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96)
096 마누엘은 공주를 습격한다
마누엘은 본처 소생에 첫 번째 남아.
원래라면 후계자가 될 신분이지만 머무는 공간은 본관의 중앙에서 뚝 떨어진 건물이었다.
후계자인 클라우스와는 어릴 때부터 대우가 다르지만, 그나마 적자이기 때문에 이것이다.
어머니 신분이 다른 이복형제들은 더 먼 건물에 살고 있었다.
본가에 있지 못하고 다른 영지, 다른 거리에 사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그런 곳에서 확실하게 구별을 두기 때문에.
혹시라도 후계자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붙는 집사와 시종, 생활에 사용하는 물건에 이르기까지 어릴 때부터 대우가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본관의 일부가 새로 단장되고 있는데, 그곳은 클라우스가 머물던 공간의 근처였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클라우스가 돌아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랫사람을 풀어 확인해 본 결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클라우스가 머무는 공간은 그대로에, 그 근처가 새로 꾸며진다.
그것도 매우 급하게.
사용되는 물건은 모두 최상급이었다.
아버지인 공작과 후계자 클라우스에만 쓰이던 품질의 것들이 다수 들어간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 귀빈이 머무는 건물에 사라문즈 공국의 공주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혼인을 위한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건 아마 집사장이 입단속을 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외국의 공주가 들어와 있다면 아무리 쉬쉬해도 어디에선가는 말이 샌다.
갑자기 단장이 시작된 후계자 공간, 거기에 들어간 최상급의 물품들, 공국의 공주, 혼인의 소문.
‘설마.’
마누엘의 눈앞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 같다.
클라우스의 아들을 죽이려던 일로 집사장의 은근한 경고를 받았다.
두 번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집사장은 아버지의 손발이다.
집사장의 말은 아버지의 뜻.
마누엘은 그때 아버지가 클라우스의 아들을 우리 핏줄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졌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그 아이를 받아들이기에는 사정이 좋지 않다.
헬가는 원한을 너무 쌓았다.
그녀의 아들을 곱게 보지 않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아직 충분히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뭔가 방법을 생각해 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 아이의 신분을 높이기 위해 공국의 공주와 혼인을 맺었나.’
클라우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대신 그 아이가 후계자가 되는 것인가.
‘이 나를 완전히 제쳐두고.’
그럴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생각은 그렇다고.
하지만 머리가 이해해도 마음이 용서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이 집안에서 자란 클라우스와 그 아이는 다르다.
완전히 외부인, 거기에 야만인의 피까지 들어있는데,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자란 그놈이 마누엘보다 낫다는 건가.
‘아버지에게 나는 그 정도로 아무 의미 없나.’
가슴이 타는 것 같다.
‘이대로 가만 앉아서 그늘 속에 묻히느니 차라리….’
부하들 말에 따르면 마누엘을 꺼려서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인지, 공주가 머무는 귀빈용 건물에는 사람이 적다고 한다.
최소한의 인원만 두고 있는 모양이다.
내부에서 적을 경계할 리도 없으니 경비도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호위를 겸한 시종과 시녀 한둘이 있을 뿐이겠지.
‘공주를 내가 가지면.’
마누엘 역시 공작의 적자다.
공국의 공주와 혼인할 정도의 신분은 된다.
이 나라에서 여자의 순결은 중요한 것.
남편 외의 남자에 닿아서는 안 된다.
일단 빼앗기만 하면 아버지도 어쩔 수 없다.
마누엘의 손이 닿은 여자를 클라우스 아들의 아내로 삼을 수는 없을 테니까.
공주를 혼자 둘 수는 없으니 마누엘을 축출할 수도 없다.
심한 질책은 받겠지만 아버지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남편만 바뀐다.
운이 좋으면 판도를 바꿀 가능성이 있을지 모른다.
마누엘은 시종 한 명만 데리고 거처를 나왔다.
새벽이라 하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사장의 눈이 어디엔가 있을지 모른다.
마누엘은 사용인의 통로를 이용해 공주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
웨즈나가 나간 직후, 공주가 머물던 관의 사용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 침대의 시트와 베개 등은 물론이요 방에 구비되어 있던 은식기와 장식품 일부가 바뀌었다.
창문은 활짝 열어 그때까지 있던 향을 날린다.
웨즈나를 위해 피웠던 향이 얼추 사라진 방에는 새로운 향초 주머니가 여기저기 달리기 시작했다.
타티아나를 맞을 준비다.
지금의 방도 충분히 괜찮은데 방주인이 달라진다고 거기에 맞춰 바꾸는 모양이다.
귀족집의 사람들은 어렵겠구나.
일이 많다.
“도련님, 먼지가 납니다. 굳이 이런 곳에 서 계시지 않아도….”
내가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자, 집사장이 곤란한 듯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먼지 좀 먹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동안 할 일도 없으니까.”
“공주께서 오시면 곧바로 알려드릴 테니 옆방에서 좀 쉬십시오. 밤이 늦었습니다. 몸이 상하세요.”
아니, 이 몸을 보면서 밤잠 좀 안 잔다고 걱정하는 건 무리지.
너무 튼튼해서 열흘 정도 자지 않아도 멀쩡할 거라고, 백 명한테 물어보면 백 명 모두 대답할 거다.
하지만 집사장의 눈은 진지하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나 어릴 적에도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집사장은 이미 정리가 끝난 자리에 의자를 놓았다.
“도련님, 이쪽으로.”
나를 안내해 앉힌 뒤 음료수와 한입에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를 가져온다.
꼭 어미새가 새끼 돌보는 것 같다.
렐라도 아니고 덩치는 산 만한 어른이 그런 대접을 받다니 조금 부끄러웠다.
먹을 건 정말 고마웠지만.
이 세계는 간식거리가 적은 편이라 공작가에서 내놓는 달콤한 음식들은 매우 기쁘다.
공작가의 무력이나 돈 같은 것보다 그게 더 마음을 끌었다.
여기에 커피까지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아직까지는 본 적이 없다.
공작가에 있는 동안 한 번 찾아봐달라고 할까.
잠시 멍해 있는 동안 얼추 정리된 것 같다.
사용인들이 마지막 점검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몇 군데 물건만 바꾼 것 같은데 방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문득 귀 기울여 보니 밖에서 다그락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다.
방금까지 바쁘게 돌아다니던 사용인들이 황급히 물건을 정리해 방을 나갔다.
내가 일어나자 집사장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따라 나온다.
밖으로 나가자 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마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공작가 부지 안에서는 지붕 없는 이인용 마차를 타고 다니는데, 지금 도착한 건 사방이 꽉 막힌 것이다.
시종이 마차 문 앞에 나무로 된 단을 놓았다.
문이 열리자 타티아나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밤이라 볼 사람도 없는데 공주 흉내를 위해서인지 얇은 베일을 쓰고 있다.
옷도 공주가 입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한 거지.’
공작가 사람들은 쓸데없이 세밀한 곳에서 완벽한 것 같다.
내가 가까이 가 손을 내밀자 타티아나가 내리는 대신 가만히 내 손바닥을 보았다.
“왜?”
내가 묻자 타티아나는 작게 한숨 쉬었다.
“평상시에는 대강 내리잖아요. 물론 라파 씨는 마차에 타고 내릴 때 몇 번이나 나를 잡아줬지만 나는 정말 대강 잡고 내렸거든요. 하지만 이제 그걸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다시 한숨 쉬는 타티아나의 모습이 왠지 불쌍하다.
베일 너머로도 한심한 얼굴인 걸 알겠어.
내가 웃자 타티아나가 다시 한숨 쉰 뒤 손을 잡았다.
보편적인 아가씨보다 센 힘으로 내 손을 누른다.
타티아나, 다른 남자 손을 그렇게 잡았다가는 함께 바닥을 구를 거야.
물론 나는 안 그런다.
힘만큼은 남아도는 사람이니까.
어쨌든 앞으로가 재미있을 것 같다.
푹푹 한숨 쉬는 타티아나가 바닥에 내리자 집사장 뒤에 있던 매디즈가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마세요, 공주님. 앞으로는 제가 옆에서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혹시 잘 모르겠다 생각되면 살짝 저를 보시면 됩니다. 제가 견본이 되어드릴 테니까요.”
“… 잘 부탁드려요.”
베일 속에서 타티아나의 어깨가 축 내려갔다.
집사장이 나와 타티아나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이제 슬슬 저희에게 말을 낮춰 주십시오.”
아, 그러고 보니 공작가에 도착했을 때 그런 말을 들었다.
자기들은 아랫사람이니 말을 편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이 사람들이 너무 정중해서 처음에는 왠지 그러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나나 타티아나는 원래 이곳과 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주인처럼 행동하는 데는 아무래도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
우리 표정을 보고 집사장의 눈매가 가늘게 누웠다.
“낯설더라도 조금씩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도 있으니까요.”
뭐, 그것도 그런가.
타티아나는 공주님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알았어요.”
안으로 들어가자 하녀가 막 침대에 보온통을 넣는 중이었다.
이 세계는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둥글고 납작한 구리통에 숯불을 넣어 침대를 따뜻하게 한다.
이게 의외로 효과가 좋아 늦은 새벽까지 침대가 뜨끈뜨끈하다.
보온통을 본 타티아나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잠시 동안이지만 마차를 타고 오느라 추웠던 모양이다.
원래는 잘 시간에 움직였으니 피곤하기도 하겠지.
어느새 하인들은 모두 물러가고 방에는 집사장과 매디즈만 남았다.
이제 그만 잘까 생각하는데 매디즈가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 도련님, 공주님께서는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
알아.
타티아나도 그녀의 말이 이상한지 침대로 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만 아직 혼례 전이라.”
곤란한 듯 말하는 매디즈에 이어 집사장이 말을 꺼냈다.
“도련님,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
아니, 기다려라.
나와 타티아나는 이미 결혼했다.
그런데 혼례 전까지는 동침 금지라는 말이야?
이게 어느 나라 법이냐.
매디즈가 굉장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곳은 믿을 만한 사람만 출입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말이 샐 가능성이 있습니다. 혼례 전의 공주님이 도련님과 동침한다는 사실이 새면 상처받는 건 공주님이세요.”
“….”
그,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하기가 어렵잖아.
저절로 어깨가 처졌다.
본관은 거대한 성이다.
여러 개의 각기 다른 크기를 가진 건물이 길게 이어 붙어 마치 거대한 요새 같다.
그 건물 안에는 수많은 공간이 존재하고, 한 건물에 같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 구분되어 있었다.
공작의 집무실 등 업무 공간과 사적인 공간, 무도회가 열리는 곳, 공작의 자식들과 외부인이 머무는 건물, 사용인들이 사는 곳 등이 긴 회랑이나 복도, 비워진 거대한 공간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금 타티아나가 머무는 공간은 손님 접대용의 건물이다.
나는 여기에서 뚝 떨어져 한참 멀리 있는 건물에 있었다.
하다못해 바로 옆방이면 좋겠는데 멀다.
“하아.”
나는 길게 한숨 쉬었다.
“어쩔 수 없죠. 혼례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죄송합니다, 도련님.”
집사장과 매디즈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나와 타티아나는 혼인하면 다시 건물을 옮기는 모양이다.
그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
나는 길게 한숨 쉬며 타티아나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타티아나는 외롭지 않은지 웃고 있었다.
“나중에 봐요, 라파 씨.”
“… 그래.”
졸렸는지 타티아나는 불빛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흔들흔들 침대로 가버렸다.
마차 지붕을 타고 온 불사조와 렐라가 먼저 침대 위에 올라가 자리 잡는다.
타티아나는 매디즈의 시중을 받으며 파티션 너머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도련님.”
집사장의 재촉을 받으며 나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힐끔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혼자 침대 속으로 꾸물거리며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렐라가 삐비거리며 타티아나 위에 올라서 뭔가 자랑한다.
뭘 자랑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가슴을 삐죽 내밀고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었다.
어쩌면 침대를 정복한 기분인지도 모른다.
그딴 걸 정복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나만 혼자야.
이런 데서 인생의 불합리를 느끼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인생이란.
하아아아아아아아.
방을 나서는 내 입에서 길고 긴 한숨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