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28)
028. 필요하면 만들면 되지.
‘도대체 뭐 때문에?’
원래의 심사위원은 강태진이 아니었다.
도웅이 알고 있던 참여 기획사는 대형인 미앤, TSP, 그리고 중소 규모의 리치.
정황상 리치 엔터테인먼트가 판타스타 엔터테인먼트로 바뀐 것 같았다.
도웅은 거기에 자신이 영향을 끼쳤을 거란 심증은 있었으나,
정확히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판타스타에 오디션을 보러 가서?’
‘아니면 축제 연습을 하겠다고 밥 먹듯이 판타스타를 들락거려서?’
떠오르는 강태진의 연결고리는 이게 다였다.
하지만 이런 일들로 미래가 바뀌었다고 치부하기엔 너무 터무니없었다.
그때 도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래, 축제. 강태진이 우리 학교에 왔었지.’
도웅이 마은율과 듀엣을 하는 바람에 무대에 올라갈 노래가 바뀌었고,
강태진이 전자 키보드를 갖다주겠다고 학교까지 왔었다.
풋풋하지만 패기와 신선함이 넘치는 고등학생들의 무대.
아마 현업에만 갇혀있던 강태진이 그 일로 자극을 받아 인재 발굴에 뛰어든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강태진은 나한테 호의적인 사람이니까.’
강태진은 이미 도웅에게 캐스팅을 제안했던 사람.
결과적으로 심사위원이 바뀐 게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도웅의 귓가에 낮고 묵직한 여성의 음성이 스쳤다.
“개 같은 자식들.”
제히는 루머 때문에 대중들의 외면을 받을 것일 뿐, 노래 실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과거의 그녀는 언제나 칭송받았으니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3차 예선 탈락.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자존심마저 악평으로 짓뭉개져버렸다.
쿵!
그녀는 온몸에서 살기를 풍기며 거칠게 오디션장 밖으로 나갔다.
‘방금 것까지 찍혔으면 더 난리 났겠구만.’
다행히 그녀가 욕지거리를 하는 장면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그녀의 회생 계획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냥 떨어질 사람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도웅은 태연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
심사위원석의 가운데 앉은 양승혁이 말했다.
“다음 참가자 들어와주세요.”
그의 눈은 지원서에 고정되어 있는 채였다.
양승혁이 가장 먼저 훑는 것은 작가들이 적어놓은 귀퉁이의 멘트.
모든 참가자에게 한결같은 에너지를 쏟을 수는 없으니 이 코멘트를 기준으로 인터뷰 강약을 조절하는 편이었다.
☆노래는 기본에 외모는 옵션. 이 참가자는 주목해서 봐주세요.
‘흠···. 별표까지.’
이번 지원서에 적힌 멘트는 유독 길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방송 분량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TSP의 양승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지원자를 바라봤다.
‘멀끔하게 생기긴 했네.’
그는 지원서에 적힌 내용과 작가의 첨언을 토대로 질문을 던졌다.
“SNS에서 영상이 화제가 되셨다고요? 무슨 영상이죠?”
“학교 축제에서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었는데,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봐주셨습니다.”
“듀엣? 그럼 여자분은.”
“그 친구는 이쪽 진로에는 흥미가 없어서 저만 도전을 했습니다.”
양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원래 가수가 꿈이에요?”
“네. 가수 말고 다른 일은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아직 어린 친구가 너무 가능성을 빡빡하게 정해두는 것도 안 좋아. 보니까 외모가 느낌이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그 순간 양승혁이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소속사에서 연기시켜주면 할 거예요?”
“아니요, 전 음악이 좋습니다.”
“안 넘어가네.”
피식. 보통의 어린 참가자들은 그냥 스타가 되고 싶어 꿈이 가수라는 참가 명분을 갖다 붙이곤 했다.
그래서 한번 빈틈을 파고들어보려 했는데 예상외로 지원자의 의지가 단단했다.
이럴수록 노래에 더 기대감이 드는 법.
“준비되면 시작해 주세요.”
사이드에 앉은 강태진은 공정성을 생각해서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 도웅이 아는 얼굴을 보고 동요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도웅은 들어온 직후, 그저 자신과 눈을 한 번 맞춘 게 전부.
의외로 별로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날 보고도 전혀 놀라질 않네. 어린 마음에 아는 척을 하거나 당황할 수도 있는 건데.’
분명 또래의 고등학생들과는 다른 의연함.
그 태도는 도웅이 예삿 인물이 아니라는 강태진의 생각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나저나 그의 시선은 도웅의 기타에 가 있었다.
생각지 못한 아이템 등장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타를 들고 오는 참가자들은 대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정말 음악이 좋아서 그 일환으로 기타를 들었거나.
뮤지션에 대한 환상이 있거나.
아무래도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보니 압도적으로 후자가 많았다.
맞지 않는 튜닝, 노래와 따로 노는 반주.
그래서 참가자가 기타를 들고 들어오면 오히려 약간 기대치가 떨어지는 기현상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남도웅이니까.’
강태진은 도웅이 어설픈 실력으로 기타를 꺼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잠자코 도웅이 어서 노래를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디리링.
도웅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기타 현을 훑었다.
뒤이어 벌어지는 도웅의 입.
-♩아직은 꽃이 아름다운 이 계절에.
봄을 떠올리는 서정적인 가사와 느린 템포.
속삭이는 듯한 잔잔한 발성.
서정적인 가삿말에는 잘 어울리는 창법이었지만 심사위원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디션에서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이곳에서는 어떻게든 다들 튀기 위해 노력했다.
무리해서라도 고음이 들어간 노래를 선곡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교를 어떻게든 다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대부분.
그래서 오히려 과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런데.
-♩아~아. 너의 모습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소리 표현.
듬성듬성 여백이 느껴지는 기타 반주.
심지어 음역대의 변화 폭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심사위원들은 상체를 데스크 쪽으로 당겨 앉았다.
듣기 좋은 음악에 끌리는 일종의 직업적 본능이었다.
‘특별한 게 없는데 듣기가 좋아.’
특별할 게 없기에 오히려 특별한.
그런 이상한 매력이 심사위원들을 끌어당겼다.
잔잔하고 느린 템포 덕에 두 가지 소리를 천천히 씹으면서 음미할 수 있었다.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운다.’
중간중간 들리는 여백마저도 음악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오디션에서는 보기 힘든 파격적인 구성이었다.
세트 바깥에 서있던 임명이 작가 역시 어느 때보다 참가자의 음악에 집중하고 있었다.
‘···. 저번보다 듣기 좋네.’
2차 오디션 당시 도웅은 딱 기본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곡을 선보였다.
이 참가자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가늠하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오래 일해 자신의 듣는 귀는 높은 편이라 자부하는데,
그런 그녀의 기준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연주하고 있는 이 곡.
지난번 보다 가진 것을 덜 보여주고 있는데도 그 여백 안에 음악적인 가능성이 펼쳐 보이는 듯했다.
실은 임 작가가 찍어놓은 참가자는 여럿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2차 때보다도 못하던 참가자들의 실력.
하이라이트가 아닌 전곡을 들으니 미쳐 보지 못했던 단점들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이 PD와 내기까지 걸어놓은 마당에 자존심에 금이 가려던 무렵.
2차 때 보다 더욱 두각을 내보이고 있는 도웅은 임 작가에게 구세주처럼 보였다.
‘그래, 내 감은 남도웅이다.’
지금 도웅이 보여주고 있는 여유는,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여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배팅할 수밖에 없었다.
끼릭.
그때 들려오는 기타 스트링의 노이즈 사운드.
벌써 도웅이 준비해온 노래 한 곡이 끝난 것이었다.
강태진은 저도 모르게 발사하고 있던 탐욕의 눈빛을 거둬들였다.
‘도대체 본 실력을 얼마나 숨기고 있는 거지?’
그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볼 때마다 탐이 나서 미쳐버리겠네.’
이전에 도웅은 회사로 데려가 키워보고 싶은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기타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욕심보다는 음악에 대한 고민이 묻어나는 선곡.
그에 어울리는 감성과 표현.
이제는 그가 한 명의 아티스트로 보이기 시작했다.
‘먹혀들었나?’
도웅이 의도한 바도 이들이 느낀 것과 비슷했다.
3차 예선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높은 고음을 내고 화려한 스킬을 보여주냐가 아니었다.
각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음악 전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자리.
그렇기에 욕심을 덜어내더라도 기타와 자신의 목소리를 가장 조화롭게 보여줄 수 있는 음악을 선곡한 것이었다.
온전한 노래 한 곡에 대한 완성도와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때 독설가로 유명한 양승혁이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도웅은 막상 자신의 노래를 그에게 평가받으려니 약간의 긴장감이 돌았다.
무표정하던 그의 입이 떨어졌다.
“투박한데 밸런스가 좋네요. 특히 애써 누군가를 따라 하지 않는 그 여유를 괜찮게 들었습니다. 저는 합격 드리겠습니다.”
‘휴.’
이 정도면 굉장한 호평이었다.
심사위원 중 가장 발언권이 센 양승혁의 긍정적인 평가로 도웅은 한시름 놓았다.
다음으로는 지카의 차례였다.
“하루 종일 자기주장이 강한 노래들로 피로가 누적됐었는데 여기서 힐링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잔잔하지만 완성도 있는 노래 잘 들었습니다. 합격 드리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마지막으로 강태진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다.
“양승혁 심사위원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기타와 목소리의 밸런스가 과하지 않고 좋았습니다. 저도합격 드리겠습니다.”
강태진은 일부러 무난하게 심사를 마쳤다.
여기서는 분위기를 타 적당히 넘어가는 게 좋았다.
혼자 너무 극찬을 했다가는 불필요한 주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앉은 데스크에 커다랗게 떠오르는 합격 글자.
그제야 도웅은 긴장이 탁 풀렸다.
그리고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희열.
스페셜K스타의 애청자로서 이곳을 통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고,
자신이 방금 그 예선의 문턱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과거로 돌아온 이후 가장 강렬한 희열이 도웅을 감쌌다.
-챠랑.
[ ★ 임명이 님이 당신의 재능에 기대를 표합니다. ]메인 작가와 일부 스태프들에게서 나온 별은 덤이었다.
도웅은 합격 티셔츠를 들고 당당히 문밖으로 걸어나갔다.
“우와아 아악!!!”
“잘했어! 잘했어!”
“역시 남도우웅!!!”
밖에서 모든 것을 숨죽이며 듣고 있던 친구들이 격하게 달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합격의 희열과 행복.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이 광경을,
빛나는 카메라 렌즈가 담아내고 있었다.
**
3차 오디션이 끝나고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NNET의 을씨년스러운 건물.
어두컴컴한 그곳의 편집실에서 아직도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두 남자.
땀에 절은 빨간 티셔츠에 등이 구부정한 조연출이 하품을 했다.
PD보다는 폐인에 가까워보이는 몰골이었다.
“하-암. 이 PD님, 이거 꼭 오늘부터 해야 돼요? 오늘 오디션 끝났는데?”
“이제 슬슬 내보낼 거 정리 안 하면 너 나중에 피똥 싼다.”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어준 탈락자,
놀라운 실력을 보여줬던 합격자.
이석규 PD는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눠 쓸만한 장면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 PD는 흥미로운 클립 하나를 발견했다.
“얘다. 임 작가가 찍은 애.”
“어디요? 저도 볼래요.”
탁.
이 PD는 곧바로 스페이스바를 눌러 영상을 가동했다.
디리링.
-♩아직은 꽃이 아름다운 이 계절에.
잔잔한 기타와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목소리.
‘오디션 프로그램에 이런 무난한 노래를 들고 나왔다니.’
하지만 들을수록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느린 템포에 완성되어가는 한 곡의 음악. 확실히 다른 참가자들과는 남다른 매력이 있었다.
자연스레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임 작가, 감이 나쁘지는 않네.”
“이런 선곡을 한 여유가 범상치 않기는 하네요.”
“아직은 써먹을만하겠어.”
이 PD의 사고는 언제나 방송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방송에 쓸만 한가, 그렇지 않은가.
이게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임은 시청률이란 방송의 본질 그 다음의 일이었다.
이 PD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잔잔함으로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까?”
그가 생각했을 때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특별함이었다.
다른 참가자들과의 차별화된 전략으로 오늘은 눈에 띄었을지언정 이런 방식으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조연출이 말했다.
“방송 내보내기에도 캐릭터가 조금 약해요. 외모는 괜찮은데 이미지가 잔잔해서.”
“캐릭터?”
순간 이 PD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필요하면 만들면 되지. 그게 내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