질이 되지 않아 잡풀과 가시덤불로 뒤덮여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은 원래보다 매일 작아져 갔다.
‘이대로 매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리아나 공주로 죽는 걸까.’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에 눈물이 섞였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좋으니 누군가, 누군가 그녀를 긍정해 줬으면 좋겠다.
작은 미소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누군가에게 받아보고 죽었으면.
웨즈나.
그것이 원래 이름이다.
죽기 전에 누군가 한 번만이라도 그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어.’
작은 새장 같은 이 별궁 안에는 그녀와 감시를 맡은 두 명의 시녀뿐이다.
숨 쉴 때마다 하얀 김이 허공으로 퍼져 사라져갔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고여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속눈썹에 눈이 내려앉아 세상이 흐릿해 보일 무렵이었다.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왕비…?
시녀의 차가운 눈초리가 그녀의 행동을 나무라는 것 같아, 웨즈나는 당황해서 몸을 털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시녀가 재빨리 눈으로 젖은 부분을 천으로 닦았다.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뒤 시녀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됐다는 신호다.
웨즈나는 허둥지둥 응접실로 향했다.
왕비가 별궁을 찾은 일은 지금까지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근래 몇 년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한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왠지 불안해서 입술을 물자, 시녀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찔한다.
웨즈나는 입술을 가볍게 열고 등을 쭉 폈다.
그게 올바른 행동이라는 듯 시녀가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안심해 작은 숨이 나왔다.
하지만 응접실에 도착하자 다시 긴장이 심해진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 것 같아 웨즈나는 의식적으로 입술을 떼고 가늘게 호흡했다.
인사를 하려고 자세를 취하는데 왕비가 손을 저었다.
필요 없다는 것 같다.
그대로 동작을 멈추자 왕비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혼인이 정해졌다.”
“… 호… 혼인이요?”
“혼례는 아레논 왕국의 발테르 공작가에서 행해질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시녀한테 듣도록 하라.”
“….”
너무 놀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혼례라니.
‘나는 가짜인데.’
겁이 더럭 났다.
“시녀가 그대로 따라갈 테니 지금까지처럼 지시대로 따르면 될 것이다.”
왕비가 치마 사이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벨벳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이다.
안에는 알이 굵은 보석 반지가 들어 있었다.
하얀 왕비의 손이 웨즈나 앞으로 뻗었다.
보석 반지를 받자, 왕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라. 이건 먼 나라로 가게 된 딸을 걱정한 어머니가 주는 것.”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작은 불꽃이 켜졌다.
관심 없는 것처럼 보였어도 오랫동안 별궁에 있었던 그녀를 약간은 생각해 준 걸까.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공작가에서도 딱히 그걸 빼놓으라 하지 않을 것이다. 항상 지니고 다녀. 그대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만일 그게 드러날 것 같으면….”
왕비가 웨즈나 손에 있는 반지 보석의 밑부분을 누르자 톡 열려 작은 공간이 나왔다.
그 안에는 하얀 가루가 약간 들어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이걸 먹어라. 고통 없이 잠들어 그대로 숨이 끊어질 것이다.”
“….”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싫다.
이런 건 싫어.
별궁 건물에서 조용히 혼자 죽어가는 것도 싫지만 낯선 곳에서 그런 식으로….
애원하는 심정으로 왕비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왕비가 웨즈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피부에 박혀 아프다.
*공작가에서 만일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고문 받아 지하 감옥에서 처참하게 죽게 될 거다. 당연히 이 나라에도 항의가 오겠지. 그렇게 되면 이 나라에 있는 너의 진짜 가족도 죽는다.”
“….”
웨즈나가 이 성에 오게 된 건 6살 때였다.
부모를 기억하고 있었다.
형제들도 있었다.
언니 오빠는 물론 동생도.
얼굴은 희미해져 정확하게 떠올릴 수 없지만 그래도 가족과 함께 보냈던 몇몇 장면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성에 온 뒤로 가족을 만난 적이 없지만, 웨즈나에게는 그들이야말로 자신이 살아 있었던 유일한 증거였다.
웨즈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증거.
그런 가족을 잃어?
그러면 웨즈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녀는 이름 없는 가짜로 죽어간다.
죽이고 싶지 않아.
그들과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먼 하늘을 보며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자신이 고문으로 죽어간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너무 두렵다.
“…오… 와… 왕비님… 저는 진짜 공주님이… 아니에요… 될 수 없습니다… 용서를… 제발… 저는 할 수 없어요….”
울면서 떠듬떠듬 말하자 옆에 있던 시녀가 바짝 다가왔다.
“공주님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저희 지시에만 따르면 됩니다.”
웨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별궁에서라면 몰라도 다른 곳에서는 금방 들키고 말 거다.
가만히 지켜보던 왕비가 실망했다는 듯 작게 숨을 쉬었다.
왕비가 시녀를 노려본다.
“이렇게 쓸모없는 것으로 기르라고 너희에게 많은 돈을 주고 붙여 놓은 게 아니다.”
“죄송합니다, 왕비 전하.”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웨즈나의 몸이 흠칫 떨렸다.
어릴 때는 곧잘 회초리를 맞았다.
뭔가 잘하지 못하거나 하라는 걸 따르지 않았을 때, 시녀들은 가차 없이 매끈한 나무 몽둥이를 휘두른다.
또다시 그렇게 맞는 걸까 싶어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왕비의 차가운 목소리가 움츠러든 공기로 퍼졌다.
“이미 정해진 일이다. 출발은 내일이니 준비하도록.”
내일?
혼담이 온 게 오늘이 아니었었나.
자기도 모르게 왕비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몸을 돌려 나가고 있었다.
웨즈나는 어쩔 수 없이 시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녀가 매서운 눈으로 웨즈나를 노려보았다.
무섭다.
하지만 적어도 어디로 가는 건지, 남편이 될 분은 어떤 사람인지, 적은 정보라도 원한다.
조금이라도 공주로 행세할 수 있도록, 아주 조금이라도 남편님의 마음에 들 수 있도록.
하지만 웨즈나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자, 시녀가 막는 것처럼 말했다.
“공주님. 당신은 그저 우리가 하는 말에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공작가로 가도 그건 변하지 않아요. 반지를 끼고 방으로 가세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합니다.”
“… 하지만 나도 뭔가 알아야….”
시녀의 눈초리가 차갑다.
“우리는 내일의 출발을 준비해야 합니다. 공주님처럼 한가하지 않아요.”
“….”
웨즈나는 입을 다물고 손안에 들린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좋지.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시녀가 매몰차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시녀에게 이끌려 응접실을 나와 방으로 향한다.
방안으로 들어가자 약간 열린 문으로 바깥이 보였다.
정원에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눈이 내려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이대로 눈이 세상을 덮어 모든 게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
외삼촌은 이곳에서 시간을 조금 보낸 뒤 에노르토스에 가기로 했다.
제니와 재회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떠나기 싫을 것이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지.
공국에 대한 건은 아직 시간이 많으니 몇 년 정도 걸려도 아무 상관 없다.
하지만 렐라 쪽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금방 크는 법이라고는 해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오렌지색 깃털이 두 개로 늘어나 있었다.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런 식이면 금세 사람들한테 들킬 거다.
“아기 새는 자라는 게 빠르네요.”
신기한 듯 타티아나가 렐라의 깃털을 들여다본다.
렐라도 제 깃털 색이 변하는 건 알고 있는지 자랑하는 것처럼 날개를 펼쳤다.
손톱보다 작은 깃털이 반짝 빛나는 것처럼 눈에 들어왔다.
“글쎄, 몸은 전혀 크지 않는 것 같은데.”
“그렇죠? 깃털은 바뀌는데 왜일까요? 먹는 게 부족한가?”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먹는 건 충분하다 못해 넘치겠지.
이 녀석은 어미랑 같이 돌아다니면서 사냥도 하는데 우리한테 돌아와서도 엄청나게 먹어댄다.
우리가 소비하는 육포의 반은 렐라가 먹는 것 같아.
“삐빗!”
렐라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와 타티아나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먹을 게 생각난 모양이다.
눈동자가 엄청나게 반짝거렸다.
“렐라 눈동자의 금빛도 점점 늘어나는 느낌이에요.”
타티아나가 렐라에게 육포를 내밀며 눈동자를 가만히 본다.
확실히 검은 눈동자에 뿌려진 황금 가루가 많아져 있었다.
“이제 정말 누군가 알아차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네.”
“그렇죠.”
타티아나가 작게 한숨 쉬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슬슬 영지로 갈까?”
내가 묻자 타티아나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라파 씨. 그… 공작가로 가서 정식으로 혼인하게 되면 말이에요.”
“그래, 우리는 명실공히 완벽한 부부가 되는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요.”
타티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냥 평민으로 자랐거든요. 공작가니 공주니, 그런 건 정말 자신 없어요. 심지어 드레스도 입은 적이 없으니까요.”
타티아나가 드레스를 입으면 그건 정말 예쁜 공주님일 거다.
머릿속에 신데렐라 실사판으로 타티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이 경우에는 미녀와 야수가 더 어울리려나.
어쨌든 정말 예쁠 거다.
내가 흐흐 웃자 타티아나가 내 손을 잡아 주의를 끌었다.
“이거 심각한 얘기거든요. 나 정말로 공주 흉내는 내지 못할 것 같은데.”
공주 흉내가 아니라 타티아나 네가 진짜 공주야.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타티아나의 걱정은 여전한 모양이다.
뭐, 가짜와 진짜를 바꿔치기하면 진짜가 가짜 흉내를 내게 생겼으니 걱정은 되겠지.
“괜찮아. 공작가에 있는 사람들은 사정을 다 알지 못한다 해도 우리 행동을 제한할 사람은 없을 테고, 정 불편하면 혼인만 제대로 끝내고 나와버리면 되니까. 사무관의 얘기 들었잖아. 우리는 그냥 우리 편한 대로 행동하면 돼.”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그녀를 안으며 히죽 웃었다.
“혼례 의상 입은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되네.”
타티아나가 혼인할 때 입을 옷은 공작가에서 준비한다.
벌써 사람이 와 타티아나의 몸에 천을 잔뜩 대고 가봉해 갔다.
발의 본도 떴다.
물론 내 것도.
“나도 그건 조금 기대되기는 하는데요….”
타티아나가 살짝 내 모습을 본다.
어쩌면 그녀도 내가 혼례 의상 입은 모습을 상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내 가짜 공주가 떠올랐는지 한숨을 쉰다.
그러자 위로하는 것처럼 렐라가 삐빗 소리 내며 요란하게 날갯짓했다.
아니, 위로가 아닌가 보다.
그새 육포를 다 먹고 또 달라는 모양이다.
입을 짝짝 벌리며 뭔가를 어필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다시 육포를 내밀자 얼른 거기에 달려들었다.
저 녀석, 배가 엄청나게 빵빵한데 그래도 들어가나.
너무 먹어서 빵 터지는 거 아냐?
타티아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은근슬쩍 손가락으로 렐라의 배를 쓰다듬더니 중얼거렸다.
“그래도 누르면 살짝 들어가네요.”
아니, 배가 두 배 가까이 부푼 시점에서 이미 아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