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97)
097 죽이지는 않아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방문이 닫히기 직전 졸음 그득한 타티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 렐라, 좀 비켜줄래? 내가 누울 자리에 그렇게 서서 돌아다니면 잘 수 없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재미있는 것 같다.
키득거리는 웃음과 이불 밟는 소리 같은 게 섞여 있었다.
어쩌면 침대 위에서 렐라와 공방을 벌이는 건지도 모른다.
타티아나는 왠지 몰라도 렐라와 불사조를 좋아하니까.
틈만 나면 놀아준다.
사고만 치는 녀석들이 뭐 그리 예쁜지 모르겠는데.
“….”
나도 함께 놀고 싶어.
귀여운 부인이랑 침대에서 술래잡기하고 싶다.
하아.
그런 생각을 하며 방에서 멀어졌을 무렵이었다.
이상한 감각에 걸음을 멈췄다.
‘뭔가….’
잘은 모르겠다.
다만 거북했다.
이 틈새에 뭔가가 끼인 것처럼 불편하다.
걸음을 멈추자 집사장이 왜 그러느냐고 묻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댄다.
집사장은 금세 깨닫고 조용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집사장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나를 보았다.
그 모습에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잠시 자신의 감각에 집중했다.
높은 천장과 바닥 사이의 짙은 어둠.
처음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신경을 기울이면 어디에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복도를 울리는 작은 발소리.
이 저택에서는 밤이나 새벽에도 종종 사람들의 발소리가 조용히 울리곤 한다.
한밤에는 하인이나 시종 대부분이 잠자리에 들지만, 이 거대한 저택에는 그 시간에도 움직이는 야간 근무조가 있었다.
복도의 촛불을 끄거나 밝히는 사람, 문을 지키는 시종, 주인이 부를 걸 대비해 복도에서 기다리는 자.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움직인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들의 움직임이 잘 들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오랫동안 짐승의 기색을 신경 쓰며 살아온 내 귀에는 그들이 내는 작은 소리도 곧잘 들어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조용하다.
아마 신경 써서 걷기 때문일 거다.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주변에 스며들어 거슬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들리는 발소리에는 그런 신경 씀이 보이지 않았다.
사용인의 발소리가 아니다.
나는 등불이 어른거리는 복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일자로 이어진 복도 중간중간에는 커튼이나 문으로 가려진 통로가 있다.
사용인들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건 그렇게 가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발소리는 그 통로 너머 어딘가에서 점점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꽤 가깝다.
‘이건 좀 이상한 일이네.’
외부나 다른 건물이라면 몰라도 여기는 귀빈이 묵는 곳이다.
숙련되지 않은 하인은 아마 들어오지 못할 테니 저 발소리는 적어도 이곳 사용인은 아니다.
그런데 왜 사용인 통로에서 오고 있어?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아니다. 여기도.
쭉쭉 걸어가는 동안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 여기네.
발소리는 타티아나의 방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복도의 커튼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가만히 귀 기울이자 남자들의 목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전체는 아니지만 드문드문 단어가 귀에 들어온다.
“… 공주는… 자고….”
“… 괜찮….”
“… 괜찮아… 시종은… 기절시키… 걱정 마라….”
집사장에게도 들린 모양이다.
깜짝 놀란다.
그의 얼굴이 확 변했다.
집사장의 입가가 내려가 굳은 걸 보면 확실하게 사용인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내 얼굴도 굳었다.
공주라고 하면 이곳에는 한 명뿐이다.
아니, 공주 아닌 다른 사람조차 없다.
이 귀빈동에는 오직 타티아나 한 명만 머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놈, 누군지 몰라도 타티아나를 노리는구나.’
한밤에 여자 처소로 몰래 침입하는 놈이 있다면 가능성은 나쁜 쪽뿐이다.
거기에 시종은 기절시킨다고?
절대로 좋은 방향은 아니겠지.
죽이러 오는 암살자든가,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는 놈이든가, 그것도 아니면 납치범이든가, 어쨌든 나쁜 놈 확정이다.
복도 커튼이 살짝 흔들리면서 그 사이로 남자 두 명이 나온다.
앞선 남자보다 뒤쪽의 옷차림이 훨씬 좋았다.
‘타티아나를 노린 건 뒷놈이군.’
남자들이 미처 나를 보기 전, 나는 팔을 힘껏 당겼다 뻗었다.
앞장선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 뒤에 서 있던 남자는 그래도 뭔가 한가락 하는 놈이었던 모양이다.
나를 보기도 전에 곧바로 남자의 몸에서 바람이 일어났다.
반응은 빠르지만 그 정도는 내게 갓난아기 숨보다도 약한 것이다.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놈에게서 일어난 바람이 나를 향해 몰려오기도 전에 이미 내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크헉!”
남자의 비명이 내 주먹에 맞으며 입속으로 사라졌다.
이빨 부러지는 감각이 손등에 닿는다.
나는 뒤로 넘어가는 놈의 멱살을 잡고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퍽,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넘어갔다.
다리가 풀려 놈이 밑으로 주저앉는다.
나는 놈의 멱살을 끌어올려 다시 주먹으로 머리를 쳤다.
그래도 죽지 않는다.
뇌는 제대로 피했고 타격은 입과 코 부분에 집중하고 있었다.
죽일까 보냐.
절대로 안 죽여.
제대로 힘 조절했다.
적어도 백 번은 주먹으로 맞고 자기가 어떤 잘못을 하려 했는지 뉘우쳐 줘야 하니까.
다시 두어 방 때리는데 먼저 맞고 나가떨어졌던 남자가 내게 달려들었다.
“머, 멈춰! 그분은! 맙소사! 마누엘 님! 마누엘 님!”
거인 등에 매달린 거미처럼, 남자가 내 목에 손을 감고 버둥거린다.
집사장도 당황해 내게 다가왔다.
“도련님, 그분은 클라우스 님의 형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죽이지 말라고?
알았어, 죽이지 않는다.
나도 공작가 사람을 죽이는 게 길거리에서 원수 한 트럭 죽이는 것과는 다르단 사실 정도는 안다.
물론 타티아나한테 손가락이라도 한 개 닿았다면 공작가고 혈육이고 뭐고 다 내려놓겠지만 지금은 모의 정도니까 봐줄게.
“하지만 죽이지 않아도 처벌은 해야지. 다시는 이런 일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나는 중얼거리며 다시 주먹을 날렸다.
등에 붙은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내 목을 조인다.
파리 같아 귀찮다.
나는 마누엘이라는 놈을 잡은 채 다른 손을 목뒤로 돌렸다.
남자를 잡아 휙 집어던지자 놈은 벽까지 날아가 부딪친 뒤 바닥에 쓰러졌다.
“무슨 일이에요?”
방문이 열리고 타티아나가 삐죽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핏덩이가 된 마누엘 멱살을 쥔 채 고개를 돌렸다.
“미안. 시끄러웠어?”
“…..”
타티아나의 얼굴이 굳는다.
그녀는 잠시 나와 피투성이 남자를 번갈아 본 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못 본 걸로 하려는 모양이다.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좋아, 한밤에 너무 시끄럽게 굴면 민폐다. 스무 대만 더 때리자.
내가 다시 주먹을 휘두르자, 집사장이 핼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닫는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차마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조금 전 문이 열렸을 때 빠져나온 렐라가 복도 끄트머리 널브러진 남자 위에서 승리의 외침을 지르고 있었다.
오늘도 렐라는 변함없이 평화롭다.
다 때린 뒤 손을 놓자, 마누엘은 힘없이 바닥으로 축 처져 바닥에 쓰러졌다.
그를 향한 집사장의 표정이 굉장히 복잡해 보였다.
며칠 뒤 공작 부부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바쁘다.
평소에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건물 안팎이 그야말로 윤이 나도록 닦여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것처럼 보였다.
샹들리에도 아닌데 건물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것 같다.
여기 사람들은 좀 유난이다.
내가 건물이었다면 좀 피곤할 것 같아.
“당일 저는 두 분을 맞으러 나가기 때문에 잠시 도련님 곁을 비울 예정입니다.”
공작은 이곳의 주인이라서 집사장이 직접 영지의 경계까지 나가는 걸까.
자리를 비운다고 할 정도면 멀리 가는 것 같아 물어보자, 본관 앞에 몇 명이 모이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러면 나도 나가지.”
“감사한 말씀입니다. 도련님의 마중이라니, 주인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할아버지는 둘째치고 집사장이 눈물을 흘릴 것처럼 기뻐했다.
잠깐 기다려 봐.
혹시 본관이라는 게 이 건물 말고 멀리 있는 다른 곳 말하는 건 아니지?
여기 맞지?
너무 기뻐해서 나도 모르게 본관이 이곳 맞는지 물어봤다.
당연히 이곳이라며 집사장이 빙그레 웃었다.
할아버지가 도착하는 당일은 나와 타티아나 모두 삐까뻔쩍 빛이 나도록 멋있는 옷을 입었다.
옷뿐만이 아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장신구부터 하다못해 바르는 향유의 냄새까지 고급이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고급의 고급이라는 느낌의 물건으로 치장되었다.
보석에는 문외한인 나조차도 이건 분명 비싼 거라고 알아볼 수 있는 큼직한 알이 장식 단추로 박혀 있다.
타티아나의 옷이 아니라 내 옷에.
보석 덕분인지 내가 날 봐도 왠지 멋져진 것처럼 보였다.
물론 타티아나도 만만치 않다.
귀걸이에서 목걸이 반지, 머리 장식에 이르기까지 처음 보는 보석이 주렁주렁 늘어졌다.
얼굴을 덮은 베일도 새것이다.
햇빛에 닿을 때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걸 보면 보통 원단은 아닐 것 같아.
“이것은 도련님으로부터의 선물입니다.”
매디즈 부인이 타티아나한테 말하는 걸 들었지만 당연히 나는 이런 걸 보낸 적이 없다.
보석이고 베일이고 간에 처음 보는 것들이야.
나와 타티아나는 둘 다 여우한테 홀린 것 같은 얼굴로 준비를 마친 뒤 집사장과 매디즈에게 이끌려 본관 앞으로 향했다.
이미 집사와 하녀장을 비롯한 사용인들과 잘 모르는 남녀들이 본관 앞에 죽 늘어서 있었다.
“저분들은 클라우스 님의 형제분들이십니다.”
집사장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와 그 배우자라는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나와 타티아나에게 박혔다.
특히 내 눈동자에 관심들이 많은 것 같다.
다른 곳에서는 보라색 눈동자라고 해도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내 얼굴보다 눈동자가 더 이목을 끌었다.
“보라색….”
“클라우스의 아들인가.”
“설마.”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경악한 얼굴로 쳐다본다.
보랏빛 눈동자가 정령인이라는 건 모를 테지만 역시 다들 그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는 모양이다.
저 사람들 옆에 설 걸 생각하니 조금 귀찮아졌다.
하지만 집사장은 그들을 지나 맨 앞으로 나를 인도했다.
왠지 모르지만 나와 타티아나가 제일 앞이다.
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은 우리에게서 적어도 1미터 정도는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쩐지 우리가 주인으로 손님인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이하는 모양새다.
이상하네.
적자인 마누엘이 나한테 맞아 못 나오게 됐으니 책임을 지라는 뜻인가.
어째서 외부인이나 마찬가지인 내가 제일 앞이야?
집사장이 서라고 하니 앞에 서 있기는 한데 어쩐지 이상하다.
타티아나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는 것 같다.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져 있었다.
귀족의 예절에 맞게 행동하는데 온 신경이 가 있는 모양이다.
렐라는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느라 신이 났다.
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 있다고 착각하는 건지 놀이동산에 놀러 온 아이처럼 흥분해 뒤뚱뒤뚱 달리고 있었다.
한동안은 연못과 숲을 돌아다니느라 방에 붙어있지 않더니 요 며칠은 그것도 시들해진 것 같다.
나와 타티아나한테 딱 붙어 다닌다.
‘한데 빠르네.’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어디로 간 거야.
다리가 짧아 느린 것 같아도 제법 빨라서 눈으로 좇기가 어렵다.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졌다 혼자 바쁘다.
논에 오리를 풀어 벌레 잡는 농법을 전생에 읽은 적 있는데 꼭 그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멀리에서 마차가 보였다.
시간을 딱 맞춘 것 같다.
기차도 이렇게 시간을 딱딱 맞춰 오지는 못할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마차가 서자 나무 계단이 놓이고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가 먼저 내려 할머니를 에스코트한다.
생각보다 굉장히 젊고 예쁘다.
할머니라기보다는 나이 많은 막내 이모 정도의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닮았구나.’
할아버지와 닮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할머니 붕어빵이다.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세 명의 외모를 나란히 늘여놓고 생각하니 다 같이 닮은 가족이라는 느낌도 있고 조금 묘하다.
나를 보자 할머니의 얼굴이 깜짝 놀라는 듯하더니 금세 눈물이 맺혔다.
두 팔을 벌린다.
“맙소사, 네가 클라우스의 아들이구나.”
이건 안아보자는 거겠지.
성인 남자가 할머니 품에 안기는 건 아무래도 장애물이 높다.
하지만 눈물 가득한 얼굴로 기뻐하는 할머니 팔을 무시할 수도 없다.
나는 몸을 구부려 억지로 작은 품에 안겼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할머님.”
“할머님이라고! 당신, 방금 들었나요?”
할머니 말에 공작이 빙긋 웃었다.
“그래, 들었소. 얘야, 나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겠느냐.”
전에 만났을 때 이미 할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걸 여기에서 지적하는 것도 이상하다.
“할아버님, 다시 뵈어 반갑습니다.”
“그래.”
“이쪽은 사라문즈 공국의 리아나 공주입니다.”
내가 소개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타티아나는 잔뜩 긴장해서 몸을 조금 낮췄다.
치마 아래는 개구리 다리다.
그게 여성이 인사할 때의 정석이라고 한다.
우아한 여성이 몸을 낮출 때마다 그 밑은 개구리라고 생각하면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니, 지금은 그게 아니고, 그 모양을 한 채 몸을 구부리는 건 쉽지 않은지 타티아나는 매번 그렇게 인사할 때마다 몸이 약간 불안정하다.
내가 볼 때는 모르겠는데 매디즈 부인과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하지만 요 며칠 맹연습을 하더니 그 단계는 넘어간 모양이다.
인사를 마치고 몸을 일으키는 타티아나가 안심한 듯 작게 숨을 쉬었다.
“….”
그건 아니지, 타티아나.
마지막이 허술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도 들렸을 텐데 두 분은 모르는 척이다.
“리아나 공주, 만나서 반가워요.”
할머니가 타티아나를 가볍게 포옹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겨우 깨달았다.
아, 이 자리는 할아버지를 마중하는 게 아니라 내부 인물에게 우리를 선보이는 자리였구나.
그래서 이렇게 귀찮을 만큼 주렁주렁 달고 나온 거였어.
하지만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나와 타티아나 몸을 장식하는 보석과 옷은 더 화려해지면 화려했지 가난해지지는 않았다.
거참 이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