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이들의 행복에 누가 되지 않길.
“아니, 여긴 너무···.”
한이경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 흩날리는 뿌연 수증기 하며, 분수에서 퍼져나오는 커다란 음악 소리 하며.
버스킹을 하기엔 절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한이경이 그 생각을 간신히 입 밖으로 꺼냈다.
“다들 집중해서 분수 쇼를 감상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연하는 건 너무 민폐 아닐까?”
“나도 그럴 것 같은데.”
본래 덤덤한 오비탁마저 걱정할 정도의 환경이었다.
‘첫 공연 장소부터 심상치가 않아.’
분명 프로그램 소개는 ‘타지의 평화로운 일상 속에 스며든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들, 그리고 그들의 음악.’ 같은 거라 잔잔하게 흘러갈 거로 예상하고 출연을 승낙한 거였는데.
‘이럴 거면 프로그램 이름을 ‘도전! 버스킹’ 같은 거로 지었어야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출연을 설득하던 구은정 PD에게 속은 기분까지 들던 때, 그녀가 살포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위쪽을 가리켰다.
‘응?’
자연스레 그 손끝을 따라가는 멤버들의 시선.
뒤에 우뚝 솟아있는 네 개의 기둥 뒤, 높은 계단을 따라 시선을 올리니 역사가 느껴지는 석조건물의 모습이 보였다.
“저 위로 올라가라고?”
“네, 저쪽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요.”
“이런 건 진작 얘길 해줘요.”
오비탁이 미안해하며 그녀를 향한 의심을 거두자 구은정 PD가 씩 웃으며 말했다.
“급하지 않으니까 좀 더 보다가 올라가셔도 돼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멤버들이 잠시 오색 빛깔을 내뿜는 분수 쇼를 감상하다가 차근차근 계단을 밟았다.
살짝 코끝에 찬바람이 스치긴 했지만, 스페인의 초겨울은 한국보다는 훨씬 따듯한 편이었다.
청바지에 맨투맨, 그 위에 살짝 두께감이 있는 모직 코트.
도웅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몸에서 조금 열이 나서 코트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분수와 멋들어진 석상들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눈요기가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 비로소 테라스처럼 평평한 곳에 이르렀을 때.
“우와아-!”
뒤쪽을 돌아본 아인이 감탄을 내뱉었다.
동시에 다른 멤버들도 뒤를 돌더니 그녀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와, 예쁘다.”
“끝내주네.”
스페인 광장까지 가운데로 뻥 뚫린 길.
수평선을 따라 보이는 황홀한 바르셀로나의 전경.
덕분에 마음까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멤버들 모두 잠시 말을 잃고 야경을 감상했고, VJ들은 그 표정들을 꼼꼼히 앵글에 담아냈다.
아래 분수대에서 들려오던 노랫소리가 멎은 것은 그때쯤이었다.
“···?”
자연스럽게 멤버들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곧바로 다시 시작되리라 여겼지만, 분수대는 물줄기까지 잠잠해진 채로 미동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개미 떼처럼 모여 있던 관광객들이 광장 쪽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끝났나 봐요.”
아인이 아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쇼의 시간이 정해져 있던 모양.
대부분은 광장을 따라 이곳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일부는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멤버들처럼 계단을 올랐다.
따라라랑.
그때 어디선가 피아노 건반을 훑는 소리가 들려왔다.
“···?”
멤버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바로 옆, 한 중년 남성이 전자 피아노의 건반을 두들기고 있었다.
본격적인 연주 시작에 앞서 소리를 테스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옆에 투박하게 놓인 앰프와 함께 이곳이 그의 무대인 모양.
썸띵 밴드도 음악을 하는 입장에서, 타지의 음악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우리도 잠깐 감상할까요?”
자연스럽게 멤버들에게 물으며 구은정 PD의 눈치를 살피니 그녀가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사람들은 이미 위쪽의 계단에 쭉 앉아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고, 멤버들도 맨 꼭대기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연주가 시작됐다.
전자피아노 특유의 비트 소리에 맞춰 약간은 엉성한 곡조로 피아노 치는 그의 모습이 투박하지만, 이곳의 정취와 꽤나 어울렸다.
관객들은 집중해서 그의 음악을 듣는다기보다는 음악을 BGM 삼아 야경을 감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적당히 흘러가게 놔두기에 좋은, BGM 정도로는 손색없는 음악.
‘일부러 엉성하고 잔잔하게 연주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멤버들 역시 이곳의 분위기에 잠시 취해있던 때, 구은정 PD가 뒤에서 속삭였다.
“저분이 30분까지 이곳을 쓰신다고 하니까 그다음은 우리 차례에요.”
동시에 멤버들이 획 하고 구은정 PD를 돌아보았다.
“여기서요?”
아까 한창 물줄기를 뿜어대는 분수대 앞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았다.
바르셀로나 전경을 배경으로 음악을 할 수 있는 참 멋진 장소.
음악을 즐기기 딱 알맞은 습도와 위쪽에서 쏟아지는 노란 조명은 낭만적이면서도 시야를 확보하기에 좋았다.
하지만 막상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공연할 생각을 하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얼마 전 광화문에서 버스킹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윽고 중년 신사의 연주가 끝나자, 관객 중 일부는 손뼉을 쳤고, 일부는 앞으로 나가 적게나마 공연에 대한 값을 지불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관심이 없었다.
무던한 관객들의 반응은 멤버들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별 반응이 없네.”
“여긴 원래 공연을 하는 곳이 아니라 야경을 감상하러 오는 곳이니까요.”
그렇게 입술이 바짝 타는 와중에도 곡의 순서는 점검해야 했다.
“원래 처음에 부르기로 했던 노래는 바꾸는 게 좋겠어.”
“네. 그건 너무 강렬하니까, 이곳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잔잔한 팝송이 좋겠어요.”
도웅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연습해 온 것 중에 이곳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몇 곡을 골라냈다.
잠시 아래서 그들을 기다리던 구은정 PD가 멤버들을 향해 손짓했다.
“내려오세요!”
그때 아인이 슬쩍 눈치 보고는 말했다.
너무 긴장돼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우리 파이팅 하고 가면 안 될까요?”
“하자, 하자. 자.”
오비탁이 먼저 바닥에 손바닥을 깔았다.
그러자 아인이 좋아하며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위로 차곡히 겹쳐지는 멤버들의 손.
그들이 작게 외치며 일시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파이팅!’
가장 먼저 오비탁이 박스 모양의 타악기인 카혼을 들고 가운데 툭 자리 잡았다.
“우리도 얼른 가요.”
도웅이 그의 뒤를 따랐고 두 여성도 서둘러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해 장비를 들고 온 스태프들까지 합세해 자리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이따금 그들에게 시선을 던질 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여유를 즐겼다.
다들 머릿속으로 무명시절 가장 처음에 올랐던 무대를 떠올렸다.
자신을 모르는 관객들과 그들의 무던한 시선.
그런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보고자 열심히 애쓰던 마음.
한이경이 서툰 영어로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벼락치기로 공부한 스페인어로 문장을 구사하기엔 무리였으니까.
“우리는 한국에서 온 썸띵밴드입니다. 그럼 우리의 음악과 함께 즐거운 시간 되시길.”
다들 슬쩍 시선이 한이경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흩어졌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듯이 마이크를 꼭 쥐었다.
달밤에 외로이 짝사랑의 감정을 읊조리는 잔잔한 흐름의 노래를 그녀는 일부러 목소리의 볼륨을 낮춰 아래로 깔았다.
그런데 각자의 시간을 즐기던 주변의 분위기가 곧장 달라졌다.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던 관객들의 소음이 줄어들고, 이곳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
멀리 야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뭔가에 홀린 듯 한이경에게로 가 닿는 눈동자들.
옆쪽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있던 이들까지 고개를 돌려 썸띵밴드를 바라보았다.
주변을 감싸는 공기와, 분위기, 듣는 이의 기분까지.
음악을 통해 모두 제 곁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게 바로 한이경이라는 보컬의 힘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마녀일까.’
일부러 저렇게 힘을 빼고 부르는데도···.
그녀의 노래에 홀린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그녀의 마력은, 이곳 스페인에서도 통했다.
워밍업과도 같았던 그녀의 노래가 끝나고, 잔잔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도웅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이제 그의 순서였으니까.
‘나도 잘 할 수 있을까?’
마음에 부담이 밀려왔다.
도웅은 다시 한번 낯선 외국인들의 표정을 살폈다.
아까보단 다음 노래를 기대하는 눈빛들. 그러면서도 순식간에 야경으로 다시 흩어지는 눈동자들.
도웅이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자 몇몇 푸른 눈동자들이 도웅에게로 향했다.
‘이 사람들이 내 노래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솔직히 잘 하고 싶고, 낯선 타국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욕심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방금 한이경의 노래를 들으며 깨달았다.
분명 그녀는 조금 더 욕심내서 자신의 실력을 내보일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앞에 앉아있는 관광객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썸띵밴드의 음악을 듣기 위해 이곳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됐다.
그래서 도웅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던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한밤의 여유를 즐기는 이 관객들에게 불청객이 되지 않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노래가 이들의 행복에 누가 되지 않길.’
최소 아까 전자 피아노를 치던 중년 신사의 연주처럼, 그리고 한이경이 보여주었던 잔잔함처럼.
자신의 노래가 이들의 여유와 함께 흘러가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마음을 조금 비우니 노래에 편안함이 실렸다.
낯선 시선들이 어느 순간 소복이 쌓이는 낙엽처럼 도웅에게로 내려와 앉았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끌림이었다.
마치 낙엽을 밟는 소리처럼 듣기 편안한 노래가 지금의 낭만과 잘 어우러졌다.
한편 오비탁은 연습할 때와는 달라진 변화를 눈치채고 내심 놀랐다.
‘분위기에 녹이듯 노래하고 있네.’
오비탁의 기준에 도웅은 아주 노래를 잘 하지만, 아직 많이 어렸다.
그런데 잘해보고 싶은 욕심이 앞설 법도 한 상황에 되려 그의 노래에서 평정심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이경이야 원래 잘하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놀랍군. 이 상황에서 듣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는 게.’
그 순간부터 도웅이 노래 잘하는 스무 살 후배가 아니라, 한 명의 음악가로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열흘간 도웅과 함께할 여행이 좀 더 기대될 정도였다.
오비탁의 눈이 천천히 사람들에게 향했다.
각양각색, 여러 나라에서 왔을 이국적인 외모의 관광객들.
그들은 도웅의 노래에 맞춰 잔잔하게 몸을 까딱거리기도, 연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면서 충분히 이 밤을 즐기고 있었다.
참으로 달빛처럼 평화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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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짝짝짝짝.
모든 노래가 끝나고 관객들이 커다란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타지에서 맞는 박수 세례는 언어를 뛰어넘는 묘한 감동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가까이 와서 공연에 대한 값을 지불하려다, 난감해하며 거절하는 멤버들과 악수만 하고 돌아갔다.
“그라시아스.”
물론 오비탁은 씩 웃으며 지폐 몇 장을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지만.
관심과 환호성이 한국에서 이들의 위상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좋은 출발이었다.
도웅은 속으로 아까 관광객들의 머리 위로 별과 함께 떠올랐던 숫자를 떠올렸다.
‘67%…. 왜 이렇게 확 올랐지?’
완료율이 올라가는 정도가 꼭 투자하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겪어본 적 없는 꽤 큰 변화폭이었다.
‘혹시 썸띵밴드 멤버들의 연주가 영향을 미친 건가?’
도웅이 음악에 관해 뭔가를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음악 천재들의 연주와 도웅의 노래가 시너지를 발휘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열흘 동안 어쩌면. 이들과 함께라면 더 많은 걸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도웅아, 얼른 가자!”
“네!”
앞서 걸어가던 오비탁이 도웅을 향해 손짓했고 도웅이 그들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