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nchkin Barbarian Warrior RAW novel - Chapter (99)
099 어쩌다 영주대리
혼인을 이틀 남긴 날에도 나와 타티아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있었다.
혼례가 이뤄지는 신전에 가기로 했다.
공작가에는 본관 건물에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 아름다운 신전이 있다고 한다.
혼인식은 거기에서 신관이 주도한다.
참석자는 공작 부부와 사라문즈의 외교관, 증인역 몇 명이다.
혼례 당일은 아름답게 꾸민 아내에 눈이 부셔 신전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거라며 할아버지가 초대했다.
그 신전은 공작가 당주가 대대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기도를 바치던 곳이라고 한다.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여 힘든 일이 생기거나 용기가 필요할 때, 그런 순간마다 그곳이 너에게 마음의 힘을 되찾을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구나.]그렇게 말씀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별로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는 신과 정령을 진짜로 믿는 것 같지만 전생 현대인이었던 나는 이곳 사람들과 달리 독실한 믿음 같은 게 없다.
내가 정령인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런 게 진짜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이 있는 건 그저 자동차나 전기가 있는 것과 같은 거라고 여겼다.
전기도 이 세계 사람들이 목격한다면 분명 마법 같은 걸 테니까.
정령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알게 된 지금에도 나는 신 같은 것에 기댈 생각은 없다.
운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는 거야, 같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신이 있어도 인간 개개인에게 신경 쓸 것 같지 않아서다.
신이 볼 때 우리 인간은 개미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
특별히 크거나 모습이 다르거나 색이 특이하지 않은 이상 우리가 개미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신도 몇몇 특별한 인간만을 인식하는 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정말로 신이 있다면.
하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은 고마웠다.
분명 당신의 경험이 있어 내게 그렇게 말씀하신 거겠지.
‘게다가 우리가 혼인하는 장소가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혼례복을 입고 그 신전을 걷는 타티아나는 분명 아름다울 거다.
머릿속으로 그 모습을 상상하며 타티아나를 보자, 그녀가 베일 속에서 웃는다.
공작 부부가 도착한 뒤부터 나와 타티아나는 계속 사람들 눈에 띄는 장소를 오가고 있다.
그래서 베일을 뗄 수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신비스러운 매력을 더했다.
내 아내는 정말 예쁘다.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항상 만나던 시간이 지났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집사장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집사장의 얼굴이 왠지 그늘진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도련님, 죄송합니다. 공작께서 피로하신 듯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 신전의 일정은 몇 시간 뒤로 미뤄졌습니다.”
몸이 안 좋은데 신전 따위에 가는 게 중요한가.
내 얼굴을 보고 집사장이 얼른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특별히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세요. 워낙 연세가 연세이신 데다 오랜 여행에 몸이 다소 피곤하셨던 것뿐입니다. 영지에 오신 뒤로도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쉬지 못하셨으니까요.”
전혀 몰랐다.
혼인까지는 느긋하게 쉬면서 머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는 계속 일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할아버님께서 괜찮으신지 걱정이 되는군. 잠시 뵙고 싶은데 시간을 좀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봐 주겠나?”
집사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기쁜 것 같다.
“공작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도련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방문해도 좋다고 미리 허락을 내리셨으니 지금 그곳으로 가셔도 괜찮습니다.”
몸이 안 좋은데 왜 집무실인가.
내가 묘한 표정을 했던 모양이다.
집사장이 말했다.
“이곳에는 영주 대리가 있어 업무를 처리하고 있지만 반드시 공작님이나 그 후계자께서 결재해야 할 일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올해는 공작께서 예년보다 영지에 머문 시간이 적었어요. 일이 많이 밀려 있습니다. 그 때문에 집무실을 떠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귀족이면 뭐든 내 맘대로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생각보다 영주라는 자리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타티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집무실로 가자, 할아버지는 집무실 한쪽에 놓인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잠시 잠이 든 모양이다.
많이 피곤했는지 내가 가까이 가도 깨어나지 못했다.
그동안은 항상 활기찬 모습뿐이어서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눈 밑이 푹 꺼져 있었다.
후계자인 아버지가 오랫동안 곁에 없었던 것도 마음의 괴로움이 되었을 것이다.
“할머님은?”
작은 소리로 묻자 집사장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공작부인께서도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바쁘십니다. 조금 전에 공작님을 뵙고 돌아가셨어요.”
공작이 영지 일을 맡고 있다면, 공작부인은 공작가 내부의 일과 봉신 가문의 부인과의 연결 등이 업무다.
사용인의 고용과 복지, 업무의 분배, 저택의 유지 보수와 치장 등 세부적인 일은 집사장이 알아서 하지만, 그걸 보고받고 결재하는 건 부인의 일이라고 한다.
영지보다 섬세하고 세밀한 일이 많기 때문에 이쪽도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일해야 한다.
할머니도 피곤이 누적되어 힘든 모양이다.
“내가 그런 걸 알면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타티아나가 미안한 듯이 중얼거렸다.
집사장이 흐르는 것처럼 그 말에 대답한다.
“공작부인께서는 작은 도움이라도 절실하시니 그 말씀을 들으시면 기뻐하실 겁니다. 공작부인의 업무라 해도 모두 어려운 것은 아니고, 마음만이라도 매우 기쁜 일이니까요.”
“… 그, 그럴까요.”
두 사람이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는 사이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고 눈을 떴다.
인기척 때문에 깬 모양이다.
“할아버님,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몸이 상하십니다. 한 시간이라도 괜찮으니 제대로 누워주세요.”
내 말에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며 웃는다.
“괜찮아, 이 정도는 예삿일이다.”
“제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
영지 일이야 모른다 해도 서류 작업은 전생에서부터 익숙하다.
적어도 분류하거나 간단한 작업에 대한 처리는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자, 할아버지의 동작이 갑자기 멈췄다.
할아버지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해 주느냐? 돕고 싶다고.”
“당연합니다. 할아버지와 손자인걸요.”
“… 고맙다… 고맙구나, 라파.”
할아버지의 눈가에 옅은 물기가 어렸다.
내 말이 그렇게까지 감격할 일일까.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데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전에는 클라우스와 내가 나눠 하던 일이지. 내가 영지에 있으면 네 아버지가 왕도에서, 내가 왕도라면 클라우스가 영지 일을 맡았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포기했는데 이제는 손자가…. 내가 얼마나 기쁜지 너는 모를 거다, 라파.”
“….”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다.
나는 단순히 지금 당장의 일을 말했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먼 미래까지 포함해 결정된 것 같아.
하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는, 그것도 수척해진 할아버지의 얼굴에 대고 그건 다르네요, 라고는 아무래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할아버지는 더욱더 미래에 핑크빛 분위기를 풍기며 기뻐하고 있었다.
“… 영지에 대한 건 집사장과 현재 영지 일을 맡고 있는 자들이 알려줄 게다. 나도 그들에게서 보고받아 처리하는 거니까 금세 익숙해질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영주 대리의 이름도 바꿔놓지 않으면….”
영주 대리…?
아니 아니 아니, 그런 것까지 맡는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 할아버님….”
뭔가 말을 하지 않으면 이대로 영주 대리로 일하게 된다.
내가 주저하며 입을 열자 할아버지가 맑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할아버지의 초췌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얼굴 전체에 새겨진 주름이 더욱 깊어지며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네가 손자라 정말 다행이다.”
너무 기쁜 듯한 표정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우선 좀 쉬세요.”
“그래.”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면서 문득 중얼거렸다.
“손자가 있으니 좋구나. 마음이 따뜻해져.”
“….”
어쩌지.
영주 대리는 곤란하다고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할아버지는 잠시 자기 위해 집무실 옆의 휴게실로 향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이야기의 흐름으로 타티아나는 할머니한테 가게 되었다.
할머니를 돕고 싶다는 말을 직접 전하면 기뻐할 거라고, 언제 왔는지 매디즈 부인이 그렇게 말하며 데려갔다.
왠지 이상하네.
“….”
나는 집사장의 안내로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의 서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한곳에 쌓인 종이 뭉치가 있지만 대강 내용을 한두 개 보니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
양도 적당히 처리할만해 보였다.
이 정도면 하루 안에 끝난다.
“서류는 이게 다인가?”
내가 묻자, 집사장이 책상 옆에 있는 나무 보관함의 뚜껑을 열었다.
“아니요. 책상 위에 다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한 번에 처리할 양만큼만 추린 것입니다. 결재가 필요한 서류는 이쪽에 모아두었습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양의 서류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판단이 필요한 서류는 이미 공작께서 처리하셨습니다. 이것들은 판단보다는 영주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들입니다.”
과연, 이 정도의 양이라면 밤을 새워서 일해도 열흘 안에는 턱도 없다.
‘할아버지가 과로인 것도 당연하겠구나.’
이런 엄청난 양을 그동안 늙은 할아버지가 혼자 처리해왔다고 생각하면, 음, 영주 대리에 떠밀린 감은 있지만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올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돕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일이 많으면 정말로 할아버지는 과로사 일직선이다.
집무실에는 몇 개의 책상이 더 있었다.
책상은 다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집무실에는 사무관이 몇 명 있습니다. 영지의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자들이지요. 그 사람들도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한 채 일하고 있었으니 공작님이 잠든 틈에 잠시 쉬고 있을 겁니다.”
잡사장이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앞으로 그들이 도련님의 일을 보좌할 거예요. 잠시 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그래.”
이상하다.
아까부터 왠지 덫에 걸린 느낌이 들어.
할아버지가 피곤한 건 사실일 것이다.
얼굴을 보면 안다.
거짓이 아니다.
일거리가 이렇게 밀려 있는 걸 봐도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직감이 속삭였다.
너는 아무래도 잘 짜인 그물에 걸린 거라고.
‘뭐… 큰 상관은 없나.’
어차피 날 쫓아다니는 렐라와 어미 때문에 평범한 거리에서는 살지 못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아내와 계속 떠돌아다니며 살 수는 없는 일이고.
‘음… 하지만 역시 계속해서 영주 대리를 하는 건 곤란하겠지.’
아버지가 숲에서 나와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할아버지는 염원의 후계자를 다시 만나고, 나는 이 일에서 해방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니 괜찮을 테고, 아버지가 어떨지 조금 걱정이지만 그쪽도 별문제 없지 않을까.
나한테 귀족의 일을 가르친 걸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완전히 이쪽 세계에서 발을 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걸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싶다.
‘진짜 아버지가 돌아와 주면 다 해결될 것 같은데.’
아니, 어머니가 원한을 너무 쌓았기 때문에 곤란하려나.
‘그것도 내가 받아들여진 걸 보면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첫 번째 서류는 처음 들어보는 지역의 두 가문이 보낸 편지였다.
읽어보니 물이 흐르는 땅의 소유권을 두고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호소문이다.
첨부된 서류에는 각 가문 주장의 정당성과 주변 사람의 증언, 법적인 문제, 오래전의 소유권 등의 일이 적혀있고, 색이 다른 잉크로 결론이 내려져 있었다.
집사장의 말대로 영주 아닌 자가 마음대로 결재하기는 힘들지만, 권한이 가진 사람은 그저 읽고 이해하는 것으로 쉽게 결론 내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음 서류도 마찬가지였다.
읽어보면 이미 조사도 결론도 다 끝나 있다.
영지 일이라곤 전혀 모르는 나한테 덥석 일을 맡긴다고 해서 속으로 조금 의아했는데, 이 정도면 열 살 어린아이한테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뒤 집무실의 사무관들이 돌아왔다.
그 안에 엔데스에서부터 나를 따라온 사무관이 있었다.
원래 집무실에서 일했던 모양이다.
그의 이름이 그레고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고 야만인이라 사무관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정말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들은 모두 열렬할 정도로 나를 환영했다.
역시 나는 거미줄에 걸린 풍뎅이 같은 게 아닐까.
하지만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할아버지의 그물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거짓이나 함정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되어 있는 걸 보면 역시 귀족은 무섭구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최소한 세 시간은 설교 코스겠지.
많은 걸 배웠지만, 이론과 실전은 역시 다르다.
“….”
만에 하나 아버지가 숲을 나와 이곳으로 오면 잽싸게 도망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