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그 상상 속의 무대 위에.
“자, 그러니까 빨리 예약들 하라고!”
판이 깔렸다.
도웅과 이세준이 연출가 함인구에게 눈도장 찍을 판이.
‘그래, 얼마나 하는지 한 번 볼까?’
함인구도 약간 알딸딸했지만 많이 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테이블에 기대어 이세준과 남도웅을 번갈아 봤다.
이세준.
큰 규모의 팬덤을 보유한 4년 차 아이돌.
비주얼 센터이자 괜찮은 노래 실력 덕분에 제작사가 밀고 있는 조연 후보.
그리고 후보엔 없지만, 갑자기 주연배우인 임현백이 밀기 시작한 남도웅.
아까 술자리에서 들은 바로는 여러 재능이 많은 친구 같았다.
‘그래도 진짜 무대에 서는 거랑은 다른 얘기지.’
명백히 뮤지컬과 실용음악에는 발성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러닝타임.
음악 방송은 3분 안에 모든 것을 축약해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뮤지컬은 두시간 반에 달하는 시간 동안 노래하고 연기해야 하는, 상당한 집중력과 체력을 요하는 분야였다.
‘일단 내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그래서 뮤지컬을 해보지 않은 이 둘에게 완벽을 바란다기 보다는,
어느 정도 노래를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 텐션을 유지하며 노래할 수 있는지.
연출가 함인구는 아주 기본적인 가능성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미달이라면 후보고 뭐고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이미 제작사 측에서 말이 나오고 있는 이세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아니다 싶으면 완강히 반대를 해야겠지.’
연출가 함인구는 문득 이세준을 이렇게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임현백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임현백의 의도는 남도웅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개성 넘치는 마스크의 배우가 벌떡 일어나더니 무작정 앞으로 튀어 나간 것이었다.
“내가 올해는 조훈기 선생님 티켓 갖다줄게, 이모!”
술기운 때문에 이곳에 흐르는 묘한 기류도,
임현백이 이 판을 깔아놓은 이유가 뭔지도 오진해의 머릿속엔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먼저 100점을 받으면 조훈기의 콘서트 티켓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크, 내가 너무 센 걸 걸었나?’
임현백이 아차 하는 동안 그는 평소 자주 부르는 노래의 번호쯤은 외우고 있었는지, 거침없이 숫자 버튼을 휘갈겼다.
‘잘 됐지 뭐, 분위기가 떠올라야 더 노래 부를 맛이 나니까.’
화려한 빛을 내뿜으며 돌아가는 조명과 스피커에서 빵빵하게 흘러나오는 반주.
오진해는 한껏 감정을 잡아 노래하기 시작했고, 임현백이 노래방 기계 옆에서 탬버린을 꺼내 들었다.
찰랑찰랑 착착.
덩실덩실 탬버린을 치는 임현백과 한껏 감정을 잡은 채 노래를 부르는 개성파 배우.
스타트를 끊은 그 덕분에 일행들도 저마다 어깨를 흔들거나, 노래 책자를 넘기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이대로 티켓을 뺏길 수는 없어!!”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아도 리모컨을 집어 올리더니 예약 버튼을 눌렀다.
도웅은 가만히 생각했다.
‘노래방 기계에서 100점을 받으려면 일단 고음이 강한 노래를 부르는 게 좋겠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일단은 함인구에게 도웅의 실력을 어필하는 게 우선.
조훈기 콘서트 티켓은 거기에 딸려 나오는 보상이었다.
‘음, 그럼 어떤 전략으로 노래를 부르는 게 좋을까?’
도웅은 벽에 붙은 추천 노래 목록을 찬찬히 살폈다.
이세준도 같은 고민을 하는 듯, 송규섭과 소곤소곤 말을 주고받으며 전략집이라도 보는 듯 노래 책자를 정독하고 있었다.
그때 임현백이 털썩 도웅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고민하고 있는 도웅에게 나머지 노래 책자를 건네주며 말했다.
“그냥 다른 거 필요 없이 노래 잘하고, 잘 노는 거 보여주면 된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 없어.”
진짜 오디션도 아닌데 머리 써서 분위기에 맞지 않는 심각한 곡을 부를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저 정도 실력에 체력이면 한 번 시켜볼 수 있겠구나, 하면 된다고. 네가 평소 해온 대로 너를 보여주면 돼.”
도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뮤지컬은 장거리 달리기와 같았다.
그걸 끝까지 완주할 만한 체력과 자질이 되는지.
이 자리에서는 그 참가 자격을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를 알아들은 것이었다.
-빰빠바빰! 아쉽군요, 조금 더 노력하세요.
그때 노래가 끝났음을 알리는 효과음이 터져 나오고,
화면에 숫자가 떠올랐다.
“아아, 안돼···. 이러면 조 선생님 콘서트에 못 간다고···.”
개성파 배우의 노래 점수는, 기대에 한참 못 미친 74점이었다.
그는 절망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고, 다음 타자 채아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새로 나오는 노래의 멜로디가 상당히 귀에 익었다.
심지어 채아가 간주에 맞춰 동작을 하는 데 노래와 딱딱 맞아들어갔다.
“어? 이건?”
뭔가를 알아챈 개성파 배우 오진해가 소리를 질렀다.
“와, 이건 공정하지 않다! 너무하다!”
채아가 자신의 히트곡을 꺼내든 것이었다.
그녀는 배우의 야유에도 아랑곳 않고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원곡 가수의 가창력과 무대매너에 일행들이 금세 빠져들었다.
임현백은 오랜만에 보는 사조직 막내의 재롱에 열심히 탬버린까지 치고 있었다.
‘와, 저 선배 지금 진심이다.’
화려한 턴에 진성으로 내지르는 고음까지.
덕분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뭐야, 100점 여기서 나오는 것 아니야?”
싱글벙글 하지만 한편으로 걱정되는 듯, 임현백이 말했다.
하지만 채아가 술에 취한 채로 춤을 격하게 춘 탓인지,
마지막에 잔 실수가 몇 군데 있어서 점수는 94점에 그쳤다.
점수를 확인한 채아가 억울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원곡 가수가 100점 못 받는 게 말이 돼요? 이 기계 순 엉터리야!”
**
이후로 개성파 배우와 채아의 불꽃 튀기는 경쟁 속에,
도웅도 한 번씩 끼어 분위기를 업 시켜놓았다.
그래도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 출신의 짬바가 있었으니, 보여줄 게 많았다.
“유후! 도웅 씨 잘한다!”
“푸하하, 저 끼 좀 보라니까.”
“와. 노래 진짜 끝내주게 잘하네요.”
신이 난 일행들이 손뼉을 치며 도웅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생각보다 엄청 잘 노네?’
분위기에 맞게 댄스곡을 부를 때도, 발라드를 부를 때도.
한결같은 실력과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는 도웅이었다.
장르 상관없이 소화해 내는 모습에,
그의 노래 실력이 기본적으로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그때 개성파 배우 오진해가 꽥 소리를 쳤다.
“과연 몇 점일 것인가!!!”
방금 도웅이 부른 댄스곡의 점수판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떠오른 점수는 아쉽게도 98점.
“으악, 큰일 날 뻔했다!!”
오진해가 콘서트 티켓을 잃을 뻔한 위기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아깝네요.”
“도웅 씨 조금만 살살해줘! 살살!”
다음 타자인 오진해가 도웅과 바통터치를 하며 앞으로 나갔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이세준은 입가에 조소를 띄었다.
‘저런 뮤지컬이랑 상관없는 노래는 아무리 불러봤자 도움이 안 돼.’
그도 그럴 것이 이세준은 아까부터 자리에 앉아 가끔 박수만 치는 게 다였다.
송규섭과 전략회의를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한 방에 보여 주자였다.
이세준은 최종적으로 선곡을 마치고 예약 버튼을 눌렀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도웅 역시 최후의 일격을 위해 남겨두었던 노래를 예약했다.
그렇게 한참을 다른 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호응하던 와중.
‘너무 많이 마셨나, 잠깐 화장실 좀···.’
도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먹먹해지는 귀.
노래방에 ‘한짝해’ 일행들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없는지, 복도가 고요했다.
도웅은 가게 문을 열고 다른 층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 올라갔다.
그때 한 남자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씨, 몇 번을 말해. 노래방 왔다니까, 노래방!”
자세히 들어보니 누군가에게 짜증을 내는 이세준의 목소리였다.
“여자랑 온 거 아니라고.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연락 그만해. 넌 그럼 연예인이랑 사는데 이 정도도 감수 못 하겠다는 거야? 애초에 너한테만 붙들려 있을 수 없다고 얘기했잖아!”
아마도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복도가 하도 조용해서 내용이 다 들렸다.
도웅은 이대로 올라가기가 애매해서 잠시 멈춰있는데,
뒤쪽의 가게 문이 열리며 채아가 걸어 나왔다.
다들 화장실에 가고 싶은 타이밍이 비슷했던 모양이었다.
“여기서 뭐 해?”
“화장실 가려고요.”
“흐흐, 나도.”
채아는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듯 안 하던 반말을 하더니 혼자 터벅터벅 계단을 밟았다.
그런 인기척을 눈치챈 듯, 통화를 탁! 끊는 이세준.
그가 채아를 발견하고는 표정을 바꿔 눈웃음을 지었다.
“선배님. 좀 괜찮으세요?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나 멀쩡해요~! 취한 것 같아요?”
“하하하. 아니요, 안 취하신 것 같아요.”
특유의 얼빵한 말투로 장단을 맞춰주는 이세준.
도웅도 슬슬 위로 올라가려는 데 이어서 말소리가 들렸다.
“저 그런데 선배님. 제가 평소에 선배님을 존경하고, 그만큼 관심이 있어서 그런데···.”
방금 애인에게 역정을 내놓고 다른 여자에게 집적대는 꼴이란.
‘에이,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도웅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타박타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말했다.
“어? 이세준 선배님. 여기 계셨네요?”
째릿하고 날카로워지는 이세준의 눈.
자꾸 방해하는 도웅이 눈엣가시 같은 모양이었다.
도웅은 일부러 더 밝게 웃으며 얘기했다.
“송규섭 선배님이 찾으시더라고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이세준이 찝찝하게 발걸음을 돌려 계단 아래로 향했다.
그렇게 도웅은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는 데 또다시 성공했다.
**
“어디 갔었어? 이제 네 차례야.”
이세준이 들어오자마자 송규섭이 앞을 가리켰다.
심사숙고하여 골라놓은 이세준의 노래가 바로 다음 순서였던 것.
곧이어 들어오는 채아와 도웅.
순간 웅장한 현악기 소리가 반주로 흘러나왔다.
이세준이 선곡한 유명한 뮤지컬의 노래가 시작된 것이었다.
‘조금 직설적이네.’
차분한 멜로디 덕분에 분위기는 갑자기 숙연해지고,
일행들도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연출가 함인구는 이러나저러나 노래에 집중했다.
이세준이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마치 뮤지컬을 하듯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고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는 잘하네.’
확실히 기본적인 노래 실력은 좋았다.
함인구는 그를 상상 속의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마스크는 괜찮았고, 노래 실력도 좋다.
아이돌답게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드는 재주도 좋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가 극을 끌어가는 느낌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뭐 때문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에 이어진 도웅의 무대로 설명이 되었다.
도웅은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는 불러본 적이 없었다.
대신 마지막 한 방으로 무대 위에서 쇼를 하는 주인공을 화자로 한 가요를 선택했다.
빠른 비트의 신나는가요.
앞선 이세준의 노래로 푹 꺼졌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도웅은 가사에 맞게 춤까지 추면서 일행들을 노래로 끌어들였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연출가 함인구는 이번에도 똑같이 상상력을 발휘해 그 상상 속의 무대 위에 도웅을 올려보았다.
출중한 노래 실력, 잘생긴 얼굴.
여기까지는 이세준과 비슷한 조건이었지만 그다음이 달랐다.
관객. 노래를 부르는 도웅 앞에 그의 노래를 듣고 즐기고 있는 관객이 상상된 것이었다.
“···!”
연출가 함인구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노래하는 도웅에게 더욱 귀 기울였다.
도웅의 노래가 더욱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웅은 자신의 필살기를 꺼낼 준비를 했다.
조금 있으면, 이 노래의 극악한 고음 구간이 나올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