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Genius's Playlist RAW novel - Chapter (90)
090. 백 번의 말보다는 한 번의 연주.
도웅과 장세호, 합주실 사장은 로비에 있는 소파에 나와 앉았다.
장세호는 차근히 오늘 공연에 대해 설명을 하는 중.
“어반홀이라는 작은 소극장에서 주최하는 공연에 저희가 제일 마지막 순서로 잡혀있는데···.”
그는 청바지에서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본인들의 자작곡을 들려주기 위해서.
“저희가 하드한 스타일은 아니라서 드럼 파트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거든요.”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지하다가,
벙거지를 푹 눌러쓴 도웅의 하관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우리 혹시 전에 본 적 있어요? 어디서 본 얼굴인데.”
“음, 아마 직접 본 적은 없을 거예요.”
도웅이 대답하자 장세호가 이내 장난스럽게 상황을 넘겼다.
“아, 그럼 운명이라서 그런가 봐요.”
“무슨···?”
“같이 공연할 운명이요.”
장세호는 생각보다 상당히 주접스러운 성격이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합주실 사장이 살짝 역정을 냈다.
“야, 너 시간 없다며!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고 노래나 들려줘 봐. 수강생이 연주하기 싫을 수도 있잖아.”
“우리 곡을요? 형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얼마나 명곡인데.”
그는 자신감을 듬뿍 담아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이내 장세호의 휴대폰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곡은···.’
그가 재생한 곡은 다행히 도웅이 알고 있는 노래였다.
인디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후렴 정도는 익숙할 그런 노래.
‘곡 진행도 익숙하고 연주도 소화할 수 있는 선이야.’
걱정보다는 오히려 이 곡을 원곡자 밴드와 함께 연주해볼 수 있다는 사실에,
도웅은 살짝 흥분이 어렸다.
그때 장세호가 도웅에게 물었다.
“어때요? 끝내주죠?”
“네, 노래 좋은데요?”
“이 곡만 잘 쳐주시면 돼요. 나머지 곡은 그냥 겉절이라고 생각하고 눈감고 치셔도 되고요.”
“이 곡만 네가 작곡한 거냐?”
“네.”
장세호가 뻔뻔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도웅에게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필인 같은 데는 정 어려우면 느낌만 줘도 되고요, 더블 킥은 그냥 원 킥으로 단순하게 바꿔서···.”
“아뇨,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도웅이 자신 있게 대답하자,
“그럴 줄 알았어요.”
장세호가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그럼 슬슬 일어날까요? 연습실에서 그래도 몇 번 맞춰보고 가야죠.”
“네.”
아직 정세호는 도웅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슬슬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겠는데.’
도웅이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앞에 있던 B룸의 문이 벌컥 열리고 합주를 끝낸 대학생들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단발머리의 여대생이 화가 많이 난 듯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하자고 한 곡을 이렇게 연습도 안 해오는 경우가 어디 있어.”
“···.”
드럼이 합주 내내 박자도 맞추지 못해서 결국 폭발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나머지 세션은 시간을 낭비한 셈이 되었으니까.
“박자도 못 맞추는 곡을 사람들 앞에 보여줄 수는 없잖아.”
“진짜 미안해. 내가 다음 주까지는···.”
“아니, 아까 얘기한 대로 그 곡은 우리 연말 공연에서 제외하도록 할게.”
리더인 여학생이 단칼에 그렇게 잘라내자,
남대생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이미 도웅에게 훈수를 둘 때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그때 리더가 사장님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사장님! 오늘 멋있으시네요. 아까 어디 가셨었어요.”
“흠흠, 아깐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리더는 사장님이 화장실 간 사이에 들어왔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아까 살짝 들었는데, 사장님 드럼도 진짜 멋있었어요.”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는 데 사장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드럼?”
“네. 아까 옆방에서 드럼 치신 거 사장님 아니에요?”
“아냐, 그거 이 수강생이 친 건데.”
사장이 벙거지를 눌러쓰고 있는 도웅을 가리켰다.
“말도 안 돼···.”
충격을 받은 남학생의 입 밖으로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무식할 정도로 기본 박자만 치던 녀석이 갑자기 어떻게···?’
도웅은 그의 표정을 읽고는 살포시 미소지었다.
“형이 말씀하신 대로 열심히 했거든요.”
“···.”
남학생은 부끄러움에 입을 꾹 다물었고,
의아함을 느낀 리더가 되물었다.
“용남이 네가 이분한테 열심히 하라고 했다고?”
“아니, 난 그냥···.”
그렇게 남학생이 자신의 입방정을 후회하며 우물쭈물하고 있던 때,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여학생 하나가 뭔가를 발견한 듯 큰 소리를 냈다.
“어?!”
그녀는 놀란 듯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곧장 도웅을 유심히 살폈다.
“왜 그래?”
“아니, 저 사람···.”
“응?”
“남도웅 아니야?”
“남도웅?”
그 얘기를 들은 멤버들의 고개가 일시에 도웅에게로 돌아갔다.
“에이, 설마···.”
듣고 보니 정말 느낌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유명인이 눈앞에 있다고 곧장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홍대 구석에 있는 지하 합주실에.
그렇게 생각한 누군가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남도웅이 여길 왜 와.”
“그래, 아마 지금쯤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라도 썰고 있겠지.”
“그리고 걔가 드럼까지 저렇게 잘 치면 그건 세상 너무 불공평하지 않냐?”
그렇게 결론이 나던 와중 멤버 하나가 배를 쓸며 말했다.
“우리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고 빨리 나가서 떡볶이나 사 먹자. 배고프다.”
“그래, 그럼 저희는 가볼게요, 사장님. 다음에 봬요!”
그렇게 학생들은 순식간에 우다다 합주실 밖으로 나갔다.
“···.”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장세호가,
고개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모자 속에 감춰진 도웅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맞네! 그래, 남도웅!”
그리고 이내 도웅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소리쳤다.
카운터에서 잔돈을 정리하던 사장은 또 장세호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콧방귀를 뀌었다.
“얌마, 너는 기운도 좋다. 온종일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 하는 데 에너지 소비하려면···.”
그때 도웅이 그늘진 모자챙을 들어 올리고는 사장에게 인사했다.
“사장님, 죄송해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맞잖아요, 형님! 우왁!”
장세호는 오두방정을 떨었고,
사장은 그런 도웅의 잘생긴 얼굴을 확인하고는 벙찐 얼굴을 했다.
“뭐야, 그럼 임지문 곡을 불렀던 그··· 아니, 그런 분이 지금 여기서 뭐 하십니까?”
정신을 차린 사장의 입에서 갑자기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하던 대로 드럼 치려고 왔죠.”
“왜 그래요, 사장님. 우리 도웅 씨 갑자기 거리감 느끼게.”
처세술에 능한 장세호는,
이미 도웅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치고 있는 채였다.
**
장세호와 함께 연습실로 향하는 길.
“도웅 씨, 근데 진짜 공연할 수 있어요? 도웅 씨가 드럼을 쳐준다는 게 안 믿겨서.”
“네. 대신 제가 이 무대에 서는 거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요. 뮤타의 무대인데 제가 방해하면 안 되잖아요.”
“오~, 배려. 좋아요. 너무 혼잡해지면 우리도 감당 안 되고.”
장세호는 연예인인 도웅이 신기하면서도,
진중한 그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든 듯했다.
“그럼 저 잠깐 소속사에 전화 좀···.”
“네, 그러세요.”
도웅은 휴대폰을 꺼내 심정남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려두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심정남은 살짝 놀라는 눈치더니, 도웅의 얘기를 듣고는 곧장 수긍했다.
-뭐, 작은 소극장에서 얼굴 감추고 연주하시는 정도라 하면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형.”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도웅 씨 연주실력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도웅은 심정남이 오겠다니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통화를 끝낸 도웅은 장세호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갔다.
**
인디 밴드 뮤타의 연습실.
밴드 멤버들은 보컬인 장세호를 빼고 저들끼리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드럼이 없다 보니 제대로 합을 맞춰보기가 쉽지 않았다.
연주에 빠지다 보면 서로 박자가 살짝씩 어긋나기도 했으니까.
“충현이 깁스에 스틱 붙여서라도 연주시켜야 하는 거 아니야?”
“야, 그 자식 이름 꺼내지도 마. 펀칭머신 최고기록에 눈이 팔려서 오늘 공연도 망친 놈인데.”
“어휴, 그놈은 언제 철들라고.”
멤버들은 오늘 공연이 약간 망했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누가 오더라도 원래 멤버처럼 곡을 소화해주는 건 무리일 테니까.
“근데 다른 사람 불러서까지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괜한 사람 데려오면 더 무대 망칠지도 모르는데.”
“야, 어반홀 마지막 타임 겨우 잡았는데 펑크내면. 앞으로 공연 길바닥에서만 할라고?”
무명의 인디 밴드는 무대에 설 기회가 적었다.
그런데 어반홀은 자체적으로 공연을 기획해서 인디 밴드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는 고마운 곳이었다.
그러니 어반홀과의 관계가 틀어져서는 절대로 안 됐다.
그때 연습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의기양양한 장세호의 모습이 보였다.
“형, 사람 구했어?”
“그래, 짜식들아, 너희 내가 누굴 모셔왔는지 아냐?”
“레몬 합주실 사장님이겠지.”
레몬 합주실은 도웅이 드럼을 연습하러 다니는 그 합주실이었다.
그때 장세호의 뒤로 훤칠한 키의 남자가 하나 들어왔다.
도웅은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드럼 대타로 온 남도웅입니다.”
“?!”
손님이 누군지 알아차린 밴드 멤버들이,
동시에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아니, 이분이 왜···.”
ET를 가리키듯 손가락을 들어 올린 멤버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얘기했다.
“이, 이분이 우리 공연에서 드럼을 친다고?”
**
끼긱, 끼긱.
도웅이 하이햇 높이를 제 키에 맞게 세팅하는 동안,
기타와 베이스를 멘 멤버 둘이서 수군거렸다.
‘야, 세호 형 인맥 무슨 일이냐?’
‘그것보다는 형 노망난 것 같은데? 저 친구를 드럼을 치게 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쓰읍···. 쟤를 얼굴 간판으로 세워서 공연 때우겠다는 거면 나도 반댄데.’
그들이 아는 도웅은 아이돌에 가까운 것이라,
당연히 그를 드럼 대타로 데려온 이 상황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언더에서 고달프게 구르는 그들의 가슴속에,
대중 가수에 대한 약간의 반발심이 박혀있기도 했고.
기타 세션이 자포자기한 상태로 얘기했다.
‘난 다 됐으니까 제발 박자만 잘 맞춰줬으면 좋겠다.’
‘아이 씨, 난 정 별로면 그냥 오늘 공연하지 말자고 할 거야.’
도웅은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의 노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유심히 드럼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형, 이제 한번 쳐볼까요?”
“벌써 준비됐어요?”
“네.”
도웅은 멤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래서 백 번의 말보다는 한 번의 연주로 보여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멤버들은 찝찝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잡았고,
장세호가 스탠딩 마이크에 무게를 실어 소리쳤다.
“자, 가보자!”
도입부에 일렉 기타가 날렵한 효과음을 흘리고,
챙, 챙, 챙, 챙.
곧바로 155 BPM에 맞춘 힘찬 드럼 소리가 귓가를 쨍쨍 울렸다.
그에 맞아들어가는 기타 소리와,
둥둥대며 저음을 받쳐주는 베이스.
멜로디를 집어넣고 있는 신디까지.
드럼의 박자를 중심으로 소리들이 듣기 좋게 모여들었다.
세션들은 바삐 손을 움직이면서도 놀란 눈을 했다.
‘정확히 155 BPM에 맞춰서 연주하고 있어?’
도웅의 리듬감과 쫀득한 연주실력은 들을수록 놀라운 것이었다.
점점 흥이 차오른 멤버들은 도웅이 리드하는 박자 속에서 맘 편히 제 기량을 뽐내기 시작했다.
드럼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고 있는 장세호는,
그런 멤버들의 반응을 확인하며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봤냐, 리더의 위대함을. 이 몸이 아무나 데려올 사람이 아니라고.’
연주가 끝나고 난 뒤,
“도웅 씨, 혹시···.”
아까 도웅에게 의구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던 기타리스트가 입을 뗐다.
“혹시 우리 팀에 새로운 멤버로 들어올 생각 없어요?”
“그래, 이참에 철없는 우리 충현이 갖다 버리고~!”
“하하, 그런데 도웅 씨 몸값이 너무 비싸지 않으려나?”
그렇게 멤버들은 오늘 공연을 무사히 해낼 수 있겠다는 기쁨에 다들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아직 저녁 어스름인 바깥과는 상반되게 암흑 속 조명이 빛나고 있는 소극장 안.
도웅은 뮤타 멤버들과 함께 짐을 풀러 조그마한 대기실로 향했다.
모든 팀이 함께 쓰는 간이 짐 보관소 같은 느낌이 나는 곳에, 먼저 와있던 어느 밴드 멤버들이 손을 흔들었다.
“야, 니네 드럼 펑크 났다면서. 오늘 공연하겠냐?”
“대타 구했으니까 신경 끄쇼.”
뭔가 분위기를 보니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한 듯했다.
상대 팀의 멤버 하나가 벙거지를 푹 눌러쓴 도웅을 흘끗 훑더니 코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데려왔는지 딱 보니까 초짜고만.’
“니네 자신 없으면 순서 우리랑 바꿀래?”
“피날레 순서를 누구랑 바꿔.”
“아니, 마지막 무대 망칠 거 같으면 그냥 묻어가는 게 낫지.”
“풋. 꿈 깨셔.”
신경을 건드리는 상대 밴드의 말에,
장세호는 여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가 피날레 멋있게 장식할 거니까.”
신뢰를 가득 실은 그의 한쪽 팔은,
도웅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