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더 이상 없었다.
“뭐?”
둘 사이에 다시금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커다란 이세준의 눈 모양이 일그러지고 검은 눈동자에서 독기가 흘러나왔다.
평소 습관처럼 짓던 순진한 표정은 오간 데 없고,
여자친구에게 폭행을 일삼던 그의 살벌한 본질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섣불리 주먹을 휘두를 수는 없으니,
이세준이 손에 든 대본을 꾸깃 쥐며 분노를 드러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만만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고요, 이 오디션.”
후배인 도웅이 당연히 반항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가 틀렸다.
물러설 기미없는 도웅의 눈동자가 이세준을 더 화나게 했다.
“하, 이 새끼 미쳤네.”
그가 기가 차다는 듯 욕지거리를 했다.
이세준이 생각했을 때 이렇게 오디션까지 봐야 하는 건 순전히 남도웅 때문이었다.
술자리에서부터 내내 거슬리던 도웅의 행동.
그리고 짜증 나는 이 상황까지.
이세준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꺾으며 더욱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네가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게 나인가? 그래서 이러는 거야?”
“무슨 얘긴지 모르겠네요.”
도웅이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시선을 손에 든 대본으로 옮겼다.
하지만 도웅의 그런 침착함이 이상하게 이세준의 성질을 더욱 돋웠다.
그때였다.
“남도웅 씨, 그리고 이세준 씨. 이쪽으로 따라와 주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제작사 직원이 친절하게 손짓했다.
이세준은 이를 까득 씹으며 속으로 분노를 삼켰다.
이세준은 아이돌 시장에서 잘나가는 동안, 자신에게 실패란 없을 줄 알았었다.
그래서 더욱 잊지 못했다.
연기로 오디션에 첫 도전을 했던 날, 떨어지면서 당했던 굴욕들을.
잘나가는 아이돌인 자신을, 벌레만도 못하게 쳐다보던 그 표정들을.
그래서 그날 이후 더욱 연기 연습에 매진해왔다.
하지만 여기 있는 애송이는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 어디 한번 시궁창으로 떨어지는 굴욕을 느껴보라지.’
그 굴욕감을 도웅도 곧 느끼겠거니 생각하니 약간 가슴 한켠이 찌릿해졌다.
왜냐하면 연기만큼은 도웅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내가 직접 널 그 시궁창으로 밀어 넣어주겠어.’
**
방금 음악 감독의 추천으로 온 두 명의 아이돌이 오디션을 마쳤다.
심사석에 앉은 인원들이 서류에 펜을 콕콕 찍으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둘 다 마스크는 나쁘지 않은데, 노래 실력이 좀 아쉽네요.”
“특히 이 친구는 연기할 때 너무 저희를 의식하는 게 느껴졌어요.”
“네, 맞아요. 연기하면서 눈치를 보다니. 거기서 사실 게임 끝이죠.”
뮤지컬 공연은 완전히 라이브로 진행된다.
돌발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배우의 기본 소양인데, 되려 주변 환경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다니.
두 사람을 추천했던 음악감독이 되려 실망감을 표했다.
“뭐, 사실 오디션 보는 김에 부른 친구들이니까요. 저도 큰 기대는 없었어요.”
“맞아요, 다음 차례에 올 친구들이 중요하죠.”
그때 제작사 직원이 오디션장의 문을 열었다.
“이세준 씨랑 남도웅 씨 들어갑니다.”
차례로 등장해 멀찌감치 떨어져 선 두 사람.
제작 감독이 대본을 넘겨보다가 한 곳을 짚으며 말했다.
“오디션은 13번 씬으로 볼 거고요, 상대역은 여기 계신 연출가 함인구 씨가 해줄 겁니다.”
제작 감독이 함인구를 슬쩍 가리켰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아까 사납기 그지없던 눈빛은 오간 데 없이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세준.
제작 감독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럼 이세준 씨 먼저 보겠습니다.”
‘좋다, 선제공격이다.’
이세준은 먼저 순서를 잡은 데 짜릿함을 느꼈다.
기선제압을 해서, 뒤이어 연기할 남도웅의 멘탈을 흔들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노래 좀 한다고 까부는데, 이 자리에 온 게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는지를 느껴봐라.’
이세준은 트레이닝 받은 대로 집중력을 끌어올리더니,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조연인 찬이가 피아노로 층간소음을 일으켜, 아랫집 할아버지가 찾아와 따지는 씬이었다.
“안녕하세요, 201호 할아버지.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가 특유의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말했다.
“무슨 일은! 저놈의 피아노. 피아노 소리 때문이지!”
연출가 함인구가 상대역 대사를 읽었다.
그런데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제대로 연기를 하고 있었다.
함인구 역시 뮤지컬 배우 출신이었으니까.
적당히 오디션 진행을 돕는다기보단 상대 배우와의 호흡까지 보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프로가 진짜 텐션으로 연기하니, 이세준이 밸런스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세준은 당황했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 톤을 높였다.
“피아노가 왜요? 아! 할아버지 제 연주를 더 가까이서 듣고 싶어서 오셨구나? 이리와 앉으세요.”
이후로도 두 사람이 연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대사가 진행될수록, 이세준의 목소리 톤이 계속 올라가면서 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실려 나왔다.
함인구의 연기에 말려 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한참 그의 퍼포먼스를 지켜보던 심사위원들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세준 씨 연기만 따로 떼놓고 보면 괜찮은데···.’
‘그런데 대화로 보기엔 좀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일단 계속 들어보죠.’
이세준은 당황하여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연습할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자신만만함은 어디 가고 행동에 초조함이 묻어나자 발음이 씹히기 시작했다.
거기에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던 도웅이 이 장면을 보고 있다는 부담도 한몫했다.
다행히 이제 연기파트는 끝나고 노래가 시작되는 구간이었다.
이세준이 앞쪽에 마련된 전자 피아노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후우, 여기서 진짜 잘해야 한다.’
그가 피아노 연주와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다.
‘역시 노래는 잘하네요.’
‘피아노도 생각보다 잘 쳐요.’
하지만 이세준이 결정적으로 실수한 부분이 있었다.
잘해야 한다는,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배역 ‘찬이’가 아닌 이세준을 내세우게 된것이었다.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 모습이 눈부셨지만,
영락없이 음악 방송에 나와 노래하는 아이돌 이세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음···.’
‘그래도 앞에 했던 친구들보다는 나아요.’
‘뭐, 아이돌 중에서 이 정도면···.’
아이돌인 이세준이 뮤지컬 배우인 함인구에게 밀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돌과 배우의 기준을 같게 보면 안 된다.
어느 정도 극을 소화하면서도 팬덤을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을 뽑는 자리니까.
안무, 노래, 연기.
따로따로 보면 아이돌 중에 상급 정도는 되겠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평가였다.
“다음으로 남도웅 씨도 같은 씬으로 준비해 주세요.”
도웅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이세준은 도웅의 멘탈을 흔들어놓지는 못했지만, 분위기상 그래도 마무리는 잘했다고 보았다.
‘딱 봐도 연기라곤 해본적 없는 녀석인데. 얼마나 삐그덕댈지 한번 보자. 큭큭.’
자신이 본 실력을 발휘하지 못 한 만큼, 초짜인 도웅은 더욱 망가져 주기를.
당황해서 쩔쩔매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세준이 위안 삼았다.
정적 속에서 도웅이 비워진 홀의 가운데 섰다.
살짝 남루한 와이셔츠에 손보지 않은 듯 붕 뜬 검정 머리.
거기에서 극작가가 뭔가를 알아채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의상도 찬이 역에 맞게 맞춰 입고 온 것 같지 않아요?’
‘그렇네요. 이렇게 보니까 이미지가 잘 맞는데요.’
그것만 봐도 도웅이 얼마나 인물에 대해 열심히 분석을 하고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뮤지컬 수업을 해줬던 권진우가 조언을 해줬었다.
되도록 심사위원들의 눈에 그 배역처럼 보이게 하는 게 중요한 전략이라고.
그렇게 초반부터 분위기가 도웅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제작 감독이 수다의 맥을 끊었다.
“이번에도 연출가 함인구 씨가 상대 배역을 맞춰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도웅이 잠시 감정을 잡는 듯하더니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인구도 아까처럼 리딩 하듯 제대로 감정을 담아 대사를 받아쳤다.
그런데 이세준이 연기했던 구간과 똑같은 대사를 치고 있는데,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아니, 난 됐다니까 정말 왜 이래?”
“할아버지. 여기 따뜻한 차에요.”
“에헴, 나 이거 참.”
“그럼 천천히 드시면서 이것 좀 들어봐 주시겠어요?”
자연스럽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밸런스가 맞았다.
누가 프로고 누가 아마추어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그냥 대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웅의 입장에서 진짜 배우와 함께 연기하는 것은 부담이 덜했다.
왜냐하면 권진우 선생과 계속 이런 식으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습해왔으니까.
도웅의 높은 수준에 맞게 그 역시 제대로 연기하며 상대역을 맡아줬었기에,
도웅은 연습과 큰 괴리를 느끼지 못했다.
권진우의 하드 트레이닝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덕에 심사위원들의 눈에는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찬이’와 ‘영배 할아버지’, 두 사람만이 보였다.
“무슨 연주를 할 건데?”
“어젯밤에 제가 만든 자작곡이에요. 할아버지가 이 곡의 첫 관객이고요.”
딕션도 정확하고, 동시에 전달이 명확했다.
봄바람에 살얼음이 녹듯 오디션장의 분위기도 극의 내용처럼 따듯해져 갔다.
오직 한 사람. 이세준만이 얼굴 근육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저 자식이 어떻게···.’
수소문을 해봤지만 남도웅이 연기를 준비한다거나, 뜻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 어느 오디션장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었으니까.
분명 뭣도 모르고 헛바람이 들어 덤비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눈앞의 도웅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찬이’ 역에 빙의해 있었다.
의상만 봐도, 자신은 잘 보이기 위해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왔다면,
도웅은 남루한 의상 덕에 더욱 찬이 그 자체의 모습으로 보였다.
‘틀렸다.’
이세준은 속에서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벌써 패배라는 불길한 단어가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에.
“자, 그럼 들어보세요?”
도웅이 자연스럽게 전자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해맑은 찬이의 얼굴로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음악천재 역에 걸맞는 연주실력.
그리고 배역의 맑은 영혼이 느껴지는 멜로디.
도웅은 ‘찬이’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노래하기 위해 호흡을 밀어냈다.
‘···어?’
순간 심사위원들의 고개가 바쁘게 돌아갔다.
당연히 도웅의 출중한 노래 실력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도웅은 원래의 도웅처럼 노래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벨팅 창법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 맞죠?’
‘네. 이건 기대 이상인데? 두성도 엄청 잘쓰네요.’
‘와, 오디션 안 봤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아이돌 중에 이런 숨은 보석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니, 도웅은 아이돌이 아니라 뮤지컬 계의 샛별들과 비교해봐도 좋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기대 이상의 결과에 음악 감독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고,
연출가 함인구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번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이세준을 밀어주려 했던 제작 감독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봐도 월등한 것은 도웅인데, 애매하게 이세준을 밀었다간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도웅은 뮤지컬에서 주로 사용하는 두성 창법으로 소리를 밀어내면서도,
가사에 감정을 감아내며 강약을 조절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 이상 아이돌 남도웅은 없었다.
‘찬이’ 역을 완벽히 소화하는 한 명의 배우가 있을 뿐.
**
도웅의 오디션이 끝난 후.
‘이러면 A팀이랑도 많이 차이 안 나겠는데요?’
‘그러게. 이러면 티켓파워 때문에 아이돌을 썼느니 하는 얘기는 안 나오겠어.’
‘함 연출가가 후보 한번 잘 데려왔네.’
심사위원들이 작게 쑥덕이며 열띠게 도웅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결과는.
“여기 있는 심사자들 의견이 너무 명확해서, 시간 끌지 말고 이 자리에서 결과를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게 두 분한테도 좋을 테니까.”
연출가 함인구가 흐뭇한 얼굴로 한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도웅 씨, 축하합니다.”
그의 한 마디에 누군가는 천국으로 붕 떴고,
다른 한 명은 마치 지옥 불구덩이 속으로 처박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