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142)
142. 편견은 독이지.
제작사의 회의실에는 벌써 몇몇 배우들이 도착해 있었다.
배우 노우혁도 꽤 일찍 도착해 안면 있는 배우들과 인사를 나눴다.
분위기는 생각보다 좋은 편이었다.
좁은 뮤지컬 바닥에서 다들 알음알음 아는 사이였으니까.
그때 낯선 얼굴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남도웅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배우들이 주춤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도웅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리는 A팀, B팀이 양쪽으로 따로 나뉘어 있었다.
“도웅 씨는 B팀이니까 이쪽···.”
직원의 안내를 따라 가운데 ‘찬이’라는 이름표가 세워진 자리에 앉았다.
그 반대편에 앉아 있는 게 노우혁.
A팀의 찬이 역할을 맡은 배우였다.
“안녕하세요.”
대본을 훑던 그가 도웅과 눈이 마주치니 가볍게 목례했다.
아닌 듯해도 눈빛에서 꽤 견제가 느껴졌다.
도웅도 가볍게 인사한 후, 다른 이들처럼 대본을 살폈다.
그러는 동안 호기심 반, 걱정 반의 시선들이 자꾸 도웅을 콕콕 찔렀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배우 임현백이 등장했다.
“어, 도웅이 와있었구나? 다들 인사는 했고?”
“네, 선배님.”
도웅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임현백에게 배우들이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
그런데 임현백의 양옆에 가만 보니 꼬마 둘이 각각 손을 잡고 있었다.
‘저 애들이 ‘세윤’이 역인가 보네.’
‘할아버지의 꿈’ 배역 중에는 아역이 하나 있었다.
두 아이가 각각 A 파트와 B 파트의 ‘세윤’역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리딩이 시작되었다.
A팀이 먼저 선두를 끊었고, B팀이 그 뒤를 이었다.
감탄을 부르는 배우들의 연기 속에 도웅도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뒷줄에 앉은 심정남은 되려 자신의 심장이 콩닥대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훨씬 잘하네요.’
‘여기 소름 보여요? 와 노래 진짜 잘해.’
남도웅의 실력은 기대 이상이라는 게 배우와 관계자들의 반응이었다.
흐뭇해진 임현백이 다른이들이 연기하는 동안 도웅에게 속삭였다.
‘지금 연기하는 저 둘이 진짜 부녀 사이야.’
‘정말요?’
‘응, B팀에서 너랑 같이 연기할 배우들이니까 잘 봐둬.’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진재선과 아역배우 진신비.
부녀는 기가 막히게도 이 뮤지컬에 함께 캐스팅됐다.
딸은 춤추는 천재 소녀 역할을.
진재선은 직장도 내팽개치고 서포트하는 팔불출 역할을 맡았다.
‘저 꼬맹이가 아주 연기를 기가 막히게 해.’
‘그렇네요.’
신비라는 이름의 꼬마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연기를 잘했다.
어린이 특유의 맑은 목소리가 노래할 때는 청아하게 빛났다.
아이의 아빠인 배우 진재선은 팔불출 아빠 역을 연기하느라 잠시 사람이 가벼워 보였지만,
리딩이 끝나자마자 얼굴에 인생의 무게가 실리는 것으로 보아 배우의 내공이 진한듯했다.
“자, 고생들 하셨고 지금부터는 앞으로의 스케줄을 말씀드릴게요.”
곧장 조연출이 스케줄을 공지했다.
“첫 연습은 이번 주 일요일부터 시작할 거고요, 저희가 대여한 연습실에서 팀별로-“
연습은 총 두 달간 진행될 예정이었다.
뒷줄에 앉은 심정남은 스케줄을 열심히 필기했고, 도웅은 함께 연기할 배우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순간 배우 진재선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왜 저러지?’
**
인생은 예고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서울예술종합학교에 수석 입학했던 진재선.
그리고 한참 후배로 들어왔던 만년 꼴등 노우혁.
하지만 지금의 노우혁은 뮤지컬계의 루키로,
진재선은 존재감 적은 조연으로.
두 사람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깔끔하고 샤프한 인상의 노우혁이 다섯 살은 많은 진재선의 팔을 툭툭 쳤다.
“형, 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오자.”
“그래, 알겠어. 신비야, 여기서 언니 오빠들이랑 잠깐만 있어?”
“응, 아빠.”
담배는 아이 때문에 끊은 지 오래였지만, 함께 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갔다.
건물 뒤편에서 노우혁이 담배를 뻑뻑 피우며 말했다.
“엊그제 유진 선배 만났는데, 그 선배가 그러더라. 형이 그렇게 장가를 빨리 갈 줄은 몰랐다고.”
“너무 어린 나이에 신비가 생겼었으니까, 서두른 감이 있지.”
대학 시절의 진재선은 조용하고 숫기 없는 타입이었다.
그러면서도 할 일은 참 잘하는, 재능있는 유망주.
하지만 덜컥 아기가 생겨서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아내의 지지로 학교를 졸업하고 뮤지컬 계로 돌아온 것이 불과 몇 년 안 된 얘기였다.
얼마 전까지는 주로 코러스를 넣는 앙상블로 무대에 서다가 연출가 함인구의 눈에 들어서,
근래에는 대사가 조금 있는 조연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 딸내미가 이렇게 신동으로 태어날 줄 누가 알았겠어.”
진재선의 딸 신비는 업계에서 신동으로 불리며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진재선보다 더 주목을 받았다.
그때 노우혁이 담배를 입에서 떼더니 말했다.
“여기 배역 얻은 거 신비 덕이야?”
“···.”
“그, 있잖아. 천재 딸 팔불출 역할이 너무 형한테 잘 어울려서.”
딸에게 묻어가는 배우. 그래, 그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딸의 이름값이 더 높으니 흔히들 하는 오해였다.
진재선이 보기에 자신을 향한 배우들의 편견은 마치 독 같았다.
사실이 아닌 걸 알아도, 가끔은 무기력하게 온몸에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진재선은 그런 속내를 숨기고 무덤덤한 투로 답했다.
“아니, 함 선생님이 저번 작품에서 내 연기를 좋게 보고 연락주신 거야.”
“아, 그래.”
별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로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무대를 진실의 값만큼 잘 해내는 수밖에.
“그래도 형 요즘엔 공연 준비하면서 행사 안 뛰어도 되겠네. 신비가 받는 돈까지 합치면 가족 생활비는 나올 거 아니야.”
“···그렇지.”
무명 배우는 돈이 안 된다.
그래서 축가 같은 행사를 뛰지 않으면 생활비가 감당이 안 됐다.
노우혁 앞에서는 그냥 그렇다고 넘겼지만, 실은 신비가 버는 돈은 웬만해선 건들고 싶지 않아 이번에도 틈틈이 행사를 뛸 예정이었다.
노우혁이 이번엔 화제를 바꿔 말했다.
“그런데 아까 남도웅은 어땠어?”
같은 찬이 역할을 맡은 도웅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진재선은 솔직하게 말했다.
“연기도 꽤 하고 노래할 때 두성도 잘 쓰더라.”
노우혁도 거기엔 동의하는지 입맛을 쩝 다셨다.
“···잘 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걱정은 되네.”
“뭐가?”
“왜 아이돌들이 다 그렇잖아. 다들 바쁘신 몸이니까. 연습엔 얼마나 나올지.”
뮤지컬은 혼자 잘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의 그림이 될 때까지 모두가 합을 맞추어야 하는데, 아이돌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연습에 빠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진재선이 조용히 말했다.
“갑자기 그 친구 스케줄 따라 움직이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연습에 많이 못 와도 된다.
다만 연습이 끝나고도 진도를 못 맞추는 도웅 때문에 쉬는 날까지 나가 보충 연습을 하지 않길 바랐다.
거기서 뭔가를 알아챈 노우혁이 고개를 들었다.
“형, 이번에도 행사 뛰는구나?”
“···응. 신비가 번 돈은 나중에 대학 갈 때 주려고.”
“형이 당장 먹고살기가 힘든데 무슨-.”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노우혁의 담배가 꺼질 때까지 계속 됐다.
탁.
두 사람이 사라진 후, 뒤편에 세워진 차에서 도웅이 나왔다.
‘휴대폰 찾으러 왔다가 애매하게 엿들어버렸네.’
**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버스 안에서 진재선이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했다.
“하 미치겠다.”
하필 일요일 오후에 첫 연습이 잡혔다.
그리고 진재선은 방금 결혼식 축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연습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슬아슬할 것 같긴 했는데.”
갑자기 취소할 수도 없는 아르바이트였다.
아슬아슬한 시간에 끝났는데, 생각보다 길이 너무 막혀서 버스가 거북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 다행인 것은 딸 신비는 오늘 와이프가 연습실에 따로 데려다준다는 사실이었다.
“예,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일단 연출가 함인구에게 연락은 해놓았다.
그때 다시 휴대폰이 진동하며 모르는 번호가 화면에 떠올랐다.
-아빠··· 왜 안 와? 결혼식이 안 끝나?
“어, 신비구나. 그게 아니라 차가 너무 막혀서. 아빠가 빨리 갈게.”
-아빠가 없으면 나는 연습을 못 하는데···.
대부분의 씬에 함께 하는 게 아빠였기 때문에 상대 배우가 없으면 신비도 연습을 할 수가 없었다.
울먹이는 딸의 목소리에 진재선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빠가 뛰어갈게, 신비야.”
-···알게써.
띠이익-.
통화를 끝낸 진재선이 버스의 하차 벨을 눌렀다.
“휴우. 그래, 차라리 뛰어가자.”
당장 버스를 타고 가는 것보단 뛰는 게 빠를 것 같았다.
**
B팀만 모여있는 연습실.
신비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휴대폰을 도웅에게 돌려주었다.
“잘 썼습니다.”
“그래.”
지난번 엿들었던 대화나, 방금의 통화로 유추했을 때 진재선이 생계 문제로 행사를 뛰고 오는 모양이었다.
꿈과 현실이 부딪히던 자신의 지난날이 떠오르며 마음이 좋지 못했던 도웅이 자세를 낮춰 신비에게 말했다.
“신비야, 아빠 오시기 전에 삼촌이랑 연기하고 있을까?”
“···어떻게요?”
커다란 눈망울이 도웅을 올려보았다.
“삼촌이 아빠 대신 대사 해주면 되지.”
“진짜요? 노래도요?”
“그럼.”
다행히 아빠의 역할은 도웅과 초반 등장이 겹치지 않았다.
그리고 도웅은 벌써 다른 배역들의 대사와 노래까지 꿰고 있었다.
한편 저 옆에서 연출가 함인구는 앙상블 중에서 아빠 역할을 대신할 배우를 찾고 있었다.
“여기 혹시 ‘광태’역 대신할 사람 있을까?”
뮤지컬엔 언더라고 해서 유사시에 주, 조연의 빈 자리에 설 수 있는 배우가 있었다.
보통은 앙상블 중 누군가 역할을 담당하지만, 첫날부터 남의 파트를 숙지한 사람이 있을 리는 없었다.
대본을 보고 하면 되겠지만, 연습이 안 된 상황에서 아역과 함께 해야 하는 씬이라면 리스크가 있었다.
그 때문에 앙상블들이 조용한 가운데 도웅이 손을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도웅 씨가요?”
연출가 함인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다른 배우들의 이목이 함께 쏠렸다.
“네, 대충 노래도 알고 있어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대안이 없던 함인구가 얼떨떨하게 답했다.
“그래요, 그럼 한번 해보죠.”
301호를 배경으로 한 씬에서, 도웅은 대본이 없는 채로 ‘찬이’역을 완벽히 소화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옆집인 202호로 씬이 바뀌면서, ‘진태’역할로 다시 연습에 투입됐다.
‘지금 대본 없이 하는 거 맞지?’
‘응, 맞아. 어떻게 벌써 다른 사람 대사까지···.’
놀란 배우들이 웅성거렸다.
“세윤아. 여기서 다시 춤을 춰봐.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하나, 둘-“
도웅이 자연스럽게 신비의 연기를 이끌어내자,
뮤지컬 계의 신동답게 신비는 금세 밝아져 연기에 몰입했다.
게다가 신비가 노래할 때, 가수로서 도웅의 프로다움이 빛을 발했다.
아무런 어색함 없이 신비의 노래를 화음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마침 그때 배우 진재선이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쉿.”
허리를 숙이는 진재선에게 함인구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했다.
그제야 앞을 보니 연습실의 가운데서 도웅과 신비가 한창 노래를 하는 중이었다.
연습은 시작도 못 하고 딸이 울고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하고 있던 진재선은,
다행히 밝은 모습으로 노래하고 있는 딸의 얼굴을 보자 다리에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아휴, 도웅 씨 너무 고맙네. 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도웅이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는 것이 놀라웠지만,
일단은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다음 씬에 재선 씨가 들어가도록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함인구의 지시에 진재선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짐을 내려놓고 한숨 돌린 뒤 다시 보니,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도웅의 손에 대본도, 악보도 없었다.
‘···어떻게···?’
이미 내 파트까지 외우고 있다는 건가?
진재선은 충격으로 온몸의 혈관이 수축하는 느낌을 받았다.
바쁜 연예인이니 연습도 제대로 못 하겠지.
연습 날에나 나오면 다행이지.
진재선은 은연중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늦은 내 파트까지 외우고 있다는 건···.’
도웅이 이 뮤지컬을 위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했다.
딸에게 묻어간다는 남들의 편견 때문에 신물이 난 상태면서,
자신도 도웅을 ‘어차피 아이돌’이라는 편견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우리 같은 배우들에게···’
그는 노래하는 도웅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편견은 독이지.’
진재선은 주먹을 불끈 쥐며,
언젠가 이 마음의 빚을 갚겠노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