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 third generation chaebol RAW novel - Chapter 182
182화
“그리하여 공적 자금 투입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연준에 불려 간 고드릭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기랄.’
그는 세계 최대 규모의 투자은행 중 하나인 리먼사의 CEO였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정부 차원의 대우를 받는 그였다.
그랬기에 고드릭의 자존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 무시하던 연준의 사람들과 정부 관리들 앞에서 앓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보통 금융회사의 직원들은 애사심이나 윤리 의식이 없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
돈밖에 모르며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나라라도 팔 수 있다고들 한다.
고드릭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마인드가 아니라면 돈을 버는 것은 어렵다.
돈을 벌 수는 있어도 크게 벌긴 어렵다.
하지만 회사를 지키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드릭은 리먼사를 사랑했다. 비록 그가 최대 주주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CEO로 재직하고 있는 지금만큼은 리먼사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 이렇게 관료들과 연준의 인사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다.
자존심을 굽혀 가며.
“흐음.”
관료들이 애끓는 소리를 내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만약 리먼사 그리고 리먼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AIG사가 무너지면 미국 경제는 치명타를 입게 된다.
물론 이미 경제공황이 확실시되는 상황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 둘이 무너지면 지금보다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이건 고민해 봐야 하겠습니다. 무작정 공적 자금을 투입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관료들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드릭이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관료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좀 잘하시지 그랬습니까?”
“크흠.”
관료들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공적 자금 투입을 요청하다니.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이건 굳이 우리 리먼사의 탓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리먼사뿐 아니라 월가의 모든 금융사가 해당 상품을 판매했습니다.”
고드릭이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경기라는 것은 늘 좋을 수가 없습니다. 경기는 늘 등락을 반복하면서 천천히 우상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경기가 낙타봉을 내려와 바닥으로 향하는 것은 우리 리먼사의 잘못이 아니라 그저 흐름일 뿐입니다. 이 사태를 잘 수습해야 다시 낙타봉을 탈 수 있음을 인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 저런 말이 다 있어?”
고드릭의 말에 몇몇 관료들이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고드릭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번에 공적 자금을 지급받지 못한다면 리먼사는 크게 곤경을 겪을 것.
그 곤경을 생각하면 지금의 부끄러움과 치욕 그리고 뻔뻔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시 한번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발언을 마친 고드릭이 회의실을 벗어났다.
회의실 밖으로 나온 고드릭이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그간 경기가 좋을 때는 얼씨구나 좋아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렇게 버리려고 해? 하지만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부정적인 전망도 많았지만 고드릭은 미국이 리먼사를 버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설혹 버리려고 하더라도 버릴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SJ에는 연락되었나?”
고드릭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오자 수행원들의 표정 역시 굳어 있었다.
“네, 연락되었습니다. 이미 대표가 미국에 들어왔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고드릭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돈 먹을 생각에 벌써 들어왔나 보군.”
마음 같아서는 돈을 주기 싫었다. 솔직히 말이나 되는가?
말도 안 되는 도박수에 당한 꼴이다. 설마 누가 미국 경제가 이렇게 망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던가.
초호황을 달리고 있던 미국 경제가 말이다.
“연락해. 만나서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고드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행원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 모습을 본 고드릭이 주억거렸다.
“스마트폰이나 만들면 되지 금융은 무슨….”
* * *
김서준은 할리우드가 좋았다.
어떤 대도시를 가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할리우드의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도 달랐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한 손으로는 시계를 보며 달리는 모습은 같았으나 그들의 얼굴에는 묘한 열기가 있었다.
“저는 할리우드가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벤치에 앉은 김서준과 소영신이 멍하니 거리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서류에서 탈출해서 밖으로 나오자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
“그렇군요.”
소영신이 벤치에 몸을 기대며 귀를 후볐다.
그런 소영신을 보며 김서준이 말을 덧붙였다.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또 이상한 소리 하실 거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래도 물어봐 주십시오.”
소영신이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좋아하십니까?”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기가 좋습니다. 단순히 출근 시간에 쫓겨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르게 보입니다.”
“그렇습니까?”
그 말을 들은 소영신이 지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소영신의 눈에는 모두가 같아 보였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입고 있는 옷만 조금 다를 뿐 뉴욕이나 서울이나 여기나 다 똑같아 보입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그 말에 소영신이 뚫어져라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리먼사의 고드릭 CEO와 약속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소영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좀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거물들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몸이 바르르 떨리곤 했다.
“네, 만나기로 했지요.”
“그런데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호텔까지는 거리가 꽤 있는데요? 시간도 거의 다 되었고…….”
소영신이 시계를 바라봤다. 고드릭과 아침 8시에 오찬 겸 회동이 있었다.
더 자겠다는 김서준을 깨워서 겨우 커피 한 잔을 들고 온 곳이 이곳이었다.
이제 오찬을 할 호텔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김서준은 느릿느릿했고 돌아갈 생각이 없어만 보였다.
“혹시 이번 만남을 깨실 생각입니까? 그러면 제가 지금 연락하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깨긴 왜 깹니까? 돈 줄 사람인데요?”
김서준의 말에 소영신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 가셔야 합니다. 지금 가도 늦을 것 같은데요.”
“지금이면 충분할 것 같네요.”
김서준이 벤치에서 일어서자 소영신이 밝은 표정으로 후다닥 따라 일어섰다.
“소 실장님.”
“네, 대표님.”
소영신은 김서준이 회담 전략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의라는 것은 원래 그러니까.
상대가 무슨 전략을 들고 나올지 예측을 하고 그것을 받아치기 위한 전략을 준비한다.
그것이 소영신이 생각한 전략이었다.
“우리는 아쉬울 게 없습니다. 받을 돈이 있으니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에 비해 리먼사의 CEO 고드릭은 아쉬운 사람입니다.”
김서준이 호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상황이 그런데 우리가 굳이 먼저 서둘러서 나갈 필요가 있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늦으면 늦는 대로 저쪽은 머리가 더욱 복잡해질 겁니다.”
“아. 네…….”
소영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심플하게 만들자는 겁니다. 아쉬운 건 리먼사. 여유로운 건 우리. 이렇게 간단히 판을 구성하는 겁니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소영신은 그제야 그가 어느 위치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삼신의 전략기획실에 있을 때는 늘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런 전략은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이제야 점점 그가 어느 위치에 와 있고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소영신이 김서준의 뒤를 천천히 뒤따랐다.
김서준과 소영신이 호텔에 도착한 것은 약속 시간보다 20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호텔의 입구에는 리먼사의 직원들이 미간을 좁힌 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고드릭은 보이지 않았다.
“자존심은 있나 봅니다.”
“그렇겠지요. 리먼의 CEO인 걸요.”
“좋은 생각입니다. 급하다고 해서 급한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네.”
리먼사 직원의 안내를 받아 호텔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이미 리먼사에서 전세라도 냈는지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고드릭과 그 양옆에 서 있는 리먼사의 직원들이 전부였다.
뚜벅 뚜벅 뚜벅.
김서준의 구두 소리가 홀의 적막을 깼다.
그제야 생각에서 벗어났는지 고드릭이 걸어오는 김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려?’
어리다는 소리는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젊다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고드릭의 눈에 보이는 김서준은 그의 생각보다 더욱 어려 보였다.
동양인의 나이를 서양인이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어려 보이는 얼굴임은 분명했다.
놀란 것도 잠시, 고드릭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고드릭입니다.”
“김서준입니다.”
고드릭이 내민 손을 김서준이 맞잡았다.
서로 마주 보고 자리에 앉은 고드릭과 김서준이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탐색의 의미였다.
눈은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눈으로 드러나는 감정을 속이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군.’
하지만 고드릭은 김서준을 보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서준의 눈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금융업을 하면서 수많은 고객을 만나 보고 수많은 사업가를 만나 보면서 사람을 보는 데 도가 텄다고 생각한 고드릭이다.
하지만 김서준의 두 눈에서는 젊은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할 그런 것이 없었다.
마치 노련한 사업가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허공에서 김서준과 고드릭의 시선이 얽혀 들어갔다.
김서준의 마음을 읽으려는 고드릭과 작게 웃음만 짓고 있는 김서준.
묘한 대치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식사부터 하시죠.”
김서준이 얼음을 깼다.
김서준의 말에 고드릭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식기를 들었다.
“그러시지요.”
식당에는 식기가 달그닥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식사를 하면서도 고드릭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상대의 생각을 읽어 내야 어떤 제안이라도 할 판인데 도저히 생각을 읽어 낼 수 없었으니 쉽게 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부딪쳐 봐야겠군.’
달그닥.
고드릭이 포크를 내려놓으면서 일부러 소리를 냈다.
“식사는 이쯤 하면 된 것 같은데 이야기나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네, 뭐. 좋습니다.”
김서준도 식기를 내려놓고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먼저 생각지도 못한 상품을 만들어서 큰돈을 버실 수 있게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뭐. 축하까지 받아야 할 일인가는 싶지만 저도 뭐 일단 감사합니다.”
고드릭의 눈빛이 바뀌었다.
김서준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진지하게 나서야 했다.
“대금 지급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볼까 하는데요?”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는 고드릭을 보며 김서준이 씩 웃었다.
평소의 고드릭이었으면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리먼사는 늘 갑의 위치였지 을의 위치였던 적이 없으니까.
“대금 지금을 걱정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귀사의 대금 지불 능력을 확인했고 귀사의 직원들이 그것을 보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대금 지급 방법을 논의한다니요?”
고드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떻게든 대금 지급 기한을 늦추든가 다른 방법으로 지급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