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solini Carries World War II?! RAW novel - Chapter (269)
무솔리니가 캐리하는 2차대전?! 269화(269/270)
타이완 (Republic of Taiwan)
건국: 1947년 3월 19일
수도: 타이베이
면적: 35.218km
인구: 21,716,382 명
민족 구성: 한족 (95%), 대만 원주민 (4%)
인구 밀도: 616.6명/km
공용어: 중국어, 객가어, 대만 제어, 대만어
명목 GDP: 9073억 달러
1인당 GDP: 41,782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A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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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공화국 (Republic of Ryukyu)
건국: 1945년 8월 3일
수도: 나하
면적: 3,493km
인구: 1,787,932 명
민족 구성: 류큐인 (79%), 일본인 (17%)
인구 밀도: 511.8명/km
공용어: 류큐어, 아마미어, 일본어
명목 GDP: 1158억 달러
1인당 GDP: 64,791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Aa2
(외전) 여행 (1)
1960년 6월 18일
대한민국 인천
우웅-
뱃고동 소리를 내며 한 척의 거대한 배가 인천 부둣가에 들어왔다.
“아우, 여긴 정말 좆같이도 덥군요.”
“원래 그런 곳이오. 아니, 앞으로 더 더워질 것이니, 그 되도 않는 긴팔 좀 벗어 던지시게.”
배에는 무솔리니와 그의 따까리들(?) 이 타고 있었다.
지금쯤 총리로서 마지막 직무를 수행하고 있을 조반니 메세를 제외하고,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부 아래에서 그를 수행했던 이들은 이번 여행에 대부분 그를 따라왔다.
아랫사람들은 비명을 지를 거대한 규모의 행사가 되겠지만, 그래도 다들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모두가 젊을 때 방문하는 국가에 유흥거리를 준다는 명목으로라도 다 같이 한 번 가 봐야지.
우리가 가장 먼저 방문하게 될 국가는 대한민국이었다.
유럽 국가들이야 워낙에 내가 쏘다녔으니 굳이 갈 필요가 없고, 결국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같은 곳을 다녀야 했는데, 그 중에서 대한민국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매번 전투가 벌어지고 어쩌면 견제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중국 (실제로는 중화연방공화국), 그리고 그 역사 때문에 사람들이 투자하길 꺼리는 일본 공화국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은 나름 체급도 있고 이탈리아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국가 중 하나라서 극동의 이탈리아 요새로 여겨졌다.
아직 대한민국은 후진국 내지는 개발도상국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지원을 받아 조금씩 발전한다면 동방에서 이탈리아의 가장 든든한 동맹국이 될 것이다. 어지간해서 뒤통수 맞을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 나라가 그렇게 이탈리아를 좋아한다던데, 그 이유가 뭡니까? 두체? 사실 우리가 도와준 나라는 대한민국 말고도 차고 넘치도록 많습니다만.”
“가장 큰 도움을 받은 나라는 대한민국이 분명하지. 우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대한독립군은 한 개 대대도 편성하기 버거웠을 거요. 그리고 저들은 제 이웃들과는 좀 다르게 은혜를 쉽게 잊지 않는다고 하더군. 물론, 그만큼 원한도 쉽게 잊지 않소.”
정확히는 나의 경험에 의해 알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 사람들의 절반은 쪽바리들이 새겨준 원한을 잊지 못해서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위협은 제쳐 두고 일본을 패기에 바빴고, 나머지 절반은 천조국의 은혜를 잊지 못해 천조국과 그 부하인 일본의 똥꼬를 헐도록 빨아 줬다. 두려워라.
“저기 부두가 보이는군요. 어……….”
배멀미에 고통받던 그람시가 지평선을 보고는 기쁘게 외쳤다. 그러나 그는 직후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연설을 할 때보다 많아 보이는 거대한 인파가, 휜 물결을 이루어 인천 부둣가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대충 적녹백으로 염색한 이탈리아 국기(물론 중앙의 왕실 문장은 없었다.)가 들려 있어 하얀 도화지 위에 녹색과 붉은색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거 봐. 이 나라는 항상 예상을 뛰어 넘는다니까?
*****
“대한민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두체.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 조봉암이라 합니다. 길이 너무 막혀서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요.”
“하하, 괜찮습니다, 대통령 각하. 오히려 이러한 환대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정작 환대를 받은 나의 일행들은 전혀 괜찮은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는 길이 온통 그 인파로 가득 차 있었고, 내가 차 지붕을 열고 일일이 손을 흔들어 주면서 왔으니 오죽했을까.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조봉암이었다.
임시 정부 주석 김구 선생은 종전 이후 바로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장장 12년 동안 대통령을 해드셨다고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제한 없는 4년 연임제였다.)
뭐, 내가 파시즘에 대해 논할 때 인기가 있고 능력이 충분한 지도자라면 장기 집권도 가능하다 했으니 (내가 그것의 산 예시였고) 할 말은 없지만, 이건 좀……
그래도 김구는 딱히 반대파를 탄압하거나 하지 않고 중도 우익으로서 모든 파벌을 포용하는 모범적 파시스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아래에서 한국의 정당들은 무럭무럭 성장해 갔다. 심지어 박헌영의 공산당마저 무력 투쟁 노선을 버렸다나.
그리고 슬슬 독재에 대한 우려가 나올 때쯤, 그는 퇴임해 버렸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또한 그는 퇴임하기 직전에 개헌으로 2선 연임 제한을 걸어 버렸으니 훌륭한 사다리 걷어차기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 다음 대통령은 여운형. 여운형 대통령 역시 김구와 같은 모범적인 파시스트였다. 성향은 중도 좌파였지만. 그 또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8년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아니, 좀 지나치게 잘했다. 본디 투사 기질에 반대파를 족치는 것에 특화되어 있던 김구 선생은 정책에 본인이 나서는 일 없이 아랫사람들에게 맡겼지만, 여운형 선생은 내정에도 관심이 많아 적극적으로 많은 일들을 벌였다고 한다.
이게 꽤 잘 먹힌 모양이다. 김구 시절에 대한민국은 빠르게 발전했지만 여운형 시절에는 더 빠르게 발전했고, 이에 따라 그의 정당이었던 조선 파시즘 노동당 (이름이 어질어질 하지만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아마 헌법에 제한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충분히 3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퇴임하자 그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조봉암은 대통령직을 날로 먹었다. 그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이승만, 이동휘, 김규식, 조소앙 같은 분들은 이미 은퇴한 이후였으므로 그를 상대할 사람은 없었다.
“뭐….. 그럼 바로 나가서 연설을 하면 되겠습니까?”
“먼 길을 오셨는데, 여독을 푸실 필요는 없고요? 부족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최고급 호텔을 두체를 위해 예약해 두었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저를 기다리는 시민들이 밖에 저렇게 많은데 내버려 둘 수는 없지요.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작 내 옆에 있던 수행원들과 일행들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내가 이렇게 멀쩡한데 젊은 것들이 말이야. 에잉 쯧쯧.
지체 없이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연단에 올라선 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서울 거리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대부분 휜 옷을 입은 인파가 가득 메우고 있긴 하다만, 교과서에서 본 1960년대 서울 모습보다는 더 발전되고 깨끗해 보이고….. 내전도 없이 무난하게 왔으니 당연한 일이려나?
내가 딱히 한국에 대단한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고 가능하면 잘 되었으면 했다. 그리고 지금 첫 단추를 잘 풀은 한국이 걸어가야 할 길은 이탈리아의 따뜻한 엉덩이 뒤에 숨는 일. 괜히 어줍짢은 중립을 지키다가는 망하는 수가 있다.
이를 생각한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마이크에 첫 마디를 내뱉었다.
“아뇽하쉽니까? 태한민쿠긔 씨민 녀러분? 이딸리아의 전 두쩨, 무쏠리니 임니다.”
“??????????”
조봉암을 포함해서 군중의 얼굴이 잠깐 의문에 빠졌다가 경악으로 물드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국뽕의 민족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려면 그 사람이 한국말 하는 것 만큼 직빵인 것이 없지.
*****
1960년 6월 28일
인도 델리
“대체 한국어는 어디서 배운 것입니까?”
“은퇴하고 나서 공부 좀 했지. 내가 언어에는 또 자신이 있지 않나. 좀 어려운 부분은 외우면 되고 말이야. 연설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 못할 것도 없지.”
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람시는 의문을 풀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긴, 연설 말고도 감격한 대한민국의 고관들과 짧은 한국어 대화를 나눈 것을 보면 이상할 만도 하지.
빙의한 나는 무솔리니의 기억, 능력, 습관을 파편화된 채로 이어받았으나 (언어나 연설 능력같은 정말 중요한 것들은 그대로 쓸 수 있었다.) 전생의 기억도 멀쩡히 남아 있었다. 따라서 내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그걸 쓰는 사람의 입이 이탈리아인 무솔리니의 입이라 발음이 끔찍하긴 했지만. 그나마 가끔 혼자 있을 때 한국어, 그리고 원래 아주 약간 알고 있던 중국어와 일본어를 연습해놔서 다행이다. 중국이랑 일본에 가서도 써먹어야지.
원래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활동을 하기 전부터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에밀리아로마냐어 등 총 5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능력자였다. (원 역사에도 그가 영어, 독어로 연설하는 영상이 남아 있다.) 이걸로 정치를 하기 전에는 선생 노릇을 하기도 했고. 그런 그가 한국어를 미숙하게라도 배웠다면 크게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내가 돼지국밥과 설렁탕을 맛있게 쳐먹는 모습을 보고 대한민국 사람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나. 사실 이탈리아에도 이것들과 비슷한 음식이 있기 때문에 이 행동조차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내 일행들도 김치만 빼면 잘만 먹었다.
나는 그람시의 눈빛을 무시하고 초대받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오…..”
“인도에 온 것을 환영하오, 두체. 꼭 보고 싶었던 얼굴이로군.”
“아닙니다, 저 또한 영광입니다.”
내 눈앞에는 전설적인 사내, 마하트마 간디가 서 있었다.
간디는 91세의 나이로 거동이 불편한 모습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아직 형형히 살아 있었다. 과연 다이아몬드를 주지 않으면 유혈 사태를 일으킬 만해 보이는군.
“일단 앉으시오, 할 이야기가 많으니.”
*****
“그것이 보스와 네루의 목표요. 인도가 선진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악습과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을 모두 털어 버려야 하오.”
“그럼….. 고문께서도 이 정책에 동의하신 것이십니까? 저는 고문께서 독실한 힌두교도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나에게는 힌두교보다 인도가 더욱 중요하오, 두체. 인도가 번영할 때에, 힌두교 또한 함께 번영할 수 있을 것이오. 인도가 시궁창에 쳐박혀 있다면, 힌두는 그저 바라트의 민족 종교로 남을 뿐이고, 인도가 날아 오르면 비로소 사람들이 힌두를 새로이 바라보게 되겠지. 옛 동남아에도 힌두교가 번성하던 시절, 그 시절이 다시 올 것이오.”
간디는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1941년에 이루어진 인도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지금까지 정부 고문으로서 대민 활동, 정치 세력 간의 조율을 관장하며 인도의 초석을 다져 놓고 있었다.
대신에 그와 함께한 독립운동의 남은 두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와 찬드라 보스가 번갈아가며 총리를 하고 있었는데, 간디의 승인 하에 이들이 꿈꾸는 이상은 꽤나 숭고한 것이었다.
“나름 큰 성과를 보았소. 적어도 대도시 지역에서는, 이제 카스트의 분별이 유명무실한 칭호 정도로 남게 되었지. 그것을 보면서 가슴 한 켠이 아리기도 하지만, 발전해가는 델리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소.”
인도의 완전한 세속화. 네루와 보스는 원 역사에서도 아주 세속적인 인물이었고, 실제로 인도가 세속화되기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네루를 시조로 하는 인도 국민 회의는 이에 따라 세속주의를 모토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상은 실패했다. 거진 50년을 대부분 집권했던 인도 국민회의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인도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카스트와 힌두 근본주의의 폐해를 씻을 수 없었다.
끝내 인도 국민 회의는 극우 힌두 근본주의 정당인 인도 인민당에게 정권을 내주고 일본 민주당같은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인도는 내가 기억하는 한 인도 인민당 아래에서 꾸준히 후진 기어를 밟고 있었다.
여기에는 간디의 성향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간디는 힌두 근본주의자는 아니었고 젊은 시절에는 서구화에 동참한 신사로서 힌두 교리를 마구 어겼지만, 독실한 힌두교도이기는 했다. 그는 카스트에 일단 찬성은 했고, 카스트를 타파하기보다는 카스트 하층 계급에게 더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자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그는 힌두 근본주의자들의 위협을 당했고, 끝내 암살당했으니 인도 힌두교의 폐해를 알 만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고쳐서 부분적으로 보스와 네루의 개혁에 동의한 모양이다.
확실히 이렇게 시작부터 건국의 아버지들이 강하게 밀어붙이고, 또 인도 사회가 힌두 일변도가 아닌 다른 종교도 많이 있으니 (현재 인도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까지 통합된 상태이므로, 이슬람교가 꽤 많았다.) 역으로 세속화에는 용이할 터.
그러나 나는 그들의 숭고한 꿈이 완전히 성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도의 ‘전통’ 혹은 악습은 그만큼 뿌리 뽑기 힘든 것이었다. 지금 인도 국민 회의가 아타튀르크처럼 탄압 수준의 세속화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완고한 인도 힌두교도들은 집으로, 지하로 숨어들고 자신의 전통을 유지하리라.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이 땅이 원 역사보다는 낫기를 기원하는 것 뿐이었다.
*****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
건국: 1940년 12월 15일
수도: 서울 (행정 기관 다수 평양 위치)
면적: 224,395km
인구: 81,372,397 명
민족 구성: 한민족 (98%) (각주: 원 역사 조선족 중 상당수 동화)
인구 밀도: 362.6명/km
공용어: 한국어 (각주: 제1외국어 이탈리아어, 제2외국어 영어)
명목 GDP: 3조 4022억 달러
1인당 GDP: 41,811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A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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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트 민주 공화국 (Democratic Republic of India)
건국: 1941년 3월 7일
수도: 뉴델리
면적: 4,261,818km
인구: 1,817,441,306 명
민족 구성: 공화국 헌법에 따라 측정하지 않음 (펀자브인, 벵골인, 힌두스탄인, 타밀인, 파슈툰인, 신드인, 구자라트인, 카슈미르인 등)
인구 밀도: 426.4명/km
공용어: 힌디어, 우르두어, 벵골어, 영어
명목 GDP: 5조 2033억 달러
1인당 GDP: 2,863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Baa1
(외전) 여행 (2)
1960년 12월 29일
에티오피아 제국 모가디슈
“허어…………..”
“대단하군요.”
우리가 인도 다음으로 예정한 도착지, 에티오피아 제국의 모가디슈에는 배에 탄 일행들이 일견 감탄할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이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가디슈는 지부티와 함께 제국 최대의 항구입니다. 따라서 물동량이 꽤나 많은 편에 속하지요. 뭐,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나름 우리 제국의 발전을 상징한다 하여 다들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허허.”
“아닙니다. 아주 훌륭하군요. 제가 지금껏 봐온 대부분의 나라보다 나을 정도입니다.”
모가디슈는 인도는 물론, 어쩌면 인천보다도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우리의 도움으로 40년 전부터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에티오피아의 영토로서 당연한 일이겠으나, 원래 내 머릿속에 박힌 아프리카와 모가디슈(소말리아) 의 모습을 생각하면 괄목할 성과였다.
“황제 폐하께서 여러분들을 위한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아디스아바바로 가시지요.”
*****
1961년 1월 5일
에티오피아 제국 아디스아바바
“이렇게까지 해주시다니,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수도의 광경을 잘 둘러보도록 하게. 전부 그대의 도움으로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니. 그대는 늘 겸손하지만, 에티오피아인들은 모든 민족, 종교를 통틀어 그대에게 감사하고 있네.”
우리는 에티오피아에 와서 시민들의 환대, 황실 근위대의 사열, 에티오피아 종교 지도자, 사회 지도자들과의 접견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저 사람들이 좋아서 준비한 거니 대충 할 수도 없고 말이야. 그래도 성탄절 주간과 겹쳐, 엄청나게 화려한 볼거리들이 많이 나와서 눈은 즐거웠다.
그 후 황제와의 접견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황제는 일행을 전부 만난 뒤에는 경호원이랑 내 일행, 자기 수행원까지 전부 내치고 나와 독대하기를 원했다. 수행원들 말로는 자기 자식이나 손자들에게만 행하는 호사라나.
“통치에 있어서 어려움은 없으십니까?”
“있지. 있고말고. 좀 잠잠할 때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오로모랑 소말리 놈들 관리하는 것도 힘들고, 종교 지도자란 놈들이 제 밥그릇 지키겠다고 허구한날 싸우는 것도 귀찮고. 자네도 알지 않는가. 종교 지도자들이 싸우면 그 아래의 무지한 백성들은 더 격렬하게 싸운다는 말일세.”
“그렇지요.”
에티오피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이 오래된 제국은 옛날부터 봉건적이고 자치적인 성향이 강했다. 옛 악숨 제국 시절이라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신민들이 분열된 것이다.
일단 에티오피아의 모든 민족은 언어(쿠시어파), 문화적 유사성을 띄고 있긴 하다. 이건 원 역사의 에티오피아-소말리아-에리트레아 관계에서도 그랬다. 종교적으로도 에티오피아의 모든 종교는 아브라함 계통 종교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는 암하라인, 오로모인, 티그라이인, 소말리인 등 다양한 민족이 어느 하나도 압도적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로 공존하고 있다. 또 종교 또한 테와히도 정교회와 수니 이슬람이 거의 반반으로 대립하는 중이다. 심지어 이 두 종교 사이에는 절대 동화가 힘들 베타 유대교와 가톨릭, 개신교도 일부 존재하였다.
이 모든 것은 본래 에티오피아 고원에 국한되었던 (그래서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같은 지역 국가에 불과했던) 솔로몬 왕조가 오로모 사막을 근세에 정복하고, 또 우리 이탈리아에게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 대가로 에티오피아는 일약 아프리카의 맹주로 우뚝 섰지만 그에 따르는 진통은 제국이 감수해야 할 것이겠지. 황제도 꽤나 골치가 아플 것이다.
“그래도, 자네의 조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느꼈네. 선대 황제들은 위대한 분들이시지만, 한 부분에서는 잘못되었어. 포용과 관용은 제국의 무기일세. 우리가 저 가나안의 적그리스도들, 그리고 메카의 거짓 선지자들과 다른 점이지.”
“그, 다 좋은데 타 국가를 비방하시는 것은 좀…..”
“아, 미안하네.”
다만 희망적인 점은 에티오피아가 이러한 분열에 있어서 최대한 관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본래 테와히도 정교회를 국교로 삼았던 제국은 국교 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모스크 건립 같은 제한사항을 전부 풀어 주었다. 또 공직에 암하라인 뿐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도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 당장 황제와 총리 다음 서열인 부총리가 오로모인이었다.
이것만 해도 에티오피아 내부의 분리주의는 그저 작은 불만 정도로 사그라들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사는 것이 독립 국가의 빈민으로 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짐은 가끔 가다가 생각한다네. 자네가, 이탈리아가 없었으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지. 자네에게 미안하지만, 아도와의 승리는 우리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그 승리가 반드시 있었을 두 번째 대전쟁의 종전까지 유효했을 것이냐 하면 의문이 드네.”
“폐하의 지도력이라면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허허, 참, 사람 하고는.”
실제로는 나보다 4살이 적고, 이제 69세의 노인이 된 황제는 걱정이 매우 많아 보였다. 믿을 만한 사람을 많이 찾을 수 있던 나와는 다르게, 그는 모든 짐을 홀로 짊어져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원 역사에서는 그의 걱정처럼,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 몇 년간 점령당하고, 신민들이 학살당하며, 또 수십 년이 지난 뒤에는 공산주의 쿠데타로 본인은 죽고 신민들은 또 고통받지만. 게다가 황제 치하에서도 신민들은 딱히 번영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유일하게 열강을 이긴 아프리카 나라라는 타이틀이 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없는 역사이고, 이곳에는 한층 강해진 에티오피아만이 남았다. 그들의 단단한 결속은 내가, 황제가 없어도 1972년의 대기근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제국의 불안을 걱정하기 전에, 신민들의 단결을 돌아보십시오, 폐하. 황제의 권위보다, 국가의 군사력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황실이 이를 망각하지 않는다면, 에티오피아의 번영은 영원할 것입니다.”
“주님께 빌건대, 부디 그러했으면 좋겠군.”
*****
1961년 1월 9일
에티오피아 하라르
아마도 마지막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와의 접견을 마치고, 성탄절 축일 행사까지 관광한 뒤 우리가 온 것은 에티오피아의 하라르였다.
동아프리카의 무슬림들에게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에 이어 4번째 성지로 여겨지는 이곳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답게 고풍스러운 멋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의 광경은 에티오피아의 일반적인 그것과는 다르게 무슬림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마치 모로코나 알제리에 온 듯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지에는 이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인 고층 건물이 자리했다.
“아프리카 연합이라…….”
원 역사에서 2002년이 되어서야 아프리카 연합이 설립된 것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에티오피아의 주도로 2차대전 후 갓 독립한 국가들이 가입하며 1950년대에 빠르게 결성되었다.
당연히 그에 걸맞게 연합의 의장국은 에티오피아였고, 의장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맡고 있었지만, 이건 형식적인 자리에 가까웠다. 황제도 바쁘니 아프리카 연합의 일에 신경쓰지 않았고 실질적 의장인 부의장은 아프리카 연합 내 국가들에서 번걸아가며 뽑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연합을 이끌어 가는 데에 어려움은 없습니까? 부의장님?”
“하하, 유엔과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의 도움 때문에 할 만 하지요. 확실히 군사력이 있으니 뭘 하고 싶으면 그대로 되는 것이 좋긴 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또 하나의 예상치 못했던 역사적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인권운동 투사, 젊은 기수 정치인, 그리고 차기 대통령으로 거론되는 아프리카 연합의 부의장, 넬슨 만델라가 눈앞에 있던 것이다.
원 역사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19세기 말부터 존재했고 1948년에 본격화된다. 넬슨 만델라는 이런 차별에 반발해 1944년부터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벌이다 수감된 것이었고.
그러나 이 지구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빠르게 소멸되었다. 이탈리아의 식민지 해방 선언으로 흑인들은 원 역사보다 큰 권리의식을 더 빠르게 얻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 알제리, 리비아, 에티오피아 같은 국가들은 실제로 흑인 중심 국가로서 빠른 근대화와 국력 증진을 이루었다.
이들이 다른 흑인 국가들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의 국제 지위와 관련된 일이었으니.
아무 것도 없지만 차라리 흑인이 중심이 되기라도 했던 다른 갓 독립한 아프리카 나라와 달리, 가장 백인의 권력이 강한 나라에 꽤 발전되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주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남아공 내의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이 알려지고, 넬슨 만델라가 수감되자 이들에 대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성토는 극에 달했다.
에티오피아 제국 해군은 희망봉 앞에서 군사 훈련을 했고,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등의 지원을 받은 모잠비크, 나미비아, 보츠와나 등은 당장이라도 남아공을 침공할 것처럼 위협했다. 이탈리아의 주도로 이루어진 전 세계적인 경제 제제는 덤이었다.
다급해진 남아공은 미국, 영국 등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미국 또한 온전에도 불구하고 제제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인구의 20% 가량이 흑인이었으니. 같은 영연방의 맹주인 영국도 여기서 남아공을 돕지 않을 만한 눈치 정도는 있었다.
끝내 남아공의 경제가 바닥을 뚫고 내려가면서 현임 남아공 정부에 반하는 진보적 백인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오자, 남아공의 백인 정부는 붕괴되었다. 흑인 대통령이 집권했고 감옥에 있던 넬슨 만델라는 풀려나 아프리카 연합 부의장이 되었다.
“이미 콩고와 르완다에서의 분쟁은 대부분 진압되었습니다. 현지에서는 오지로 숨어든 군벌들을 토벌하는 일만 남았으며, 우리는 해당 국가에 민선 정부와 기반시설 건설 지원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앞으로 하시는 길에 행운만이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그가 부의장으로 있는 아프리카 연합은 확실히 원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지구에서도 아프리카에 분쟁과 가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가 모든 나라를 케어해줄 수는 없으니. 그러나 내전과 같이 지나친 피가 흐를 것 같으면 제압하는 것은 유엔 평화유지군의 힘으로 가능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이미 핵확산 금지조약으로 인해 원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갖춘 상태였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수백명 씩 찔끔찔금 파병하는게 아니라, 정말 일국의 군대보다 강한 수십만 병력을 부린다는 소리.
이 정도면 원래 유엔, 혹은 미군이 겪던 문제인 부족한 인력으로 현지 게릴라에 고통받는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냥 초토화 작전으로 다 쓸어버리면 되니까. 물론 현지 반발이 컸지만 대신에 평화유지군은 반발심을 키우는 다국적군이 아닌 현지인을 고용, 훈련해서 사용했다. (그만큼 여유를 부릴 능력이 있었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서 우리가 아는 만큼의 학살과 전쟁이 벌어지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럴 기미가 보이면 몇 만 씩 우르르 몰려가서 지도상에서 지워 버렸으니.
그런 이후에는 역시 유엔 소속의 엄청난 투자금이 무너져가는 나라의 교육과 의료, 교통을 되살렸다. 평화유지군처럼 돈이 많으니 이것도 가능했다. 유엔은 비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현지 정부가 아닌 현지의 협력기구를 별도로 선정했는데,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의 유엔 협력은 아프리카 연합이 관장했다.
젊은 만델라의 환한 미소를 보면서,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바꾼 역사가 이렇게 긍정적인 변화를 이룬 것을 볼 때면, 항상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았으면 좋겠네.
*****
에티오피아 제국 (Empire of Ethiopia)
건국: 1943년 11월 21일
수도: 아디스아바바
면적: 2,020,357km
인구: 162,255,374 명
민족 구성: 오로모인 (29%), 암하라인(25%), 소말리인(19%), 티그라이인(8%), 아파르인(3%), 베타 이스라엘(1%)
인구 밀도: 80.3명/km
공용어: 암하라어, 오로모어, 소말리어, 티그라이어, 아파르어
명목 GDP: 2조 575억 달러
1인당 GDP: 12,681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A2
(외전) 피자위키 – 유고슬라비아 분할
1977년 5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베오그라드
“국왕 폐하, 아군이 크로아티아 민병대에게 대패하여 세르비아 영내로 밀려났다고 합니다. 자그레브를 점령하려면 이보다 더 큰 지원이 필요합니다.”
“빌어먹을! 총리는 뭘 하고 있는가!”
‘그 총리야 당신이 이미 식물인간 상태로 만들었지 않은가.’
국왕 페타르 2세를 상대하는 국방부 장관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걱정은 끊일 줄을 몰랐다. 그의 선왕들이 이루어낸 대유고슬라비아가 자신의 대에 와서 모래성처럼 바스라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중기갑사단을 투입하여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동시에 제압하는 것은 어떤가?”
“이미 아시겠지만, 중기갑사단에는 크로아티아인과 마케도니아인이 많이 있습니다. 이미 사단은 해체되어 경기갑사단과 통합시킨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설령 병력이 있다 한들, 지금 저희가 국제 사회에 이번 일을 내부 분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기갑사단을 동원했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 그럼 슬로베니아인들에게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은? 그들은 항상 왕국에 비교적 충성하는 이들이었네.”
“슬로베니아는 강경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민병대를 결성하여 크로아티아 민병대와 왕국군 할 것 없이 몰아내는 것을 보면, 다른 나라들이 독립할 때 같이 편승할 것으로 보입니다.”
“으으으….! 그럼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의 분열을 책동하는 것은 어떤가? 본토 크로아티아인과 달마티아인은 생각이 많이 다르다고들 하네.”
“그건 사실입니다만, 그들은 우리를 몰아내겠다는 공통적인 목표에는 동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깨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잘못되었을까?
쓸데없이 총리의 권한을 정지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았을 때? 아니면 이탈리아가 전쟁이 끝나고 조금씩 자신들을 멀리하기 시작했을 때? 그도 아니라면 그들이 처음 이탈리아의 손을 잡았을 때?
아니, 아니지. 유고슬라비아가 이탈리아가 아닌 다른 국가의 손을 잡았다면 분명히 더 빠르게 패망했을 것이다. 이 왕국은 그 영토와 인구에 걸맞지 않은 누더기였으므로. 이탈리아는 그들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왕국은 그 기대를 배신했다.
아무래도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유고슬라비아 왕국 자체에 있을 것이다. 선대의 왕들이 대세르비아를 위해 주변국들을 침공하고, 굴복시킬 때부터 모든 것은 잘못되었다. 그 과정에서 약자에게 우호적이었던 여론은 조금씩, 아무도 모르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
“왕국이 분열하고 있으니, 나 또한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못하도다!!”
*****
유고슬라비아 분할
1. 개요
유고슬라비아 분할, 혹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1977년 중반기부터 1977년 말까지, 갖가지 민족 갈등으로 분열되어가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운명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다. 이 사건의 결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여러 개의 자치 공화국, 그리고 본국인 세르비아 왕국으로 해체되었으며 이 자치 국가들은 이후 다른 국가에 합류할지, 독립할지를 선택하게 된다.
2. 배경
본래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이루는 남슬라브인들은 언어학적으로는 강력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개중에도 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보스니아인은 하나의 민족이라 해도 될 정도로 유사성이 강력했다. 이는 다른 다민족 국가들, 예를 들어 에티오피아나 커먼웰스의 예에 비하면 매우 좋은 조건에 속하였다.
그러나 그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갈등은 동시대 어떤 국가보다 극심했다. 이는 다른 요소가 아닌 종교적 차이에 가장 크게 기인한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주류인 세르비아는 정교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카톨릭, 보스니아와 코소보는 이슬람을 믿었으며, 개신교회 신자도 왕국 내에 적지 않았다. 이 분열은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각축 때부터 형성된 유서 깊은 것으로, 이미 왕국의 사회 내부에 뿌리 깊게 박힌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슬라브주의 아래에서 통제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적어도 언어는 같으므로) 왕국의 안일한 대처는 문제를 악화시켰다.
3. 전개
1918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결성 이후, 세르비아 왕실과 정부는 민족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다른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악화시켰다.
또한 본래 이탈리아의 일리리아 합병 야망을 막기 위해 유고슬라비아로의 합병에 동의했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자치 사회는 이탈리아가 불과 몇 년 만에 식민지를 해방, 또 자다르를 반환하는 등 전향적 모습을 보이자 유고슬라비아로의 통합 필요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세르비아 외 지역에서 자치권 요구, 그리고 세르비아가 이를 강력 탄압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2차대전 도중에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추축국에 가담하며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본래 발칸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군대를 지니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이 반란에 전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며 그저 속 빈 강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았다.
이미 크로아티아 병사들의 반란으로 군 전력 3분의 1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병사 등이 파업을 벌이자 세르비아군은 무참히 밀려났고 이탈리아군이 달려올 때까지 수도에서 항전을 벌여야 했다.
그렇게 크로아티아를 진압하고 재건된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크로아티아 반란에 동참한 인사들을 출신 가릴 것 없이 전부 숙청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이때 크로아티아에게 패배하거나 항복한 세르비아인 장군들은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아, 다른 민족의 분노를 샀다.
이탈리아는 동맹 왕국의 실수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유고슬라비아에 조언, 요구를 했는데 유고슬라비아는 대부분 받아들이는 척만 하였다. (각주: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집권기부터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체질 개선을 위해 힘썼다. 당장 자다르 반환의 조건부터가 타 민족 권리 보장이었다.)
이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이탈리아의 요구를 받아들여 설립한, 그러나 완전히 무시한 각 자치령과 자치 의회들은 오히려 왕국의 분열을 가속화하는 무기가 되었다.
전쟁 이후에도 유고슬라비아 중앙 정부의 분리주의에 대한 대처는 일관적이라, 평소에는 무시하고 대규모 소요사태가 터지면 군대로 진압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에 이탈리아는 계속해서 유고슬라비아에 시정을 요구하며 중앙 정부로 가는 지원을 줄였지만 유고슬라비아는 듣지 않았다.
결국 분노한 이탈리아 정부는 역으로 분리주의 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는 역으로 세르비아인 일색인 중앙 정부가 미합중국의 지원에 기대게 만들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유고슬라비아를 흔들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크로아티아 해방운동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끝내 1977년 2월 12일, 84세인 고령의 티토가 세르비아 영내에서 체포 및 즉결처형 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각주: 티토는 이탈리아의 권고에 따라 무장 투쟁을 하지 않았다. 즉, 세르비아인들은 평화적 시민운동가를 재판도 없이 살해한 셈이다.) 왕국 내의 분노가 폭발했다.
1977년 2월 15일, 크로아티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했으며, 2월 22일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이, 2월 28일에는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3월 11일에는 보이보디나-바나트 자치령이, 3월 28일에는 코소보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했다.
슬로베니아와 몬테네그로는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으나, 이들 또한 민병대를 결성해 세르비아인들을 영내에서 쫒아냈다. 이는 사실상 독립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변화에 경악한 세르비아 정부 역시 혼란에 빠졌다. 본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동시대의 많은 입헌군주국 중에서도 국왕의 권위와 권력이 강한 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국왕이 총리에게 책임을 물고 의회를 해산하자 민주 세력은 저항하지 못하였다.
그 이후 국왕은 강경 진압이라는 큰 실책을 저지른다. 사가의 평에 의하면 국왕의 이러한 선택은 위대한 유고슬라비아를 만든 선대 왕들에 비교되는 것을 꺼려서라고 예측한다.
마치 40년 전의 크로아티아 반란처럼, 다양한 민족 구성이 빠진 유고슬라비아군은 현지 민병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또한 비교적 약한 세력을 가진 자치령들은 외국에서의 개입으로 인해 보호되었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군의 개입이 차단되었다. (각주: 코소보는 알바니아군,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불가리아군, 보이보디나는 헝가리군이 개입했다.)
이에 국왕은 당시 분쟁을 ‘가벼운 내부 갈등’ 으로 선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군과 기갑부대를 동원하려 했으나 이는 국제 사회의 제제에 가로막혔다.
이탈리아를 주도로 한 유엔에서는 세르비아가 ‘자유 투사’ 들을 강경 진압한다면 평화유지군을 파병할 수밖에 없다며 위협하였고, 이에 세르비아는 미국에게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세르비아의 잘못이 워낙 명백했기 때문에 세르비아는 미국에게도 버려진다. 끝내 세르비아는 1977년 10월 7일, 유엔의 중재안에 굴복한다.
5. 결과
중재안에 따라 세르비아를 제외한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주는 국민 투표를 통해 차후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국가’ 가 아닌 ‘주’ 에 따라 투표를 진행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처럼 원하지 않는 분류 하에 여러 국가가 묶이는 일을 방지할 수 있었다.
2개월 뒤 실시된 투표 결과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남기로 결정한 국가는 하나도 없었다.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는 독립을 확정지었다.
코소보는 알바니아에, 보이보디나는 헝가리에, 달마티아는 이탈리아에 합병을 결의했다. 헝가리와 알바니아는 즉시 동의했다. (각주: 보이보디나의 경우, 코소보와는 다르게 헝가리인은 20%내외고 세르비아인이 과반 정도였으나 이 지방에 사는 세르비아인들도 세르비아에 학을 떼고 같은 민족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탈리아는 달마티아의 합병 요청에 크게 당황했는데, (크로아티아 역시 강하게 반대했다.) 몇 차례 이루어진 재투표에도 달마티아인들은 90% 이상의 찬성률로 합병을 적극 지지했다. 당시 달마티아 또한 이탈리아인은 많지 않았으나 대부분 인구가 이탈리아어가 가능했고, 이탈리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탈리아를 동경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끝내 이탈리아는 내부의 걱정 (경제적 격차 우려)과 크로아티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달마티아의 합병 요청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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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Kingdom of Hungary)
건국: 1920년 3월 1일
수도: 부다페스트
면적: 222,917km
인구: 23,733,621 명
민족 구성: 헝가리인 (75%), 루마니아인(21%)
인구 밀도: 106.5명/km
공용어: 헝가리어
명목 GDP: 7165억 달러
1인당 GDP: 30,190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Baa1
(외전) 피자위키 – 칼리아리 합의
1982년 12월 26일
이탈리아 칼리아리
회의장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다만 그 기운은 이전에 두 나라의 대표단이 만났을 때보다는 좀 누그러진 것이어서, 이 회의의 결과를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양국 대표단 사이에 있는 OPEC 대표단이 입을 열었다.
“OPEC은 원유 가격의 책정은 달러를 기반으로 하되, 거래에 있어서 유로화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바입니다. 미합중국 대표단은 이에 동의하십니까?”
미합중국의 대표단은 침통하지만, 또 시원섭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며칠간의 회의에 따라 합의된 내용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결단이 필요한 때였다.
“또한 유럽 대륙의 국가들은 앞으로 미국과 FTA를 자유롭게 체결할 수 있을 것이며 유럽연합은 이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럽연합은 유로화의 환율을 달러에 맞게 조정하여야 합니다. 이탈리아는 유럽연합의 의장국으로서 이에 동의합니까?”
“동의합니다.”
이탈리아 대표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표정은 비교적 밝았으나, 그럼에도 걱정이 가시지는 않았다. 이번 협상은 그들의 승리였지만, 이탈리아에게 손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면에서 이 결정은 대규모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이를 헤쳐 나가는 것은 비교적 쉬웠다. 앞으로는 무한한 경쟁이 아닌, 상생이 있을 것이므로.
이탈리아 대표와 미국 대표는 손을 잡고,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가, 한 시대의 끝을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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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아리 합의
1. 개요
이탈리아 샤르데나의 칼리아리에서, 미합중국과 이탈리아의 대표단이 만나 차후의 세계 정세, 경제 정책에 대해 논의한 회의. 이에 따라 양국은 사실상 공공연히 진행되된 온전의 종식을 선언하고, 서로를 기축통화국으로 인정했으며, 폐쇄적이던 상호간의 무역을 개방하였다.
2. 미국은 왜 굴복했나?
칼리아리 합의는 일반적으로 미국이 고개를 숙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미국의 경제력은 분명히 이탈리아에 비해 압도적이었고 (각주: 현재도 미국은 이탈리아 GDP의 3배에 가까우며, 당시에는 4배를 넘었다.) 유럽 연합의 경제력을 전부 합쳐도 미국에 살짝 못 미쳤다.
유럽 연합의 결속력은 여러 국가로서 미국이라는 단일 국가에 미치지 못함을 고려하면, 미합중국이 이른바 ‘챔피언 홀더’ 로서 이탈리아에 먼저 양보할 이유는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합의에 동의한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무역 수지 문제와 국제 여론 문제이다.
무역 수지의 경우, 미합중국은 수십 년 전부터 꾸준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가짐으로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인데, 유럽 연합의 경우 이것이 앞선 사항을 고려하더라도 유독 심했다.
유럽 연합은 여러 국가가 연합한 체제라는 특성으로, 다른 단일 국가에 비해서 내수가 활발히 돌아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즉, 유럽 연합 내부에 필요한 모든 상품이 있기 때문에 미국과 무역을 할 필요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유럽 연합에는 미합중국의 농산물 대신 프랑스의 농산물을 유통했고, 미합중국의 첨단 물품 대신 이탈리아의 첨단 물품을 유통했으며, 미합중국의 축산물 대신 커먼웰스의 축산물을 유통하였다.
그에 반해, 미합중국은 내수 시장에 한계가 있고 또 유럽에서 가져와야만 하는 물품이 많았다. 이탈리아의 명품, 프랑스의 고급 식재료, 북해의 수자원 등은 전부 유럽 연합이 제공할 수 있는 품목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유럽 연합에 수출을 하지 못하는데, 유럽 연합에서 받아오는 수입은 많아지는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는 미합중국의 대유럽 무역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결과로 나타났다. 당시에도, 현재에도 미국을 제외하면 가장 큰 시장은 유럽임을 고려하면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심각한 일이 아니할 수 없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미국은 유럽의 시장을 개방해야 했다. 문제는 유럽의 시장이 제도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미국에게 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앞서 설명한대로 미국의 무역품은 유럽에서 그리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실적인 문제였고, 또 이를 감안하여 가격대로 승부를 보려 해도 이탈리아를 주도로 한 유럽 연합은 사실상 미국에게 무역 제한을 내린 상태였다.
이는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값싼 상품으로부터 유럽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붙었으나, 이것이 온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세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유럽 연합 가입국들을 설득하여 미국 상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 미합중국 무역이 유럽 각국 경제 비율에서 10%를 초과한 적은 없다.
이 현상에도 관여한 사항으로는 앞서 언급한 미합중국의 인식 문제가 있었다.
미합중국은 그동안 다양한 국제 문제에서 공격자, 침략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세계의 많은 신흥 개발도상국들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미지는 실제로 미합중국이 이스라엘, 세르비아, 서일본 등 국제적 인식이 나쁜 국가들과 협력한 것 이외에도, 그들이 개입한 국가는 대부분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가 있었다.
남미에서 미국의 개입을 받은 국가들은, 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미국 거대 기업들의 경제적 수탈로 국가 경제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는 미국이 온전 과정에서 개입한 대부분 국가들에서도 똑같이 시행되었고 현재 서일본 경제는 미국의 거대 기업이 점령한 판이다. (각주: 이는 일본의 통일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소이다.)
이에 반해 최대한 협력국, 동맹국의 편의를 봐 주고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삼가는 이탈리아의 대외 정책은 세계적인 호감을 살 수밖에 없었고 미국은 빠르게 세계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미 외교적인 부분에서는 미국이 아니라 이탈리아가 초강대국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