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solini Carries World War II?! RAW novel - Chapter (268)
무솔리니가 캐리하는 2차대전?! 268화(268/270)
수도: 에든버러
면적: 77,933km
인구: 6,231,021 명
민족 구성: 스코틀랜드인 (86%)
인구 밀도: 79.9명/km
공용어: 영어, 스코트어
명목 GDP: 2504억 달러
1인당 GDP: 40,197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A2
(외전) 피자위키 – 높은 성의 사나이
1960년 12월 27일
미합중국 뉴욕 맨해튼
월 스트리트의 신사, 워런 버핏은 콜라를 마시며 그날의 장 상황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도 백만장자에 투자회사 회장인 그는 어디로 놀러 가거나 그냥 회사 사무실에 앉아서 보고만 받아도 될 위치였지만, 그에게 이러한 직무유기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았다.
시장은 언제든지 자신을 배신할 수 있지만, 노력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투자와 경영에도 끝없는 근면함이 필요했다. 자금력을 믿고 방만한 자는 파산하며, 반대로 시장을 맹신하지 않고 정보를 긁어 모으는 자는 승승장구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정의일 터.
버핏은 딱히 그의 가정부처럼 서민들을 깔보지는 않았으나, 부가 나뉘어지는 자본주의의 섭리는 불공평하지 않다고 느꼈다. 이는 월 스트리트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생각이었다.
물론, 버핏은 그 중에서도 재분배에 반대하지 않는 입장이라 일반적인 투자자와는 다르게 고액소득자 증세에 찬성했다. 이것은 그와 다른 투자자들을 차별하는 점, 그리고 그가 벌써부터 고향에서만큼은 큰 명성을 얻게 한 점일 테다.
이토록 젊은 나이에 냉철한 현자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도 요즘 취미는 있었으니, 바로 소설을 읽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TV에 그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는 자극적인 오락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자신은 일만 하는 노예처럼 살고 싶지 않았으므로 책은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 중에서도 흥미를 갖게 되는 분야는 바로 ‘대체 역사’.
경제 관련 서적이나 소설이야 이제 워낙 많이 읽어서 자신보다 잘 아는 책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였고, 순수 문학은 이미 하늘 높은 곳을 날고 있는 그에게는 별 공감이 되질 않는 내용이 많았다.
그에 반해 대체 역사는 사람의 흥미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점점 사회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본인이 지금 하는 이 행동이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이 역사에서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어느새 서점 앞에까지 와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유가 있을 때 책이나 한 권 읽어 볼까?
그는 하루에 500페이지는 읽어야 지식을 쌓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책은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었다. 충분히 단련된 그에게 장편 소설 하나를 뚝딱 하는 일은 별것도 아닐 테다.
그런 그의 눈앞에 서점의 판매대 한 쪽을 가득 메운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매대에 모여들에서 소설을 가져갔기 때문에, 직원은 바로 옆에서 소설을 채워 넣느라 애를 쓰는 중이었다.
“높은 성의 사나이라….”
높은 성의 사나이.
필립 K. 딕 이라는 소설가가 한 달 전에 출판한 소설로, 이 소설은 출판된지 고작 몇 주만에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었다. 버핏 또한 당연히 이 책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았다.
“안 그래도 최근에 좀 바빠서 못 읽어 봤는데. 이 참에 한 번 볼까?”
아주 마이너한 장르인 대체역사가 한 달 만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이것이 일어났다면, 그만큼 저 소설이 수작이라는 소리일 터. 여론은 ‘대체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매대로 가서 ‘높은 성의 사나이’ 한 권을 집어든 후 계산을 하고 나왔다.
책을 들고 벤치에 앉은 그는 종이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흐음…..음?”
“…………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
“작가 놈이 미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워렌 버핏은 작가의 창의성(?) 에 온갖 욕을 하게 되었다. 허나 그 반응과는 별개로,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길은 더욱 빨라졌다. 실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훌륭한 소설의 자질이라 할 수 있었다.
소설이 그려낸 끔찍한 역사, 그리고 그 역사의 나비효과에 빠져든 버핏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주식장이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이, 이런! 오늘 안에 매도를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었는데…..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이 명작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해!”
월스트리트 신사에게는 드물게도 버핏은 손해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높은 성의 사나이 (The Man in the High Castle)
1. 개요
1960년에 발표된 필립 K. 딕의 장편 대체역사소설. 이 소설은 만약 제 2차 세계대전을 추축국이었던 나치 독일, 소비에트 연방, 그리고 일본 제국이 승리했다면? 이라는 가정을 두고, 일본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 그리고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미국이 나치즘, 전체주의, 공산주의에 지배당하는 일상, 그리고 전후 추축 삼국의 냉전 관계를 그리고 있다.
출판 직후인 1960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듬해인 1961년 휴고 과학소설상 최고상을 수상한다. 2011년에는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2. 배경
소설은 1925년에 일어난 이탈리아 반무솔리니파의 2차 로마 진군 성공에서 시작된다. 원 역사에서는 무솔리니가 계략으로 반대파를 일거에 숙청한 것에 가까웠지만, 여기서는 이들이 쿠데타에 성공하여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도주하고 반동주의자들이 이탈리아의 정권을 잡는다.
여기서 시작된 역사의 개변은 추축국이 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해 역사가 흘러, 1950년대부터 시작된 온전이 추축국에게는 더욱 냉혹한 냉전으로 나타났다는 가정을 바탕 하에 그 전제주의 치하 민중의 삶을 조명하고 이를 비판한다.
2.1 전쟁 전
2.1.1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개혁에 결사반대하는 남부 이탈리아의 대지주, 토호, 전 상원의원이었던 루이지 베를루스코니는 무솔리니를 쫒아내고, 국왕을 협박하여 스스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대연정에 참여했던 정당 중, 우익과 중도는 눈치를 보다가 베를루스코니에게 합류했으며 나머지 정당은 크게 힘을 잃는다.
이에 베를루스코니는 일본 제국보다 약간 온건한 정도인 (각주: 나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건하다 나온다) 독재정을 수립하고 국외에서는 무솔리니, 국내에서는 그람시가 주축이 되어 이에 저항한다.
그러나 이는 역부족이었고 베를루스코니의 반동 정책은 무솔리니의 개혁에 따라 생동하던 국가를 정체시키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잠시 동안 일본을 추월하고 프랑스에 근접했던 이탈리아의 경제력은 세계 7위까지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러자 베를루스코니는 이 모든 것이 식민지 해방 때문이라 선전하며 리비아를 재공격하여 손쉽게 점령하고, 옛 동아프리카 식민지, 그리고 나아가 에티오피아를 노린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도움으로 빠른 근대화를 달성하던 에티오피아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고 이탈리아는 수십만의 인명 피해 끝에 에티오피아를 점령한다. 이 출혈 때문에, 이탈리아는 그동안 구축했던 국가들 간의 네트워크, 독립 보장을 모두 폐기하고 강력한 중립을 선택한다.
2.2 전쟁 중
2.2.1 나치 독일
이탈리아의 제한이 사라진 상태에서 독일의 폭주는 막을 수 없었다. 독일은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의 묵인 하에 손쉽게 오스트리아, 체코를 합병하고 끝내 폴란드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이때만큼은 영국과 프랑스도 참전하나,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설득에도 끝내 참전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와 프랑스를 고작 1년 만에 무너뜨리고 대륙 전역을 석권한다. 이후 그들은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에게 선전포고하고 리비아에 상륙하여 중동 전역을 장악한다. 결국 1943년, 독일이 유럽 전역을 정복하고 미국을 침공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유대인 대부분이 나치의 절멸 정책에 사망하였다.
2.2.2 이탈리아
중립을 고수했던 이탈리아였지만 그들은 전쟁 시작 당시에 피해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또한 무기 체계 역시 후진적이라, 돌격소총을 제외하면 프랑스에 비해 낫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를 간파한 히틀러는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프스를 넘은 공격을 감행한다.
이탈리아는 세계의 예상과는 달리 8주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사실 이미 베를루스코니가 무솔리니의 군사적 유산을 까먹고, 프랑스가 적에게 넘어간 시점에서 이탈리아는 희망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적이 로마에 당도하자 베를루스코니 정권은 시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항복한다.
독일은 부유한 이탈리아 북부를 직접 점령하고, 남부에 괴뢰국인 양시칠리아 공화국을 세운다. 본래 공화국의 총리는 일찍이 항복한 베를루스코니를 세울 예정이었지만 그가 그람시의 게릴라들에게 맞아 죽었기 때문에 총리 자리에는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오른다.
2.2.3 영국 및 기타 유럽 국가들
프랑스, 폴란드가 항복한 이후 영국은 홀로 남아 악전고투를 벌인다. 그러나 이탈리아마저 기습 침공으로 멸망하고 스페인 (각주: 이탈리아가 공화파 스페인을 위해 개입하지 않아 국민파가 승리했다.) 이 참전하여 지브롤터는 함락, 중동의 식민지가 하나씩 넘어가기 시작하자 에드워드 8세가 친위 쿠데타로 정부를 전복시키고 항복한다.
항복 이후 영국은 스코틀랜드, 웨일스를 독립, 북아일랜드를 해방시키고 콘월에 독일 주둔군을 허용하며, 독일에게 필요한 자원과 병력을 지원하는 속국이 되었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대부분 독일에 점령당하거나 협력한다.
2.2.4 소련
독일과 동맹을 맺은 소련은 독일이 서유럽을 장악하는 동안 걱정 없이 핀란드와 루마니아, 터키를 공격한다. 서로 협력이 없던 이들 국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합지졸에 불과한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중과부적으로 항복한다.
소련은 기세를 이어 덴마크를 제외한 스칸디나비아 전체를 적화시키고, 발칸 반도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만 여기서부터 독일의 견제로 소련은 터키 전역과 이란 북부, 인도 북부, 루마니아 북부에 만족해야 했다. (각주: 영국은 패전과 함께 식민지를 대부분 할양한다.)
2.2.4 일본
이탈리아의 지원이 없는 중국을 1942년 즈음에 제압하고 미국의 개입을 걱정하지 않으며 편하게 남방 작전을 시행한다. 그리고 진주만에서 미 태평양함대를 영국 동양함대와 함께하여 제압한 뒤 미국 동부에 상륙한다.
2.2.5 미국
전략적 우호국들이 너무 빠르게 무너지자 크게 당황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오히려 이 책임을 지고 재선에 실패했으며, 이탈리아와 비슷한 강경한 고립주의로 돌아선다, 그러나 미 해군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소련의 연합 해군을 당해낼 수 없었고 끝내 상륙을 허용한다.
그제서야 루즈벨트가 복귀한 미국은 엄청난 산업력을 과시하며 상륙한 추축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만, 육군이 준비가 전혀 안 되었기 때문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독일군에게 패배한다. 이후 동남부 해안은 독일, 서남부 해안은 일본, 캐나다와 북부는 소련이 분할 점령한다.
2.3 전후
2.3.1 나치 독일
전후 세계의 최강대국이 된 독일은 강력한 인종주의 정책으로 라틴인, 발칸인 대다수를 노예로 만들고 학대하고 있다. 또한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 집시는 거의 씨가 말랐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그리스는 독일에 거의 완전히 종속된 국가가 되어 있으며 나머지 유럽은 독일이 완전 점령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들 또한 대부분 독일의 것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유럽보다 심한 인종주의 정책이 행해진다.
독일은 핵무기, 강력한 로켓 기술, 압도적인 과학력을 가진 최고의 열강이다. 그러나 그 안에 내재된 사회적 불만 (각주: 종교마저 금지되었다.) 과 경제적 모순이 심각한 수준이라 무력과 군사력으로 버티는 중.
2.3.2 일본
모든 면에서 미국에 살짝 뒤지는 2류 열강으로 나온다. 동방에서의 패권을 위해 소련과 한 차례 전쟁을 벌였다. (각주: 핵개발 전)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약간의 우세를 점했으나 (각주: 내정에 집중한 일본의 기술력이 꽤나 발전하여 정체된 소련을 추월한 뒤였다.) 소련의 물량 공세, 그리고 시베리아의 끔찍한 보급 때문에 승리할 수 없었다. 반대로 인명 피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던 소련 역시 평화를 원해 양국은 영향권을 설정하고 서로에게 개입하지 않기로 한다. 독일은 양국이 약해지기를 바래 전쟁을 방관했다.
이후 일본은 이 전쟁의 피해로 독일을 따라잡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2.3.3 소련
3대 열강 중에 상황이 가장 좋지 않다. 독일과 일본의 통제로 약소국이 아니면 공산주의 사상이 침투할 곳이 마땅치 않고 사회적 문제를 분출할 대전쟁이 없어 모든 면에서 정체되었다. 결국 빠르게 쇠퇴하는 상황. 하지만 거대한 육군 병력만큼은 독일에 준하는 것으로 나온다.
2.3.4 미 자유국
소련, 일본, 독일의 점령지 중간 쯤에 있는 황무지이자, 세계 자유 투사들의 본거지. 대부분의 국가는 추축국의 영향력에 있기 때문에 완충지대에 가까운 이들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자유주의자, 독립군, 유대인 등의 안식처가 되었다.
다만 제대로 된 정부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연합이 형성되어 추축국 현상금 사냥꾼이나 군대의 습격으로부터 일대를 방어하는 중. 무솔리니가 이곳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각주: 실제로 작중에 한 인물이 여기로 가서 자유 투사에 가입하고 무솔리니를 만나는 내용이 나온다.)
(외전) 피자위키 – 제 3의 길
1970년 1월 4일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서기장 동지, 영국 대사관이 다시 입국을 요청해 왔습니다. 바로 허가해 줄까요?”
“우리가 처음이오?”
“그건 아니고….. 캐나다와 호주 바로 다음입니다.”
“병신같은 놈들. 꼴도 보기 싫으니 한 몇 달 미뤄 버리게.”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외무부 장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할 수 없었다. 왜 난데없이 핵을 숨기려 해서 이 사단을 낸단 말인가? 그런 식으로 타국의 뒤통수를 칠거라면, 한 1만발 쯤은 숨겨 놨다가 들켰을 때 당장 세계를 날려 버리겠다고 협박해야 효과라도 있지 않겠는가.
혼자서 섬뜩한 생각을 한 안드로포프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섬나라 놈들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 자들이었으나, 그래도 소련과 이해 관계가 가장 일치하면서 체급이 맞는 국가이기도 했다.
제 3의 길.
소련이 밀고 있는 일종의 캐치프레이즈였다. 역설적으로 소련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 전쟁에서 발생한 사상자의 숫자는 원 역사의 20% 수준도 되질 않았다. 물론 이것만 해도 엄청난 숫자이긴 했으나 어쨌든 소련은 국력을 크게 소모하진 않은 셈이다.
그 결과, 이 거대한 나라는 오히려 원 역사보다 좋은 잠재력을 갖게 되었다. 이미 주도권을 잃은 이상, 다시 소련이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서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사정은 4개로 갈라진 독일보다 훨씬 나았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미국과 이탈리아, 어느 질서에도 속하지 않기를 원하는 나라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들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하긴 하겠으나, 미국과 이탈리아가 소비에트 연방을 영 꺼리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러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를 숙였을 때 그 세력 내에서 소련이 2인자의 자리라도 잡을 수 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과연 소련이, 프랑스-알제리 연방, 혹은 무섭게 성장하는 중화민국이나 바라트, 대한민국을 누를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정체된 소련의 경제로는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독자 노선이 답이었다. 그것만이 반쯤 범죄 국가로 낙인 찍힌 소련이 국제 사회에 설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다.
문제는, 비슷한 위치에 서 있던 잉글랜드가 소련보다 심한 왕따 국가가 되었다는 점. 이러면 소련은 다시 약소국들을 일일이 설득하는 지루한 과정에 들어가야 했다.
“……내무부 장관! 당 대표들을 소집하시오!”
썩 보고 싶은 얼굴들은 아니지만, 독단은 화를 불러올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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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의 길
1. 개요
소비에트 연방이 주장한, 미국과 이탈리아의 온전에 휘말리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걸을 수 있는 세력. 역사적으로 이 노선을 선택한 국가로는 소련, 잉글랜드, 네덜란드, 멕시코,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꽤 많은 국가들 등이 있다.
2. 배경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소비에트 연방은 그 이름은 유지했으나 완전히 민주화되어 전과는 다른 나라가 되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에 생겨난 수많은 정치 세력들은 그 입장을 크게 달리했지만 한 가지 공감하는 점이 있었으니, 바로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소련은 역설적으로 전쟁에서 패했음에도 영토 상실과 정부 교체, 군축 이외에는 비교적 힘을 잘 비축한 상태였고, 국내적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이 힘을 해외로 투사할 수단이 필요했다. (각주: 끝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전례를 생각했을 때 소련 혁명당 당수 레프 트로츠키와 보수당 당수 안톤 데니킨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받았다.)
소련의 정치인들은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해외에서 소련의 동맹을 구하고 경제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라 여겼으며, 소련의 다양한 정치 세력은 공통적으로 이 정책만큼은 실현시키려 노력했다.
3. 목록
3.1 소비에트 연방
제 3의 길의 지도자격 국가. 많은 빈국, 개발도상국에 경제적 원조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길 원했으며 이탈리아와 미국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소련은 현재 그리 높지 않은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힘이 있는 국가이다.
다만 정치 세력별로 영향력을 전파하는 방식은 달랐다. 보수당 집권기에는 주로 정교회 국가에게, 혁명당 집권기에는 주로 산업화 중인 개발도상국, 민주당 집권기에는 같은 민주주의 국가, 민주공산당(각주: 부하린이 창시한 중도좌파 정당) 집권기에는 좌익이 집권한 국가, 공산당 집권기에는 권위적인 국가에 접근하는 경향이 강했다.
3.2 잉글랜드 왕국
당시 브리튼 연합왕국. 잉글랜드는 이탈리아와 미국 중간에 있는 위치로서 연합국으로 참전했지만, 중간에 내전으로 이탈할 뻔하고 이탈리아와 해전을 벌인 전적 때문에 연합국 내에서는 국력 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의 보수당 정부는 이념의 차이와 국가적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소련과의 동맹을 추진한다.
이후 이어진 두 나라의 파트너십은 북해-발트 무역로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길 수 있도록 하였으며 소련은 영국에게 풍부한 자원과 값싼 노동력을, 영국은 소련에게 기술과 산업집약적 물품을 제공하였다. 또한 영국의 폭넓은 세계적 영향력은 제 3의 길이 빠르게 확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969년, 브리튼 핵위기로 인해 연합왕국이 해체되고 영국이 세계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소련은 잉글랜드를 버리기에 이른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날 때까지 잉글랜드가 어떠한 세력에 가입하는 일은 없었다.
당시 사건의 적대감이 많이 사라진 지금, 잉글랜드는 다양한 국가와 협력을 추진하며 예전의 3의 길 맹주로서 정체성을 잃은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잉글랜드의 이런 박쥐같은 행보를 농담 삼아 ‘제 4의 길’ 이라 칭하기도 한다.
3.3 서북인민공화국
소련과 함께 세계에서 매우 드문 공산주의가 성행하는 국가. 소련의 자유주의 세력이 적어도 국가 여론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과는 다르게, 서북인민공화국은 아직도 마부팡주의, 혹은 저우언라이주의라 칭하는 중국식 사회주의가 대다수이다. (각주: 다만 민주화는 되어 있다. 공산당이 대부분의 선거에서 과반을 얻을 뿐이다.)
국가 형성부터 소련과 밀접한 관계이던 서북인민공화국은 서북 혁명 전쟁 (각주: 서북이 자신을 제외한 중국의 모든 국가들의 반동맹에게 공격을 당한 전쟁) 이후 더욱 소련과 관계를 강화시키게 되었다.
지금도 서북인민공화국은 소련과 가장 가까운 국가이며 서북인민공화국이 경제적으로 큰 성장을 이룬 현재 믿음직스러운 동맹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3.4 이집트
제 2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집트는 본래 이탈리아의 영향력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나, 아랍 연방 왕국이 중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자 또다른 지역강국인 이들은 아랍연방을 경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중해 안쪽에 있고 미국과 사이가 좋은 이스라엘과 적대적이었던 이집트는 이탈리아에게 지원을 받는 아랍 연방에 대항할 다른 동맹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나세르 대통령의 집권기에 이집트는 소련과 우호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아직까지 중동 패권의 경쟁자로 남아 있다.
3.5 멕시코
반미 감정이 강력한 멕시코 공화국은 항상 미국에 맞설 동맹 국가를 원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국경이 맞닿은 멕시코까지 끌어들여 미국의 분노를 살 생각까지는 없었으므로 이들에게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
멕시코는 러시아만큼이나 잦은 혁명을 겪은 국가였기 때문에, 이에 따라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멕시코가 아니더라도 쿠바,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 반미 감정이 강한 남미의 상당수 국가들은 아직 소련의 영향력이 강한 편이다.
3.6 에티오피아 제국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즉위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1982년에 사망하고, 황태자인 암하 셀라시에가 잠시 소련과 가까워진 적이 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전체의 패권을 원했고, 팽창주의적인 암하 셀라시에의 성향은 이탈리아-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영향력과 남아프리카 공화국-미국의 남아프리카 영향력을 묵인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암하 셀레시에의 부황인 하일레 셀라시에가 워낙 고령이었고, 이에 따라 역시 고령이었던 암하 셀라시에가 1990년에 사망하여 에티오피아의 친소련 정책은 빠르게 끝났다.
3.7 루마니아
추축국의 편에 섰다가 패전한 국가. 주변 국가들(헝가리, 불가리아 등)이 대부분 친이탈리아 국가였고, 이 국가들에게 영토를 강탈당했으며, 전쟁의 후유증으로 외교 관계를 제대로 수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주: 미국 역시 루마니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전 국가적으로 보복주의가 들끓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루마니아에게 접근한 것이 소련으로, 루마니아는 가까운 소련의 도움을 받아 경제 개발을 진행하였으며 몰도바와의 통일 또한 소련의 지지로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최근에는 루마니아와 이탈리아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몰도바는 역으로 독립을 주장하며 양국의 관계에 금이 가고 있는 상황이다.
3.8 튀르키예
역시 추축국의 소속으로 패전을 당한 터키는 루마니아처럼 빠르게 전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무조건 항복을 했기 때문에 훨씬 가혹한 조건에 따라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스타파 케말이 성립한 기존 터키 공화국에서 아나톨리아 서부, 서남부 해안과 발칸 반도 영토는 그리스에게 할양, 동남부는 쿠르디스탄으로 독립, 동북부 중 동쪽은 아르메니아에게 할양, 서쪽은 라즈-폰토스 공화국으로 독립, 남부 해안은 키프로스에게 할양하였으며 튀르키예에게 남은 것은 북부 해안 일부와 중부 뿐이었다.
(각주: 키프로스 공화국은 본래 남부 해안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으나, 연합국이 이를 제안하자 덜컥 수락하였다.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쓰길 원하지 않아 했던 남부 아나톨리아 튀르크인, 그리고 키프로스 터키인 역시 이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이 지역의 그리스인, 터키인은 키프로스인이라는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역시 무너진 튀르키예에 손을 내민 것은 소련 뿐이었으며 터키는 소련의 지원으로 남부와 북부의 일부 영토를 되찾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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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Republic of Turkie)
건국: 1923년 10월 29일
수도: 앙카라
면적: 397,872km
인구: 50,114,824 명
민족 구성: 튀르크인 (95%)
인구 밀도: 125.9명/km
공용어: 터키어
명목 GDP: 2850억 달러
1인당 GDP: 5,687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B3
(외전) 피자위키 – 일본 내전
1965년 6월 9일
일본국 교토
“…….신주의 평화는 이를 바라는 천황 폐하와 신민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렬에 이르고야 만 것입니다. 지난번부터, 정부는 동쪽 괴뢰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해 왔습니다만, 그들은 지금까지의 주장을 일발도 양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보를 강요할 뿐입니다. 이러한 폭거는 용납될 수 없으며 반드시 우리의 분노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노회한 일본국 전 총리대신, 기시 노부스케의 열정적인 연설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만일 일본이 저 반역자들의 요구에 굴복한다면, 우리의 권위는 실추되고 일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없을뿐더러, 결국에는 신주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합니다.”
일본국 육상 ‘자위대’ 총사령관 무타구치 렌야는 감명을 받은 듯한 사람들 사이에서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 뜯었다. 늘그막에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자신은 그냥 인생을 날로 먹고 싶었을 뿐인데.
“일본의 운명, 아시아의 운명이 그야말로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으니, 우리 1억 국민들은 온 몸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며 명예롭게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그러한 정신을 버리지 않는 한, 희대의 명장 렌야 장군과 천황 폐하는 우리를 반드시 승리의 길만으로 이끌 것입니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
군중은 숫제 눈물까지 흘리며 만세를 외치고 부복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렌야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이 앞설 뿐이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고, 또 반으로 갈라졌다는 사실은 렌야에게는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인생은 그 뒤로도 잘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가 초공작전과 이어진 산서-서북의 포위전에서 무참히 패한 점은 그가 제안했던 대륙타통작전을 시행하기 위해 감춰졌었다. 말하자면 정치적 이유로 본인의 용렬함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신민들은 초공작전을 ‘군벌의 뒤통수로 인한 비운의 패배’ 정도로 기억했다.
대륙타통작전의 경우, 공세가 서서히 돈좌되기는 했으나 일단 작전의 초반은 대성공이었고 결판이 나기도 전에 미군이 천황을 사로잡으며 전쟁이 끝나 버렸다.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작전이 계속되었다면 아마 일본군은 계림 즈음에서 주저앉고 광서군, 중화민국군, 미군 사이에 압착 프레스를 당해 소멸했겠지.
이렇게 되었으니 일본 국민들이 렌야를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군국주의를 잊지 못한 성향의 국민들은 그를 중국을 응징하려 노구교를 넘은 열사, 산서에서 비운의 패배를 당한 장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국을 멸망시킬 뻔한 명장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 렌야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전범 재판에서 처형당하거나 전장에서 죽어 숫자가 극히 적었으므로 이제는 꺼릴 것도 없었다. 그는 열심히 프로파간다를 돌리며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는 아주 성공적이어서, 렌야는 일본국(서일본) 육상자위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안락한 일상을 영위했다. 원래부터 철면피였으니 부담감 없이 인기를 즐기던 그는, 7년 정도 전에 퇴임하여 노후를 즐기던 참이었다. 한 조각의 양심조차 저버리니, 누릴 수 있는 명예와 쾌락이 무한하여 70대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몸은 쌩쌩했다.
정작 이 사실은 그에게 큰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나날이 악화되어만 가는 두 일본의 관계. 끝내 호전적인 일본국의 유사 민주주의 내각은 일본 공화국 (동일본)에 대한 기습 침공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단 전쟁만 생각했지 별다른 계획이 없던 정부는 일본 현대사 최고의 명장 무타구치 렌야를 다시 현직으로 복귀시킨 것이었다.
77세면 현역으로 돌아오기에는 무리인 나이였지만, 워낙 렌야가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공식 석상에서 왕성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렌야는 관광지에서 자주 만날 수 있고 만나면 인자하게 싸인을 전부 해주기로 유명했다.) 이는 변명이 될 수 없었다. 또 전쟁 당시 74세였던 프랑스의 막심 베이강 원수 역시 무리 없이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던가?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던 렌야는 결국 군복을 다시 꺼내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입을 털었는데 여기서 발을 뺐다가는 미친 놈들에게 칼빵을 맞을 수도 있으니.
물론 렌야 역시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상황이 대륙타통작전 당시처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두 일본의 국력은 거의 같았으니, 기습의 이점을 가진 일본국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무참하게 패배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저자들이 바라는 것처럼 총체적인 승리와 일본 통일은 솔직히 불가능할 것 같아서 문제였다.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결국 그의 생각은 이 수준으로 회귀했다. 뭐 어쩌겠는가. 방도가 없는데. 이번에도 적당히 부하들에게 떠맡기면서 전쟁을 끝낼 핑계거리를 찾아야지.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렌야 본인에게도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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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전
날짜: 1965년 6월 13일 ~ 1966년 5월 12일
장소: 일본 중부 (미에현, 시가현, 후쿠이현, 기후현, 교토)
교전국: 일본국(서일본) vs 일본 공화국(동일본), 유엔 평화유지군
병력: 일본국 자위대 – 약 30만 명, 일본 공화국 자위대 – 약 25만 명, 평화유지군 – 약 10만 명
피해: 일본국 – 군인 약 10만 명, 민간인 약 33만 명, 공업 기반 80% 이상 소실
일본 공화국 – 군인 약 8만 명, 민간인 약 50만 명, 공업 기반과 국부 절반 소실
1. 개요
일본 내전은 동일본과 서일본이 무력 통일에 대한 여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1965년부터 1년간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도중에 공격을 받은 동일본을 돕기 위해 유엔군이 파병되었으며 전쟁의 결과로 현재의 국경선이 확립되었다.
2. 배경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서일본과 동일본은 전쟁에 대한 대가로 분단되게 되었다. 이 때 분단된 양국의 성향은 판이하게 달라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훗날 갈등의 씨앗이 된다.
서일본, 즉, 일본국의 경우, 전 일본 제국 해군과 육군의 근거지, 혹은 옛 조슈 번과 사츠마 번이 있던 곳으로, 폐번치현 이후 이러한 영향력은 많이 줄어들었으나 군의 인사 대부분이 이쪽 출신인 것도 사실이라 서일본은 시작부터 군국주의적 인사를 많이 포함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에 책임이 있던 쇼와 덴노 역시 분노한 도쿄의 시민들을 피해 서일본으로 왔고, 국제 사회의 방관 아래에서 서일본은 군국주의, 친 쇼와 세력이 득세하였다.
쇼와 덴노는 본래 항복을 결정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군국주의 세력에게도 인기가 없어야 정상일 것이나, 덴노의 형제들이 전부 평화주의자였으므로 이들에게 선택지는 쇼와 덴노 뿐이었다. 군국주의자들의 선전에 따라 서일본에서 덴노는 신민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린 비운의 사내로 포장된다.
본래 해군과 육군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부는 초기에 엄청난 갈등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는 해소된다. 새로 창설된 자위대의 규모가 워낙 작아, 갈등을 유발하지는 않았고 또 전쟁 당시의 앙금이 잊혀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서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단일한 세력을 형성, 서일본에서 사실상 독재를 펼친다.
동일본의 경우, 군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서일본으로 도망치자 손쉽게 민선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에는 옛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겪었던 인사들이 도움이 되었다.
천황과 군인들이 아무런 책임을지지 않고 서일본으로 도망가 떵떵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본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에 동일본 정부와 국민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전범 히로히토를 폐위하고 일종의 대립 천황으로서 다키히토 친왕을 옹립한다.
이후, 약 20년 동안 동일본과 서일본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비방의 역사였다. 동일본은 서일본을 군국주의 미치광이들이라 비난하였으며, 서일본은 동일본을 나약한 배신자들이라 공격했다.
온전의 양상 역시 양국의 갈등을 악화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민주정을 도입한 동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저항이 있었으나, 미국은 서일본을 지원하게 된다. 이미 사우디아라비아를 지원한 전력이 있던 미국도 큰 거부감은 없었던 것이다.
다만, 국민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갈등을 체감하지 못하였다. 동일본과 서일본 간에는 군사적 긴장에도 잦은 교류가 이어졌으며 민간인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오갔다.
3. 발단
전쟁의 기운은 1964년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미에현은 본래 서일본의 근본이 되는 간사이 지방의 일부였는데, 이에 따라 서일본의 영토여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미에현은 바로 동쪽에 있는 나고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동일본이 실효 지배를 하고 있었다.
이를 트집잡은 서일본 정부는, 미에현에 정당한 지배를 되돌리고 나아가 일본을 통일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군국주의의 몇 안 되는 장점은, 강력한 군사적 전통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서일본의 군대는 동일본의 군대보다 사기, 규모 모두 높다고 평가되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서일본 자위대 전 총사령관 무타구치 렌야의 존재였다.
지금은 그 실상이 밝혀진 지 오래이지만, 렌야는 당시 일본 전역에서 중국을 재패할 뻔한 명장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렌야가 사석에서 한 발언 (각주: ‘동일본의 오합지졸은 우리에게 상대가 안 된다.’) 은 서일본 정부에게 용기를 주었다.
서일본 정부는 퇴임한 무타구치 렌야를 총사령관직에 복귀시키는 동시에, 동일본을 연이어 비난하면서 찬전 여론을 끌어 올린다. 그러다가 1975년 6월 13일, 잠시 평화의 제스처를 통해 동일본을 방심시킨 서일본 자위대는 미에현 국경을 넘으면서 동일본을 침공한다.
4. 전개
전쟁에 참여한 양국의 병력은 그리 크지 않은 수준이었다. 일본 자위대는 타국을 공격할 수 없도록 군비를 제한받았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10만 이하의 병력을 가져야 했으며, 유엔의 감시를 받았다. 유엔의 감시를 피해 서일본이 준비할 수 있는 병력은 대략 20만 정도였으며 이를 가로막은 서일본의 군대는 10만에 불과했다. 이는 영국 내전, 중동 전쟁보다 규모가 적은 것이었다.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의 호언장담처럼, 서일본군은 동일본을 손쉽게 유린했다. 병력이 매우 부족한 동일본은 기갑 장비까지 준비한 서일본을 막을 수 없었으며 순식간에 기후현 전체가 점령되기에 이른다. 이에 렌야는 3주 내로 도쿄를 점령하고 적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 선언했다.
전쟁을 국경 분쟁 정도로 보고 있던 동일본 정부는 서일본군이 기후현과 주부 지방의 경계를 넘어오자 기겁을 하고는 동원령을 선포했다. 적지 않은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서일본 기갑부대는 빠르게 충원되는 동일본 징집병의 결사적인 저항에 추가 공세가 돈좌되었다.
이때 렌야가 한 말이 걸작인데, 그는 기후현을 점령했으니 재보급과 휴식을 거쳐야 한다는 군단장의 말에, ‘보급은 적에게서 취하면 된다.’ 라는 명언을 날렸다. 이에 따라 무리한 공세를 벌인 서일본 기갑군단은 큰 피해를 입었다.
양군은 곧 주부와 기후현의 경계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본 중부 고원 지대를 빼앗고 탈환하는 피의 고지전이 이어진다.
5. 절정
또한, 상황을 지켜보던 유엔군이 개입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상임이사국인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하며 결의안의 통과를 방해했으나, 가입국 80% 이상이 찬성하면 이를 무시하고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곧 이탈리아군을 주축으로 한 10만여 명 규모의 유엔군이 미에현 해안에 상륙하였다. 해안 평야를 위주로 한 얇고 빈약한 보급 능력에 의존하고 있던 서일본군은 너무 깊숙이 들어간 탓에 그대로 포위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사기가 크게 하락한 서일본군은 나기소마치 전투에서 참패하여 기후로 쫒겨났으며, 후방의 동일본군과 측면의 유엔군의 습격을 받으며 긴 후퇴를 감행해야 했다. 이 피로 얼룩진 후퇴에서 렌야 장군은 음주가무를 즐기며 놀았다고 하여 큰 비난을 들었다.
다시 본래의 국경선까지 후퇴한 서일본 잔존군은 총동원령을 내린 본국 징집병들과 합류하여 나라와 교토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민주 정부-다국적군이라는 한계 때문에 동원력에 제한이 있던 동일본은 이들의 결사적인 방어를 쉽게 뚫지 못하였고, 전선은 교착 상태로 빠진다.
이 교착을 뚫기 위해 유엔군은 교토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는데, 이때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5. 결과
결국 폭격을 견디지 못한 서일본은 조건부 항복안을 제시하였으며 동일본이 이를 받아들인다. 협정의 결과에 따라 미에현은 확실히 동일본에 귀속되었고, 서일본의 지도자급 인사들은 다시 전범 재판에 기소된다.
양국은 자위대의 10만 병력 제한을 보다 확실히 감시받을 수 있게 유엔에서 정기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게 되었다.
히로히토 덴노는 스스로 퇴위하였고 가장 큰 전범이라 할 수 있는 무타구치 렌야는 종전 이후 1년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죄를 받지 않았다. 서일본에는 동일본과 같은 민주 정부가 수립되고 평화주의자인 헤이세이 덴노가 즉위한다.
군사적 개입은 차마 하지 않았으나 꾸준히 서일본을 지원한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그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다. 학자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가 깨지고 미국과 이탈리아가 비로소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평한다.
후방에서 동일본의 군수 물자 생산과 (각주: 양국은 일본의 오랜 식민지로서 상당한 산업 시설이 남아 있는 국가였다.) 유엔군의 보급을 담당했던 대한민국, 타이완은 엄청난 경제적 특수를 입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일부 우익 국민들은 아직도 대한민국과 타이완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현대 일본국과 일본 공화국에는 모두 평화주의자 덴노가 재위 중이며, 정치권 역시 다른 국가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민주화 되었다. 또한 양국은 평화적인 통일을 위한 논의를 1990년부터 진행해 왔으며 언젠가는 통일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다만 일본국에 아직도 존재하는 군국주의 극우 세력은 통일을 방해하는 위험 요소 중 하나라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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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Japan)
건국: 1940년 2월 29일
수도: 교토 (각주: 실질적 경제수도는 오사카)
면적: 116,207km
인구: 40,232,718 명
민족 구성: 일본인 (99%)
인구 밀도: 346.2명/km
공용어: 일본어
명목 GDP: 1조 2946억 달러
1인당 GDP: 32,178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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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화국 (Republic of Japan)
건국: 1940년 2월 15일
수도: 도쿄
면적: 248,836km
인구: 74,884,103 명
민족 구성: 일본인 (98%)
인구 밀도: 312.9명/km
공용어: 일본어
명목 GDP: 2조 9016억 달러
1인당 GDP: 37,256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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