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그녀의 철칙.
회의가 끝나고, 대표실로 돌아가는 길.
강태진이 신경 쓰이는 게 있는지 이마를 긁적였다.
‘신세인을 또 무슨 수로 꼬드기지.’
강태진과 신세인은 한창 활동할 때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
허나 워낙 자유분방한 신세인의 성향 덕에 가끔씩 연락하며 그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난 공모 심사 때는 거의 처음 하는 부탁이라 들어준 것 같은데, 두 번 연속으로 내 부탁을 들어주려나.’
그렇게 잘나가던 가수 시절에도, 소속사에서 요구하는 게 자기가 원하는 음악 스타일이 아니라며 단칼에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던 신세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무슨 방법으로 확실하게 도웅의 곡을 부탁할지 골똘히 생각하며 대표실의 문을 열었는데, 한가운데 놓인 고급스러운 소파에 여명이 태연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어, 왔어?”
제집 안방마냥 구는 여명 덕에 심기가 불편해진 강태진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여기가 네 안방이냐?”
“왜 그래, 또 새삼스럽게. 이 소파가 아주 푹신해서 내방 침대보다 잠이 잘 와.”
여명이 상체를 일으키며 소파의 쿠션을 툭툭 쳤다.
“얼씨구, 아예 그냥 이불이랑 베게까지 갖다 놓지 그래? 기왕이면 잠옷도 차려입고.”
강태진이 빈정거렸지만, 여명은 끄떡없었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진짜 그래도 돼?”
“말을 말자, 말을.”
강태진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건너편 소파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오늘 좀 이상하네. 뭐 고민되는 일 있어?”
여명의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태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냥 고민할 시간에 빨리 저지르자는 생각에서였다.
업계에서 비싼 몸인 버드가 그동안 다른 스케줄을 잡아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따르르르릉-.
신호가 한 번 울렸다.
그러나 곧바로 연결음이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 버렸다.
수신 거부를 한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강태진은 답답함을 느꼈다.
“와, 이것 봐. 큰일 났네. 연락이 안 돼버리네.”
막막해하는 강태진을 여명이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
“···형.”
“왜.”
“여자친구 생겼어?”
강태진은 여명의 말을 무시한 채 두 번째 통화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머리를 흐트러트린 뒤 소파 등받이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번이야말로 자신이 도웅에게 도움이 될 절호의 찬스인데.
‘이거 또 잠수 탄거 아니야?’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시골 깡촌으로 이사를 가버리고.
신세인은 이미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작사 의뢰는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갔으니까 그녀 입장에선 아무 상관 없었지만.
‘이러면 방법은 신세인이 읽을 때까지 공식적인 메일을 보내두는 것밖에는 없는데.’
그럼 내가 나선 의미가 없잖아, 하며 강태진이 난감해하고 있던 때.
지-잉. 징.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강태진은 부리나케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
신세인은 얼마 전 공모 심사를 갔다가 받은 자극을 영감 노트에 적어넣는 중이었다.
폭죽이 터지는 축제의 한 장면이 상상되는 도웅의 노래,
그리고 그 곡을 베낀 다른 한 남자의 추악한 욕망.
그날 겪었던 사건과 그때 느꼈던 감정이 몹시 영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재미있었어. 이게 나중에 다~ 써먹을 일이 있겠지?”
그녀는 보물 같은 영감 노트를 툭툭 털어 소중히 책꽂이에 꽂아 넣었다.
음악을 시작하면서부터 가지런히 모아놓은 이 영감 노트들이 그녀의 보물 1호였다.
“근데 아까부터 누구한테 자꾸 전화가 오는 거야.”
신세인이 부재중 화면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강태진···?”
불과 얼마 전에 봤던 인물이 무슨 일로.
이렇게까지 자주 안부를 묻던 사이는 아니지만, 궁금증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연결음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묘하게 다급한 강태진의 음성.
-여보세요? 세인아!
“···무슨 일인데 그래?”
신세인이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본디 체력이 약해서 한 번 뭔가에 집중하면 에너지가 금방 소진되기 일쑤였다.
곡을 예민하게 골라 작업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또 무슨 사건 터졌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이번엔 작사 일 좀 부탁할까 하고.
“하하.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신세인이 피식 웃었다.
“그럼 곡부터 보내.”
가사를 쓰고 그다음에 멜로디를 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세인은 무조건 멜로디가 먼저 나온 후, 마음에 들어야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도 그녀의 가사를 받기 위해 메일함에 쌓여있는 곡만 수십 곡에 달했으니까.
최근에 작업하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곡은 조훈기의 ‘두근두근’.
조훈기가 부르기에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멜로디가 영감을 콕콕 찔렀었다.
‘그때부터 심상치 않았지, 남도웅이란 애.’
강태진이 그간 엄청난 가수가 회사에 들어왔다며 도웅의 자랑을 늘어놓아도 대단히 관심이 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신세인이 같이 작업하는 가수 중에는 더 엄청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무려 조훈기 선배님의 곡을 그렇게 세련되게 풀어내다니.
그때부터 도웅에 대한 관심이 확 생겼다.
게다가 얼마 전 도웅이 만든 사파이어의 곡까지 생각하면···.
그때 강태진의 낮은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아니, 너 바쁠 테니까 미리 부탁하는 거야. 아직 곡이 나오진 않았거든.
“그게 말이야 방귀야? 내 스타일 몰라? 난 곡 없으면 작업 결정 안 해.”
-···그러니까 부탁이라고, 부탁.
수화기 너머로 절박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신세인은 피로를 느끼고 통화를 조금 끊고 싶어져서, 강태진을 방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다정한 투로 말했다.
“태진아, 나 먼저 한숨 자고 다시 통화하면 안 될까? 오늘 좀 무리했더니 피곤하네.”
-···너 이제 내 전화 안 받을 거잖아.
“오, 어떻게 알았지?”
그녀는 전화를 끊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눈썹 근처를 긁적이며 던지듯 물었다.
“대체 누구 노랜데 그래?”
-얼마전에 봤지? 우리 도웅 씨.
“어?”
-다음 앨범을 도웅 씨가 주축으로 작업을 할 건데, 그 친구가 너랑 꼭 같이하고 싶대.
“흐음···.”
‘도웅 씨라면 또 같이 일해보고 싶기는 한데.’
원래 같았으면 씨알도 안 먹혔을 일이지만 도웅의 이름에 약간의 흥미가 당겼다.
그녀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희망을 느낀 강태진이 서둘러 말했다.
-친구야···. 네가 이 부탁만 들어주면 나중에 내가-.
“관심은 가는데 확답은 못 드려요, 강 대표님.”
신세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강태진의 말을 끊었다.
“누가 뭐래도 곡이 맞아야 작업을 하죠. 억지로 가사를 끼워 맞추면 매력이 숭숭 새어 나간다고요. 그러면 서로한테 민폐야.”
강태진은 일목요연한 그녀의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일단 보내고 얘기해요. 일 순위로 검토해볼 테니.”
그래도 아주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
“신세인이면 그 가수 선배 맞지? 근데 작사를 해?”
강태진이 통화를 끊자마자 유심히 듣고 있던 여명이 물었다.
“···넌 몰라도 돼.”
“와-. 우리 강 대표님 인맥.”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신세인이라는 가수가 어느 순간 사라져서 세간의 관심을 받았던 것은 기억했다.
그런 신세인이랑 연락하는 사이였다니.
여명의 감탄하는 시선에 강태진이 살짝 거들먹거렸다.
“대표는 아무나 하는 줄 아냐?”
“근데 조금 비굴해 보였던 게 흠이라면 흠이야.”
여명이 무신경하게 자신의 손톱을 어루만지며 말하는 모습은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너 이거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라.”
“봐서.”
여명은 말을 마치고 곧바로 소파에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강태진은 순간 억울한 마음이 들어 중얼거렸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쟤랑 이렇게 지독하게 엮인 거지.”
**
똑똑.
강태진이 도웅의 작업실 문을 두들겼다.
이번에 새로 공사한 두꺼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에는 마이클이 벌렁 누워있었다.
마이클이 강태진을 먼저 발견하고 공처럼 몸을 굴려 일어났다.
“하이, 보스.”
“여기도 하나 있구먼.”
강태진이 틈만 나면 도웅의 작업실에 와있는 마이클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표실을 제 안방처럼 쓰는 여명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도웅은 컴퓨터 앞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 대표님 오셨어요.”
“네, 도웅 씨. 내가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슬쩍 마이클을 쳐다보자 그간 한국식 눈치를 장착한 마이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또 만나요, 보스.”
마이클이 두꺼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강태진이 조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도웅 씨, 그, 버드 말이에요.”
“네.”
도웅은 순간 뭔가 뉘앙스가 좋지 않음을 캐치했다.
‘아무래도 뭐가 잘 안된 모양이네.’
여기서부터 막히면 안 되는데. 직접 연락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최후로 고려해볼 만한 방법이었다.
그때 강태진이 다음 말을 이었다.
“곡을 먼저 보내 달라고 하네요. 일 순위로 검토를 해보겠다고.”
아예 스케줄이 안 된다거나 거절을 한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별 도움이 못 된 것 같아서 미안해요. 워낙 자기 스타일이 강한 친구라.”
“아니에요, 제가 작사가님 마음에 들만한 곡을 만들면 되는 거잖아요.”
도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검토 후보군에 든 것만 해도 만족스러웠으니, 지인 찬스는 이만하면 됐다.
“음악 하는 사람이면 음악으로 설득해야죠.”
**
사실 신세인의 가사를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붉은 별을 어떻게 모으지?”
오랫동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두문불출하는 신세인을 무슨 수로 바깥으로 끌어낼 수 있을까?
작사는 직접 만나지 않고도 작업이 가능하단 것이 문제였다.
“직접 만나서 작업하고 싶을 만큼 끝내주는 곡을 만들면 될 텐데.”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쉽나.
먼저 완료율부터 높이기로 하고 도웅은 나만의 연습실에 입장했다.
현재 완료율은 91%.
붉은 별이 나올 확률을 높이려면 완료율 먼저 높여야 했다.
하지만 레벨이 높아질수록 완료율을 높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종일 매달려 2% 정도를 더 올린 도웅.
잠시 휴식을 위해 등받이에 몸을 기댔을 때, 시스템 속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영감 노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전부 신세인 선배가 예전에 만들어놓은 것들인가?”
지금까지는 저 위쪽에 꽂힌 것까지 꺼내 볼 생각은 않았지만, 갑자기 궁금증이 밀려왔다.
촤라라락.
그곳엔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기록해놓은 신세인의 영감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도웅은 그 안에서 짤막한 일기 형식으로 쓰여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 눈을 감았다 뜨니 스타가 됐다. 역시 나란 여자.
길거리에서 노래하던 망나니 같은 나지만 청초하게 꾸며놓으니 이것도 잘 어울리네. 사람들이 무척 좋아한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사람들이 내게 이런 모습만 보여주길 원한다는 거. 다양한 스타일 중 하나를 시도한 것뿐인데.
-내가 즐겁지 않으면 금방 뽀록이 날걸?
내가 하고 싶은 음악 vs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음악.
한 번 사는 인생 내가 원하는 대로 살란다.
-가명을 써서 작사를 시작했는데,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음악 할 수 있다는 게 좋다. 원할 때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볼까? 언젠가 이렇게 자유롭게 노래 부를 날도 오기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영감 노트들을 쭉 읽다보니 이해가 갔다.
신세인 선배는 자유롭게 음악을 하기 위해서 잠적을 선택했던 거구나.
어떤 부분에선 공감이 가기도, 과감한 선택이 놀랍기도 했다.
저마다 다양한 삶의 모습.
나와 다른 남의 삶을 엿보는 일은 때로 커다란 영감이 되기도 한다.
디리리링-.
도웅은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서, 급하게 시스템 안에서 기타를 꺼내 들었다.
**
“흐아암.”
낮 동안 푹 자고 일어난 신세인이 밤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며 이 순간의 자유를 깨트렸다.
신세인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휴대폰을 꺼버릴까 하다가 일전에 약속한 게 있어 받아들었다.
“강태진 씨, 나한테 너무 집착하는 거 아니야?”
“···.”
“나 질척이는 남자는 딱 질색이야.”
“···저번에 말한 곡 보낼 테니까 들어보고 연락 줘.”
“알겠어.”
장난이 좀 심했나? 용건만 말하고 끊긴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곧장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남도웅 씨가 이번엔 어떤 노래를 만들었으려나.”
기대 반, 설렘 반.
과연 이번에도 자신의 창작 욕구를 자극할 만한 그런 노래일지.
신세인이 가볍게 재생 버튼을 터치했다.
노래를 듣는 동안 눈썹이 올라갔다가,
두 눈이 가늘어졌다가,
턱에 힘이 들어갔다가.
얼굴 근육을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던 신세인이 곧바로 다다다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강태진에게 연락하는 대신,
이전에 작업할 때 연락을 주고받았던 도웅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도웅 씨, 내일 시간 돼요?
정말 좋은 곡이 있으면 놓치지 않는 것도,
그녀가 일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칙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