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87)
087. 너도 어쩔 수 없는 음악쟁이구나.
도웅의 시원섭섭한 라디오 마지막 방송이 끝나고,
제작진들과 오래도록 아쉬움의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야 도웅은 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후련하네. 내일 저녁부터는 푹 쉴 수 있겠어.’
도웅을 성장시켜준 고마운 밑바탕인 동시에,
매일같이 진행하던 생방송은 도웅에게 은근한 마음의 부담이었던 모양이었다.
도웅은 푹신한 가죽시트에 몸을 묻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레벨업 자격을 검토합니다. ] [ Lv.2 루키 > Lv.3 베테랑 ] [ 사용자의 수준 검토 중···.. ] [ 이 작업은 다소 시간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베테랑이라.’
도웅은 오래간만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메가플레이는 지금까지 도웅이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영상을 추천해줬다.
그러므로 영상의 레벨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도웅의 수준도 높아졌다는 얘기.
‘뭔가 내 수준을 객관적인 지표로 확인하는 느낌이 드는데.’
게다가 도웅이 지금까지 신인으로서 어느 정도 성과를 달성했다면,
이제 자신의 영역을 만드는데 골몰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딱 필요한 때에 들려온 업그레이드 소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음에 어떤 영상이 나오려나?’
그렇게 기대에 부풀어있던 때, 잠자코 운전하던 심정남이 말했다.
“도웅 씨, 그나저나 이제 휴식기인데 뭐 하실 계획입니까?”
“음···. 그건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도웅의 대답에 심정남이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아 말했다.
“개인적으로 도웅 씨가 조금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에 너무 일 생각밖에 안 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도웅은 다음 스텝에 대한 고민에 치중하느라,
휴식기에 무엇을 할지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일을 끊임없이 한다기보다는, 음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네.’
음악을 생각하는 동안은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목마름은 채울수록 오히려 갈증이 났다.
도웅은 휴식기에도 온전히 쉴 생각이 없었다. 다만 아직 계획이 없을 뿐.
‘게다가 지금 메가플레이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내가 쉬어서는 안 될 타이밍이라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때 도웅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도웅이 홍대에서 발굴한 작곡가 임지문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네, 형.”
-도웅아, 라디오 잘 들었어. 그동안 고생 많았다.
수화기 너머로 특유의 느릿한 음성이 들려온다.
“고마워요. 요즘 작업은 잘 돼가요?”
-응,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락했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면 이번에 만든 노래 한번 들어봐 줄래?
“네, 알겠어요. 파일 보내주세요.”
임지문은 혼자 작업하던 습관을 버리고 이렇게 종종 도웅에게 자작곡에 대한 의견을 묻고는 했다. 도웅의 얘기라면 거의 전적으로 수용하기도 했고.
“그런데 형, 판타스타랑 계약 얘기는 잘 진행되고 있어요?”
-아, 여기 내 작업실 계약 끝나고 가기로 했어. 좀 아깝잖아. 홍대가 영감 떠올리기에 좋기도 하고.
‘영감이라···.’
실제로 이맘때 홍대는 인디 씬의 거점과도 같은 곳이었다.
새롭고 참신한 노래들이 홍대에서부터 탄생해서 인디 음악의 부흥기를 이끌었을 정도로.
‘그래서 락페스티벌 같은 게 많이 생겨났었지.’
임지문도 대표적으로 성공한 홍대 인디 뮤지션.
도웅은 문득 그 홍대 특유의 분위기 속에,
음악이 만들어지는 현장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임지문에게 물었다.
“근데 형, 저 형 작업실 놀러 가도 돼요?”
-이 누추한 데를? 보면 깜짝 놀랄 텐데.
“아무 상관 없어요.”
-네 스케줄만 괜찮으면 놀러 와. 나도 곧바로 수정하기에 그게 좋지.
그렇게 휴식기를 맞아 첫 번째로 할 일이 갑자기 결정됐다.
**
초여름 특유의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도웅은 챙이 넓은 벙거지를 푹 눌러쓰고 홍대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다른 곳이라면 조금 특이하게 여겼을지 모르지만,
이곳은 자유의 거리.
다행히 도웅의 스타일이 홍대에 자연스레 묻어 들어갔다.
‘대낮이라 사람은 많이 없네.’
길가의 양옆에는 개성 넘치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트렌디한 아이템들과 알록달록한 색감의 간판들.
거리를 걷기만 해도 시각적 자극들이 머릿속에서 넘실대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예술가들이 홍대를 좋아하는 거구나.’
고개를 돌릴 때마다 새로운 가게들이 눈에 들어와서,
정신없이 그 풍경들을 훑는 동안 좁은 골목 가에 도착했다.
주택을 개조한 듯 조금 낡은 건물의 지하.
도웅이 문을 두들기자 임지문이 철컥 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냉한 지하실 냄새가 훅 끼쳐왔다.
“너 온다고 해서 조금 정리하기는 했는데, 조금 정신없을지도 몰라.”
빛바랜 카키색 페인트가 칠해진 열 평 남짓의 공간에는,
임 지문이 하나씩 사 모은 음악 장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아늑하고 좋은데요? 사람 냄새도 나는 것 같고요.”
“그래? 다행이네.”
도웅은 작은 간이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때 눈에 들어온 나무선반 하나.
“형, 저 캐릭터 좋아하세요?”
그 위에는 크고 작은 크기의 피규어들이 얼기설기 줄지어 있었다.
임지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뜬다.
“아, 너 단팥빵맨 알지?”
“네, 어릴때 봤죠.”
“그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영화거든.”
“그런데 왜 악당 캐릭터만 모으세요?”
실제로 선반 위에는 동그란 검정 얼굴에 더듬이가 있는 병균맨 캐릭터가 가득했다.
가끔 그의 동료들만 뒤섞여 있을 뿐.
‘저 캐릭터 좋다는 사람은 처음 보네.’
그렇게 의아함을 느끼고 있던 때 임지문이 답했다.
“솔직하잖아. 그냥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게.”
“···맨날 사람들 괴롭히고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데도요?”
도웅이 기억을 더듬어 만화의 내용을 꺼내놓자,
임지문이 말을 대충 얼버무린다.
“···그리고 생긴 게 귀엽고.”
“···.”
오늘따라 사람이 확 특이해 보였다.
원래도 그런 면이 좀 있었지만.
“네 덕분에 수익이 생겨서 요즘은 고퀄리티만 사 모으고 있어. 나중에 돈 좀 벌어서 일대일 사이즈 사는 게 소원이야.”
임지문이 반들반들한 피규어 하나를 들어 살피며, 싱글벙글한 얼굴을 했다.
‘그래, 취향 존중이다.’
도웅은 그렇게 생각하고 임지문에게 만들고 있는 노래를 들려달라 부탁했다.
“음, 잠깐만.”
임지문이 잠자고 있던 모니터 화면을 흔들어 깨운다.
그 위에 떠 있는 작곡 프로그램.
세로선 하나를 왔다 갔다 옮기며 마스터 키보드를 두들기고,
파형 그림을 자르고 붙인다.
‘겉으로 봐선 뭘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러다 임지문이 스페이스 바를 툭 치자,
그가 만지작거리던 디지털 데이터가 음악이 되어 나온다.
‘봐도 봐도 신기한 장면이네.’
도웅은 직접 옆에 있던 기타를 연주해가며 자신의 의견을 내놨다.
“싸비 멜로디 부분에서 이런 식으로 약간 변화를 주면 어때요.”
“오, 그거 괜찮다. 잠깐만.”
임지문이 또 마우스를 몇 번 딸깍대자 수정된 소리가 흘러나온다.
“비슷한가?”
“음···. 형, 그거 뒤에 약간만 밴딩 더 해줄 수 있어요?”
“응, 되지.”
그렇게 여러 번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도웅은 남의 손을 거쳐 표현을 만들어내고 있는 데서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다.
‘저걸 내가 직접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실 작곡에 대한 욕구는 언제고 있어왔다.
다만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
‘어쩌면 지금이 도전할 시점이야.’
도웅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수가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넓히는 데 작곡만 한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도웅이 임지문에게 물었다.
“형, 작곡하려면 뭐부터 해야 해요?”
“작곡 시작하려고?”
“네, 배워보고 싶어요.”
“완전 잘 생각했어. 내가 봤을 때 너는 이미 소질이 있거든.”
그가 컴퓨터 앞에 의자를 당겨 앉고는 말했다.
“음···. 넌 기타를 쳐서 코드 진행에 대한 데이터는 어느정도 머릿속에 있을테니까, 바로 미디를 배우면 되겠다.”
그는 곧바로 도웅에게 프로그램을 기초를 알려주었다.
“나는 야매로 시작해서 이게 정답은 아닌데, 보통 작업이 하고 싶으면 멜로디를 떠올리거나 비트를 먼저 찍어.”
그는 프로그램 위에 마우스를 움직여가며 설명을 이었다.
“이걸 찍으면 킥이고 여기는 스네어, 여기는 하이햇인데···.”
도웅도 책상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생소한 화면 위에 마우스가 날아다니고, 임지문이 뭐라 설명은 해 주는데, 한 번에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임지문이 도웅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악기 명칭 같은 게 아무래도 생소하지?”
“네.”
“하다 보면 금방 아는데, 이럴 때 좋은 방법이 있어. 여기는 홍대니까.”
그가 뜬금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지갑을 뒷주머니에 꽂는다.
“무슨 방법인데요?”
“일단 밥부터 먹자. 작곡의 기초는 밥심이거든.”
도웅은 임지문 특유의 느긋한 말투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뽀얀 국물에 넉넉한 닭고기.
홍대에서 유명하다는 닭곰탕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두 남자는 홍대의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어? 왜 형네 작업실로 안 가요?”
“따라와 봐. 갈 데가 있으니까.”
도웅은 임지문을 따라 합주실 간판이 붙은 지하로 내려갔다.
두꺼운 철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부스스한 머리의 남자.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여, 인기 작곡가 왔나.”
그가 두툼한 손을 들어 임지문에게 인사했다.
“인기 작곡가는요. 형님, 아무 방이나 비는 데 있어요?”
“네가 웬일로 합주실엘 들어가려고? 요즘 통 안 오더니.”
합주실 사장이 임지문 뒤에 있는 도웅을 흘끗 살핀다.
“수강생?”
“아, 예.”
“그러면 저기 A룸에 들어가.”
인디 씬에 있는 음악가들은 수강생을 받아 부가 수입을 만드는 경우가 잦았기에 그렇게 두루뭉술 넘어갔다.
“근데 왜 기타는 안 들고 왔어.”
“오늘은 드럼 때문에 온거라서요.”
“네가 드럼을 가르친다고?”
“아휴, 제가 형님 앞에서 어떻게. 그냥 기본적인 명칭 같은 거만 알려주려는 거죠.”
도웅이 합주실 사장의 카운터 주변을 둘러보니,
그가 드럼을 치고 있는 사진들이 여럿 붙어있다.
‘원래 드럼 치는 사람인가 보네.’
그렇게 두 남자는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아담한 합주실 안으로 들어섰다.
“말로 백번 하는 것보단 한번 이렇게 보는 게 낫지. 나도 그래서 이 악기, 저 악기 야매로 많이 만져봤거든. 처음 음악 시작할 때.”
그는 드럼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빌려온 스틱으로 악기들을 톡톡 두들겼다.
“이렇게 챙챙 소리 나는 게 하이햇, 한마디에 하이햇을 몇 번 치느냐에 따라 비트가 나뉘어.”
그러고는 발을 둥둥 굴러 보였다.
동시에 사방에 쾅쾅 울리는 두꺼운 타격음.
“이게 킥이라고 부르는 거고.”
그렇게 심벌, 스네어, 탐 등등.
그는 드럼의 구성을 소개해주며 기본적인 비트 몇 가지를 시범으로 보여줬다.
심장을 울리는 듯한 드럼 비트에 도웅은 살짝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노래의 중심축을 드럼으로 만드는 거야. 너도 한번 해볼래?”
도웅은 양손에 헤드가 살짝 갈린 드럼 스틱을 손에 쥐고, 악기를 하나씩 두드려보았다.
‘드럼을 보기만 봤지 각각 소리가 이렇게 나는 줄은 몰랐네.’
임지문의 말대로 한 번씩 직접 두들겨보니 드럼 비트의 구성이 빠르게 이해됐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욕구 같은 게 본능적으로 피어올랐다.
이 악기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그런 욕구가.
그때 임지문이 말했다.
“이제 대충 알겠으면 작업실로 돌아갈까? 이어서 미디 설명해 줄게.”
“형, 저 온 김에 좀 더 배워보고 싶어요.”
“드럼을?”
“네. 드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곡을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악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는 거니까.
“그래 알겠어. 남자라면 지나칠 수 없는 곳간이긴 하지, 여기가.”
임지문은 도웅의 눈 속에 번쩍이는 욕망을 읽어내고는 피식 웃었다.
“너도 어쩔 수 없는 음악쟁이구나.”
그는 도웅의 욕심에 공감하면서,
기본적인 비트부터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드럼의 두근대는 비트 소리가 합주실 안을 가득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