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언제 어디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뽀글뽀글 볶은 긴 머리와 히피스러운 의상.
가수로서의 청초한 이미지와 다른 스타일링 때문에 버드가 영상 속 그녀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가느다란 뼈대와 조금 병약해 보이는 외모가 영상에서 보던 그 신세인이 맞았다.
‘버드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구나.’
어디선가 프로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겠거니 했지만 설마 그녀가 그 잘나가는 버드 일 줄은 몰랐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도웅은 모르는 새 그녀와 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붉은 별을 모으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쉽게 풀릴 수도 있겠어.’
도웅의 눈이 혹시나 싶어 신세인의 머리 위를 훑었다.
하지만 별의 흔적은커녕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둘 중 하나지.’
아직 도웅의 작사 실력이 신세인의 감정을 흔들기엔 부족하거나, 발현될 조건이 아니었거나.
그래도 신세인은 찾았으니 앞으로 기회는 있는 셈이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오가던 때 신세인이 알이 커다란 선글라스를 코 위에 다시 얹었다.
“아, 나를 모르나? 그럴 나이인가?”
그녀는 도웅의 밋밋한 반응이 살짝 놀라운듯했다.
‘어디를 가도 알아보던 게 이제는 정말 과거의 일이 된 건가?’
아쉽기도 했지만, 과거의 이미지가 잊히는 것.
그래서 조금 더 자유롭게 음악 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게 신세인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신세인이 담백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도 예전에 가수로 활동했었거든요.”
“그러니까 너 이제 이렇게까지 꽁꽁 숨기고 다닐 필요도 없다니까.”
강태진이 그녀의 헐렁한 옷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아니, 오늘 나 때문에 집중이 깨질까 봐 그랬지. 이제 슬슬 기어 나올 생각이니까 알아서 하게 놔둬.”
신세인이 잡힌 옷가지를 툭 잡아끌었다.
긴장이 풀린 도웅이 그 틈을 파고들어 꾸벅 인사했다.
“선배님, 실제로는 처음 뵙겠습니다. 남도웅입니다.”
“네, 저는 잘 알죠. 도웅 씨.”
신세인이 맞잡은 손을 흔들며 씩 웃었다.
도웅은 얼른 오해를 풀기 위해 말했다.
“저도 선배님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 노래도 알고요.”
“에이, 아는 척하는 거 아니고?”
“진짜 압니다. 이렇게 뵐 줄 몰라서 조금 당황했었습니다.”
그제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신세인이 ‘그것 봐’하는 뉘앙스로 강태진을 쳐다봤다.
“또 알겠다니까 그것대로 심경이 복잡해지네.”
“···네?”
“아무튼 오늘 도웅 씨가 쓴 곡 인상 깊었어요. 나중에 또 같이 일할 일 있었으면 좋겠네.”
손을 흔드는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에서 형형색색의 팔찌가 찰랑거렸다.
당장은 붙잡을 수는 없지만.
‘일단은 메가플레이 영상의 완료율을 높인 다음에.’
곧 다시 보게 되리라.
**
강태진과 신세인은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겠다고 따로 나섰고, 도웅은 임지문을 포함한 몇몇 작곡가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도웅 씨, 오늘 들었던 그 노래, 느낌이 진짜 좋아요.”
“맞아요, 사파이어 다음 앨범 잘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심사를 보았던 작곡가들이 먹음직스러운 반찬을 집어 먹으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당연히 가장 뜨거운 화제는 방금 있었던 표절곡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겠네.”
임지문이 입을 웅얼거리며 말했고,
조훈기 ‘두근두근’의 원곡자 이윤수처럼 장난스럽게 얘기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이길 자신 있으니까 이렇게 밀어붙인 거죠? 도웅 씨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보통 아니라니까.”
“하하.”
그런데 이윤수는 문득 판타스타의 작곡가 하나가 도웅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해줬던 작곡가의 옆구리를 몰래 쿡 찍었다.
‘혹시 옹석이란 그 작곡가가, 전에 말했던 그 사람이에요?’
‘···전에?’
‘왜, 도웅 씨 작곡하는 게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 그거 다 회사에서 이미지 메이킹 하는 거라고 떠들었다는 사람이요. 판타스타 소속 작곡가라고 했잖아요.’
‘아아-. 맞아. 그 사람이야, 옹석.’
남자는 무릎을 ‘탁’ 치곤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랬던 당사자가 정작 도웅 씨 곡을 베끼다니. 염치도 없지.’
생각해보니 그가 더욱더 괘씸했다.
그리고 이전에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던 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작곡가 이윤수가 인상을 썼다가 슬쩍 도웅에게 물었다.
“도웅 씨, 그럼 옹석 작곡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까 강 대표님이 무슨 약속을 지켜달라 하시던데.”
도웅은 잠시 고민하다 사실 그대로를 얘기했다.
어차피 금세 다들 알게 될 테니까.
“패배한 사람은 그날로 판타스타에서 작곡을 멈춘다. 그게 공모를 그대로 진행하는 조건이었어요.”
살벌한 조건에 작곡가들이 하나같이 ‘헤엑‘소리를 내며 숟가락질을 멈췄다.
여차하면 억울하게 작곡에서 손을 뗄 수도 있었던 건데.
“도웅 씨 배짱 장난 아니네.”
감탄하는 입들이 느리게 반찬을 씹으며 움직거렸다.
식사를 마친 작곡가들과 도웅이 판타스타 건물 앞으로 걸어왔다.
외부 작곡가 대부분이 그쪽에 주차를 해뒀기 때문.
그때 판타스타 1층의 유리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검은 실루엣.
오늘로 영원히 판타스타를 떠나게 된 옹석이었다.
거의 살다시피 하던 작업실이었지만, 막상 챙겨나온 짐은 달랑 배낭 한 개.
낡은 배낭은 그의 신세처럼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
순간 도웅과 함께 있던 작곡가들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중 분노를 참지 못한 이윤수가 옹석에게 불쑥 다가갔다.
지금이 아니라면 마주칠 기회도 없을 것 같아서.
“창피한 줄 아세요.”
“···.”
작곡가 모임에서 뒷말을 하고 다닌 것도 모자라, 표절곡으로 패배까지 했다.
옹석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너무 큰 정신적 충격에 눈앞이 뱅글뱅글 돌고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만··· 좀.”
옹석이 마른 가지 같은 손으로 이윤수를 툭 밀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윤수는 멈추지 않고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업계 좁은 것 다 알면서 그런 행동을 하고 다녔으니, 죗값 치를 준비도 다 한 거겠죠.”
과거 소문만 듣고 도웅에 대해 짚어 넘긴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절반이었다.
더는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메마른 옹석이 터덜터덜 빈 껍데기처럼 주차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도웅은 결국 그가 남의 것에 손을 댄 죗값을 아프게 치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날 도웅을 그늘에서 바라만 보게 될,
그의 남은 인생이 무엇보다 잔인한 형벌이 되리라.
**
도웅이 만든 곡을 주축으로 사파이어 앨범의 콘셉트를 잡았다.
플롯으로 따지자면 도웅의 노래가 ‘절정’에 해당되고,
몽환적이면서 화려한, 축제와 관련된 남녀의 에피소드로 나머지 곡도 다른 작곡가들에게 의뢰하기로 했다.
“각자 캐릭터를 확실히 잡아서 스타일링에도 반영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의상 같은 경우에는 스팽글이나 펄이 들어간 소재를 적당히 써서-.”
도웅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관련 부서의 직원들이 꼼꼼히 받아적었다.
중간에 역경은 있었지만, 공모를 뚫고 올라온 검증된 실력.
이미 성공한 가수로서 시장을 파고드는 통찰력.
도웅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래서 도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다같이 열심히 노를 젓는 중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가온 사파이어의 녹음 날.
이번엔 도웅의 참여하에 제대로 녹음을 하게 되었다.
녹음실로 걸어가는 길.
막내 로다가 자신의 왼쪽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은율 언니, 어떡하지?”
“왜?”
“나 심장이 너무 뛰어.”
하지만 마은율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 인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안 뛰는 것보단 낫지. 난 심장이 멈출 것 같아.”
“으앙!”
위로를 받고 싶었던 로다가 되려 더 긴장되는지 비명을 질렀다.
이미 가녹음도 해 본 곡이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차원이 달랐다.
치열한 공모를 뚫고 작곡가들의 극찬을 받은 곡.
그리고 본인들이 듣기에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곡.
그런데 만약 이게 잘 안되면?
그건 여지없이 본인들의 부족함 탓일 테니까.
잘해야만 한다는 부담이 온몸을 감쌌다.
후-하.
멤버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하며 녹음실 안으로 들어섰다.
달칵.
그 순간, 먼저 와있던 도웅이 따듯하게 그들을 맞아주었다.
“왔어요? 그럼 다들 마음 편하게 먹고, 한 번 잘해봅시다.”
그리고 도웅과 눈을 맞추자,
마치 주문이라도 걸린 것처럼 사파이어 멤버들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믿을 만한 선장이 함께 배에 탄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
“끝부분을 설레는 감정으로 떨어줘야 해요.”
“네, 다시 해보겠습니다.”
마은율은 평소보다 긴장한 듯 보였지만, 한 번 도웅과 녹음해본 전력이 있어서 그런지 금세 적응하고 제 역량을 발휘했다.
백설과 이삭은 실전에 강한 타입인지, 도웅의 디렉팅을 잘 따라왔고.
가장 어린 로다가 문제였지만,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로 예를 들어 설명하니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곧잘 이해했다.
그래도 다들 신인 딱지는 떼서 그런지 녹음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도웅은 이들이 1집 활동을 했던 게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디렉팅 붙었다고 녹음 결과가 이렇게 달라지나?”
“그냥 디렉팅이 붙은 게 아니라 도웅 씨가 붙은 거야.”
“아이고, 어련하시겠어.”
대표실에서 노래를 들어본 여명과 강태진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노래는 정말 좋았다.
사파이어의 다른 곡들은 하나둘 다른 작곡가들에게서 들어오는 중이었고, 도웅이 만든 곡은 벌써 안무팀에게 넘어갔다.
그 사이, 도웅은 뮤지컬에 집중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남 배우, 고생했어.”
원로 배우 임현백이 도웅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고, 다른 배우들과도 웃으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였다.
“막상 끝나니까 너무 아쉽네. 도웅 씨랑 같이 무대에 섰던 거, 정말 영광이었어요.”
“도웅 삼촌, 또 만나~. 노래 나오면 나 열심히 들을게.”
아역배우 신비는 예상외로 울지 않고 씩씩하게 헤어졌다.
함께 고생했던 만큼 거나하게 뒤풀이를 하고 며칠 후 돌아온 도웅의 안식처 판타스타.
“자, 그럼 개운하게 도웅 씨 앨범에 대한 회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제작 팀장이 시원한 국밥이라도 먹은 듯 우렁차게 얘기했다.
“네, 좋아요!”
이나래 과장이 신난 듯 박수를 짝짝하고 쳤고 최 과장도 그 옆에서 거들었다.
박수 소리에서 도웅의 표절 시비가 깔끔하게 해결된 데 대한 개운함이 느껴졌다.
이들이 왜 지난 회의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었는지 알게 된 직원들은 작게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도웅 씨가 주축으로 작곡을 하고 필요할 경우에 서브로 다른 작곡가랑 작사가를 섭외하는 거로-.”
당연히도 이번 앨범은 대부분 도웅의 자작곡으로 채우게 되었다.
지난 앨범에선 도웅의 자작곡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과 달리, 다들 이제 ‘때가 되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간 회사에서 도웅의 위상도 ‘가수에서 아티스트로.’ 많이 달라진 것이다.
“도웅 씨 의견은요?”
“저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번 앨범에서 꼭 같이 일하고 싶은 분이 한 분 있어요.”
“네, 말씀해보세요.”
과연 도웅이 같이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누군지, 회의실 안에 있던 모두가 집중했다.
그리고 도웅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이름은.
“작사가 버드랑 꼭 같이 하고 싶어요.”
일시에 직원들의 얼굴이 조용히 회의에 참여하고 있던 강태진에게로 돌아갔다.
얼마 전 그의 부탁으로 버드가 등장했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태진이 ‘하하’하고 살짝 난감한 듯 웃더니 답했다.
“그건 제가 최대한 힘써보도록 하죠.”
겉보기엔 태연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여러 생각이 오갔다.
왜냐하면 버드는 본인이 원하는 곡이 아니면 쉽게 의뢰를 받아들이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
며칠 전 입고 온 거적때기 같은 옷 스타일처럼 신세인은 마이웨이 성향이 강했다.
공모 심사 날 와준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웠으니까.
‘언제 어디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종잡을 수 없는 친구라.’
하지만 도웅이 원하는 것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사시켜야만 했다.
강태진에게 미션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