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solini Carries World War II?! RAW novel - Chapter (270)
무솔리니가 캐리하는 2차대전?! 270화(270/270)
3. 합의
이미 온전은 유고슬라비아 분할에서 미국이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많이 완화된 상태였고,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양 국가의 사회에서는 이제 갈등을 멈추자는 여론이 우세하게 된다.
미국에 비하면 덜하지만, 미합중국과의 관계 냉각은 이탈리아의 경제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미합중국의 에너지 안보는 이탈리아에 자주 1차 산업적 위기를 일으켰고 무역 관계 냉각은 이탈리아 경제 성장의 둔화로 나타났다.
그동안 이탈리아는 유럽 연합과의 관계로 이 어려움을 헤쳐 왔지만, 세계화의 시대에서 이제는 제한을 해제할 때가 온 것이다.
이탈리아와의 친선을 공약으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이탈리아에 먼저 접촉을 시도함에 따라, 양국은 빠르게 서로의 관계를 정립할 회담을 준비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82년, 양국의 역사적인 회담이 샤르데나 칼리아리에서 열린다.
회담의 쟁점은 크게 3가지였다. 기축 통화 문제, 무역 문제, 그리고 국제적 영향력 문제.
우선 기축 통화 문제에서, 미합중국은 이탈리아에게 양보하여 유로화를 기축 통화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본래 원유와 천연가스의 구매에 있어서는 신뢰가 있는 달러만을 이용하는 것이 OPEC의 규약이자 OPEC 미가입국에게도 국제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양보에 따라 유로화를 이용해서도 원유를 거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이탈리아 및 유럽 국가들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각주: 유럽연합에 가장 부족한 자원이 원유이다.)
그리고 무역 문제에서는 이탈리아가 미국에게 양보하였다. 이탈리아는 유럽 연합 내규로 정해져 있던 외부 국가 관세 조항에서 미국을 제외하고 유럽 연합 가입국들이 자유로이 미국과 FTA를 체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몇 개의 유럽 국가들이 미국과 FTA를 체결하고 미국산 농산물, 공산품이 유럽 시장에 들어오니 미국의 무역수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정되었다.
마지막으로 국제적 영향력의 경우, 미합중국이 양보했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미국에 그들이 설립한 독재 정권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거대 기업의 횡포를 제한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미국은 이를 수용하였다.
이에 따라 중남미의 이른바 ‘바나나 공화국’ 들에서는 연일 혁명이 일어나 독재 정권이 타도되었으며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미국은 이들 국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중단하고 새로운 민주화 정권을 후원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미국의 인식을 남미에서도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남미 국가들은 먼 이탈리아보다 ‘상냥한 이웃’ 미국에 의존하게 되어 이때부터 실제로 남미가 미국의 앞마당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이와는 별개로 새로운 이중기축통화 체제를 위해 환율이 대폭 조정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무역 적자를 개선하기 위한 미국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프랑스-알제리는 이로 인해 나타난 저성장을 대체하려 금리 인하와 부동산 규제 완화 정책을 사용한다.
이때 프랑스-알제리, 정확히는 프랑스 본토의 경제력은 비대화하여 이탈리아를 빠르게 추격했는데, 알제리에서 다시 프랑스가 우리를 식민지 삼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프랑스는 저성장에 빠지고, 알제리의 연방 내 영향력이 크게 상승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탈리아는 대미 무역이 경제 비중에서 크지 않은 편에 속하였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급진적인 금리, 부동산 정책을 사용하지도 않았으므로 환율 변동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다.
4. 이후
현재 미합중국과 이탈리아는 원만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또 FTA 협상을 추진 중이다. 본래 상당히 자주 있던 유엔에서 양국의 거부권 행사는 칼리아리 합의 이후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대부분 사안에서 입장을 함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탈리아의 무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프랑스, 커먼웰스, 대한민국에 이은 4위, 미국의 무역에서 이탈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중화민국, 영국에 이은 3위이다.
또한 최근의 일본 통일 문제와 커먼웰스 연방 갈등에 있어서 양국은 평화적 해결책을 지지하며 빠르게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양국의 관계는 굳건하며, 큰 문제가 없는 한 이는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일각에서는 칼리아리 합의를 이탈리아가 미국의 경제적 패권을 인정하고, 이탈리아는 외교적 패권과 경제적 독립을 인정받은 합의라 평한다.
*****
이탈리아 왕국 (Kingdom of Italia)
건국: 1861년
수도: 로마
면적: 339,116km
인구: 91,812,769 명
민족 구성: 이탈리아인 (90%)
인구 밀도: 270.7명/km
공용어: 이탈리아어
명목 GDP: 8조 4066억 달러
1인당 GDP: 91,563 달러
신용 등급: 무디스 Aaa
(외전) 인물열전 – 독일
한스-발렌틴 후베 브란덴부르크 군사고문은 군복의 모자를 눌러쓰고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휘르트겐의 오솔길을 걸어갔다. 이곳은 그가 일 년에도 몇 번씩 다니던 곳이지만, 오늘은 좀 특별한 손님이 있었다.
“각하께서 여기까지 오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가능하면 옛 기억을 피하고 싶다 하시지 않으셨는지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각하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이미 퇴임한지 오래인데.”
전 나치 독일 국방군 총사령관, 그리고 전 브란덴부르크 공화국 연방총리 하인츠 구데리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 외진 곳에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라인란트-하노버 연방공화국에 속한 휘르트겐은 10년 전만 해도 자유롭게 오갈 수는 없었지만, 이제 세상이 좋아져서 옛 독일의 구성국들 사이에 통행의 제한은 없었다. 각국 정부는 서로를 독립적인 국가로 존중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맺었다.
예전 독일 민족의 국수주의적 생각, 이념이 많이 사그라들었다는 소리겠지. 이제 민간인이 된 자신의 입장에서는 더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휴우…… 여기입니다. 장군께서는 가능하면 본인이 지휘했던 병사들 사이에 묻히기를 원하셨지요. 어쩌면 누구보다도 장군다운 선택입니다.”
“허허……”
아헨 기차역에서 비 사이를 걸어서 오길 한 시간. 그곳에는 그토록 그가 두려워했던 과거의 잔재가 죽 늘어서 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칙칙한 비석들 사이로 보이는, 눈에 띄게 꽃이 많이 놓여 있는 무덤.
발터 모델, 독일 국방군 원수 (1891.1.24.~1940.4.15.)
“저 꽃은 제가 최근에 놓고 간 것도 많지만, 장군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놓고 간 것입니다. 라인란트-하노버에서도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사람은 많지요.”
“쯧……. 본인이랑 관련도 없는 이미 죽은 사람을 위로해서 뭘 하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구데리안의 손은 들려 있던 국화 한 무더기를 무덤 위에 올려놓은 후였다.
“본래 이 묘지는 그리 크지는 않았는데, 2차대전 이후에 네덜란드나 라인란트에서 죽은 장병들 묘지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본래 장성이야 베를린에 있는 국립묘지에 묻히겠지만, 모델 원수의 소식을 듣고 이곳을 선택하는 나이 드신 장군 분들도 있지요. 그래서 묘지기 한 명만으로는 관리하기 힘들어 빈리히 베어 대령과 모델 장군의 아들분이 돕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함께 싸운 전우들과 함께 묻힐 수 있다는 것은 독일의 사나이로서 최고의 호사였다. 이 청년들이야 죽기를 원했겠냐마는, 이미 모든 게 끝난 이상 후대의 사람들에게 기억받을 수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곳에 오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좀…….회한이 드는군.”
“다들 비슷한 말을 하지요.”
구데리안은 많은 것이 담긴 눈으로 비석들을 눈에 담았다. 이들은 모두 한 때, 자신의 지휘 아래에 있었을 수도, 자신이 직접 얼굴을 봤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무덤 앞에 서니, 감회가 남달랐다.
“나는 말이야, 후베, 늘 고민하곤 했다네.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나고 요양을 할 때도, 그리고 정부에서 일할 때에도. 결정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내가 중요한 순간마다 내린 선택이 옳았는지. 더 나은 길로 나아갈 방법은 없었는지.”
“…….장군께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셨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8년의 임기를 수행할 수 있었고, 지금도 독일인이 존경하는 위인 순위권에 드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베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독일군 최고의 명장 중 하나.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독일 국민들 편에 섬으로서 범죄 정권을 몰아낸 일등 공신. 그런 그가 위인이 아니라면 누구를 위인이라 하겠는가.
“하지만 나의 지휘 아래에서 독일은 패배했고, 또 분열되었지. 지금 국민들의 삶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더 잘 싸웠더라면 하나된 독일이 더 행복하지는 않았을지. 아니면 내가 선택을 더 빨리 내렸더라면 더 많은 장병들을 살릴 수 있지는 않았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네.”
그러나 구데리안의 후회도 타당한 것임은 틀림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것들을 보았고, 또 고민했기에 그에 걸맞는 짐을 짊어져야 했으리라.
“바라건대, 그런 고민은 이제 내려 놓으시지요, 장군.”
“………..”
“전 독일에서, 장군보다 많은 무게를 짊어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롬멜 장군이 생포당하고, 모델 장군이 돌아가셨을때부터 항상 그러했습니다. 어쩌면 모델 장군조차 장군에 비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 장군이 죄인이라면, 독일의 모든 국민들이 죄인입니다. 장군께서는 죄가 없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순간에서 독일 국민들의 편에 선, 영웅입니다.“
“말뿐이라도 고맙군.”
“받아들이시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이미 지나간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과거를 추억할 때가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넘겨주고 나아갈 때입니다.”
구데리안은 눈을 감았다. 그가 부대를 시찰하며 봤던 수많은 독일 청년들의 얼굴들, 그리고 발터 모델의 활기찬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후베의 말은 전부 맞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 기억의 편린만을 붙잡고 자책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
구데리안은, 이제 그의 후배를 놓아주기로 했다.
“이보게, 후베.”
“왜 그러십니까?”
“자네와 나 중에 누가 더 오래 살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먼저 죽으면 나 또한 이곳에 묻어주게. 아내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거든. 자네에게라도 먼저 말 해 둬야지.”
“…….좋은 선택이십니다.”
*****
발터 모델 (1891.1.24.~1940.4.15.)
‘내가 진심으로 범죄 정권에 종사해 왔음을 알게 되었네.’
나치 독일의 군인.
발터 모델은 본래 몸이 안 좋았으나, 주변의 격려로 군인이 될 수 있었고 이 때부터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정신력, 명석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1차대전에서 위관급 장교로 복무하였으며, 그의 용맹한 모습은 한스 폰 젝트 장군이 그를 장군참모 과정에 추천하도록 만들었다.
1차대전 이후 모델은 유능함을 인정받아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한 군축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전간기 동안 특유의 신형 전술 개발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는 기존의 방어 전법에 반대했으며, 기동과 재편성을 통한 종심 방어, 대반격 교리를 열렬하게 지지했다고 한다.
당시 모델 원수의 성향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모델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 정복 전쟁은 크게 지지했다. 이는 그가 나치였는지 여부에 대해 논란이 되는 사항 중 하나이다.
2차 대전 개전 이후, 모델은 비교적 젊은 나이와 낮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 쾌속 진급하였다. 이는 히틀러의 국방군 융커 장교 불신, 그리고 모델이 융커가 아닌 유능한 중산층 계급 장교로서 히틀러의 아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는 롬멜, 구데리안과 비슷한 발탁 사유였다.
모델은 서부 전선에서 참모장으로 복무하였고 낫질 작전에 관여하는 등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주었다. 이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그가 총사령관의 자리로 올라서는 계기가 되어 준다.
야전사령관이 된 그는 다른 장군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항상 전선을 직접 시찰하고 아주 작은 단위의 작전까지 관여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는 기존 독일군의 임무형 지휘 체계와는 매우 다른 방식이었으며, 모델의 명석한 두뇌와 합쳐져 큰 위력을 발휘했다.
또한 모델은 항상 사병들의 상황을 신경 쓰고 시찰 때마다 장병들 옆에서 함께 일했기에 일선 장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는 일선의 장교들이 엄격한 모델을 경외했던 것과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모델은 모든 물자,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한 번의 대반격으로 전선을 다시 프랑스 너머로 돌려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총통의 지속적인 잘못된 판단은 모델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끝내 그는 총통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대를 후퇴, 해산시키기에 이른다. 이후 모델은 휘르트겐 숲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모델은 현재 드물게도 전공만으로 많은 독일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2차대전기의 장군이며 그 높은 인품, 정치와 관련되지 않은 특성은 그의 인기를 드높이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현지인, 유대인 학살에도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도덕적 흠결이 적다고 평가된다.
다만 그가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다는 점, 히틀러와 자주 독대를 했다는 점 때문에 그 또한 결국 나치 협력자가 아니냐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또한 그가 담당한 전선에서 학살이 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결국 그의 학살 반대는 말뿐인 것에서 그친, 그저 본인 만족을 위한 것이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
하인츠 구데리안 (1888.6.17.~1957.7.14.)
‘나의 악행과 실수는 용서받을 수 없지만, 내가 행한 모든 것들이 독일 국민을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나치 독일의 군인, 브란덴부르크 공화국의 군사학자, 브란덴부르크 공화국 2대 연방 총리.
하인츠 구데리안은 발터 모델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군인 집안 출생이었으며, 아버지의 일을 따라 장교로서 1차대전에 종군했다.
전간기에 독일 군축에서도 살아남은 그는 차량화, 기갑부대 업무에 부임하였으며 이 때부터 상관을 따라 군대의 기동전, 기갑화를 신봉하게 된다.
구데리안이 열렬히 지지하고 직접 개발한 기동전 전술, 전차 교리는 그대로 나치 독일 국방군의 교리가 되었으며, 이른바 ‘전격전’ 이라 불리게 된다. 이 전술에 따라 나치 독일은 폴란드, 2차대전 초반의 프랑스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모델, 롬멜 다음으로 신임하는 장군이 구데리안이었는데, 이는 구데리안 또한 융커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히틀러의 신임으로 자신의 전술을 군 전체에 도입하고, 또 야전사령관으로 낫질 작전을 이끈 그의 인생이 바뀌는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만슈타인 탈출 사건이다.
아미앵 전투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만슈타인은 연합군 포위망에서 후퇴한 이후 수감되었고, (본래 히틀러는 융커인 만슈타인을 신뢰하지 않았다.)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이탈리아 정보부에 의해 그가 구출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에 연루된 구데리안은 총통의 히스테리로 인해 자택 연금되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모델의 사망까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학자들은 당시 사건으로 인해 총통의 측근이던 구데리안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평한다.
발터 모델이 서부 전선에서 패배하고 자살하자, 총통은 그나마 신뢰하는 구데리안을 석방하고 지휘권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구데리안은 넝마만 남은 독일군으로 지연전을 펼치며 훌륭한 전과를 냈다.
그러나 총통의 의심은 매일 더해만 갔고, 결국 시민들의 혁명으로 베를린이 공격받는 사건이 터진다.
이때 구데리안 원수가 직접 지휘하는 진압군과 시민 사이의 대치는 유명하다. 당시 구데리안은 브란덴부르크 4대 연방 총리인 빌리 브란트가 군인들은 총통을 위해 싸우는가, 국민을 위해 싸우는가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병사들의 총구를 내려 시민들의 편에 섰다.
그렇게 시민들의 영웅이 된 구데리안은, 전범 재판에서 어떠한 혐의 없이 풀려나 브란덴부르크 연방군 창설에 관여했다. 이후 그는 집에서 지내기를 원했으나, 독일 국민들의 부름이 그를 다시 불러냈다.
많은 정당들에 의해 대연정 총리로 추대된 그는 총 7차례 이를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8년간 총리 임기를 수행한 그는 경제, 군사 부문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대체로 중도적인 정책, 위임에 능력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그의 치세에서 브란덴부르크 공화국은 라인란트-하노버를 크게 앞질렀으며 1980년대까지 옛 독일 구성국들 중 1위의 경제력을 자랑했다.
또한 그는 유난히 평화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전쟁에서 바뀐 그의 성향 때문이라는 추측이 대다수이다. 그는 전쟁 이후 경색된 독일 구성국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힘썼고 그의 재임 이후로 독일 구성국 사이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해졌다.
그가 설립한 통일부의 노력으로, 2000년에 프로이센국이 브란덴부르크 공화국과 통일을 결정했고, 또 2010년에는 나머지 세 구성국이 독일 연합이라는 느슨한 연합을 구성한다. 이 연합은 노르드 연합보다도 결속력이 작지만, 합쳐졌을 때 강력한 독일의 영향력이 유럽연합에 행사될 수 있도록 하리라는 예측이다.
현재 구데리안은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현대 인물 중 하나이며 그를 기리는 대학, 거리, 박물관 등이 베를린에 존재한다.
(외전) 인물열전 – 연합국
“구닥다리 샤를 드골은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샤를 드골은 여기까지 선명하게 들리는 시위대의 고함 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에잉, 날씨도 좋은데 시끄럽게 말이야.”
“전부 해산시킬까요? 기동대가 대통령궁 옆에서 상시 대기 중입니다.”
경찰청장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는 말게.”
드골의 성격으로 저렇게 자신의 눈앞에서 날뛰는 놈들은 괘씸하기 그지없었고, 전부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를 실제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대중의 지지를 먹고 사는 파시스트와 대중을 세뇌하여 일꾼으로 여기는 나치는 종이 한 장 차이.
그가 명예로운 지도자로 남으려면 저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해야 하리라.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국민 투표를 밀어 붙이는 것이 좋겠나, 아니면 이대로 조용히 대통령궁에 박혀 있는 것이 좋겠나?”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지스카르데스탱 재무장관이 앞으로 나섰다.
“대통령 각하, 시민들은 불만이 많지만, 그것이 꼭 각하를 결사 반대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불만을 토로할 만한 사람이 각하 뿐이니 각하에게 매달리는 것에 가깝지요. 지금의 성장 정체는 일시적인 일이고,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각하의 권위는 영원합니다. 각하께서는 그저 가만히 계시면 지지가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흐음….. 그러나 떨어지는 지지율을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신문사 놈들이 몇 퍼센트니 떠벌리는 것도 이제는 지겹단 말일세.”
지스카르데스탱은 드골 본인이 지명한 30대의 젊은 기수였다. 고작 30대의 나이에, 일개 의원도 아닌 장관직을 맡고 있었으니 실로 드골주의의 미래라고 할 만 했다. 물론, 실상은 그와 대통령의 생각이 매우 달라 갈등을 빚고 있었지만.
“결국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입니다, 각하. 한낱 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실로 각하를 끌어내리기를 원했다면 바로 전 선거에서 사회당을 지지했겠지요. 아직 저들이 각하께 거는 기대가 많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정부가 성장률을 목표치 이상으로 올릴 수만 있다면…..”
“그만, 이제 나가 보게. 자네의 생각은 잘 알았네.”
얼굴이 굳은 지스칼데스탱은 뻣뻣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방에서 나가 버렸다.
“젊은 친구가 아주 훌륭하긴 하다만….. 너무 머리가 꽃밭으로 물들어 있구만.”
“당연한 일입니다, 각하. 감히 각하의 혜안에 도전하려 하다니요. 나이 어린 자의 치기에 불과하지요.”
다른 장관들의 아부와는 별개로 드골은 진심으로 지스카르데스탱의 해법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국민들의 지지를 생명과도 같이 삼는 파시스트다. 그런 자신이, 경제 하나만을 믿고 국민 절반을 무시한 채로 칩거하라고? 말이 되지 않는 소리. 그건 파시스트가 아니라 수구 꼴통이나 다름 없다.
무솔리니가 공산주의자들을 무시했던가? 마누엘 아사냐 디아즈가 근왕주의자들을 숙청했던가? 반대파를 무시하는 것 또한 파시스트에게는 죄악이었고, 적어도 그들을 설득시킬 수단을 찾아야만 했다. 무솔리니처럼 정말로 위대함을 보여줌으로서 마음을 돌리던가.
아니면 자신처럼 국민투표로 국민 전체의 생각은 다르다는 걸 보여주던가.
자신이 시행한 몇 번의 국민투표, 여론전은 꽤나 뛰어난 효과를 보여주었다. 반대파는 자신들이 목소리만 컸고, 실제 투표 결과에서는 드골이 완승을 거뒀다는 것에 절로 지리멸렬하기 일쑤였다.
이에 그는 보수주의자들의 엄청난 찬사를 받았고 이제 ‘신 파시즘’ 이라는 칭호를 받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자리 보전을 위해 조용히 있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차라리 멋있게 도박을 하고 말지.
“내가 몰락하든, 늙어 죽든, 그는 분명히 새로운 당을 꾸리려 하겠지. 자네들도 이에 대비해야 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재무장관의 ‘신자유주의’ 적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그들은 미국 자본주의 돼지들이 아니다. 물론 명색이 보수인 만큼 빨갱이처럼 행동할 수는 없겠으나, 복지와 국가자본주의를 접목한 파시즘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뭔 놈의 신자유주의란 말인가. 민영화도 적당히 해야지.
드골은 결단을 내렸다. 이제는 시위대에 맞서 행동에 나설 때였다.
‘모두들 ’상원 개혁안과 지방 분권화 개혁안에 대한 개헌 찬반투표‘를 그대로 준비하시오. 몇 달 내로 이를 시행할 것이오.’
그의 12년 임기가 이어질지는 여기에 달려 있었다. 그가 독재자인지 아닌지는 국민들이 판단하리라. 그러나 드골은 전혀 의심치 않았다. 국민들이 그를 선택하리라는 것을.
*****
샤를 드골 (1890.11.22.~1970.11.9.)
프랑스의 전 군인, 정치인.
드골은 프랑스 북부 공업지대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은 저지대의 영향으로 프랑스 중앙 문화와는 괴리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불전쟁의 결과를 보고 독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군인의 길을 택하는 등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드골은 위관급 장교로 복무하였으며, 특이한 생김새 때문에 동료들의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여러 번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소련의 전 서기장인 투하쳅스키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각기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다시 만난다.)
소위로 임관할 때부터 패텡 휘하로 복무한 드골은 패텡 원수의 부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시종일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는 훗날 패텡이 제자를 위해 정치적 생명을 희생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드골은 2차대전 전부터 강력한 기갑부대의 편성을 상부에 요청해 왔으며(일설에 따르면 그는 스페인 내전 의용군 사령관으로 복무하여 독일, 이탈리아군을 지켜보며 기계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이는 마지노선을 맹신하던 보수파들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다. 이 때문에 드골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낮은 계급에 머물러야 했다.
2차대전 발발 이후 프랑스군의 허무한 붕괴는 드골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아르덴으로 무리하게 진격하는 독일군을 습격할 것을 제안했으나, 프랑스군의 무능으로 이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자 크게 절망했다.
모리스 가믈랭이 전방 사단들을 이끌고 항복하고, 피에르 라발의 3공화국 정부가 항복을 논의하자, 분노한 드골은 항전을 결의한 시민들, 그리고 자신 휘하의 기갑사단과 함께 파리로 진격하여 정부를 붕괴시킨다. 이를 9월 8일 혁명이라 하고, 이때부터의 프랑스를 4공화국이라 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드골은 의외로 권력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또 총사령관직을 원로인 막심 베이강에게 양보했다. 또한 그는 손수 남아있는 병력으로 센 강까지 도달한 독일군에게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다. 당시 프랑스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으나,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독일군도 마찬가지였고 이는 이후 이탈리아군의 구원으로 파죽지세이던 추축군이 패퇴하는 계기가 된다.
이와 같은 행보 때문에 드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차기 대통령으로 거론되기에 이른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드골의 행동이 계산된 것이라 평한다.
이후 드골은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종전까지 복무했으며, 여러 차례 독일군에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그는 전쟁 중에 한 차례의 위기를 겪는데, 알제리 위기가 그것이다. 인력을 필요로 했던 프랑스는 알제리인을 징병하려 했고, 이는 알제리 독립운동가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알제리인들이 마땅히 위대한 프랑스와 함께하리라 예상했던 그는 안일하게 대처했고, 이는 알제리의 독립 위기로 이어진다. 결국 패텡 국방장관이 직접 알제리 권리 성명을 발표함으로서 드골은 살아날 수 있었다. 이 때를 계기로 드골은 알제리 평등파로 선회한다.
전쟁 이후 드골은 잠시 회고록 등을 작성하며 칩거하였으나, 1945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집권 12년 동안 그는 모범적인 파시스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였으나 복지적, 사회적 정책을 다수 시행했고 프랑스의 경제를 고도 성장으로 이끌었다. 또한 이탈리아에만 매달리지 않는 독자 외교는 유럽 연합 내에서 프랑스의 2인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소수파인 반대파를 본인의 인기로 찍어 누르는 방식은 끝내 문제를 일으켰다. 전 유럽을 휩쓴 67혁명(반파시즘 반권위주의 운동)에서 드골은 국민투표를 통한 정면 돌파를 시도했고, 48%의 근소한 차이로 통과에 실패하자 사임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드골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합적으로 갈리며, 그가 최고의 파시스트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를 존경하는 프랑스인이 매우 많은 것 또한 확실한 사실이다.
*****
앨버트 프레드릭 아서 조지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형님, 일어나 계십니까?”
“………..”
침대에는 그의 형인 에드워드 앨버트 크리스티안 조지 앤드루 패트릭 데이비드가 누워 있었다.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지만, 살짝 움직인 것을 보니 깨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 음식을 잘 못 드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심프슨 부인에게 수발을 들도록 할까요?”
“…………..심프슨 공작이라 불러라. 조지.”
“……이렇게 계속 고집을 부리셔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조지, 혹은 대영제국의 국왕 조지 6세는 안타까움에 고개를 떨궜다. 그의 형은 너무 오랫동안 과거의 영광에 젖어 있었다. 이제는 좀 내려 놓아도 좋으련만.
영국 내전의 피해는 다른 나라 입장에서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 한 번도 국토가 직접 침공당한 적은 없던 영국에게 국토에서 내전이 난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람이 많이 죽은 것 외에도 국내의 기반이 다 불탔으니.
당연히 내전에서 패배한 측의 수장인 조지 6세의 형, 에드워드 8세는 먹을 수 있는 욕이란 다 들어먹었다. 세계적으로도 나치와 협력하려 한 놈, 혹은 적어도 나치를 본의아니게 도와준 놈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국내에서는 매국노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당연히 내전 이후의 처우에 있어서 최대한 온건한 처사를 약속한 조지 6세도 형을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었다. 에드워드 8세는 죽을 때까지 윈저 백작으로 격하되어 런던탑에 유폐되었다. 그의 애인, 월리스 심프슨을 쉽게 만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꽤나 오래 침묵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6세가 나가지 않자 에드워드 8세는 몸을 일으키 휙 돌아보았다.
“나를 모욕하러 온 게냐? 그렇다면 당장 나가거라.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
“그런 의미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10년을 넘어가는 오랜 유폐 생활은 쾌활한 ‘인싸’ 에 가까웠던 (그리고 약간 오만했던) 에드워드 8세의 성격을 비틀어 놓았다. 비로소 국왕으로서 품위를 갖춘 조지 6세와는 정반대의 면모였다.
“나는 너에게 품은 원한은 없으나, 이 나라는 용서할 수가 없구나, 동생아.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던, 그리고 나라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국왕의 선택을 매국노라고 매도하다니. 이것이 영국이 점점 영락해가는 이유일 터.”
궤변이었다. 귀천상혼 문제야 맞는 말이라 한들, 그게 나치에 호감을 느끼고 내전을 일으켜 수십만을 죽일 이유는 되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나 추해질 수가 있구나.
“이 저주받을 나라가 그 보수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영원히 대영제국은 파도를 지배할 수 없을게다. 저 천박한 이탈리아인들은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로 우뚝 서겠지. 그러니 내 사랑하는, 하지만 증오해 마지않는 동생아, 부디 나를 풀어줄 생각이 없다면 나를 찾아오지 말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무너지는 대영제국도, 나를 배신한 동생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으니.”
그 말과 함께 에드워드 8세는 다시 돌아누워 버렸다.
“…….평안하십시오, 형님.”
그는 직감했다. 그의 형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인지, 자신의 건강도 많이 나빠진 상태였다. 자신이 죽기 전에 형과 화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6세는 안타까움을 깊이 느꼈다. 삐뚤어진 옛 왕의 망언에, 약간의 현실도 담겨 있음을 알았으므로.
*****
조지 6세 (1895.12.14.~1952.2.6.)
윈저 왕조의 3대 국왕, 인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조지 5세의 차남으로 태어난 조지 6세는 활발하고 인기가 많던 형 에드워드 8세의 그늘에서 지냈다. 그는 본래 매우 내성적이고 말까지 더듬었기 때문에, 국왕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던 터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가 귀천상혼, 그리고 나치-연합국과의 관계 문제로 기성 정치인들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자 상황이 변했다.
본래 영국은 연합국의 일원이었고, 당연히 서부 전선을 도와야 했다. 그러나 나치 사상에 동조하고 히틀러에게 호감이 있던 에드워드 8세는 연합국이 영국의 국익에 손해만 된다고 여겼다. 이는 그의 결혼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반감과도 이어져 그가 의회 해산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다.
에드워드 8세가 의회를 해산하고 왕당파를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 연합국을 탈퇴할 움직임을 보이자 그에 반대하는 입헌파 (노동당 반스탈린파가 주류였으며 처칠을 위시한 보수당 항전파, 자유당 대다수가 포함되었다.) 는 내전을 준비하며 조지 6세를 옹립하였다.
조지 6세는 처음에는 이들의 요청을 거부하였으나 나날이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형의 모습에 끝내 입헌파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후 영국 내전은 이탈리아 등의 지원으로 입헌파의 승리로 끝났고, 이 과정에서 조지 6세는 로열 네이비의 몰락 (지중해 해전), 식민지들의 대거 이탈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 격동의 시대에서 내성적이던 조지 6세는 국민들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으며 피나는 노력을 통해 말을 더듬는 장애를 고쳤다. 이 과정에서 그가 행한 연설은 상당히 유명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조지 6세는 내전 관련자에 최대한 관대한 처사를 적용했다. 사형을 당한 사람도 영국 파시스트당의 극히 일부 뿐이었고 대부분 군인들은 처벌을 면했다. 적의 지도자 격이었던 에드워드 8세 역시 영구 유폐 (유폐 장소인 런던탑의 시설은 매우 훌륭했으므로, 사실상 가택연금인 셈이다.) 로 끝났다.
다만 내전 과정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또 영연방의 설립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므로 그의 말년은 좋지 못했다. 조지 6세는 형과 화해하기 위해 애썼으나 실패했고, 결국 급격한 건강 악화로 56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남편을 요절하게 한 직접적 원인인 에드워드 8세를 극히 증오했으며, 에드워드 8세에게 약간의 자유가 주어지려 하면 크게 화를 냈다. 또한 그녀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에드워드 8세의 사형을 주장하여 정치인들을 곤란하게 하였다.
(외전) 인물열전 – 이탈리아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RAI의 알베르토 페라리 기자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 아닙니다. 국영 방송에서 이런 늙은이를 찾아주다니 저 또한 영광입니다.”
이탈리아의 전쟁 영웅이자 현재 가장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정치인, 조반니 메세는 수많은 방송국에서 섭외 대상이었다. 그러나 메세는 제 옛 상관처럼 방송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고, 그런 그가 이탈리아의 중앙 방송국의 요청만 먼저 허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겸손함까지 갖추시다니, 실로 모든 이탈리아인의 동경을 받는 분이라 하실 만합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정치에 도전하신 이유가 뭡니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부터 한 기자는 질문에 들어갔다. 일반적으로라면 이는 경험 있는 기자의 스킬에 가까웠겠으나,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자기 눈 앞에 있는 남자는 그럴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었다.
“고금의 군대를 보면 아시겠지만, 나이 많은 영웅이 군대에 남는다고 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국가의 전력에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높지요. 저 소련의 부됸늬와 프랑스의 가믈랭을 보십시오. 그들은 전쟁 이전만 해도 전 사회의 칭송을 받는 숙장이었지만 막상 전쟁이 나니 드러난 모습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전쟁이 날 것이라는 말씀이신지요?”
“하하, 그건 아닙니다.”
메세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속으로는 욕을 삼켰다. 기자 놈들이란. 이 사람은 TV에 자주 나오는 기자이지만 이렇게 특종을 잡으려 입을 터는 것은 똑같단 말이다. 이래서 언론 앞에서는 항상 말을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이 세계를 지키는 경찰으로서, 다른 나라 군대에 비해 맞이할 위험이 더 많다고 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겠지요. 따라서 그 말에는 저 또한 포함이 됩니다.”
“장군께서는 누구보다 신식 전술에 잘 적응하시고 전장을 선도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시대에 뒤떨어지다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칭찬은 고맙습니다만, 이미 저도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이해하기 힘든 것이 많더군요. 가령 요즘에는 대전차 미사일이라는 무기를 활용한다 하더군요. 전차를 로켓포보다도 쉽게 잡는다는데, 제가 총사령관직에 있을 때 결재를 하면서도 갸우뚱 했습니다. 이렇게 벌써 따라잡기 힘든 것들이 나오니, 어찌 고집을 부려 남아 있겠습니까? 어차피 정년도 몇 년 안 남았으므로 빠르게 은퇴했을 뿐입니다.”
메세의 은퇴는 꽤나 큰 화제가 되었었다. 그는 여전히 일선을 잘 이해해주는 장군으로서 군의 장교, 장병들에게까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니.
그러나 본인의 상황은 메세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이미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고 도장만 찍어 넘긴 무기, 전술이 한 트럭이었다. 수십 년 전에 두체에게 찍혀 로도스에 박혀 있다가 쫒겨난 바돌리오 원수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물론 메세는 바돌리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덜 완고했고, 본인에게 지식이 없는 부분은 전문가들을 신뢰할 줄 알았으니 지금은 상관없을 터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내릴 수도 있고, 결국 최선의 선택은 적절한 때에 물러나는 것. 이미 그는 종신 원수직을 받았지만 일반적인 정년은 5년 정도만 남아 있었으므로 시기도 적절했다.
“국가를 생각하는 의원님의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입니다. 퇴임 이후 정치에 도전하시게 된 이유, 그것도 무소속으로 도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국가에 헌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아직은 젊고, 군대가 아니더라도 저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요. 무소속으로서 활동하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오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두체는 국가의 통합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지요. 그렇기에 그는 모든 정당을 파시스트당으로 통합하지 않고 화합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다른 정당으로 간다면, 그 정당이 힘을 얻게 될 것이고, 파시스트당으로 간다면 그곳에 있는 좋은 분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는 두체에게 보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정당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영향력은 자신을 얻은 당이 충분히 정계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을만한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두체가 이루어낸 대연정은 그대로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자리에서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곧 정답이지요. 저는 군인이었을 뿐이니, 각 정당이 특화된 부분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경청할 것입니다.”
*****
조반니 메세 (1883.12.10.~1971.12.18.)
‘나는 일개 장군에 불과하다. 내가 받은 모든 헌사는 두체에게 가야 마땅하다.’
이탈리아의 장군, 전쟁 영웅, 여섯 총리의 시대 (두체를 계승하는, 혹은 두체 아래에서 직접적으로 일했던 여섯 이탈리아 총리)중 두 번째 총리.
평범한 집안의 아들로 일개 병사로 19세에 입대한 조반니 메세는 놀라운 전공을 세우며 쾌속으로 진급했고, 병사 출신으로는 이례적이게 대령까지 진급하였다. 1차대전 당시 메세는 최정예 돌격보병 사단인 아르디티 대대를 지휘하였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부관으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1922년, 총리에 취임한 무솔리니는 조반니 메세를 눈여겨보았으며, 두체의 군제 개혁에서 메세는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대령에 불과했던 그는 장성으로 특진하였고, 스페인 내전 의용군을 지휘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에서 큰 공을 세운 그는 이탈리아 사관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구식 이탈리아군의 장교단 질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2차대전이 터진 이후, 메세는 기갑부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하였다. 현대전에서 기동과 기갑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고 있었던 그는 강력한 주장으로 기갑부대의 완전 차량화, 그리고 2차대전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가진 중형전차, 아리에테 전차의 개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두체의 전적인 지원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메세가 직접 군을 지휘한 센 강 공방전, 아미앵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구스타프 작전) 등에서 이탈리아군은 신들린 기동으로 적을 대부분 크게 격파하였고, 이에 추축군은 그를 ‘이탈리아의 독수리’ 라 부르며 두려워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메세는 매우 겸손하였고, 덕분에 외국의 인사들에게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그는 현장의 목소리, 즉, 병사와 장교의 편의를 크게 신경쓰기로 유명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메세는 잠시 총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은퇴하였으며, 이는 군대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는 무소속으로서 상원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몇 년 후에 이탈리아 의회 내 대부분 정당들의 추대를 받아 3차 이탈리아 대연정 내각을 구성한다.
총리로 재임한 시절, 메세는 노동은 공산당, 경제는 인민당, 외교는 공화당, 내정은 파시스트당에 맡기는 등 철저한 신뢰와 위임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메세 본인이 적극적으로 관여한 분야는 군사 뿐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분업화에 따른 좋은 결과로 나타났으며, 멀리 한국의 김구와 비슷한 정치를 펼쳤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정치는 이탈로 발보와 같이 파시스트당 중심의 패권적 연정을 시도한 공격적 파시즘과는 달리 ‘방어적 파시즘’ 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는 파시즘의 두 큰 분파 중 하나를 이룬다.
현재 조반니 메세는 이탈리아 국영 방송에서 실시한 ‘가장 존경받는 이탈리아인’ 조사에서 2위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카이사르와 함께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탈리아의 장군으로 남아 있다.
*****
안토니오 그람시는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스탈린의 소련은 실패했고, 러시아가 세상의 중심에 다시금 서는 일은 매우 난망하겠지만, 역설적으로 공산주의는 이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괴짜들의 사상으로 남게 되었을 공산주의는, 적어도 선거와 평화를 받아들임으로서 각국에 합법적으로 녹아들 기회를 잡은 것이다. 당장 한국, 인도, 폴란드, 프랑스와 같은 주요 국가들에서는 공산당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이는 필연적으로 상당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그람시 동무, 동무의 방식은 지나치게 반혁명적이오!”
단상에서 열변을 토하는 동양인의 모습에 그람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무엇이 반혁명적인지 설명을 하란 말이오, 박헌영 동무. 설마 옛 악습인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그건.”
신흥 공업국가 대한민국의 조선공산당은 그람시의 온건공산주의, 혹은 노동주의에 반발하는 파벌의 수장 격이었다. 사실, 대한민국과 같은 가난한 (빠르게 발전하고는 있지만) 나라의 야당 (그것도 제1, 제2 야당도 아닌)이 파벌의 중심인 것부터가 이들에게 큰 희망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레닌 동무의 의지에 맞지 않소이다! 모름지기 세계 혁명이라는 것은 공산주의가 각 국가의 주도권을 잡고 국제적인 통합을 이루어내는 것을 말하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통한 권력에 안주하며 가만히 있는 것은 죄악에 가까울 것이오!”
“그래서, 지금 폭력 혁명을 일으켜 집권할 힘은 있고 말이오?”
“…………..”
이는 조선 공산당의 대표인 박헌영이 강력한 레닌주의,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박헌영은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기는 했다만 조선 파시스트당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반정부 인사들을 모아 (아이러니하게도)트로츠키와 교류하며 적지 않은 세력을 형성한 터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 조선의 공산당주의 온전히 그의 것은 아니었으니. 정말 온건한 사람들은 조선 노동당으로 빠져 나갔으며 조선 공산당에서는 중도파(박상희의 파벌)와 강경파(박헌영의 파벌) 이 경쟁을 벌이는 처지였다.
언제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의 당권을 잃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코민테른에 와서도 열정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자신의 명망을 높이고 세력을 모으기 위해. 그게 효과적이라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레닌 동지의 말도, 세계 혁명도 절대적이지는 않소. 우리는 명심해야만 하오. 공산주의의 생존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세계 노동자를 위하는 단체가 존립의 위기에 처한 시점에서, 그러한 모험적인 도박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오.”
당연히 공산주의자들도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강경 폭력 노선에 동조하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당장 박헌영과 트로츠키도 말만 그러하지 선거에 잘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박헌영에게도 마지막 할 말은 남아 있었다.
“그렇게 쉽게 혁명을 배신하다니! 공산주의를 파괴한 무솔리니와 협력한 당신이 할 말이오?”
“………………..공산주의의 파괴라….”
무솔리니의 존재는 공산주의자 입장에서 매우 애매한 존재였다.
그는 공산주의의 기둥이었던 소련, 그리고 역시 공산주의가 살아 있던 나치 독일을 붕괴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파격적인 친노동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다만 무솔리니는 공산주의가 혐오하는 민족주의, 종교적 발언을 상당히 자주 했으니 공이 있더라도 대부분 공산주의자에게 꺼려지기 일쑤였다. 그런 그의 밑에서 커리어를 쌓은 그람시는 큰 약점을 가지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람시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소. 스탈린의 소련이 만들어낸 지옥도를 보시오. 그런 자가 세계 공산주의의 본산이었다면, 공산주의의 미래가 어찌 되었겠소? 그런 자를 몰락시키고 공산주의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무솔리니는 오히려 찬양받아야 마땅할 것이오.”
“그런!”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좋소. 나는 그가 위대한 공산주의자 중 하나로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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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 (1891.1.22.~1963.4.27.)
이탈리아의 혁명가, 공산주의자, 정치인, 여섯 총리의 시대 중 네 번째 총리.
안토니오 그람시는 샤르데나 출신이며,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키가 150cm에 불과했고, 이 때문에 코민테른에서는 그에게 고위직을 주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집안 형편은 그람시가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도록 만들었고, 그는 젊은 나이에 이탈리아 사회당의 주요한 세력이 되었다. 당시 그는 토리노 지국에서 무솔리니를 만났으며, 이때 두 사람은 상당한 갈등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는 무솔리니의 집권 전과 이후의 달라진 태도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후 사회당의 미적지근함에 질린 그는 뛰쳐나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파시즘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유일한 정당이었으며 이는 1922년, 무솔리니의 집권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집권 당시 공산당이 연정에 참여한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었다. 학자들은 그 이유가 그람시가 온건하게 변화한 무솔리니의 언변에 (당시 무솔리니는 직접 그람시의 자택에서 그를 설득했다 전해진다) 설득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무솔리니의 식민지 해방 선언에 감화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이후 무솔리니에 의해 노동부 장관에 임명된 그람시는 장장 20여 년을 노동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무솔리니 정부의 파격적인 친노동 정책을 주도한다.
당시 그람시는 이 때문에 수정주의자라며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그의 노선에 반대하는 강경 스탈린주의가 나치즘과의 결합, 패권주의, 전쟁에서의 패배로 완전히 몰락하면서 그는 세계 공산주의의 지도자 격으로 격상되었다.
그람시의 태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유하게 변하였기로 유명하다. 무솔리니 집권 초반기에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임하던 그는, 무솔리니 집권 후반기와 이후에 와서는 무솔리니를 가장 강력하게 옹호하는 공산주의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를 넘어서 그람시는 자본주의의 필요성,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 등을 이탈리아 정부에서 일하면서 주장하였으며, 이에 따라 현재 그의 사상은 공산 파시즘, 혹은 수정공산주의라는 별도의 분파로 분류된다. (현재 공산파시즘은 공산주의의 가장 강력한 분파 중 하나이다.)
그람시와 무솔리니의 개인적인 친분은 유명하다. 집권 전만 해도 공개적으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집권 이후에는 함께 있는 것이 자주 포착되었으며, 심지어 무솔리니가 개최한 사석에서도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무솔리니의 정치적 후계자는 치아노 백작, 발보가 아닌 그람시라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현재 그람시는 현대 공산주의의 아버지 격으로 여겨지며, 그를 추앙하는 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의견은 시간이 흐르면서 극소수 의견으로 줄어든 상황이다.
(외전) 독일서, 히틀러 본기
아돌프 히틀러는 본래 오스트리아의 오버외스터라이히 브라우나우암인 출생으로,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었다. 이때 히틀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외당숙과 종질의 관계였으니, 그 촌수가 멀다 하지만 이는 근친상간이라 할 수 있다.
본래 히틀러의 성은 시클그루버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할아버지가 가출 중에 성을 히틀러로 바꾸었으므로, 그의 가족들이 이를 따라 그의 성 또한 히틀러가 되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초졸의 학력으로 세무서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집은 평민 중에서 매우 유복하였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또한 매우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가장이었다. 그는 자식들을 때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화가가 되길 원하는 히틀러를 걱정하여 그에게 공무원이 되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공무원의 규율과 구속됨을 경멸하였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또한 히틀러의 아버지는 의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민족적 해결 방안을 지지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당시의 기준으로도 매우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권위적인 아버지를 깊이 증오했으므로, 훗날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상이 히틀러가 그에 반대되는 강력한 인종주의를 주장하게 되는 원천이라 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히틀러는 비로소 꿈을 좆아 화가의 길을 걸었는데, 공부에 흥미와 재능이 없어 학업에서 대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성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빈의 국립미술아카데미에 지원하였으나, 여러 번 낙방하여 낙담하였다.
이때 그는 국립미술아카데미의 교장에게 직접 항의하였는데, 교장은 유대인이었으며 히틀러에게 건축을 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이에 히틀러가 큰 모욕감을 느끼고 말하였다.
‘세상은 나의 실력을 알아주지 않는구나! 내 반드시 다른 곳에서 대성하여 나를 무시한 자들에게 똑똑히 가르쳐 주리라!’
이는 당시의 화풍이 초현실주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으로, 히틀러는 그림을 잘 그렸으나 상상력이 부족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교장은 히틀러에게 보다 적성에 맞는 진로를 권한 것이었으나, 히틀러가 건축에 필요한 과목에서 낙제했으므로 그는 학업을 접어야만 했다.
히틀러는 미술에 낙방한 이후 빈, 파리 등에서 엽서를 팔며 살았다. 이때 그에게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이 많았으므로, 사실상 백수처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가 독일군에 입대하였다. 본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인이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입대해야 할 것이나, 히틀러는 전쟁 없는 군대의 쓸데없는 규율, 그리고 다민족과 함께 싸우는 것을 기피했음으로 이전에 병역을 피해 도주했다. 이후 그는 전쟁이 나자 바이에른으로 가서 혼란 속에 입대할 수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히틀러는 연락병으로 활동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와 동일한 훈장을 수여받은 사람 중에 살아남은 이는 거의 그 뿐이었다.
동료들은 그를 몽상가로 평하였는데, 그에 대한 증언이 다음과 같았다.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여자에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혼자서 독일의 운명에 대해 논할 뿐이니, 누가 그와 가까이 하겠습니까? 다만 그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므로 따돌림은 당하지 않음입니다.’
1916년, 히틀러가 부상당하여 후방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후 사람들은 이때 히틀러가 고환에 부상을 당했다며 짝불알이라 놀렸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종전 직전, 히틀러가 또다시 부상당해 치료를 받았다. 다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히틀러는 당시 PTSD 증세로 입원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는 히틀러가 차마 본인이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도망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거짓말을 한 것이다.
히틀러가 입원해 있을 당시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났다. 이에 히틀러가 크게 울분을 터뜨리며 말하였다.
‘내 후방에서 전쟁에 회의적인 자들, 꾀병을 부리는 자들을 만나보며 독일의 미래에 대해 걱정했는데, 마침내 이런 운명을 맞이하는구나! 위대한 제국이 한낱 배후로부터의 중상으로 무너지니,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는 군대를 떠나고 싶지 않아 준군사조직에서 활동했다. 당시 그는 사회주의 무장 조직에 속하기도 했으므로 우익 인사들이 그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비판하였다.
히틀러는 의용군에서 소수 정당 조사 업무를 맡았다. 이때 방문한 정당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곧 나치당의 전신이다.
이 군소 정당의 전당대회에서 초청을 받은 바우만 교수는 바이에른의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연설을 진행하였다. 이에 가만히 앉아 있던 히틀러가 크게 분노하였고, 연단으로 올라가 외쳤다.
‘독일이 배신자들에 의해 몰락한 지가 수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단결하여 이 수모를 갚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또다른 분열을 야기하겠습니까? 그러한 분열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당의 사람들이 큰 감명을 받아 히틀러에게 입당을 권유했다. 히틀러는 본인의 연금보다 당 기금이 적은 정당의 권유를 무시했으나, 이내 생각을 바꾸어 55번째 당원이 되었다.
히틀러는 의용군 등에서 활동하면서 동료들에게 시국에 대해 연설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재능을 깨달았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 능력에 기반하여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명세를 떨쳤다.
본래 히틀러는 마르크스, 룩셈부르크, 무솔리니와 같이 자신만의 사상을 가진 논객이 아니라 선동가에 가까웠다. 그의 말은 다분히 충동적이었고 과격했으나, 당시 독일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그의 선동을 주목받도록 하였다. 그의 독일의 미래에 대한 명쾌한 해법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그를 따랐다.
히틀러가 적지 않은 지지를 끌어모았고, 또 세력이 독일 내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으므로, 그가 최대한 빠르게 집권하기 위해 무솔리니의 선례처럼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꿈꾸었다.
이에 1925년, 히틀러가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역시 정부에 불만이 많던 전 독일군 원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그를 지원했다.
히틀러가 철저한 계획 하에 각 지역의 정부 수반, 그리고 여당 및 야당의 인사들까지 신속하게 사로잡았으므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정부를 대적하기에는 부족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잡았다. 당시 대통령이자 사회민주당 당수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쿠데타 소식에 뇌출혈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다.
스스로 총리 자리에 오른 히틀러는 야당의 활동을 강력하게 제한하고, 아직은 부족했던 자신의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이때 그가 국민들 앞에서 주장한 바는 다음과 같았다.
‘가장 위대한 독일이 패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독일은 저열한 슬라브인들을 패배시키고 라틴인들을 시종일관 밀어 붙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배후로부터의 공격에 무너져야 했습니다.
인구의 1%도 차지하지 못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자들, 거기에 외부에서 독일을 공격하는 저열한 민족들까지. 이들 모두가 독일의 적이며, 우리는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위대한 독일을 재건하기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에 독일 국민들이 마음 속에 있던 분노와 원한을 표출했다. 그를 처음에는 의심하던 국민들 상당수가 그에게 열광하니, 나치당의 하켄크로이츠가 거리에서 물결을 이루었다.
1931년, 히틀러가 약속대로 라인란트를 재무장하였다. 당시 독일군이 라인란트로 진주함에 있어서 규율이 없는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므로, 많은 장교들이 준비 없이 정치적 목적으로만 행동하는 히틀러를 원망하였다.
그러나 독일을 막아야만 할 프랑스가 독일의 상황을 잘 몰랐으므로, 프랑스군이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과 이탈리아도 우려만 표시하였다.
1934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주데텐란트에 사는 독일인들이 권리를 요구하자, 체코슬로바키아군이 이들을 강경하게 진압하여 수십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히틀러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세계 각지에 사는 독일인들이 대전쟁의 원흉이라는 거짓된 낙인으로 고통받은지가 오래이다. 개중에서도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은 조국을 눈앞에 두고도 핍박받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그들의 절규가 이곳까지 들리는 듯하니, 마땅히 그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리라!’
이에 독일 국민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체코슬로바키아 정벌을 주장하였다. 독일에서 자원 입대자가 줄을 이루고 독일 기갑부대가 체코 국경에서 기동하므로, 체코슬로바키아가 크게 두려워하며 동맹국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이때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말하기를,
‘우리가 준비한 사단이 고작 4개라고 하니, 지금 독일과 전쟁을 하면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오. 독일인들이 원하는 것은 같은 민족과의 통합이므로, 그것을 들어준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겠소이까?’
프랑스가 이 말에 동의하였으므로, 이탈리아 또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체코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였으며, 많은 체코인들이 영국인들을 증오하였다.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얻자, 독일인들이 크게 열광하고 그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다. 이에 히틀러가 자신감을 얻어 말했다.
‘오스트리아는 본래 독일의 중심으로, 그들이 독일과 다른 나라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오스트리아에서 저열한 열등 민족들이 떨어져 나갔으므로, 그들이 독일과 다시 하나가 되는 때가 진정한 독일 민족의 통합이라 할 수 있소!’
이 말을 들은 오스트리아인들 상당수가 독일과 통합할 것을 주장하니, 오스트리아 정부가 큰 위험에 처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 총리가 이탈리아에 도움을 요청하니, 무솔리니가 토론회를 주장하고 이에 히틀러와 괴벨스가 응하였다.
히틀러가 토론회에서 주장하기를,
‘고금에 이르기를 어리석은 민중들이 끼친 폐해가 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가득 메우고도 남습니다. 많은 사공이 국가를 패망의 길로 이끌 수 있으니, 오직 철인만이 이상적인 정치를 이룰 수 있다는 플라톤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자신의 국가의 사례를 들며 반박하니, 히틀러가 이에 논리적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다만 얼굴을 붉혔다. 이에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이 히틀러에게 실망함으로, 이어진 국민투표에서 오스트리아가 독일과의 통합에 반대하였다.
이에 1936년, 히틀러가 분노하여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니, 이것이 2차 세계 대전이다.
독일군이 기세를 높여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으나, 오스트리아가 험준한 알프스의 산세에 의지하여 방어하니 뚫지 못하였다. 이에 총통이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독일은 일찍이 같은 독재 국가인 소련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공산주의와 슬라브에 맹렬히 반대한 총통의 발언에 대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을 들은 총통이 말하기를,
‘국가의 대업이란 중요한 것이라, 그 방향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있다. 비록 슬라브인이 아리아인에 비해 못하지만, 유대인과 라틴인을 몰아내는 일에 함께할 수 있다면 어찌 맹우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소?’ 라 하였다.
독일인들은 이 말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다른 국가들은 이 말을 크게 비웃으며 독일은 앞과 뒤가 다른 국가라 하였다.
이미 소련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폴란드의 뒤를 독일이 공격하니, 독일군이 파죽지세로 바르샤바를 점령하였다. 독일이 염원하던 단치히 회랑과 포젠을 되찾았으므로, 모든 독일 국민들이 승리를 찬양하며 총통을 따라 오른손을 어깨 위로 높이 들었다.
1936년 8월,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이미 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준수하여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상태였는데, 독일이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에 집중할 때 부실한 독일 서부를 공격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독일군이 프랑스의 전선을 맹렬하게 공격했으나 쉽게 뚫지 못하였으므로, 국방군의 장성인 만슈타인이 이른바 ‘낫질 작전’을 제안하였다. 그 과격함에 대부분 장성들이 반대하였으나, 총통은 오히려 그 과격함을 마음에 들어하며 밀어 붙였다.
프랑스군이 이 작전에 크게 당해 무너지므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독일군을 파리 앞에서 밀어내니, 독일군이 처음으로 패배하였다.
이후에 이어진 전투에서, 독일군이 다시금 프랑스군을 밀어 붙였으나 지원의 부족으로 아미앵에 포위되었다. 이에 만슈타인이 군을 이끌고 도주하였으나 총통의 친위대가 많이 낙오되었다. 이에 총통이 크게 분노하며 말하기를,
“군은 위치 사수라는 명령을 듣지 않고, 오히려 같은 전우를 버리고 나오니 어찌 배신자들의 집단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또 다시 1918년의 비극이 독일의 등을 찌르는구나!” 하며 총통과 갈등이 있던 옛 프로이센 귀족 장성들을 대규모로 숙청하니 죽거나 다친 사람이 셀 수가 없었다.
1937년과 1938년, 독일이 전세를 뒤집기 위해 영국, 소련 등 동맹국들이 싸우는 곳에 병력을 자주 파견하였다. 그러나 발트해에서 독일의 함대가 노르드인들에게 침몰하고, 영국에서는 이탈리아의 지원군에게 패배하니 나라에 전쟁을 의심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또한 총통이 라틴인들과 유대인들을 크게 원망하는 마음이 늘어나, 점령지에서 프랑스인을 마구 학살하고 유대인은 본국의 수용소로 끌고 갔다. 전선이 점차 독일 쪽으로 밀릴 때에 이 현장이 프랑스군에게 발견되니, 모든 프랑스인들의 독일에 대한 원한이 뼛속 깊이 사무쳤다.
1938년, 동맹국들이 무너지며 전세가 불리해지자 총통이 조급해져 이탈리아에 대한 공세를 주장했다. 이에 독일 전역의 정예병들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므로, 이탈리아가 크게 놀라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독일군이 무리한 공세를 성공시키지 못하고 스위스에 갇혔다.
많은 병력을 잃자 총통의 의심이 더욱 심해졌다. 총통이 죄없고 유능한 사람들을 많이 잡아 죽였기 때문에, 총통을 싫어하는 자들이 독일 내에 더욱 많이 생겼다.
1940년, 빼어난 공을 세운 독일군 원수 발터 모델이 죽었다. 그러나 모델이 죽기 전에 군을 총통의 명령을 무시하고 후퇴시켰으므로, 총통이 그를 비판하며 말하기를,
‘가장 유능한 자마도 독일의 등에 비수를 꽂기를 마다하지 않으니, 우리 사회에 유대인의 병폐가 이처럼 크고도 깊다. 아아, 슬프도다! 일세의 영웅이 독일을 구원하지 못할 운명이 보이니, 이 모든 것은 유대인에게 속은 독일인들의 잘못이라 할 수 있으리라!’
새로 사령관이 된 구데리안이 이 말을 듣고 동의하지 않았다. 몇 달 후, 총통의 말에 분노한 많은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구데리안과 국방군이 이를 진압하지 않고 시위대에 동조하니, 총통이 두려워하며 남미로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총통이 독일 중부의 마을에서 사로잡혀 말하기를,
‘그대들은 독일 민족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가? 이토록 국민들이 어리석으니, 제국이 두 차례의 대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알 만 하도다!’
이에 그를 붙잡은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여 외치기를,
‘총통이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다! 그가 독일 민족을 제 망상과 권력에 취해 전쟁터로 내보내었으니, 그가 죽인 독일 민족의 숫자가 유대인의 몇 곱절은 넘을 것이다. 이에 대한 죗값은 오늘 치를 것으로는 한참 부족할 터이니, 수백만 독일인들의 원혼은 누가 달래 주리오!“
하며 총통을 구타해 죽이니,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총통이 죽자 많은 독일인들이 거리에 나와 축하를 벌였다. 그러나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아, 지금도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의 묘지에는 꽃과 오물이 공존한다고 한다.
사관은 논한다. 히틀러는 타고난 정치인의 재질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으므로 그의 내치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비했을 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독일 국민들이 칭송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전쟁에서 패한 독일 국민들의 증오와 원한은 엄청난 것이어서, 독일이 다시 전쟁에 뛰어든 것은 단지 히틀러 개인의 잘못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히틀러가 세계에 끼친 패악은 전례가 없는 것이고, 그의 주장 또한 논리적 모순이 심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단지 민족의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의심병으로 유능한 측근들을 떠나보냈으며, 독일과 타 국가의 청년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이는 반드시 세계 최악의 범죄자의 행각이라 할 만하니, 어찌 기억하고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누가 그를 진심으로 옹호할 수 있겠는가! 삼가고, 또 삼가야 할 일이로다!
– <독일서>, 류사오보, 히틀러 본기 –
(외전) 이탈리아서, 무솔리니 세가
베니토 무솔리니는 에밀리아로마냐 주 출신으로, 대장장이의 아들이다. 무솔리니의 아버지가 열렬한 사회주의자였으므로, 무솔리니 또한 20대까지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또한 그 영향으로 무솔리니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
무솔리니가 기숙 학교에 다닐 적에, 다른 학생들을 심히 괴롭히고 건물에 돌을 던지는 등 반항심이 많았다. 이에 학교에서 그를 퇴학시켰으나, 다른 학교에서 그는 우등생이 되어 졸업한 뒤 프랑스어 교사로서 생활하였다. 당시에 무솔리니가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전 지역의 언어를 능통하게 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총명하다 하였다.
1902년, 이탈리아군의 영장을 받은 무솔리니가 스위스로 도주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병역 기피자라 일컬으며 그를 조롱하자, 그가 성을 내며 말하기를,
‘무릇 남자는 때를 기다릴 뿐이다. 어찌 주어진 의무를 결국에는 다하지 않겠는가?’
하며 1904년, 정말로 약속을 지켜 입대하였다.
사회당에서 무솔리니가 평가받기를, 연설 실력과 카리스마가 빼어나다 평하였다. 이에 무솔리니가 승승장구하여 1차대전 직전에는 당 기관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이 자리에서 국가를 위한 전쟁을 옹호하니, 전쟁을 반대하던 사회당에서 그를 미워하는 자가 많았다.
끝내 사회당에서 무솔리니를 제명하자, 그는 독자적인 신문사를 창간해 자신만의 사상을 구체화한다. 무솔리니는 사회주의를 실패한 사상이라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폭력을 옹호했다.
1916년, 이탈리아에서 총동원령이 내려지자 무솔리니 또한 병사로 재입대하였다. 이때 그가 최전선에서 활동하다가 몸에 박격포탄 파편 40개가 박히니, 이로 인해 몸이 평생 불편하였다.
1918년, 대전쟁이 끝나고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이탈리아에 혼란이 일어났다. 이에 무솔리니가 비로소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인물들을 모아 ‘전투 파쇼’, ‘검은 셔츠단’ 등을 창설하였다.
무솔리니는 다양한 사상들을 종합하여 파시즘을 홍보하였으며, 수많은 정치 잡지에 글을 기고하였다. 이는 사상가로서 히틀러의 부족한 이념적 근거와는 차별되는 점이다.
다만 당시의 파시즘은 이른바 ‘원시적인 파시즘’ 으로, 훗날 민주주의와 결합되는 것과는 그 성향이 매우 달랐다. 당시 파시즘과 오늘날 완성된 파시즘의 유사성은 국민주의적 단결, 대중적 인기, 국가자본주의/복지주의 정도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사관은 논한다, 어찌하여 무솔리니는 민주주의를 자신의 사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이는 국민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반이 없던 그가 집권하기 위해서는 폭력과 극단주의가 필요했지만, 집권 이후에 그는 실력으로서 국민들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필요치 않았다.
따라서 무솔리니는 자신 이후 지나친 권력 집중으로 부패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이는 현 이탈리아의 다당 – 연정주의 정치 체제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1922년, 무솔리니가 동지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였다. 이에 국왕이 그를 마음에 들어하며 총리로 임명했다. 당시 무솔리니는 밀라노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두고 진군이 실패할 시 스위스로 도주하기 위함이라고 비난했다. 무솔리니가 훗날 이를 인정하였다.
무솔리니가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식민지 해방 선언과 대연정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크게 대경하며 말하기를,
‘어찌 식민지를 포기하면서 위대한 이탈리아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강력한 이탈리아를 주장하더니, 전부 거짓말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자 무솔리니가 군중들 앞에서 말했다.
‘무릇 국가의 국력이라는 것은 국민들의 단결에서 나오는 것이지, 해외 영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식민지가 적자에 어떠한 이득도 없다는 것은 수치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고작 식민지 따위로는 보탤 수 없는 웅대한 계획이 있으니, 모든 국민들과 정치 세력은 마땅히 나를 따르라.’
하니 사람들이 그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그를 지지하며 ‘두체’ 라 불렀다. 이에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독립시키고,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에티오피아에 반환하니, 이탈리아의 재정이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공산당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정당들이 무솔리니에 설득되어 입각하였다. 이에 전후 이탈리아를 흔들던 정치적 혼란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리고 개선된 재정을 바탕으로 무솔리니가 대대적인 감세를 진행하니, 국민들이 그를 칭송하기를 마지않았다.
1924년, 두체가 남부 소작농들을 괴롭히던 토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선언하였다. 토지개혁법에 따라 남부의 대지주들이 소유한 대농장은 유상 몰수되었으며 싼 값으로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
이에 지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사조직을 만들고 로마로 북상하니, 두체가 병력을 숨겨두었다가 이들을 쳐서 많은 지주들이 죽었다. 이를 2차 로마 진군이라 한다.
또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남부에 주로 세력을 뻗치던 마피아를 강력하게 탄압하였으므로, 이들의 세력이 지리멸렬하여 대부분이 독일과 미국 등으로 도망갔다. 개중에서 독일로 도망간 이들은 히틀러가 집권하는 것을 도왔다. 이에 사람들이 마피아에게 퇴로를 열어준 것은 실수라 하였으나 두체가 이 또한 계획이라 하였다.
마피아, 지주 등에게 역적이라는 명목으로 몰수한 돈을 두체는 다양한 계획에 사용하였다. 엔리코 페르미를 필두로 핵개발을 시작한 것이 이 때이며, 아리에테, 안티카로, 베레타 돌격소총 등 이탈리아의 신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이다.
두체가 지중해의 국가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여,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는 식민지 해방의 일환으로 영토를 반환했고, 또 그리스와 터키의 종전을 그리스에게 유리하게 중재해 주었다. 또한 헝가리는 고토를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와 동맹을 체결했다.
이에 사람들이 저들과 같은 약소국과의 관계가 무엇이 중요하냐고 말하자, 두체가 반박하기를,
‘하나보다 둘이 낫고, 둘보다 여럿이 낫다. 개미들 또한 여럿이 모여 강대한 힘을 내니, 아직 세계의 열강들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한 이탈리아 또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저들에게 주는 모든 것이 나중에는 더 크게 돌아올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이에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나, 훗날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 국가들이 전부 망설임 없이 참전하므로 모두 두체의 혜안을 찬양하였다.
1931년, 스페인에서 내전이 벌어지자, 두체가 소규모의 의용군을 파견하여 공화파 정통정부를 도왔다. 마드리드 전투에서 이탈리아 의용군이 새로운 무기, 전술로 엄청난 전공을 세우니, 참전한 프랑스, 독일, 소련의 의용군이 모두 이를 보며 두려워하였다.
독일이 라인란트를 재무장하고, 또 주데텐란트를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강탈할 때, 두체와 이탈리아가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든든한 동맹이 되어야 할 프랑스와 영국이 크게 망설이므로, 두체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두체가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아, 헛되도다! 저 사악한 나치 학살자들을 막을 기회는 지금이거늘, 세상에 겁쟁이들이 많아 잘 되지 않는구나. 지금 우리가 준비가 되지 않아 입을 피해는 독일이 준비가 된 후 입을 피해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니, 우리 모두 수백만의 목숨이 스러진 후에야 깊이 후회하리라!’
프랑스와 영국의 시민들이 이 말을 듣고 이탈리아의 총리가 전쟁광이라며 비난하였다.
1936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려 하자 두체가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며 히틀러에게 토론을 제안했다. 히틀러가 이를 수락했다.
히틀러가 민족자결주의와 나치즘을 주장하며 두체에게 맞서자, 두체가 말하기를,
‘총통의 의견은 잘 알겠으나, 국민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고금에 무한히 지속된 왕조도, 독재도 없으니, 이것은 권력이 한 곳에 고이면 몰락한다는 증표가 아니면 무엇이겠소? 또한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이천년 동안 다른 나라였고, 단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가짜 제국의 회원이었을 뿐이니 어찌 두 나라가 하나라고 하겠소?’
이에 오스트리아인들이 이를 듣고 동의하였다. 이후 이루어진 투표에서 여론이 뒤집어져 오스트리아가 통일에 반대하므로,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난 후 두체가 수많은 국가들에 병력을 보내면서 독일에 맞섰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은 국토가 공격받을 때 직접적인 지원군을 받았으며, 영국 내전에는 의용군을 파병했다. 또한 역시 동맹에 가까운 중국의 군벌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폴란드 망명 정부의 위치를 중재해 주었다.
이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왜 이탈리아가 남의 나라 전쟁에 나서야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였다. 그러나 두체가 듣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이탈리아가 지금 최전선이 아니지만, 최전선에서 싸우는 국가들은 우리에게는 방패와도 같다. 저 프랑스를 보라. 몇 번이고 동맹을 저버렸다가 자신의 국토에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강대국으로서 의무를 저버린다면, 반드시 더 큰 대가를 치룰 것이니 최선을 다해 싸우라.’
1938년, 그러나 독일이 예상을 깨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이탈리아의 반전 여론이 크게 일었다. 국토가 불타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화평을 하자는 제안이 우세하자 두체가 대노하여 군중 앞에서 직접 연설하였다.
‘우리는 곧 유럽의 등불입니다. 우리가 무너진다는 것은 곧 유럽이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어느 때보다 번영하는 이탈리아를 지켜보는 선조들, 그리고 이 번영하는 이탈리아를 물려받을 후손들을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탈리아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의 당당한 초강대국으로 우뚝 설 것인가, 아니면 독일에 굴종하고 그들의 개로 살 것인가. 우리가 이러한 선택지에서 모욕의 길을 고를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은 아닙니다. 나는 오늘, 마땅히 맞서 싸우겠다고 맹세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저를 믿고 따라 주십시오. 이탈리아 만세!‘
이에 전세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두체를 연호하며 열광하였고, 자원입대자가 모병소에 줄을 이루었다. 사기가 충천한 이탈리아군이 미군과 함께 독일군을 밀어 붙이니, 독일군 대부분이 포위되어 전멸당하였다.
1940년, 소련이 또한 이탈리아와 미국의 지원을 받은 공세로 몰락하고, 병력을 크게 잃은 독일에게 패색이 깊어지자 히틀러가 결사 항전을 결의했다. 그러나 독일 국민 상당수가 아직 전황이 나쁘지 않은 줄로만 알았으므로 두체가 이들을 일깨울 방안을 생각해냈다.
이미 독일로 도주했던 마피아들은 두체의 설득으로 이탈리아의 스파이가 된 채였다. 이들의 도움으로 독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두체가 연설을 하였다.
‘독일의 국민 여러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아이들이, 더 이상 반목하지 않고 평화를 노래하는 꿈입니다. 어찌하여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유를 빼앗은 저 독재자의 말을 따라, 죽음의 구렁텅이로 들어가고 있단 말입니까?
떨쳐 일어나십시오. 압제자들을 무너뜨리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마땅한 권리를 되찾으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이 태초부터 가지고 태어난 권리를 손에 쥐었을 때, 이탈리아와 독일은 비로소 평화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방송을 들은 독일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니, 이들이 베를린으로 몰려가 히틀러를 매질하여 죽였다. 전 이탈리아 국민들이 전쟁이 끝난 것을 축하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세계의 뭇 국가들이 이탈리아를 칭송하며 상국으로 받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체가 이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강대국의 미덕을 후계 총리들에게 각인시키니, 전 세계에서 미국보다 이탈리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한 두체가 유래없는 강력한 복지 정책을 도입하여 이탈리아에서 돈 없어 굷주리고 고행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이 이탈리아가 곧 낙원이라 하여 이탈리아로 이민을 왔다. 이 정책을 위해 두체가 강력한 증세를 했음에도 국민들이 두체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1942년, 두체가 스스로 총리 자리에서 내려왔다. 사람들이 절대적인 권력과 지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그가 모든 지도자의 귀감이라며 칭송하였다.
퇴임 이후, 두체가 연일 파티를 열며 놀러 다녔으나 사람들은 호방한 이탈리아 남자의 전형이라며 칭찬했다. 이에 일부 이탈리아 남자들이 매우 억울해했다. 또한 정부에서 가끔 두체를 특사, 고문으로 채용하니 업무를 맡을 때마다 큰 성과를 내었다.
1982년, 두체가 99세의 나이를 일기로 졸하였다. 죽기 1시간 전까지 정신이 또렷하였으니,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가 죽음을 직감하고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귀중한 기회를 받았으니, 나의 인생이 신기하고 소중한 것이었음에는 후회가 없다. 그러나 나만이 이탈리아를 부흥시킨 것이 아니고, 내가 없다 하여 이탈리아와 파시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대들은 슬퍼하지 말라.
부디 무엇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흔들림 없이 그것을 행하라. 어설픈 이기심보다 확실한 정의가 좋은 결과를 불러옴이며, 나는 그것만을 믿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나는 이제 긴 여행의 끝을 맺으니, 그대들 또한 이를 명심할지어다.’
사람들이 이를 듣고 그 뜻을 전부 짐작하지는 못하였으나, 두체의 말을 따르겠노라 마음 깊이 맹세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가 슬퍼하였으며, 이탈리아 전역에서 무려 일주일 동안 조기를 걸고 스포츠, 도박 등 모든 오락 활동을 중지했다. 두체의 시신은 국왕과 교황들의 영묘 곁에 묻혔으며 지금도 조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관은 논한다. 무릇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이란 무엇인가?
지도자란 대중을 설득할 줄 알아야 하고, 국가의 재정과 산업을 잘 관리해야 하며,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고 군대를 강력하게 길러야 한다. 또한 좋은 외교로서 국가가 위태로운 지위에 처하지 않게 해야 하며 권력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그 외에도 국가의 미래를 예측하고, 우유부단하지 않는 등 필요한 능력이 셀 수도 없이 많으니 이를 모두 취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 중 어느것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여 제일의 강대국이었던 나라를 몰락시켰고,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 모든 것을 이룩하여 삼류 열강이었던 이탈리아를 초강대국으로 발전시켰다.
아아, 이처럼 세기에 한 번 나오는 지도자의 존재는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니, 그 향방을 예측할 수가 없구나!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니, 공명의 말이 실로 맞도다!
그러나 이처럼 중화 또한 하늘의 계시를 받은 지도자가 필히 있었을 것이니, 공명의 말에서 일을 꾸미는 사람 또한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탈리아는 뛰어난 지도자를 알아보아 흥하였고, 중화는 그러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무솔리니가 아니었더라도 이탈리아는 번성하였을 국가이니, 너무 질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외전) 하츠 오브 스틸 (完)
20XX년 10월 27일
이탈리아 로마
“자…..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고….. 오늘은 과제가 있습니다~ 교과서 7장 연습문제를 1번부터 67번까지 전부 풀어오시면 됩니다.”
“으아악!”
교수가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 왜들 그러시는지. 복습과 문제풀이는 본인의 학업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방법입니다. 다른 시답잖은 이유 때문에 이것을 두려워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솔리니 군?”
“컥, 케흑! 그렇습니다, 교수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던 알베르토 무솔리니는 교수의 급작스러운 공격에 물을 뿜을 뻔 했다. 동기들이 이 광경을 보고 킬킬댔다.
“역시 무솔리니 군 또한 동의하는군요. 그럼 다음 주 월요일까지 해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대학생들은 앓는 소리를 하면서 일어났다. 과제는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악이 틀림 없었다. 대체 공과대학 학생들의 역량에 문제를 많이 푸는 것이 왜 들어간단 말인가?
어차피 대부분의 학생들은 연습문제를 풀 때 솔루션 반, 자신의 풀이 반 정도로 타협하면서 과제를 해결했다. 다 베끼는 사람도 많았고. 결국 이러면 걸리는 건 시간이요, 늘어나지 않는 것은 실력이니, 학생들은 과제를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조교는 채점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교수만 재미를 보는 시스템이었다.
차라리 공부를 하고 싶은 놈들은 독학하도록 하고, 대학생들을 좀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과제가 있든 없든 할 놈은 하지 않는가. 그런 실없는 무솔리니의 망상을 동기들의 목소리가 깨웠다.
“야, 무솔리니! 우리 축구 하러 갈 건데. 안 따라오냐?”
“아, 안 가. 나 축구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야구라면 모를까.”
“그럼 저기 3무니치오의 클럽에나 가자고. 너 헤어진 지도 꽤 되었잖아.”
“너나 가라 새끼야. 난 할 일이 많다.”
“에잉….. 재미없는 새끼… 네 할아버지는…”
무솔리니는 동기가 유명한 자신의 선조 얘기를 꺼내기 전에 도망쳐 버렸다.
정확히 말해서, 이탈리아의 영원한 두체, 베니토 안드레아 아밀카레 무솔리니는 자신의….. 삼촌의 할아버지의 사촌의 아버지의 당숙이었다. 따지고 5대손에 14촌인 셈. 당연히 자신은 두체의 얼굴을 본 적도 없다. 아버지와 삼촌이 갓난아기 시절 기억을 가끔 언급할 뿐.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성은 자신이 두체의 인척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도록 만들었다. 무솔리니가 딱히 흔한 성도 아니었으니까. 그의 선조가 호색한으로는 이름이 높았음에도 아직은 그랬다.
덕분에 원조 무솔리니와는 다르게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알베르토는, 어디를 가나 어마어마한 숫자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일단 그가 먼저 다가가는 것을 어려워했지, 그에게 먼저 친한 척을 하면 감사히 받아들이는 편이었기에 이게 가능했다.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 삶은 피곤했지만, 동시에 만족감을 채워 주기도 했다. 선조의 위상 때문에 뭘 하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게 보는 것이다. 워낙에 옛날 분이라 그런지 비교로 고통받지는 않아도 되었다.
“에휴….. 얼른 집에 가서 신작 게임을 해야 하는데…. 과제가 다 뭐냐….”
한숨을 내쉰 알베르토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았다.
“일본에서 통일을 반대하는 극우 시위대의 난동이라….. 저 섬나라 놈들은 또 저러는구만.”
다만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달라 보이는 두 무솔리니가 가지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역사와 정치에 대한 관심이었다.
원조 무솔리니 또한 역사에 해박하셨다고 들었다. 사실 자신은 아예 이쪽과는 전혀 상관없는 진로를 골랐음에도 소위 ‘역덕’ 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고대의 신비로움, 중세의 어두움, 근세의 생동감, 근대의 잔혹함, 1차대전의 참호, 2차대전의 프로파간다와 전술, 현대의 시끄러움과 신속함.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설레게 했다. 심지어 자신이 그 역사에 여러 페이지의 족적을 남긴 사람의 후손이라면? 이쪽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닌가?
때문에 그는 스포츠와 향락을 즐기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매일 뉴스와 책, 이상한 게임을 하는 별종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마 그의 성이 무솔리니가 아니었다면 필히 왕따를 당했으리라.
사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부모님과의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꽤나 보수적인 분이시라 자신이 전형적인 ‘이탈리아 남자’로 크기를 원했다. 그 말인즉슨, 직업은 정치나 사업, 혹은 명망이 높은 전문직을 하고, 호방하게 (좀 부정적으로 말하면 향락적으로) 청장년 시절을 보내길 원하시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매우 부럽게 여기겠지만, 알베르토는 이것이 정말로 싫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를진대, 누가 자신에게 앞길을 강요한단 말인가? 그의 고고조할아버지는 자식들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을 절대적으로 응원해 주었다는데,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이를 빌미로 성인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집에서 나와 그나마 성적이 괜찮던 공과대학으로 진학했다. 당연히 부모님은 분노했지만, 이탈리아는 미국보다도 더한 상당히 자유분방한 사회였기 때문에 자신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였다.
다행인 점은 이탈리아는 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그가 부모님과 연락을 끊고도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선 등록금은 집이 못살거나, 재산이 적정선 이하면서 성적이 평균만 되어도 전액 가깝게 장학금이 나왔다. 거기에 교과서 같은 것은 무상 제공, 또 벌이가 아르바이트 정도 외에는 없는 학생들은 상담을 통해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부족함이 없었던 그가 온전히 느낄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살기 좋은 나라임에는 틀림 없었다. 이것 또한 그의 선조가 만든 것이겠지.
당장 옆나라인 프랑스도 등록금은 비쌌고, 미국은 가난한 사람은 학업을 웬만하면 꿈도 꿀 수 없다는데. 이탈리아와 가장 가까운 동양 국가인 한국도 복지예산이 GDP대비 이탈리아의 3분의 1이 안 되었다.
당연히 그의 집안은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부호였지만 (무솔리니의 재산이 5대동안 갈라져 내려왔음에도 그랬다.) 그는 떳떳했다. 자신은 부모님께 전혀 손을 벌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국가에서 받은 은혜야, 그가 일을 하면서 낼 세금, 그리고 나중에 상속을 받으면 갚지 않겠는가.
그는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자취방으로 걸어갔다. 걸어오면서 본 뉴스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소식이 많았다. 이탈리아,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유인 화성 착륙에 성공했다며 자축하는 커먼웰스 국민들, (알베르토는 역덕들 사이에서 도는 ‘커먼웰스는 우주에 갈 수 없다’ 라는 밈을 떠올리고는 웃었다.) 사우디 내전의 완전한 종식, 미얀마의 소수민족 권리법 통과까지.
세상에 여전히 갈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꽤나 희망은 있어 보였다. 그의 선조는 이런 미래를 보았던 것일까. 알베르토는 알 수 없었다.
끝내 자취방에 돌아온 그는 신이 난 채로 노트북을 열었다. 오늘은 노르드 연방 (정확히는 스웨덴) 의 유명, 그리고 유일 대전략 게임회사 콘트래딕션 인터랙티브의 신작, 하츠 오브 스틸 5가 공개되는 날이었다.
하츠 오브 스틸 4는 유저들 사이에서 망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건 다들 1000시간씩 이 게임만 하니까 문제점이 눈에 보이는 것에 가까웠다. 나태한 스웨덴 놈들이라고는 해도 저들의 게임은 점점 발전했고 (이건 구라파 유니버셜리스 등 다른 작품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덕분에 하츠 오브 스틸 5는 엄청난 기대를 모았다.
알베르토는 손을 비비며 고민 없이 80유로를 결제하고 게임을 다운받았다. 용량이 상당했다. 대체 무슨 대단한 기능들을 추가했길래 그러지?
이윽고 역덕의 마음을 울리는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졌고, 넓은 프랑스 평원에서 자웅을 겨루는 아리에테와 판터의 삽화가 눈에 들어왔다.
“크으~ 이거지! 믿고 있었다구!”
솔직히 이 게임 회사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분명 버그가 첫 버전에는 넘쳐날 테니까. 그래도 작년 이맘때부터 이 게임만을 기다려온 그에게는 감회가 남다른 것이었다.
그는 바로 게임 시작을 누르고 국가 선택창으로 들어갔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명한 나라부터 폴란드, 스웨덴 등 중요한 나라들, 그리고 벨기에같이 지금은 없는 나라들까지.
하츠 오브 스틸의 장점이라 하면 밀덕의 로망을 채워주는 전술, 편제, 설계 등이 있었고, 또 게임회사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대체 역사 시나리오가 있었다. 이 게임의 국가들은 ‘국가 중점’ 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정해진 루트대로 국가를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당연히 이 루트 중에는 원 역사와 다른 것, 심지어 아예 반대인 것이 많았다.
알베르토는 가장 먼저 이탈리아를 클릭했다.
당연히 전쟁의 승리자들 답게, 이탈리아는 상당히 사기적인 국가에 속했다. 재미는 없지만 그냥 강한 미국, 역사와 밸런스를 동시에 맞추기 위해 지나치게 강력해진 독일 다음 정도일까.
프랑스와 소련이 엄청나게 강력한 디버프에서 허우적대고, 영국이 대부분의 루트에서 예정된 내전을 준비하며, 일본이 내정을 관리할 새 없이 전쟁만 해야 할 때, 이탈리아는 처음의 유사 열강 국가에서 엄청나게 빠르게 산업력과 외교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급성장형 국가, 혹은 중반형 국가였다. 오죽하면 악명 높은 독일보다도 중점으로 주는 공장은 더 많았을까.
다만 그가 아쉬워했던 점이 하나 있다면, 이탈리아의 중점은 대체 역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아마 이는 무솔리니의 위상, 그리고 게임회사의 상상력 부족이 클 텐데, 이탈리아의 중점은 무솔리니라는 위인을 전제로 세세한 부분에만 변화를 줬다.
전작에서 유일한 대체 역사는 무솔리니가 2차 로마 진군으로 실각하고 베를루스코니가 집권하는 이른바 ‘높성사’ 루트 뿐이었다. 전전작에는 몇 가지 더 있긴 했으나, 이건 자신이 초등학생 시절에 나온 게임이라 패스.
전작의 업데이트를 중지할 때까지도 이는 개선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번에는 저들이 이를 갈았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알베르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를 증명하였다.
“와….. 이게 다 뭐냐…..”
이탈리아의 거대한 중점창은 못해도 7개 정도의 루트가 있어 보였다. 익숙한 무솔리니 파시즘, 높성사 루트와, 그람시의 반무솔리니 공산 혁명, 가스페리의 민주연합, 사보이 왕가의 귀환, 가톨릭 신의 왕국 (이건 좀 뇌절 같지만) 등등….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아마 이것만 해도 100시간은 뽑아낼 수 있으리라. 잔뜩 기대를 하던 그의 눈에 마지막 루트가 들어왔다.
“이게 뭐지…..? ‘파시즘의 타락…?’”
이 루트에는 익숙한 무솔리니의 초상화가 있었으나, 가장 앞에 있던 원 역사 루트와는 다르게 뭔가 초상화가 뒤틀리고 어두워 보였다. 그리고 초상화 뒤에는 하켄크로이츠와 적녹백 삼색기가 교차되어 있었다.
“세상에나…. 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생각이냐…..”
더 세세한 내용은 더욱 경악스러웠다. 이 분기점의 첫 번째 가정은 무솔리니가 식민지 해방을 하지 않고, 또 연합국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이어 갔다는 가정에서 시작하였다. 즉, 말 그대로 무솔리니의 타락인 것이다.
루트를 따라가면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히틀러의 안슐루스를 묵인하며, 끝내 스트레사 전선을 파기하고 추축국에 가입하게 되어 있었다. 그 후에는 난데없이 그리스를 침공하고, 로마의 부활을 외치는 것이 상당히 골때렸다.
“아니, 이게 말이 돼?”
뭐, 게임이니 안 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저 신의 왕국 루트보다도 이게 현실성이 떨어져 보였다. 무솔리니가, 자신의 자랑스러운 조상이 히틀러 같은 새끼랑 손을 잡고 저렇게 비현실적인 말들을 내뱉는다고?
당장 높은 성의 사나이도 무솔리니를 파시즘 투사로 설정했는데, 이건 좀 욕을 먹을 것 같았다. 자신 같은 온건한 사람조차 이렇게 느꼈으니, 유튜브의 쓰레기같은 국뽕 유튜버들 (‘미국이 결국 이탈리아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이유’ 같은 영상을 배설하는 놈들 말이다.) 이 뭐라고 하겠는가.
게다가 이 루트는 한 눈에 봐도 정말 어려워 보였다. 다른 루트에서 드러나는 이탈리아의 사기성, 엄청난 공장 펌핑과 연구 부스트, 교리 및 무기 개발, 사기 보너스 등이 별로 보이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른 나라에 비해 심히 부실했다.
게임사도 이걸 예상한 건지 아예 중점 이름이 ‘그리스에서의 추태’, ‘키레나이카 굴욕’ 같은 식이었다. 뭐 실력자들이야 이걸 다 무시하고 가장 마지막에 있는 ‘스파치오 비탈레’를 찍어버리겠지만, 솔직히 저게 메리트가 있을까?
알베르토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 루트를 타면 산업력이 원 역사의 반토막이 날 것 같았다. 저 넓은, 이탈리아의 몇 배는 되는 스파치오 비탈레 판도를 차지해도 말이다.
뭐…. 그래. 이 정도면 생각보다 괜찮을 수는 있겠군. 게임회사는 이걸 노린 것 같았다. 조금씩 준동하는 옛 나치의 잔재 (당연히 아직도 있는 스탈린주의자들처럼 나치를 추종하는 자들도 있긴 했다. 서일본에는 아예 옛 군국주의자들의 후계 정당이 여당이라니 이상하지는 않았다.) 에게 경고 메시지를 준 것이겠지. 이탈리아가 타락한 세상은 이토록 끔찍한 것이라고.
무솔리니가 타락한 세상에서도 이탈리아가 승승장구했다면 파시스트와 국제주의자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한 눈에 봐도 망한 것이 보이니 괜찮아 보였다.
“당연한 일이지. 암.”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이탈리아. 자신의 존경할만한 선조, 두체 무솔리니가 만들어낸 이탈리아는 가장 위대한 나라, 가장 공명정대한 나라. 가장 아름다운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나치 독일과 같은 바보들처럼 행동할 리가 없었다. 우리들의 선조들, 그리고 우리들은 현명했으니까.
대체 역사는, 대체 역사로만 남아도 족하리라.
-完-
현대 기준 판도의 지도를 그려 왔습니다. 제가 지도 제작 실력이 일천하고, 지도 툴 때문인지 그림이 좀 깨져서 판도가 상당히 이상하고 중간에 휜 구멍들이 보일 수 있습니다. 너그럽게 봐 주세요 ㅠ 아예 휜 색인 부분은 원 역사와 차이가 없는 국가들입니다.
일단 동, 남아시아 판도입니다. 인도가 거대하고, 중국은 아름답게 쪼개졌으며 몽골이 좀 더 커졌습니다. 한국은 백두산은 온전히 가져갔습니다. 류큐와 타이완도 독립 상태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국경이 이상할 수 있습니다. 원 역사의 티베트, 신강,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등 경계를 생각하면서 봐주십쇼
동아프리카와 중동입니다. 아련이 크고 아름다우며, 이란은 여러 군데에서 파먹혔습니다. 터키 위쪽의 하늘색은 라즈-폰토스 공화국으로, 독립국가입니다. 중간 노랑은 쿠르디스탄이고요. 사우디는 4갈죽 되어서 북쪽과 서쪽은 아련에 가입했습니다.
복잡한 유럽입니다. 동유럽 쪽이 좀 이상한데, 우크라이나 국경은 원 역사와 똑같습니다. 다만 서쪽 일부가 커먼웰스로 갔습니다. 커먼웰스는 폴란드, 슐레지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극서 우크라이나 정도의 합입니다. 코소보는 알바니아와 합병을 선택했습니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에게 반갈죽되었고, 노르드 연방은 원칙상 다른 국가이지만 편의상 하나로 표시했습니다. (핀란드는 러시아에게 영토를 뜯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아이슬란드 또한 지도에 안 보이지만 노르드 연방 가입국입니다. 우크라이나 남쪽의 흑색은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국입니다.
세계 지도입니다. 역시 휜 색은 바뀐 게 없는 곳이라 보면 되고, 아프리카는 원 역사와는 다르게 부족 경계를 존중하여 상당히 많이 바뀌었습니다만 여기 표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에라도 지도를 만들어서 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