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of the Infinite Clones RAW novel - Chapter (117)
#117
전조 (2)
“죄송합니다. 프리지아가 마침 자리를 비웠던지라. 그녀가 있었으면 괜히 번거롭지 않게 바로 오실 수 있었을 텐데요.”
“응—? 그건 딱히 신경 쓸 필요 없단다. 별일도 아니고.”
뮬로는 브리키를 집무실 한쪽에 놓인 소파로 안내하고, 느긋하게 그녀가 좋아하는 홍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태도는 겉모습일 뿐, 그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상태였다.
‘예정된 방문일까지 최소 20년은 넘게 남아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시다니.’
거기다 하필 하인즈도 자리를 비운 상황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싸운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결계 내부라고 하더라도, 혼자 그녀에게 대적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사실 싸우고 싶지도 않고.’
지금은 하인즈에게 종속된 몸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셔왔던 존재가 아닌가.
실질적으로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해도, 그녀가 자신이 이은 혈맥의 시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뮬로의 혼란스러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태평한 얼굴로 사방을 뒤덮은 혈마법 결계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정성스럽게 탄 홍차를 브리키의 앞으로 내놓자.
후루룹—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를 받아 홀짝이며 뮬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너도 마찬가지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당연히 변질된··· 아니, 더욱 진화한 피에 관해서 하는 말일 터.
혈맥의 시조인 ‘브로코슬락’에게 피의 성질을 파악하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구나. 분명히 내 피를 이은 건 맞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는 게. 혈통은 그저 그 자체만으로 오롯하다고 생각했거늘···.”
그것이 수백,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상식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정면으로 반박의 증거가 들이밀어진 것이다.
“브로코슬락 님, 그러니까···.”
“브리키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니? 난 그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아, 네. 브리키 님.”
“그래, 그쪽이 훨씬 귀엽잖니. 역시 처음부터 이름을 잘못 지은 것 같아. 좀 더 깜찍한 이름으로 지을 것을.”
갑자기 화제를 바꿔 혼자 투덜거리는 브리키의 말에 뮬로는 혼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마터면 깜찍한 성을 가지게 될 뻔하지 않았나.
그는 지금의 성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어디 있니?”
혼자 투덜거리던 그녀가 다시 뮬로를 향해 태평하게 물었다.
언제 들어도 두서없는 화법이었지만, 이미 그에 적응돼있던 뮬로는 곧바로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흐음—.”
그의 대답에 브리키는 별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다시 홍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궁금하네, 대체 어떤 아이기에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는지.’
처음엔 클랜로드인 뮬로를 찾아오면 궁금증이 해소될 줄 알았건만, 정작 마주해보니 그도 누군가에게 종속된 처지에 불과했다.
‘성혈인 나의 지배권을 빼앗아서 말이지.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애초에 권력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만큼, 자신의 권위를 침탈당했다는 것에 대한 불쾌감은 없었다.
오히려 이 일의 주모자에 대한 호기심만 더욱 강해졌을 뿐.
‘진화를 통한 혈맥의 강화, 보다 우월한 피의 전승. 이거라면 뱀파이어들이 양지로 나아갈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바로 그것이 그녀가 어떻게든 후계를 남기기 위해 오랜 세월을 버텨온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잠든 사이에 그 가능성이 성큼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네가 타준 홍차를 마시니 기분이 좋구나, 뮬로.”
“감사합니다, 브리키 님.”
“참, 나 머물 곳이 없는데. 당분간 여기서 신세를 좀 져도 될까?”
“···물론입니다. 편하게 지내실 방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뮬로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골머리를 싸맸다.
그녀의 태도를 보니 딱히 적대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지만, 하인즈가 돌아오면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관련 방침을 전해 들은 것도 없고, 따로 먼저 연락을 취할 수단도 없으니···.
‘모르겠군. 하지만 내가 멋대로 판단하기엔 사안이 너무 크다.’
결국 하인즈가 돌아올 때까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빼앗긴 집에 찾아온 전 주인이 태평하게 눌러앉았다.
***
툴크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강철의 성채는 오늘도 연일 몰아치는 몬스터들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이미 아오니아 백작령의 군대는 끌어올 수 있을 만큼 끌어온 지 오래였고, 주변의 다른 영지에서도 속속 지원군이 도착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이곳이 밀린다면 왕국의 북부 전체가 쑥대밭이 될 것이 뻔했으니, 그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각 영지에서 파견된 병력과 막대한 보수를 노리고 찾아온 용병,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합류한 주신교단의 사제와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세상에··· 저게 말이 되나?”
“···말이 되는 것 같네.”
하지만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는 화려한 마법을 난사하는 마법사도, 신의 자비를 구현하는 사제도 아니었다.
“타라크에서 유명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저 정도였다니.”
“···우리 대장이 언제 한 번 저 인간 박살 내겠다 벼르고 있었는데. 아직 안 덤빈 게 다행이군. 목숨이 남아나지 않았겠어.”
몬스터의 무리 속에 파고들어 싸우는 한 명의 전사가 그 주인공이었다.
다만 그냥 전사라고 치부하기엔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그의 용모가 범상치 않았는데···.
오크를 압도하는 덩치와 근육, 상체는 벌거벗은 채 투구 대신 마수 머리를 뒤집어썼으며.
전신에는 온갖 형상의 문신이 은은하게 발광하고, 눈에서는 적광과 녹광이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크하하핫—!”
무엇보다 전신에 피를 뒤집어쓰고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학살을 벌이는 그 모습은, 사방에서 덤벼드는 몬스터들보다 더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성벽에서 내려가 저기에 정면으로 덤벼들 때는 웬 자살 희망자인가 싶었는데···.”
그는 정면에서 얼마나 많은 놈들이 달려들든, 어떤 대형종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온몸을 사용해 적들을 박살 낼 뿐.
한 손에 들린 커다란 도끼가 장식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콰앙—!
“쿠웨엑!”
“끄익—!”
힘이 어찌나 센지, 그저 들이박기만 해도 몬스터들이 마차에 치인 인형처럼 튕겨 나간다.
귀찮게 엉겨 붙는 걸 걷어차자, 공이라도 찬 것처럼 허공을 날아 다른 놈들과 부딪혀 우르르 넘어졌다.
맨손으로 질긴 가죽을 찢고, 그 주먹은 놈들의 두개골을 우습게 부숴버렸다.
“이젠 누가 괴물인지 모르겠는데···.”
“···그러게. 저게 인간의 전투 방식이 맞나?”
그렇게 성벽 위에서 항전하는 이들이 저도 모르게 힐끔거리는 대상, 할리는 싸움 와중에도 부지런히 전장을 살피는 중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는 단순히 관심을 받기 위해 이곳에 뛰어든 게 아니었다.
‘찾았다! 이번엔 변종 미노타우로스인가.’
검은 광택이 빛나는 금속성의 가죽과 날카로운 두 쌍의 뿔을 가진 소머리 괴물.
광기를 정도 이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과시하듯, 그 두 눈은 흉포한 붉은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놈을 발견한 할리가 곧바로 그쪽으로 내달렸다.
콰직! 쾅! 콰드득—!
“크이익!”
“케흑!”
그 와중에 무수한 교통사고가 발생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뺑소니치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으하하하! 이리 오너라, 이놈!
북부 산맥의 몬스터들은 먹이 사슬의 위에 있을수록 그간 쌓아온 광기의 양이 큰 폭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어느 임계점을 넘었을 때, 과하게 활성화된 생체력은 변이를 거치게 되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광기에 물든 변종 몬스터인 것이다.
‘즉, 저놈들은 하나같이 풍부한 광기를 품고 있는 영양식이라는 거지! 거기다 저마다 특출하게 진화한 유전 형질도 있으니.’
물론 모든 면에서 고루 발달한 용의 인자가 있기는 하지만, 각 분야에 특화된 유전자는 또 각자의 쓰임이 있는 법.
그것이 할리가 직접 전장을 돌아다니며 놈들을 사냥하는 이유였다.
“쿠워어어—!”
그가 몬스터들을 몸으로 치고, 밀고, 걷어차며 마침내 미노타우로스의 앞까지 도달했을 때.
마침 놈도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리의 위용을 보고 경계하는 기색이긴 했으나, 그간 산맥에서 포식자로 군림하던 놈이었던 만큼 위축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크르르···.”
콰앙—!
그저, 곧바로 땅을 박차며 네 개의 뿔을 그에게 내밀고 돌진해 왔을 뿐.
4미터가 넘는 미노타우로스가 덩치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순식간에 접근했다.
물론 그의 반응속도라면 쉽게 회피할 수 있겠지만.
“오냐! 어디 한 번 붙어보자!”
상남자 할리는 회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뿌드드득— 콰앙!
그의 허벅지 근육이 한순간에 부풀어 오르며, 더욱 무겁게 바닥을 딛고 몸을 앞으로 밀어냈다.
양쪽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만큼 둘 사이가 급속도로 좁혀졌다.
“후읍—.”
충돌 직전, 할리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오른손을 틀어쥐었다.
장전된 화살처럼 살짝 뒤로 당겨지는 오른 주먹.
그리고 초고밀로도 압축된 그의 근육에서···.
끼긱— 끼기긱!
이제는 사람의 몸에서 나면 안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명체의 몸에서 난다기보단, 공사장의 대형 건설 장비에서나 날 법한 금속성이 울려 퍼지고.
동시에 그의 팔을 검붉은 비늘이 뒤덮었다.
직후.
“카하하핫—!”
“쿠워어어—!”
콰아앙——!
미노타우로스의 두꺼운 두개골과 할리의 오른손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우우웅—!
한순간 일어난 충격파에 주변을 둘러싼 몬스터들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자욱하게 일어난 흙먼지 속으로, 충돌 지점부터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며 밀려난 할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앞에 머리를 내민 채 멈춰선 미노타우로스도 함께.
그리고 놈은···.
쿠웅!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후우— 이거 참. 생각보다 많이 밀려났군.”
아무리 그의 무게가 많이 나간다고 해도, 4미터가 넘는 괴물과의 질량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무거운 게 빠르게 다가오기까지 하니 정면으로 부딪치면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놈은 머리가 박살 난 채 그대로 즉사해 버렸지만.
할리는 검붉은 비늘에 뒤덮인 오른팔을 가볍게 털다가 놈의 가슴 부위에 그 팔을 그대로 꽂아 넣었다.
단단하고 질긴 가죽이 그 몸뚱이를 보호했지만, 「생체 오러」와 광기를 비롯한 기운을 막아설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승전의 의식을 치르듯 미노타우로스의 마석을 뽑아내 먹어 치웠다.
‘역시 이쪽이 효과가 좋단 말이지.’
「광기 제어」가 체내로 들어온 기운을 휘어잡고 순식간에 통제에 넣었다.
서서히 주변의 광기를 흡수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효율이었다.
그리고 새로 얻은 유전자도 제법 쓸 만한 구석이 있었다.
질주에 특화된 하체 근육의 일부는 곧바로 접목해 써먹어도 될 정도였으니.
“으핫! 그럼, 계속 가 보자고!”
그는 순식간에 뽑아낸 변종 미노타우로스의 뿔 4개를 「아바타 클라우드」를 통해 휴버트에게 전송하며 다시 전장을 질주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느긋하게 파밍을 할 수는 없었지만, 좋아 보이는 핵심 소재들 정도는 틈틈이 챙기는 중이었다.
‘나중에 이걸로 하워드가 장비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테니까.’
그 때문에 창고 관리를 맡은 상인 휴버트가 잠시 발이 묶이긴 했지만, 어차피 최근에는 공방 개설 건 말고는 딱히 급한 용무도 없었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할리가 위험한 고위 몬스터들을 노리고 사냥을 이어가자, 성채 수비를 맡은 이들은 한결 편하게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거기다 그는 다른 강자들과 달리 체력이 무한하기라도 한 듯 쉬지 않고 출전 중이지 않은가.
당연히 그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할리가 성채로 돌아갔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의 감탄과 공포를 비롯한 경외에 찬 시선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막 전투를 끝낸지라 광기의 여파가 남아 흉흉한 그의 눈빛에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온통 피범벅이 되어 김을 풀풀 풍기는 모습에 쉽게 접근할 이는 없었을 것이다.
“오! 할리! 이번에도 한 건 했구만! 수고했네!”
물론, 이미 그런 모습에 적응된 일행은 별개였다.
함께 북부 산맥을 빠져나오며 친분이 쌓였던 드워프가 그에게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그와 함께 강철의 성채에 주둔 중인 아오니아 백작가와 접촉하는 것으로 의뢰는 종료되었었다.
이후 할리는 자연스럽게 몬스터를 막는 데에 참여했고, 자오닉은 무구를 정비하는 쪽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아, 이번엔 전해줄 말이 좀 있어서 왔네! 아무래도 친분이 있는 내가 말을 전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말이야.”
뒷머리를 긁적인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꺼낸 용건은, 누군가가 할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언이었다.
“일단 전투를 마친 직후이니 지금은 쉬고, 나중에 편할 때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군.”
물론 그가 직접 심부름을 올 만한 상대가 별것도 아닌 인물일 리 없었다.
타르민 아오니아.
처음 자오닉의 구출을 의뢰했던, 이곳 아오니아 백작령의 영주였으니까.