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이 무대의 한 시간.
“지금부터는 여러분의 자유시간이에요.”
버스에 짐을 다 싣고 난 뒤 구은정 PD가 말했다.
“원하시는 데 있으면 그리로 가셔도 되고요.”
첫 버스킹이 성공적이서 기분이 업 된 구은정 PD에 비해 멤버들은 그저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세요?”
정말 모르겠다는 무해한 표정.
몇 번 지켜본 바로 구은정 PD는 열정이 넘쳐서 그렇지 악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비탁이 차분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지금은 너무 시간이 늦었지 않나?”
“어머!”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는 구은정 PD.
“그렇네요. 한국에서는 지금 한창인 시간인데.”
한국이라면 그렇지. 치안이 세계에서 손꼽히니까.
하지만 여긴 무장 경찰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걸 보면 지금 이 시각에 관광지 같은 델 돌아다니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곳도 아까 분수 쇼를 할 때에 비하면 굉장히 휑해진 상태.
오비탁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도 못 먹었으니 일단 숙소 근처로 가죠.”
대부분 문을 닫았을 거라는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 숙소 근처 몇몇 가게들의 불이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흐아아암.”
-꼬르르륵.
하품 소리와 꼬르륵 소리가 함께 들려오는 총체적 난국.
버스킹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배고픔과 피로가 함께 몰려온 것이었다.
시차 적응도 안 된 데다, 한국이었으면 지금은 새벽 시간대.
비행기에서 쪽잠을 잔 게 전부였으니 다들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기운넘치던 아인이 까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왔으니 말 다 했다.
물론 고개는 쉬지 않고 휙휙 돌아가고 있었지만.
한이경이 먼저 마트 쪽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오늘은 간단하게 요기 때울 것만 사서 들어가는 게 어때요. 맛있는 건 내일 먹고.”
“그래, 어차피 식재료도 좀 사두는 게 좋겠다. 아침에 먹을 것도 챙기고.”
오비탁이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설마 꼭두새벽부터 버스킹을 하러 가진 않겠지.”
구은정 PD가 그의 의중을 알아듣고 손사래를 쳤다.
“아침 드실 시간 충분히 드릴게요. 앞으로 일정 그렇게 빡빡하지 않아요.”
그제야 오비탁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마트로 가자.”
**
마트 안은 별천지였다.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조금 모양이 다른 형형색색의 과일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각종 식료품.
일렬로 걸린 건조한 돼지 뒷다리를 보고 아인이 순간 놀라 ‘으앗’ 소리를 냈다.
오비탁이 카트를 끌고 오더니 말했다.
“며칠 두고 먹을 건 내가 챙길 테니까, 각자 오늘 먹을 것만 여기에 담아.”
“오-, 선배 요리 실력 좀 발휘해 보려고?”
한이경이 함께 앞으로 뚜벅뚜벅 걸으며 놀란 눈을 했다.
그녀는 요리에 젬병이라 안 그래도 고민이었는데 오비탁이 나서주니 다행이었다.
한이경의 별명이 마녀인 건 노래 때문도 있지만, 그녀가 예능에서 보여준 끔찍한 요리실력 때문도 있었다. 그녀는 모든 식자재를 지옥에서 온 것처럼 연성하는 능력이 있었다.
“왜, 네가 할래?”
“그러고 싶은데 그건 모두를 위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닐 거야.”
한이경이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이며 옆에 있던 과일코너로 향했다.
붉고 푸른 사과 종류만 여러 개.
한이경이 그중에서 신선해 보이는 것을 신중히 골랐다.
피식 웃던 오비탁이 카트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이번엔 도웅이 그 자리를 낚아챘다.
“카트는 제가 끌게요.”
오비탁은 고집부리지 않고 카트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별로 집어넣지도 않는 것 같았는데 계산할 때쯤 카트가 수북했다.
계란, 치즈, 우유, 야채, 과일 등등···.
거기서 한이경이 와인병을 집어서 흔들었다.
“이 술은 뭐야?”
“그래도 한 병은 있어 줘야 든든하지.”
오비탁이 씩 웃었다.
삑- 삑- 삐익.
그렇게 한참을 울리던 바코드 음이 멈췄을 무렵이었다.
계산대 직원이 과일이 담긴 봉지를 살피더니 영어로 무어라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얼떨결에 맨 앞에 있던 한이경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한국어를 뱉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 그녀는 스스로 해결해 보기 위해 애썼다.
“···Pardon?”
다시 얘기해달라는 한이경의 요청에 직원이 또 무어라 얘기했다.
하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설상가상으로 계산대 뒤에 현지인 한 명이 줄을 섰다.
‘어떡하죠?’
‘글쎄, 뭐라는 거지.’
다른 멤버들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나마 영어를 가장 잘 하는 게 한이경이었으니까.
전혀 의사소통이 되는 것 같지 않자 직원도 답답해 한숨을 푹 쉬던 그때였다.
한이경의 옆쪽에서 불쑥 유창한 영어가 튀어나왔다.
“Then, can I just exchange that···.”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자신을 구해준 그 구세주를 바라보았는데, 제작진일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 사람은 도웅이었다.
덕분에 한이경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도웅 선배 영어 엄청 잘해요!’
아인은 흥분해서 오비탁의 팔뚝에 매달렸고, 오비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해결하는 도웅을 바라봤다.
“OK, then···.”
대화가 통하는 것 같자 그제야 살짝 굳었던 직원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가 말해준 대로 도웅이 상한 과일을 교환해 오면서 상황이 일단락됐다.
‘살았다!’
특히나 짧은 영어로 이들을 끌고 다닐 부담을 잔뜩 끌어안고 있던 한이경의 얼굴에는,
방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개운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다음날 바르셀로나에서의 하루는 순탄했다.
거실 창문에서 보이는 성당에도 가봤고 빠에야 같은 현지 음식도 사 먹어 봤고.
도웅이 영어를 꽤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나서 일행들은 한결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도웅은 이들에게 음악에 관해서 사소한 것부터 배울 게 많았으니 상부상조라고 할 수 있었다.
멤버들의 일상적인 걱정이 덜어지니 노래 역시 더욱 듣기에 편안했고, 버스킹을 하면서 점점 합이 맞춰지는 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삼 일째, 그러니까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날.
내일 아침 일찍 썸띵 밴드는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네르하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째 날씨가 조금 수상하다.”
정면엔 다양한 형태의 낮은 석조 건물들이 보이고, 뒤편엔 짙은 바다가 펼쳐진 부둣가에서 장비를 세팅하던 한이경이 걱정스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칙칙하게 드리워지는 게 아무래도 비가 한탕 쏟아질 모양새였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얘기가 있었나?”
구은정 PD가 불안한 얼굴로 서둘러 장비 세팅을 도왔다.
그래도 근처에 지역 축제가 있었던 탓인지 부둣가에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래서 비가 오기 전에 얼른 끝내자는 생각으로 도웅이 막 첫 번째 곡을 부르려던 때였다.
툭.
노래하는 도웅의 콧잔등에 비가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꿋꿋이 노래를 이어가고 있는데, 비의 양이 점점 많아지는 게 느껴졌다.
후두둑.
겨우 노래 한 곡을 끝냈을 즘에는 노래를 감상하던 관객들도, 비를 피하느라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웅이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지만, 이곳엔 이 많은 인원이 비를 피할만한 그늘이 없었다.
“이거 안 되겠는데?”
“일단 다들 버스로 들어가시죠.”
악기와 카메라부터 잽싸게 버스 안으로 옮기고, 뒤이어 멤버들이 올라탔다.
빗줄기가 거세지는 차창 밖을 바라보는 멤버들의 표정이 찝찝하다.
“우리 그러면 오늘 촬영은 어쩌지?”
**
“금방 그칠 비가 아니네.”
숙소로 돌아온 한이경이 걱정스레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러면 오늘 더 이상 버스킹은 무리일뿐더러 어딜 돌아다니기에도 나빴다.
“열흘 중에 하루 날려 먹으면 분량 괜찮아요?”
“어떻게든 해봐야죠.”
하지만 이미 한국에선 그날그날 보낸 촬영분으로 편집에 한창이었다.
심지어 첫 방송이 며칠 후.
이미 편성은 정해져 있는 터라 분량 조절에 난관이 예상되는 듯 구은정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멤버들에게는 티 내지 않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처럼 안되는 게 여행의 묘미죠. 그럼 오늘은 자유롭게 쉴까요?”
하지만 멤버들은 이대로 쉴 생각이 없었다.
노래하지 못하는 게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고, 방송 분량도 신경이 쓰여서.
“뭘 만들어 볼까?”
분량이라도 만들어보고자 오비탁은 남은 재료들을 식탁 위에 모조리 꺼내놓았다.
그는 잠시 요리를 구상하는가 싶더니 도웅에게 손짓했다.
“도웅아, 요 앞 마트 가서 재료 몇 가지만 더 사 올래?”
“네, 그럴게요.”
“저는 뭘 도와드릴까요??”
아인이 뭐든 시켜달라는 눈빛을 반짝거리자 도웅과 함께 장을 다녀오라는 오더가 내려졌다.
한이경은 열심히 팔을 걷어붙이고 버벅대며 오비탁의 옆에서 재료 손질을 도왔다.
커다란 우산을 나눠 쓰고 도웅과 아인이 마트에 가는 길.
VJ 둘이 각각 앞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도웅이 우산을 좀 더 아인 쪽으로 기울여주는 배려에 뒤따라오던 구은정 PD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동생 잘 챙겨주는 오빠 롤로 편집하기 딱 좋겠네. 뭔가 설렘 포인트도 되겠고.’
그렇게 편집 포인트를 구상하던 때, 우산 위로 쏟아지는 폭우의 리듬 사이로 음악이 들려왔다.
다른 이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도웅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돌아갔다.
‘가게에서 틀어놓은 건가?’
간판에 선명히 찍혀있는 ‘라이브 바’라는 글씨.
호기심이 동한 도웅이 걸음을 살짝 멈추고 아인에게 물었다.
“우리 저쪽으로 잠깐 가볼까?”
“네, 좋아요.”
창밖에 얼굴을 붙이고 보니 안쪽에 조그맣게 마련된 무대에서 키가 훤칠한 백발의 노인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우와, 멋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듬성듬성 앉아있었다.
그런데 피아노를 치던 남자가 대뜸 일어나더니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식사도 있고, 맥주도 있습니다.”
차림새를 보니 백발의 남성은 아마 이곳의 매니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식사할 생각은 없던 터라 멋쩍게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그가 이어서 말했다.
“한 시간 후엔 멋진 오픈 마이크가 예정되어 있고요.”
오픈 마이크. 방금의 그 단어가 도웅의 걸음을 붙잡았다.
누구든 사용할 수 있도록 이곳의 마이크를 개방한다는 것을 뜻했다.
도웅이 잠시 텀을 두었다가 신중히 말했다.
“그럼 저도 나가서 노래할 수 있나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살짝 움찔하는 매니저의 눈썹.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썸띵밴드가 라이브 바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면?
그럼 방송 분량 걱정도 끝이거니와 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었다.
순간적으로 도웅의 의중을 알아챈 구은정 PD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아니요, 오늘은 무대 예약이 끝났습니다.”
매니저의 점잖은 대답에 구은정은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오픈 마이크이긴 해도 예약을 받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웅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그럼 혹시 예약 시간 전까지 무대를 쓸 수는 없을까요?”
백발의 매니저는 고민하듯 눈썹을 삐죽 올렸다.
도웅은 그래서 얼른 뒷말을 붙였다.
“오늘이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밤이라서요.”
매니저는 ‘잠시’하고는 바 안쪽에 배가 불뚝 튀어나온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아마도 그가 이곳의 사장인 것 같았다.
배불뚝이 남자는 뒤뚱뒤뚱 걸어 곧 이쪽으로 나왔다.
사장은 낯선 동양인을 무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약하지 않고는 조금 곤란한데요.”
역시 쉽게 풀릴 리가 없지. 구은정 PD도, 도웅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데서 솟아날 구멍이 생겼다.
“어···? 남도웅 씨 아니에요?”
몸집이 커다란 배불뚝이 남자의 뒤로, 반가운 한국말과 함께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내추럴한 차림새에 집게핀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여성은 카메라를 발견하고 소리를 꺅 질렀다.
“맞네, 맞아! 이거 ‘씽 썸웨어’ 찍고 있는 거죠?”
마침 오늘 뜬 홍보 클립 때문에 한인 커뮤니티에선 난리가 났었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자신의 가게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나 남도웅 씨 노래 엄청 좋아해요!”
들뜬 와이프의 반응에 사장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설명했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지금 여기서 한국의 프로그램을 촬영 중이라고.”
그러고 보니 눈에 띄는 카메라 두 대.
폭우 속에 살짝 떨어져 있어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 가수야, 여보!”
의구심과 호기심이 동시에 사장의 얼굴에 교차했다.
아내가 이렇게 좋아하니 노래를 부르게 해주고 싶다가도, 과연 한국의 가수가 얼마나 노래를 할지가 걱정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가게였고, 손님들에게 너무 형편없는 노래를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그럼 당신의 노래를 한 곡만 먼저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꽤 후한 조건을 내 걸었다.
“노래가 내 마음에 든다면 이 무대의 한 시간을 당신에게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