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여기서 공연을 하라고?
출연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카메라에 충분히 담은 후, 구은정 PD가 이어서 설명했다.
“광화문에서 딱 한 곡만 하고 스페인에서 같은 노래 부르는 장면으로 전환되게 할 거예요. 홍보 클립 영상으로 쓸 거거든요.”
그녀가 장면 전환 설명을 하며 두 손바닥을 휘휘 교차시켰다.
출연자들이 ‘아’하는 소리를 냈다.
“좋죠? 좋은 생각이죠? 여러분도 곧바로 해외에서 버스킹을 하기에는 부담되는 것도 있을 테니까.”
영상 분량도 챙기고, 미리 광화문 한복판에서 프로그램 홍보도 하고, 연습도 하고.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게 하필 노래를 처음 맞춰본 당일 이뤄진다는 게 당황스러웠지만.
하지만 그게 바로 구은정 PD가 천재들을 고르고 고른 이유였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흥미롭겠는가. 처음 만난 날 이들이 만들어 낼 멋진 음악이.
“그럼, 준비해서 갈까요?”
“하하, 이거 참.”
방송국 물을 오래 먹은 프로들이라 그런지 당황하는 리액션과 함께 군말 없이 짐을 챙겼다.
이미 버스도 대절해 놓아서 다 함께 그리로 올라탔다.
한 앵글에 담기 좋도록 뒷좌석에 쪼르르 앉은 네 사람.
갑자기 닥친 상황에 살짝 경직된 아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한이경이 물었다.
“아인이는 스페인에 가본 적 있어?”
“아니요! 저는 해외에 가보는 게 처음이에요!”
산골에서 홀로 기타를 독학하다 소속사에 발탁되었던 아인이 해맑게 웃었다.
그녀의 포지션은 기타 및 간단한 코러스.
버스킹도 처음이고 해외도 처음이라 설레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금세 긴장을 풀고 좋아하는 아인을 보고 한이경이 조금 안심했다.
같이 여행하기에 까다로운 타입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나저나 우리 중에 스페인어나 아니면 영어라도 할 줄 아는 사람 있나?”
“···.”
한이경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숙소, 교통수단, 버스킹 장소 같은 큼직한 것은 제작진들이 도움을 주지만, 그 외의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일들은 네 사람이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특히 식사나 관광 같은 것들.
그래서 누군가 스페인어나 하물며 영어라도 쓰는지 물은 것인데, 침묵하는 출연진들을 보니 편하게 여행하기는 힘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도웅은 평소 마이클과 영어 회화를 열심히 해서 일상적인 대화엔 문제가 없었지만, 여기서 나섰다간 원어민급의 기대를 받을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반면 한이경은 벌써 걱정이 앞섰다.
“고생 꽤나 하겠네, 우리.”
“걱정 마, 몸짓 발짓으로 하면 다 통하게 되어있어.”
오비탁이 짧은 머리를 손바닥으로 문질 거리며 태평하게 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대화가 단절되었고, 버스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여러분, 가시는 동안 밴드명을 한번 정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구은정 PD가 침묵을 깨고 진행상 필요한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아, 그게 좋겠네요. 잠깐이긴 해도 활동명은 필요하니까. 뭐가 좋을까?”
한이경의 질문에 곧바로 답한 것은 아인이었다.
“음···. 한국인들은 어때요?”
“틀린 말은 아닌데 그건··· 꼭 올림픽이라도 출전해야 할 것 같잖아.”
“그럼 외국인들! 스페인에선 저희가 외국인이니까요!”
“···.”
이어서 튀어나온 아인의 신박한 아이디어에 3초간 아무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다간 꼼짝없이 ‘외국인들’이 될 것 같아서 하는 수없이 도웅이 머리를 굴렸다.
마침 눈에 들어오는 프로그램명 ‘씽 썸웨어.’
도웅은 거기서 연상되는 아무 단어나 꺼냈다.
“···차라리 썸띵밴드는 어떨까요?”
“오! 좋다!”
단번에 아인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녀는 정말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을 뿐이라서 도웅의 의견이 달가웠다.
나머지 멤버들도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는 가장 좋겠다는 눈치여서 한이경이 도장을 쾅쾅 찍었다.
“좋아! 그럼 우리는 지금부터 썸띵밴드야.”
**
이윽고 근면한 불빛이 반짝이는 평일 저녁의 광화문에 도착했다.
곧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쏟아져나올 높다란 빌딩들이 도시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악기와 앰프는 직접 챙겨주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세팅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와’준다는 단어가 구은정 PD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다들 ‘여기서부터 시작이구나’하고 직감했다.
버스킹을 하러 가는 거니 당연히 기본적인 세팅은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했다.
스태프들이 들고나온 촬영 장비는 아까 합주실에서보다 훨씬 간소했다.
앰프의 사이즈나 촬영 장비를 축소한 것은, 꾸밈없이 버스킹하는 느낌을 담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썸띵밴드가 광장의 가운데 줄줄이 내려 각자의 악기를 세팅했고, 악기가 없는 한이경이 마이크와 악보 세팅 등을 도왔다.
스탠드와 악기 따위로 점점 모양이 갖춰져 가던 때였다.
“···어?”
“맞지?”
“저거 한이경 아니야?”
퇴근하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근처에 멈춰 서성이면서 썸띵 밴드를 관찰하다가 ‘꺅’, ‘헐!’ 같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맞네, 남도웅이잖아!”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노래할 건가 본데?”
“대박, 완전 운 좋다!”
실로 썸띵 밴드 멤버들의 ‘이름값’은 파급력이 대단했다.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하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빽빽하게 주변을 둘러싼 시민들.
순식간에 커진 웅성거림 때문에 조금 당황한 아인의 세팅을 도웅이 도와주었다.
세팅을 마치고 고개를 드니, VJ들은 감쪽같이 인파 속으로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먼저 마이크를 잡은 것은 밴드의 중심을 잡아주는 한이경이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부로 함께 활동하게 된 썸띵밴드라고 합니다.”
-와아아아아!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덕분에 가던 길을 멈추고 이곳으로 더욱 몰려드는 사람들.
지금 막 온 사람은 깨끔발을 들기도 하고, 비교적 지대가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광활한 광장의 한 가운데서 포스 있는 한이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부를 곡은 남도웅 씨와 저의 듀엣곡입니다. 그러면 잘 들어주세요.”
피아노는 도웅, 기타는 아인, 타악기는 오비탁이 맡아서 연주를 시작했다.
여러 악기의 소리가 금세 하나의 음악이 되었고, 함께 사람들의 사이로 퍼져나갔다.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은 직장인들부터 휴대폰으로 촬영을 하는 이들까지.
관객들의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을 때, 도웅과 한이경의 입이 열렸다.
**
홍보 클립에는 1절에 합주실에서 촬영했던 인터뷰 화면이 겹쳐졌다.
인터뷰 첫 타자는 가장 대중의 기대치가 높은 전설의 보컬 한이경이었다.
“한이경 씨는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보컬이잖아요. 그런데도 타지에서 노래하는 ‘씽 썸웨어’에 출연을 결정하신 계기가 있을까요?”
앉아있는 자세부터 포스가 느껴지는 한이경.
그녀가 구은정 PD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음···. 옛날에 가진 거 없이 음악에만 올인하던 때가 가끔 그립다고 할까요.”
“아.”
“주변의 기대를 조금 내려놓고 노래를 하고 싶었어요. 이제 그게 될까 싶기도 하지만.”
그녀가 싱긋하고 웃어 보였다.
두 번째 인터뷰 상대는 오비탁이었다.
출연 계기를 묻는 공통 질문에 그가 더벅머리를 쓰다듬다가 별거 아닌 듯이 툭 말했다.
“글쎄요, 전 그냥 음악 하는 게 좋으니까요. 장소가 어디가 됐든.”
대답도 그의 성격대로 심플 그 자체였다.
다음은 아인의 순서였다.
그녀는 공통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답했다.
“버스킹이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요?”
“외국에도 나가보고 싶었고요!”
“하하하하.”
“최고에요, 씽 썸웨어!”
그녀의 업 텐션에 구은정까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따지자면 아인은 여자 마이클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도웅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이번에도 구은정 PD가 공통 질문을 던졌다.
“도웅 씨는 가장 바쁘면서도 단번에 ‘씽 썸웨어’ 출연을 승낙한 출연자인데요. 혹시 그 이유가 있을까요?”
“아무래도···.”
그는 출연자 중 가장 신중하게 생각하고는 말을 골랐다.
“선배님들과 함께하며 배울 게 많을 것 같았어요.”
각자 다른 이유로 뭉친 네 명의 아티스트.
그들을 풀샷으로 비추던 카메라가 뒤편의 고궁에 포커스를 맞췄다.
이 뒤로는 스페인에서 노래하는 이들의 모습이 오버랩 될 예정이었다.
**
썸띵 밴드 멤버들이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이곳은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바르셀로나였다.
지난번 베트남에 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긴 비행을 한 터라 도웅은 다리가 퉁퉁 부은 느낌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아인은 확장된 동공으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공항에 풍기는 이국적인 내음과 광고판, 가게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없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세요.”
“네에-!”
가장 먼저 숙소에 가서 짐을 풀었다.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는 숙소에서 자연스레 남자 둘, 여자 둘이 각각 방을 나눠서 옷을 갈아입은 뒤, 다 함께 거실로 모였다.
집안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들이 소리 없이 출연진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VJ나 PD가 뭔가 지령을 내리는 것도 아니라서 멤버들은 잠깐 각자 할 일을 했다.
비행기에서부터 왕초보 회화책을 뒤적이던 한이경의 옆에 아인이 바싹 붙었다.
“스페인어 공부하시는 거예요?”
“응, 그래도 기본적인 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올라! 씨, 그라씨아스!”
아인이 그녀의 옆에서 함께 스페인어를 중얼거렸다.
반면 오비탁은 여유롭게 아인의 기타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거 만져봐도 돼?”
“부에노스 디아··· 네! 마음껏 보셔도 돼요.”
아인이 양손을 뻗쳐 올리며 얘기하자 오비탁이 능숙하게 현을 튕겼다.
그냥 툭툭 튕겨져나오는 소리가 참 맛깔났다.
도웅은 말없이 그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는데 오비탁이 뜬금없이 물었다.
“도웅이 너도 기타 칠 줄 알지?”
“네.”
“옛날에 라디오 가끔 들었는 데 잘 치더라.”
악기의 대가 같은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니 좋으면서도 조금은 멋쩍었다.
그때 소파에 앉아있던 아인이 다다다다 일어나서 창가 쪽으로 달려 나갔다.
화-악.
창문을 열어젖힌 그녀가 발코니로 나가더니 ‘우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그래?”
멤버들이 천천히 발코니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어딘가를 가리키는 아인의 손가락.
“저기 보이세요, 저기? 성당이 보여요!”
무슨 성당? 하고 바라보니 바르셀로나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보였다.
독특한 형태로 높이 솟아있는 성당은 멤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는 엄청 멀어 보이긴 하지만.
“오, 시간 날 때 저기까지 한 번 걸어갔다 와보자.”
“Si, 좋아요!”
아인은 방금 배운 ‘네’라는 뜻의 스페인어를 섞어 대답했다.
그때 구은정 PD가 원하는 장면을 뽑아냈다는 듯이 기다렸다가 외쳤다.
“그럼 이제 첫 번째 버스킹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
“벌써요?”
때마침 해가 뉘엿뉘엿 지고있는 오후 즈음이라 일행들은 출출함을 느꼈다.
한국인은 밥심인데, 밥이라도 먹고 하면 좋으련만.
첫날부터 강행군이라 생각하면서도 군말 없이 악기를 챙겨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나 배고픔이나 걱정 따위는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싹 날아갔다.
“우와- 엄청 높다!”
족히 아인의 키 열 배는 넘어 보이는 높고 강한 물줄기가 노래에 맞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이 장관이었다.
이곳은 세계 3대 분수 쇼가 펼쳐지는, 몬주익 마법의 분수대였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했지만, 아무도 썸씽 밴드를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서 묘한 해방감과 어색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멤버들은 넋을 놓고 분수 쇼를 감상했다.
팔짱을 끼고 역시 그 장면을 눈에 담던 한이경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근데 우리 버스킹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설마···.”
물줄기와 함께 귀가 먹먹할 정도로 빵빵 터져 나오는 노래, 공중에 흩날리는 엄청난 양의 수중기.
뭣보다 분수를 감상하는데 정신이 팔린 수많은 관광객이 한 가득인데···.
“여기서 공연을 하라고?”
오비탁이 당황해 구은정 PD를 돌아보자, 그녀는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입꼬리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